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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얘야~! (눅 15: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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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장빈 목사

오늘의 본문은 <돌아온 탕자>라는 제목의 비유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린 이 비유를 들으면서 늘 둘째에게만 관심일 쏟았던 것 사실입니다. 하지만 누가 선생님은 첫째 아들에 대해서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면서, 무언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해서 오늘 우리는 둘째 대신 첫째, <맏아들>을 만나려고 합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맏아들입니다.

맏아들, 그에겐 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건방진 그 동생은, 일전에 자기 몫의 유산을 챙겨, 먼 나라로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형은, 그 날 이후, 동생을 잊기로 했습니다. <나에게 동생이란 없다!> 이제 그는 이 집안의 장자이며 동시에 외아들이 되었습니다. 해서 그 날 이후, 더욱 열심히 아버지를 섬기겠노라 다짐했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역시 듬직한 맏아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잘 지내던 어느 날, 그 날도 맏아들은 밭에 나가 일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집에 가까이 오자, 평소에 듣지 못하던 풍류 소리, 춤추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설마~! 우리 집에서? 그 녀석 나간 이후로 적막강산이었는데?> 자기 귀를 의심하며 다시 들어보니, 자기 집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틀림없었습니다. 그것도 굉장한 잔치가 벌어진 모양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거기 25절의 <풍류>라는 헬라어 단어는, 심포니라는 단어의 어원입니다. 해서 요즘 말로 번안하자면, 악단과 무희까지 동원한 훌륭한 잔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맏아들, 종 한 사람을 불러 자초지종을 묻습니다. <무슨 일인가?>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맏아들이 집으로 들어가 아버지께 직접 여쭙는 대신, 종을 불러내어 묻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지금 맏아들의 마음이 언짢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큰 잔치를 베풀어야 할 정도의 일이라면, 당연히 맏아들인 자기와 먼저 의논하셨어야지, 그럼, 내가 누군데,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는 맏아들 아닌가, 오늘 이 때까지 오직 아버지 한 분 모시고 살아온 장자 아닌가? 지금도 밭에 나가 죽도록 일하다 돌아오는 길 아닌가? 집안의 대소사, 맏아들과 먼저 상의해 주시는 것, 마땅하고 당연한 일이지! 그런데 지금 들려오는 소리는 뭐지? 어찌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아무 말씀 없으시던 아버지가, 장자에겐 알리지도 않고, 장자는 밭에서 일하고 있는데, 이런 잔치를 베풀다니,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랬습니다. 맏아들로서는 이 상황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순간 화가 치밀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런 맏아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종은 곧이곧대로 대답을 합니다. 그 종의 답변이 맏아들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뒤집어 놓습니다. 직접 확인해 봅니다. / 15:26-27 / (읽기) / 지금 무어라 합니까? <당신 동생이 돌아왔습니다. 당신 아버지가 당신 동생 보시더니, 버선발로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셨습니다. 제일 좋은 옷도 내 주셨습니다. 새 신도 신게 하셨습니다. 참, 당신 아버지, 손에 끼고 계시던 가락지까지 빼서 그 아들 손에 끼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라 하셨습니다. 죽었던 내 아들이 살아 돌아왔으니 먹고 즐기자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맏아들, 완전히 삐지고 맙니다. <나 맏아들 안 해, 아니 더 이상은 맏아들 못해, 이젠 안 할 거야, 나 저런 집구석에 들어갈 수 없어, 나 안 해!> 소리에 소리를 지르며 지금 장자가 화를 내는 중입니다. 누가 선생님은 그 상황을 이렇게 전합니다. 28절인데요,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였다!>

