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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함이 있는 믿음 (삼상 18:10~16, 약 2: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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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성희 담임 목사
 
  “행동”이란 사람이나 동물이 어떤 일을 목적하여 실제로 자기의 몸을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심리학적으로는 어떤 자극에 대응하는 생체의 근육반응이나 내분비선의 작용 상태 등의 총칭을 말합니다. 윤리학적으로는 “행위”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곳곳에 “행함”이란 말로 쓰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큰 장애는 머리는 있고 큰데 몸이 없고 작다는 것입니다. 생각은 있는데 삶이 없고, 말은 있는데 실천이 없습니다. 오래 전 김경일 교수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을 썼습니다. 이 교수의 논리도 행함이 없고 사변만 있는 것을 꼬집습니다. 머리만 있고 손발이 없는 우리의 삶의 실체를 해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의 행함이란 믿음의 실천적 면, 나아가서 참 믿음을 의미합니다.

  바울과 야고보의 조화는 성경신학의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입니다. 바울은 믿음을 강조하고 있고 야고보는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와 야고보서는 서로 대치되는 것 같습니다. 믿음과 행위가 대조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로마서와 야고보서는 서신의 수신자와 대상에 따라서 강조점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인 로마 사람에게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을 아는 유대인에게는 믿음보다 행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가 행함을, 야고보서가 믿음을 역시 외면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4:2에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함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없으려니와”라고 하여 야고보서 2:11의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라는 말씀과 서로 대치되는 것 같습니다. 갈라디아서 2:16에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라고 하여 야고보서 2:17의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니라”는 말씀과 서로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믿음과 행위의 대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과 행위는 서로 보충적 관계입니다. 믿음은 행위를 필요로 하고, 행위는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영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도사들은 수도원의 삶을 삽니다. 그들은 문자적으로 성경을 믿고 제한적 삶을 삽니다. 그들의 행동반경은 상대적으로 좁습니다. 그러나 수도원의 영성보다 위대한 것은 삶의 영성입니다. 직장의 영성이며 가정의 영성입니다. 우리 모두가 수도사이면 큰일입니다. 모든 곳이 수도원이면 세계는 망합니다.

  스캇 펙은 ‘끝나지 않은 여행’에서 “쓸모없는 행위란 아무 것도 없다”고 합니다. 실제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신앙적으로 볼 때 우리의 모든 행위는 믿음의 결정체이며, 믿음의 표현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표현입니다.

  중국의 격언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는 듣는다. 그리고 잊어버린다. 나는 본다. 그리고 기억한다. 나는 행한다. 그리고 이해한다.” 행해야 비로소 모든 것이 내 것이 될 수 있고 가치 있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예외가 아닙니다. 행해야 비로소 믿는 것이 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첫째, 행함이 있는 믿음이 구원합니다.

  14절에는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구원하지 못합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만이 구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우리의 믿음이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1:1에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합니다. 믿음은 실상과 증거입니다. 실상이 되기 위해서는 노력하고 만들어야 합니다. 증거가 되기 위해서는 행동해야 합니다. 행함으로 비로소 참 믿음이 됩니다.

