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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율법을 온전케 하신 예수 (마 5: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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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노강국 목사

지금 한국에서는 “국가보안법 폐지” 문제를 놓고 정부와 야당 간에 씨름이 한창입니다. 국가보안법은 1949년에 한시적으로 만들어진 법인데, 그동안 이 법으로 인하여 인권이 유린되는 사례가 많고, 유엔 인권위원회에서도 인권에 저촉되는 요소가 많다고 하여서 그동안 없애자고 하는 논란이 많았던 법입니다. 하지만 이 법이 폐기되는 것을 반대하는 쪽에서는 이 법이 폐기되면 국가 안위에 많은 지장이 올 것이라고 맞서고 있는 가운데 있습니다. 지금부터 약 55년 전에 한시적으로 만들어진 법이지만, 이 법을 폐기하는 일이 그렇게 쉽지만은 아닌 듯싶습니다. 왜냐하면,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 법이 악법이므로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폐기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 한국 내의 실정을 생각해본다면, 예수님 시대의 율법의 문제가 얼마나 더 심각했는지 실감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에게 있어서 이 “율법”이란 것은 “하나님”과 거의 동일시되는 그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수천 년 동안 변치 않고 내려오는 이 율법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언급하는 것 자체가 그야말로 위험할 수 있다고 봅니다. 사실 엄밀히 말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게 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바로 이 “율법” 문제에 있습니다.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이해와 해석, 그리고 적용이 그 당대의 유대인이나 서기관, 바리새인들과 엄청나게 달랐기 때문입니다. 서기관이라 하면 이 율법을 해석할 수 있는 자격과 능력을 지닌 학자들로서 소위 공인받은 율법 해석자였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이 율법을 자기들의 생활의 표준으로 삼아 여기에 맞추어 사는 것을 자기들의 보람과 자랑으로 삼는, 율법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히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반 유대인들 역시, 오랜 세월 내려오는 율법의 전통에 물들어 어떤 비판의식 없이 살아가는 소시민들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예수님이 제시하시고 가르치시는 율법에 대한 해석들은 이들이 보기에는 사뭇 이단적인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연히 예수님이 제시하는 율법의 가르침을 새롭게 받아들이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들의 생각이나 이해와 다르다고 해서 이 예수를 해치려고 한 결과가 결국 예수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고 가게 된 것입니다.

한 예로, 안식일의 문제가 있습니다. 구약의 십계명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까지 내려오면서 이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은 수없이 많은 조항으로 가지를 뻗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안식일에 등잔(lamp)을 이리저리 옮길 수 있느냐?”
“여인들이 가발을 쓰거나 ‘브로찌’를 달고 다닐 수 있느냐?”
“남자가 아이를 안고 다닐 수 있느냐?”
“글을 종이나 가죽위에 잉크로 두 자 이상 쓰면 죄가 되고, 땅이나 모래 위에 쓰면 죄가 안 된다.”
“안식일에 병자가 생길 때 생명에 위험이 없으면 다음 날까지 기다려야 한다.”
“안식일에는 10리(약 4Km) 이상 걸어가는 일은 안 된다.”

이렇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라는 십계명은 예수님 시대에는 많은 조항으로 가지를 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든 자도 고치시기도 하고, 안식일에 귀신도 내어 쫓으시기도 하시면서 그 당시 사람들이 보기에는 안식일을 범하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지적하고 항의하는 사람들에게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오히려 야단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예수님의 응답은 일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보여주기보다는 오히려 반발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그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한 자기들의 전통과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전통에 사로잡혀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 사회를 지배할 수 있는 힘과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예수를 강하게 반대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제거하고자 하는 계획까지도 가능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법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에도 의미가 있지만, 이 법에 관습이 붙고 그래서 전통으로 덧입혀지고 하면, 법 이상의 효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이러한 법조문이 본래의 취지에 어긋나게 될 수도 있게 되어 모든 것 위에 군림하게 되는 경우도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법의 문제를 생각할 때에는 이러한 법이 가질 수 있는 위험성과 법의 한계를 함께 살필 수 있는 지혜로운 자세와 이해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특히 우리 크리스천들은 현재 시행되는 법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바르게 집행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잘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는 지혜도 필요하지만, 용기도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생각하기에 앞서 오늘 본문의 배경을 먼저 살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다음에는 예수님께서 그 당시 사람들에게 잘못 이행되고 있다고 보이는 율법의 몇 가지 내용들에 대해서 가르치는 말씀들입니다. 여기에는 “살인에 대하여”(5:21-26), “간음에 대해서”(5:27-28), “이혼에 대해서”(5:29-32),  “맹세하는 일에 대해서”(5:33-37), “보복하는 일에 대해서”(5:38-42), 그리고 “원수사랑에 대해서” (5:43 -48) 가르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아마 이러한 율법의 내용들은 예수님께서 보실 때에 그 당시 유대인들이 본래의 취지대로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여기셔서 이를 바로잡기 위해 가르치신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가르침들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일정한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옛사람에게 말한바 ‘~ 하지 말라’라고 너희는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 ~ 하게 말한다”라는 형식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그 당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와는 사뭇 다르게 율법에 대한 해석을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서 그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을 하였겠습니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아주 싫어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 유대인들은 이상한 가르침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오해는 “저 예수라는 사람은 율법을 무시하거나 안 지켜도 되는 것으로 잘못 가르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오해를 미리 방지하는 차원에서 마태는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가르침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은 과연 율법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신가 하는 것을 미리 서론적으로 말씀하고자 한 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배경이라 할 것입니다.