거기 28절의 <저가 노하여>라는 표현이 있는데요, 거기 <노했다>라는 말, 헬라어로 일시적 감정이나 순간적 분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오랜 세월을 두고 마음 속 깊이에 자리 잡은 노여움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그동안 맏아들 가슴 속에 뭔지 모르는 노여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바로 그것이 지금 동생을 위한 잔치를 빌미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맏아들이 그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마음까지야 바라지 않는다 해도, 형으로서 동생이 돌아왔는데, 그렇다면 먼저 감사했어야 했습니다. 그럼요, 얼른 집으로 달려 들어가 동생을 얼싸안고 풍류에 맞추어 춤을 추어야 했습니다. 그가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그렇게 했어야 했습니다. 그 날은 잃었던 아버지의 아들, 곧 자기 동생이 살아 돌아온 날, 기쁜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맏아들의 마음엔 기쁨 보다 동생을 향한 섭섭함이 더 컸습니다. <건방진 녀석, 정신 나간 녀석, 벨도 없는 녀석, 자기 유산 챙겨서 도망갈 땐 언제고, 가서 창기와 허랑방탕하다 돈 다 떨어지니까 이제 자기 발로 다시 돌아와? 무슨 염치로! 에이, 나쁜 녀석!>

그런데 어인 일인지, 맏아들 마음의 섭섭함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동생을 향하던 섭섭한 마음이 움직여 아버지를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맏아들 마음에 진짜 섭섭한 일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동생을 향한 섭섭함 보다 아버지를 향한 섭섭함이 더 문제였습니다. 그랬습니다. 정작 맏아들이 더 섭섭했던 대상은 바로 아버지였습니다. 맏아들에겐 아버지가 더 문제였습니다.

사랑하는 부모님 여러분, 특별히 존경하는 아버지 여러분! 한 말씀만 드리고 갑니다. 우리 자녀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노여움이 남지 않도록 긴장해 주시고 조심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명령입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에베소 6:4)> 그렇습니다. 나 아버지의 표정 한 자락이 가정의 행복을 좌우합니다. 나 어머니의 말 한 마디가 자녀들의 인생을 좌우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녀들의 가슴에 노여움은 남지 않도록 꼭 그렇게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아버지에게서 배울 것이 하나 있습니다. 27절을 다시 보실까요? 거기 놀라운 말이 있습니다. 중간 대목,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거기 <건강한 몸>이라는 말에 표시하시지요. 지금 아버지가 감사하는 제목은 오직 아들의 건강입니다. 잃은 줄만 알았던 둘째 아들이, 건강한 몸으로 돌아왔다는 그 이유만으로 지금 아버지는 감사가 넘쳐 살진 송아지 잡아 잔치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다른 건 보지도 않습니다.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묻지 조차 않습니다. <그 돈 다 어쨌느냐?> 책망하지도 않습니다. <앞으로 잘 한다고 맹세하면 받아주마!> 그 어떤 조건도 내 걸지 않습니다. 저 멀리 도망가서 허랑방탕하다 돌아온 탕자인데도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어버이의 사랑법입니다.

아버지~! 제발 내 눈에 좀 들어도, 내 마음에 좀 미흡해도, 도대체 저 녀석 무엇이 될까 한심한 듯해도, 일단 내 자식 그 몸이 건강하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오냐, 난 너희가 건강해서 참 감사하다!> 고백하시며, 건강한 몸을 인하여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이 너른 마음 받아, 우리 아이, 건강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살진 송아지 잡아 잔치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우리 아이, 건강하니 감사합니다. 더 건강하라고 여기 살진 송아지 잡았으니, 잘 먹고 잘 소화시켜 더 건강하게 해 주십시오.> 여러분, 이런 가정, 되는 가정입니다. 그런 가정, 반드시 천국 가정 될 줄로 믿습니다. 가정이 천국이니 아이들이 천국을 살지요, 천국을 사니, 천사 같은 아이들로 씩씩하고 건강하게 잘 자라나지요. 그러니 행복하지요. 꼭 이 가을, 살진 송아지 한 마리 잡아주시기 바랍니다.