  우리말에는 이런 구분이 없습니다만 영어에서는 믿음을 다른 단어로 구분합니다. ‘belief’와 ‘faith’입니다. 믿음(belief)은 내적 확신이고, 신앙(faith)은 외적 행동입니다. 믿음에서 신앙으로 승화해야 참 신앙이고, 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신앙은 ‘belief’가 아니라 ‘faith’입니다.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구원을 받기 위하여 힘겹게 일했습니다. 그는 행함과 노력으로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렸습니다. 이런 그의 실천적 행함이 믿음이었고, 모든 숨쉬는 동물들이 죽었을 때에 그는 방주에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갔습니다.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여행은 간격을 뛰어넘는 이동입니다. 그의 믿음은 목적지를 알지 못하고 말씀에 의지하여 가는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는 행함으로 믿음을 보였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단호하게 믿음을 뛰어넘어 신앙의 땅에 발을 디뎌야 합니다. 행함이 없이 믿음이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3:13에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습니다. 믿음이 제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랑이 제일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여기에 중요한 해답이 있습니다. 이미 세 가지가 다 있습니다. 하나만 있어야 한다면 단연코 믿음입니다. 그러나 세 가지가 항상 있을 경우에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사랑은 사변이 아닙니다. 사랑은 행동입니다. 소망은 믿음의 내용입니다. 사랑은 믿음의 행위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루가 저물 때 우리는 사랑한 것을 기준으로 심판을 받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심판을 받고 구원을 받는 것은 사랑한 것이 기준입니다. “사랑한 것”이란 말에 우리의 행위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많은 사랑은 혀끝에 있고 참사랑은 손끝에 있다고 합니다. 참 사랑은 행함이 있어야 하고 이것이 믿음이라고 합니다.
  원래 사랑한다는 말과 살다는 말은 같은 동사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영어에서도 ‘live’와 ‘love’는 철자 하나의 차이입니다. 사랑은 사는 것입니다. 사랑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사랑은 믿음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행동입니다. 이 행동이 곧 구원입니다.

  실천이 수반되지 않고 궁극적으로 행동과 신학을 통합하려고 시도하지 않는 신앙심은 겉치레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실천적 삶에서 말 자체를 바꾸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아니라 ‘생활신앙’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주일을 지키고 교회에 가고 예배를 드리는 그 이상을 요청합니다. 교회에서 ‘주여’ 하면서 세상에서는 ‘나여’ 교회에서 ‘아멘’ 했으면 끝까지 ‘아멘’으로 밀고 나가야지 금방 ‘글쎄’로 바뀝니다. 교회 안에서는 사랑하지만 세상에서는 미워하고 인색합니다. 이것이 행함이 따르지 못하고 실천이 수반되지 않는 믿음입니다. 이것을 극복하고 행함이 따라야 참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말이 아니라 행함이 따르는 신자가 천국에 들어가고 구원을 받습니다. 신앙과 행위가 일치하는 우리가 되어야 구원받은 신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17절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죽은 것은 생명이 없다는 말입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생명을 잃으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고로 행함이 없으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사변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산꼭대기에 안주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 가운데 2:15-16에는 말합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아무 쓸데 없는 신앙이 됩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신앙이 아닙니다.
  놀부 집에 거지가 왔습니다. 거지는 힘없이 “아주머니 밥 좀 주세요”라고 하였습니다. 놀부의 아내는 “사흘 지난 밥도 괜찮겠수?”하고 말했습니다. 거지는 얼른 “그럼요, 배가 고픈데 사흘 지나면 어떻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놀부 아내는 “그럼 사흘 후에 오슈”라고 하였답니다. 그의 생각은 이미 자선과는 멉니다. 당장 필요한 것을 채워주지 않고 말로만 평안을 빌고 복을 비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당장 배가 고픈데 사흘 후에 오라는 것은 전혀 동정심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도 그렇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를 만나 신음하고 있는 사람을 외면하고 지나칩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그들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믿음이 컸습니다. 그랬기에 다른 사람을 지도하는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켰습니다. 그리고 성전도 아끼고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려움을 만난 사람에 대하여 선을 베풀지 않았습니다. 이런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신앙인들 가운데는 머리로 믿는 사람이 있고, 가슴으로 믿는 사람이 있고, 온 몸으로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머리로 믿는 사람은 지식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성경을 압니다. 가슴으로 믿는 사람은 말씀에 감동을 받고 살지만 행동이 따르지 못합니다. 온 몸으로 믿는 사람은 아는 것과 감동이 행동화되어 실천하며 살아갑니다. 행동이 따르는 믿음이 참 믿음입니다. 온 몸으로 믿는 사람이 참 신앙인입니다.

