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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과 물을 통행하였더니...(시 66: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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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기 목사

9월 5일이 저희가 이곳에 온지 꼭 만 9년이 되는 날입니다. 제 자신도 좀 여유를 갖고 싶었고, 아내에게도 잠시 교회를 떠나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는데, 마침 삼남연회 부흥단에서 베트남을 여행과 영성수련회를 한다기에 참석했습니다.
가장 기억나는 건, 호치민주석의 기념관과 평소 그가 지냈다고 하는 집입니다. 기념관에는 이미 죽은 호치민주석을 미이라로 만들어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죽은 지 오래지만 그의 평소 정신이 지금도 베트남에 큰 영향력을 주고 있었다는데 놀랬습니다.
그곳에는 주석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크고 화려하다고 해서 작은 나무집에서 지냈습니다. 아래층은 응접실로 사용되었고, 이층엔 작은 책상 하나 들여놓은 작은 방과 침대 하나 들여놓은 작은 방이 있었습니다. 이분에 대해 저는 다 모르지만 그 집을 보면서 이분이 그렇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정신 때문이라는, 그래서 지도력에 대해 많이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좀 여유만 생기면 큰집을 짓는 것과는 상당한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구동태감독님께 “저런 정신으로 목회하면 그 목회는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말씀드리고선, 내내 지도력에 대해 생각하는 여행이 되었습니다.
만 9년, 그 기간 동안 역사하신 하나님. 그리고 부족한 사람을 하나님의 종으로 여겨 함께 힘을 모아주셨던 교우들이 있어 또한 감사를 드립니다. 저도 사람이다 보니, 이런 저런 삭힐 수 없는 일들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런 감정들 다 떨어버리고, 처음 가졌던 제 마음을 되새길 수 있음에 감사했던 여행이기도 합니다.
행여 저에 대해 여러분의 마음에 응어리진 부분이 있다면 떨어버리시기를 아울러 부탁드립니다.
인생의 삶도, 목회 역시 혼자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실패를 피해갈 수 없는 것이 인생이요, 목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혼자 살아갈 수 없습니다. 스스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순간순간 이런 착각으로 인해 넘어져서 상처를 입고, 아픔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은 넘어지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손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당신의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누구든 그 손을 붙잡고 의지하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의 손은 세상을 만드신 손이요, 사랑의 손이요, 도움과 치료의 손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손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붙잡아 주십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지 않고는 어떤 자유도, 어떤 평안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벤스 하브어’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은 채 마귀와 싸울 때, 마귀는 우리에게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게 달려들어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고 말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잠언 16장 6절은,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12절, “불과 물을 통행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으로 들이셨나이다.” 하고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잘 먹고, 잘 입고, 문젯거리 없이 평안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안 됩니다. 문제없는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불과 물을 통행하였더니…….” 그것은 계속되는 역경을 의미합니다. 하나의 고통이 끝나자 또 다른 고통이 시작되었다는 겁니다.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던 날, 그들은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 지긋지긋한 종살이는 이제 안 해도 되게 생겼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대한 소망도 있습니다. 기쁨과 기대감으로 설레는 마음을 안고, 노래를 부르고, 왁자지껄 떠들면서 애굽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앞에는 바다가 넘실대고 있습니다. 장정만 60만 명. 그러니 배 한 두 척으로는 건널 수 없는 일입니다. 거기에다 ‘설상가상’, ‘엎친 데 덮친다.’는 식으로 뒤에는 바로의 군사들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 기쁨이 싹 가셨습니다. 기대에 설레던 가슴이 이제는 절망과 두려움으로 쿵쾅거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바닷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들은 바다를 육지같이 건넜고, 추격해 오던 애굽의 군사들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다 건너가자 또 노래가 나왔습니다. 모세의 누이와 여자들이 소고를 잡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우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데…….”
그런데 그 한번으로 끝났나요? 먹을거리, 고기, 물 등등 수도 없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감사도 기쁨도 사라지는 겁니다. 처음 한번이야 그럴 수도 있고, 또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어서 감사할 수도 있었지만, 계속 어려움이 반복되면서 감사도 기쁨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한두 번도 아니고…….” “그냥 평안히 가게 해주시면 안 되나요?”
우리들도 그런 푸념을 하잖아요. “잘 살게 해주시면 어디 덧나시나?” “나 같은 사람, 하나님께서 돈이랑 펑펑 주시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나?”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맞습니다. 그렇게 됩니다. 큰일 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잘 살도록 그냥 내버려 두시면, 하나님의 가슴이 아파 견딜 수 없는 일들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돈이랑 뭐 이런 것 펑펑 주시면 큰일이 납니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에 매여 살기 때문입니다. 믿음보다는 현실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미래보다는 지금의 상황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잘 살도록 두시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릴 겁니다. “내가 언제 봤다고…….” 아마 그럴 겁니다. 아니라고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살 때 그들은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전능하심에 대한 경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그대로 들어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풍성함에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겼을 것 같습니까?
광야 40년을 다니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음을 경험했는데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는 하나님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은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해주신 기적들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를 끼니때마다 먹었고, 하나님께서 주신 메추라기를 코에서 냄새가 날 정도로 먹었습니다. 반석에서 솟아나는 생수를 마셨고,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나안 땅에 들어가, 이제는 자기 손으로 뭔가 할 수 있게 되고, 좀 가지고, 배도 부르게 되니까,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제는 “하나님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하나님 신세를 지겠습니까?” 그리 되었습니다. 그것이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불과 물을 통해하도록 하신 이유는, 10절,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라고 하셨습니다.