<가을 인사 한번 나눌까요? / 주 안에서 천국 가정되시기 바랍니다.>

자, 맏아들이 돌아올 시간이 되었는데도 돌아오지 않자, 아버지가 마중을 나옵니다. 집 앞을 나서는데 거기 성난 맏아들이 서 있습니다. 그런 아들을 보시고, 건네는 아버지의 첫 마디가 바로 오늘 말씀의 제목입니다. <얘야~!> 거기 31절을 보시면 <아버지가 이르되 얘~!>라 하십니다. 거기 <얘>라는 단어를 공동번역 성경은 <얘야~!>라고 푸는데요. 해서 오늘 말씀 제목이 <얘야~!>입니다.

그런데 정작 아버지가 자기를 <얘야~!>하고 부르시자 맏아들의 섭섭함과 불만이 폭발하고 맙니다. 오늘 따라 <얘야~!>하고 부르시는 아버지의 음성이 듣기 싫습니다. 해서 불쑥 아버지를 향해 불경한 말을 내 뱉고 맙니다. 여기서 맏아들의 항변을 직접 듣겠습니다. / 15:29-30 / (읽기) / 와~! 정말 심각한 상황입니다. 맏아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진 몰랐습니다. 부모님 여러분, 우리 자녀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늘 조심스레 헤아리셔야 합니다.

그런데 듣고 보니, 맏아들의 항변은 이유 있는 반항입니다. 그랬습니다. 맏아들의 항변, 철없는 십대의 이유 없는 반항과는 그 질이 다른 것 맞습니다. 그런데 왜 맏아들이 이런 지경에 빠지게 되었나? 거기 29절에 보면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겼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거기 섬겼다는 말, 종이 주인을 섬길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곧 맏아들은 아버지를 주인으로, 그리고 자신을 종으로 여겼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아들로서 아버지를 섬긴 것이 아니라 종으로서 아버지를 섬겼다는 겁니다.

바로 이 생각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맏아들은 스스로 종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는 오직 종이었습니다. 그에겐 자유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자유가 없어 자유롭지 못한 것 아니요, 아버지가 그를 속박하여 자유롭지 못했던 것 아닙니다. 그 자신, 장자라는 직분에 매여 스스로 종이 되었던 까닭입니다. 그런 맏아들, 장자의 직분을 감당하다 피곤해지면, 둘째 아들을 부러워합니다. <그래, 그렇게라도 자유를 찾아 떠난 네가 부럽구나!>

그러나 이건 착각입니다. 둘째가 자유를 찾은 것 아니기 때문입니다. 15장 19절을 보실까요? 돈만 있으면 아버지도 형님도 필요 없다고 큰소리치며 도망갔던 녀석이, 거지가 되어 아버지께로 돌아와 드리는 말씀입니다. / 15:19 / (읽기) 이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자리, 감당치 못하겠으니, 그저 종의 하나로 받아달라는 겁니다. 자기 스스로 아들이 아니라 종이 되겠다는 겁니다. 결국 아버지의 두 아들 모두가 스스로 종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귀한 아들로 낳아 놓았더니 스스로 종이 된 어리석은 두 아들의 현주소입니다.

여기서 자유란 단어에 대해 잠시 생각하고 싶습니다. 영어로 자유를 <freedom>이라 하는데요, 이 단어의 어원적 의미는 놀랍게도 <사랑한다!>입니다. 한 마디로 사랑하기에 자유롭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면 자유롭게 됩니다. 사랑은 자유를 보장합니다. 당신을 사랑하기에, 당신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마음, 바로 자유 한 마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자유로 통합니다. 자유의 뿌리엔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 없인 그 누구도 자유인이 되기 어렵습니다.