1. 그 첫 번째는 예수는 율법을 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고자 한다는 사실입니다(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온전케 하려 함이로라.”

여기서 “폐하다”라는 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취소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과 같은 말이 마 26:61의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와 27:40의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에서의 “헐고”의 용법과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유추해 볼 때 이 “폐하다”의 의미는 이 “집을 다시 짓기 위해 지금 있는 집을 헌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뭔가 다른 것으로 대치하기 위해 지금 있는 것을 허물어버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다”는 뜻은 “율법 대신에 뭔가 다른 것으로 혹은 다른 법을 세우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즉, 예수님은 지금의 율법 대신에 다른 율법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다른 것으로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율법을 완전하게 하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율법의 바른 의미와 정신을 바로 세우겠다는 뜻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모세 시대에 받은 10개의 계명이 예수님 시대에는 자그마치 252개로 확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확대되면서 본래의 하나님의 뜻에는 어긋나거나 부풀려지는 경우가 생기게 됩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율법의 본래의 의미를 제시함으로써 왜곡된 부분을 바로 잡고 부풀려진 부분이나 축소된 모습에 대해서는 그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예수님의 의지가 반영된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서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 기준을 그저 우리의 생각이나 기준에 맞출 때가 많이 있다고 봅니다. 특히 교회 다니는 우리들은 쉽게 하나님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데 아주 익숙해져 있습니다. 때로는 성경 말씀의 문자에 얽매여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속단하거나 결정짓는 어리석음을 범할 때도 많이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어쩌면 진정한 하나님의 율법을 헐고 내 생각이나 기준으로 대체하려는 모습과도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할 때,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깊은 마음에 동참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자세를 기본적으로 지닐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둘째로 18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과연 율법을 어떻게 여기고 계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이 말씀은 하늘과 땅이 존재하는 한, 율법은 타당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말 번역에는 “모든 일을 다 이루기까지”(until everything is accomplished. NIV)라는 표현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렇게 번역하면 더 잘 이해가 되리라 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 곧 모든 일을 다 이루기까지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율법을 얼마나 권위 있게 여기고 신뢰하고 계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이 왜 권위가 있습니까? 그것은 율법에는 하나님의 섭리의 방법이 들어있고, 또한 하나님의 의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모습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도록 하십시다.

2-1. 율법에 드리워져 있는 것 : 하나님의 섭리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섭리하시는데 있어서의 원칙이 바로 이 율법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믿고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율법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일에 예수님의 최대 관심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그 시험들을 바로 율법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은 율법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확신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예수님은 하늘과 땅이 무너지기 전에 율법이 그 완성에 도달된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표현 속에는 예수님의 의지가 들어 있습니다. 어떤 의지인가요?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 율법의 현실 속에 자기 자신을 던지겠다는 의지입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유대인이나 바리새인들처럼 단순히 율법의 어떤 조항들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을 삼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대로 이루시고자 하시는 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기 자신을 던지시겠다는 의지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율법에 대하여 자기 자신을 던지는 자세를 갖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예수님의 입장이 19절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율법을 행한다”는 것은 율법에서 요구하는 내용을 이행하는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가르친다”는 것은 율법의 정신을 바르게 깨닫도록 하는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 당시, 서기관이나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율법의 정신을 가르쳤다기보다는 율법의 문자에 얽매여서 그 율법의 정신을 흐리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을 지키기로 유명한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조항을 지키려고만 하는데 얽매여서 율법의 정신은 망각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를 우리는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야단치시는 말씀에서  발견합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로움과 인자함과 신실함은 버렸도다”(마 23:23a). 그러므로 율법의 정신을 헤아리지 않고 행하고자 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율법의 정신은 어떻고 하며 가르치고자는 하지만 행하지는 않는 모습 역시 잘못된 모습일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가르침 역시 율법의 정신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의 조항을 지키는 것으로 자기만족을 삼고자 한다든지 그것을 은연중 자랑으로 여기려고 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두 가지 큰 비극적 현상이 나오게 됩니다. 하나는 위선입니다. 그렇게 행하지도 못하면서 행한 것처럼 보이고자 하는 모습이 바로 위선입니다.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아무개는 ~ 하게 행하지 않는다” 하는 정죄하는 자세가 나오게 됩니다. 이 두 가지 모습은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우리들에게 나타나지 않도록 세심하게 자신을 살필 수 있는 겸손함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잘못의 원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율법에는 하나님의 섭리의 정신과 방법이 드리워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모습에 그 원인이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율법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섭리하시는 그 방법과 정신과 뜻이 있음을 우리가 안다면, 이러한 율법을 바로 깨닫고 잘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우리는 “사명”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이러한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사람을 예수님은 “천국에서 큰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2. 율법에 드리워져 있는 것 : 하나님의 의