  조이스 마이어는 ‘단순함이 주는 기쁨’이란 책에서 “믿는다는 것은 믿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간단한 일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들 보면 세상을 참 어렵게 살아가고 있어 불쌍해 보입니다. 그런데 믿는 것보다 믿는 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믿음은 행동이 따라야 하며 행함이 있는 믿음이 가치 있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마리우스 블롱델은 “어떤 사람이 믿는바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싶으면 그의 말에 귀기울이지 말고 그의 행동을 눈여겨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의 행동을 보기 전에는 그 사람의 믿음도 사실은 알지 못합니다. 행동을 봐야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전도서 9:4에는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합니다. 살아 있고 행동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의미가 있습니다.

  토마스 왓슨은 ‘묵상’에서 “선한 행위는 비록 구원의 원인이 되지는 않지만 구원의 증거가 된다. 믿음은 행위 위에 구축되어서는 안 되거니와 행위는 반드시 믿음 위에 구축되어야 한다. 믿음은 행위를 정당화(justify)하고 행위는 믿음을 증거(testify)한다”고 합니다. 행위 그 자체는 믿음을 동반해야 진정한 가치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행함이 동반되어야 비로소 참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행함으로 우리의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18절에는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고 합니다. 우리의 행함이 우리의 믿음을 보이는 증거가 됩니다. 아무리 믿음이 깊어도 행함이 없으면 그 사람에게서 믿음을 볼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로 인정받았습니다(창 15장).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의 진수는 이삭을 드림으로 보여줍니다(창 22장). 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리는 그의 행함은 그의 큰 믿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8:15에는 “사울이 다윗이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라고 합니다. 다윗이 행하기 전에는 사울이 그의 지혜를 알 수 없습니다. 다윗은 행함으로 자신의 지혜를 보였습니다. 다윗은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보인 것입니다. 이전에 다윗이 골리앗을 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골리앗에게 담대히 나아가면서 다윗이 말합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이 말은 그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는 말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물맷돌을 가지고 골리앗에게 나아가 그를 넘어뜨렸습니다. 그의 행동 그 자체가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으로 하나님께 대한 그의 믿음을 보인 것입니다. 그는 행동하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마태복음 5:16에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행동으로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보여줄 것은 착한 행실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행위로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선행은 값비싼 향유보다 존귀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탈무드에는 “향유는 부자만이 살 수 있는 것이지만 선행은 가난한 자나 부자나 누구나 다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연로한 분이나 젊은 자나,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선행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보일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미국에서는 흔히 출판계에서 ‘바이블 벨트’(Bible Belt)라는 지역을 설정해 둡니다. 미국 남부 지역의 근본주의를 따르는 신앙이 두터운 지역을 말합니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북부보다 남부가 신앙이 깊고 생활에서도 보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격노하게 만든 사람들은 더 잘 믿는 근본주의자들이라고 부르는 자들입니다.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비판을 받습니다.

  믿음이란 신조의 총합도, 처세술도 아니며 특정사고 방식도 아닙니다. 믿음은 생활방식이며 실제적인 삶을 통해서만 올바르게 구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동하는 사람 간디는 말했습니다. “신념이 행동으로 바뀌지 않는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세상은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행함으로 우리의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결론

  1934년 파리 올림픽에서 100미터 금메달 유망주 에릭 리는 출전포기를 선언했습니다. 이유는 주일성수 때문이었습니다. 온갖 비난이 그에게 쏟아졌을 것은 뻔한 일입니다. 며칠 후 에릭 리는 400미터 달리기 경기에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중거리는 자신의 주 종목이 아니었기에 많은 사람들은 에릭의 출전을 무의미하게 보았습니다. 하지만 에릭 리는 처음부터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고 마침내 예상을 뒤엎고 세계신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했습니다. 기자들이 우승소감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처음 200미터는 내가 뛰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200미터는 하나님이 직접 달리셨습니다.” 에릭 리는 주일성수를 통해 ‘금메달’과 ‘영광’을 동시에 얻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실천함으로 보인 승리자입니다.

  우리는 이미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행위와 일치해야 합니다. 머리와 가슴과 손과 발이 일치해야 합니다. 우리의 온 몸이 우리의 믿음을 실천하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거룩함이 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며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세상의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그리스도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행위가 그리스도의 삶이며 전도가 되게 하는 거룩한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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