해서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오늘 주시는 요절 말씀으로 받고 싶은데요. / 갈라디아 5:13 / (308쪽, 읽기) / 놀랍게도 자유와 사랑이 만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으니, 그 자유 가지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는 겁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랑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섬기는 종이 될 때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린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랬습니다. 오늘의 주인공 맏아들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사랑으로 섬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맏아들로서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아야 한다는 의무감, 장자로서 스스로 아버지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결국 그는 온갖 집안일을 내가 해야 한다는 스트레스 속에 종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아들이 아니라 종이었기에,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살아온 아버지의 마음이나, 벌벌 기어와 고개도 들지 못하고 그저 종으로 받아달라고 애원하는 동생의 심정을 헤아릴 만한 사랑이 그의 마음엔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살아 돌아온 동생을 보고서도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대신, 오히려 아버지께 따지고 덤비는 불쌍한 아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랑이 메말랐기 때문입니다. 해서 이 기쁜 날, 맏아들이 아버지께 불경하게 대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더 한심한 것은 맏아들이 따지고 덤비는 내용이었습니다. 지금 아들이 무엇 때문에 섭섭하다 합니까? 놀랍게도 맏아들 입에서 나온 이야기, 간단하게 추리면 <염소 새끼 한 마리와 살진 송아지 한 마리!> 때문입니다. 염소 새끼 한 마리와 살진 송아지 한 마디 사이에서 그만 맏아들은 이성을 잃고 말았던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그의 가슴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맏아들 노릇이 그에겐 의무방어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들이 아니라 스스로 종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 자리에 함께 한 아들딸 여러분께 한 말씀드리고 갑니다. 아들딸 여러분, 무조건 아버지와 어머니를 사랑하고 존경하시기 바랍니다. 십계명의 한 복판에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명령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지점에 부모님이 계십니다. 부모님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특히 부모 공경이란 이 계명은 정언적 명령입니다. 무조건 순종해야 하는 하나님의 명령이란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제5계명 앞에선 그 어떤 신학적 토론도 필요 없습니다. 그 어떤 핑계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 안에서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고, 내 부모님, 공경하기만 하면 됩니다.

특히 염소 새끼 한 마리 때문에 아버지께 눈 똑바로 뜨고 덤비는 것 아닙니다. 왜 내 동생한테만 살진 송아지 잡아주느냐고 집에도 안 들어오고 밖에서 어머니를 향해 화를 내는 것 아닙니다. 어느 안전이라고 지금 부모님께 눈을 똑바로 뜨고 대듭니까? 아니 될 말씀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여러분, 아버지 어머니한테 대드는 자녀 치고 잘 되는 자녀 없습니다. 공갈 협박 아닙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자녀들이 잘 됩니다. 효도하는 자식 치고 망하는 자식 없습니다. 그런 가정, 되는 가정입니다. 이 가을, 내 사랑하는 부모님의 마음에 행복을 드리는 작은 이벤트 하나 연출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 맏아들, 결국 화를 참지 못하고 해서는 안 될 말을 하고 맙니다. 15장 30절 보실까요?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란 표현이 있는데요. 거기 <이 아들>이란 말을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곧 <당신의 아들>이 됩니다. 그 녀석은 <내 동생>이 아니라 오직 <당신의 아들>이란 겁니다. 나는 동생으로 인정할 수 없으니, 당신 아들만 삼으라는 겁니다. 이쯤 되면 막 해 보자는 거죠.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입니다. 결국 그는 그렇게 카인의 후예로 서고 말았던 것이죠.

그런데, 다음 장면에서 우린 감동하고 맙니다. 막 해 보자고 덤비는 아들 녀석을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 때문입니다. 우리네 같았으면 이런 버릇없는 녀석, 맏아들은 무슨 맏아들, 거저 죽지 않을 만큼 두드려 혼을 냈을 것입니다. 성격 급한 아버지라면, 벌써 반쯤 죽여 놓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이 아버지, 그래도 내 아들이라고 이 녀석을 다시 품에 안으시고 달래십니다. 이것이 부정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그럼요, 잘 났어도 내 아들, 못 났어도 내 아들, 그러니 내가 안고 가야 합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말씀을 들어봅니다. / 15:31-32 / (읽기) / 아버지, 맏아들의 손을 잡고 하시는 말씀,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지 않느냐? 그리고 내 것이 다 네 것 아니냐? 염소 새끼가 문제냐? 송아지 한 마리가 문제냐? 이 에비가 가진 것, 몽땅 다 너, 곧 맏아들 것 아니냐?> 정말 아버지십니다.