제대로 된, 순도가 높은 은을 만들려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뜨거운 불 속에 넣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불속에서 완전히 녹아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거룩하고 순수한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내기 위해 극심한 고통을 겪게 하신다는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차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마태복음 7장 24절 이하의 말씀 같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이나, 듣고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나 똑같이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창수가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똑같이 어려움을 당합니다, 고통을 당합니다. 이때, 예수 안 믿는 사람은 “아이고 내 팔자야, 이렇게 살아서 뭐하노?” 하고 말합니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를 연단시키시는구나. 이 연단이 끝나면 난 더욱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그리 생각합니다. 이것이 차이입니다.
11절, “우리를 끌어 그물에 들게 하시며” 이것은 물고기가 그물에 걸린 상태, 새가 그물에 걸린 상태입니다. 이것은 답답하고 절망의 상태입니다. 빠져나오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욱 그물에 엉켜듭니다. 희망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상태입니다.
11절 하반절,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두셨다.” 이것은 위로 올릴 수도, 아래로 벗어버릴 수도 없는 짐이라는 겁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짐이라는 겁니다.
12절, “사람들로 우리 머리 위로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그것은 반항적이고, 오만한 폭군 같은 자들에게 짓밟히고, 괴로움 당하고, 모욕당해도 어쩔 수 없는 그런 상태입니다.
10절의 말씀은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기 위해 연단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11절, 12절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지키신다는 겁니다. 그것도 주무시지도 않고, 졸지도 않고, 밤낮으로 지켜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다른 어려움이나 사람에 의해 고통당하지 아니 하도록 지켜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그물에 들게 하시며, 왜 어려운 짐을 그 백성의 허리에 두신다는 말입니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것이다.”는 겁니다. 예수 믿든 안 믿든 사람은 다 그렇게 사는 겁니다. 또 하나는, 그런 삶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어떻게 하시는지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출애굽. 홍해를 건너지 않아도 됩니다. 애굽에서 나와 지중해를 끼고 올라가는 것이 가나안 땅까지 가는데 훨씬 쉽고 가깝습니다. 그런데 남으로 내려가 홍해 곁에 섰고, 나중에 홍해를 지나면서 광야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 왜 홍해 앞에 서게 하셨고, 왜 광야를 지나게 하셨을까?
그것은 그런 절망의 순간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돕는 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렇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런 절망의 순간, 누구보다도,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편기자의 마음과 삶은 마치 불과 물을 통행하는 고통스러운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고백은 “우리가 불과 물을 통행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이끌어내서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고 찬양합니다.
이사야 43장 1-3절에,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 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네 구원자임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드시지요?
인간은 고난 중에서 낙망하기 쉬운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고난 중에 낙망하지 마십시오. 불과 불을 통해할 때 쓰러지지 마십시오. 낙망하고 쓰러지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실패의 첫걸음입니다.
신앙격언에,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서 네게 일러 주신 말씀을 너는 어둠 속에서도 의심치 마라.”고 하였습니다.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어둠에서 순종해야 할 말씀입니다.
“달리는 말에 채찍질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잘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채찍질 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잘못하면, 명령하십니다. 채찍질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어둠에서 건져내십니다. 빛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고난이 우리 곁에 올 때는 싫고, 고통에 고통을 더하는 것이지만, 믿음으로 그 고난을 견디는 자들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유익과 복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 17절에,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고난당하는 것이 뭐가 유익입니까? 고난은 고난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게 되면 그 고난은 유익이요 복이 되는 겁니다.
‘플라벨’(Flavel)은 “고통이 주는 섭리는 우리가 조급하여 그것을 참지 못할 때에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또한 그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물러가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고난이 다가와 그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면 고난은 물러가지 않는답니다.
아직도 고난 중에 있습니까? 그 고난의 섭리를 깨달으십시오. 그 고난에서 전능하신 하나님,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그러면 고난은 그 목적을 다 했기에 떠나갈 것입니다.
이사야 50장 10절에, “흑암 중에 행하여 빛이 없는 자라도 여호와의 이름을 의뢰하며 자기 하나님께 의지할지어다.”고 하셨습니다. 흑암 중에서 하나님을 의뢰하며, 또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불속에서, 물속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크신 사랑과 권능의 손으로 건너가게 하실 것입니다. 책임지고 통과시켜 주실 것입니다. 건져주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보게 하고, 신뢰하게 하고, 또한 좋은 결과를 경험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환경을 보지 마십시오.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사랑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이 힘으로 헤어 나올 수 없는 그 수렁에서 여러분을 건져 주실 것입니다.

“풍부한 곳”
그곳은 수리 시설이 잘 되어 있는 땅입니다. 물을 농토에 잘 대어 줄 수 있어 모든 곡식이 잘 자라 결실을 맺는 곳입니다.
성도 여러분, 고난의 출구는 축복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환난을 이기고,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나아가고 건너가면, 바로 그곳이 풍부한 축복의 땅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불과 물을 통행하게 하셨습니까? 바로 풍부한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신명기 8장 15-16절에,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간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단단한 반석에서 물을 내셨으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마침내”

여러분, 서두르지 마십시오. 낙망하지도 마십시오. 원망하지도 마십시오.
불과 물을 통과할 때 풍부한 곳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깊고 넓고 높은 뜻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불평하지 마십시오. 고난의 뒤편에 있는 주님께서 주실 복을 미리 보십시오. 그리고 그 고난 중에서도 오히려 감사하십시오. 왜 이런 슬픔 찾아 왔는지 원망하지도 마십시오. 우리가 잃은 것보다 주님께서는 더 많은 것을 주십니다. 그렇다면 더욱 감사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일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지금도 여러분을 사랑하시며, 여러분을 위해 일하십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심을 믿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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