그러면 율법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의가 들어있음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20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 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율법에는 하나님의 의가 들어있음을 아시기 때문에 이 자리에 제자들을 초청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율법의 정신을 바로 깨닫고 행하는 데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다고 여기고 이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자 하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들이 율법의 정신을 망각하고 외적으로 지키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는 그러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율법의 정신을 잘 깨닫고 이를 바르게 행하는 모습이 바로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율법에 대한 입장을 잘 깨닫고, 이에 따른 가르침을 잘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와 율법의 관계 :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 - 사도 바울

예수님은 이 율법에 대해 자신의 인격을 걸고 책임지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세 번째 입장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태도를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자세를 가장 잘 바르게 이해한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 10:4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깊은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빙자하여 하나님의 뜻을 운운하는 자들에게 십자가의 죽임을 당한 예수의 모습이 바로 율법을 이루게 되었다는 역설적 진리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진정한 신뢰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목숨을 바쳐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한 예수냐? 아니면 율법의 부분적 조항만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 바리새인이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이러한 자세는 결국 십자가의 죽음으로 연결되어  하나님에게도 그리고 인간에게도 모두 만족스런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이야기가 이러한 모습을 잘 설명해 줍니다.

옛날에 어느 나라에 아주 흉악한 죄가 들끓게 되었다고 합니다. 임금님은 신하들과 더불어 이러한 죄를 막아보려고 여러 가지로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심한 벌을 통해서 그 흉악한 죄를 방지하고자 임금님이 온 나라에 선포를 하였습니다. “이 나라에 이러한 흉악한 죄악이 벌어지기에 이를 단호하게 뿌리 뽑고자 한다. 누구든지 제일 처음으로 적발된 자에게는 그 두 눈을 다 뽑는 벌을 내리고자 한다.” 그러니 잠시 잠잠해지더랍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한참 후에 이 흉악한 죄를 지은 사람이 붙들려 왔습니다. 그런데 신하들이 이 죄인이 누군지를 임금님께 밝히기를 꺼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이 화가 나서 그 죄인을 당장 끌고 오라고 명했습니다. 할 수 없이 끌고 왔는데 보니까, 임금님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 곧 왕자였답니다. 임금님은 너무 화가 나고, 창피하기도 하고, 후회도 되는, 여러 가지 감정이었습니다. 그 아들의 두 눈을 다 빼자니 장차 왕이 될 처지에 소경 임금으로 만들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앞으로 왕이 될 왕자이니 봐 주자고 한다면 이 역시 왕과 나라의 기강이 망가지는 일이 되기 때문에 아주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한참 만에 임금님은 결정을 했습니다. “두 눈을 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신하들은 할 수 없이 왕자의 눈을 빼었습니다. 한 눈을 빼고, 다른 한쪽마저 빼려고 할 때, 임금님은 “나머지 눈 하나는 내 눈을 빼라”고 하면서, 자신의 눈을 빼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임금님은 임금님대로 체면이 서고, 왕자도 소경이 되지 아니하고, 나라에는 그 같은 범죄를 짓는 사람이 없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법을 세운 자로서 그 법에 자기 몸을 던져 책임지고자 한 것입니다.

율법과 관련하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는 이러한 모양새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을 인간이 어기는 죄를 범하게 됨으로 그 죄에 대한 율법의 판단으로 모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운명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러한 죄에 대한 율법의 값을 치르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로 우리들은 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마치 왕자가 한 눈은 뽑히지 않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마태는 일찍이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이러한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이해와 정신과 자세를 본받아서 우리의 모든 삶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의 율법의 가르침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도록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의 정신을 바르게 깨닫고 행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너무 부족하여 하나님의 율법 행하기에 연약하오니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게 하기 위하여 율법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지킨 것을 본받아, 저희들 역시 하나님의 율법을 바르게 지킴으로 우리 주변에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게 되는 귀한 복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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