그러면서 아버지, 맏아들을 잔치로 초청하십니다. 어서와 우리가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자 하십니다. 그런데 32절에서 주목하고 싶은 대목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네 동생>이란 표현이요, 둘은 <우리>라는 표현입니다. 거기 <네 동생>과 <우리>라는 단어에 동그라미 하시지요. 무슨 뜻입니까? 방금 전, 맏아들 녀석이 <당신의 아들>이라 부른 둘째를 가리켜, 지금 아버지는 <너의 동생>이라 수정해 주시는 대목입니다. <얘야~! 이 아이는 너의 동생이다! 그리고 말이야, 여기 있는 너의 동생 말이다. 이 아이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것 아니냐?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기로, 살진 송아지 한 마디로 잡아 잔치를 베풀기로, 형인 네가, 맏아들인 네가, 꼭 그렇게 화를 내야 하겠느냐? 얘야~!?>

그러면서 아버지는 두 아들을 가슴에 품어 다시 <우리>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럼, 우린 하늘 가족이야! 우린 헤어질 수 없어! 그 무엇도 우릴 갈라놓을 수 없는 거야! 우린 우리야! 우린 하늘 가족이야! 얘야~!>

오늘 말씀 마당을 닫으며,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더 드리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동광 가족 여러분! 우린 예수님을 맏아들로 하는 하늘 가족이며, 특별히 우린 하나님의 큰 복을 받은 맏아들 교회입니다. 저는 이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결코 잘난 척 하려는 것 아닙니다. 결단코 제세하려는 것 아닙니다. 그저 맏아들의 직분을 주시고 감당할 있는 복을 주셨으니 최선을 다해 섬기자는 호소이며 제안입니다. 특히 우리 동광 교회는 우리 노회와 교단 안에서 맏아들의 직분을 감당해야 하는 중요한 교회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맏아들의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 먼저 사랑으로 충만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형님 교회로서, 장자 교회로서, 우리에게 요청되는 일이 정말 많습니다. 도와야 할 농촌 교회도 많습니다. 섬겨야 할 선교사님들도 많습니다. 우리를 기다리는 가난한 영혼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제 우리 귀찮아하지 말고, 따지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무엇도 섭섭해 하지 말고, 무엇도 바라지 말고, 그저 사랑하십니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주심에 감사하며, 주님의 사랑 품고, 우리 주 안에서 자유롭게 사랑하십니다. 우리 교회를 여기 대치동 언덕에 세워 주신 귀한 뜻인 줄 믿습니다.

오늘 이 비유 말씀을 주신 배경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곧 당시 유대 사회의 장자들의 못난 모습이 있습니다. 15장 2절을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주님 곁에 세리와 죄인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원망합니다. 왜, 죄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느냐고 주님께 따집니다. 그런 저들을 향해 우리 주님, 한 말씀 하십니다. <얘야~!, 우린 우리다. 우린 하늘 가족이다. 우리가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얘야~!>

주님의 이 사랑 가지고, 오는 24일, 김인호 목사님과 함께,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매교회, 대만 반정교회를 방문하려고 합니다. 특히 요즘 반정교회가 어려움에 처해 있습니다. 해서 지금은 우리가 형님 교회로서의 사랑과 책임을 다해야 할 때입니다. 지난 번, 우리의 사랑을 전할 때에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 말씀하시던 장세웅 목사님의 얼굴이 지금도 선합니다. 저는 확실히 믿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사랑으로 대만 반정교회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대만 땅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구원의 방주로 우뚝 서게 되리라 믿습니다. 또한 이 일에 사랑으로 참여하시는 우리 동광 하늘 가족들에게도 크신 은혜로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우린 우리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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