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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비전을 품은 사람들입니다. (마 28: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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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덕재 목사

  오늘은 그리스도인의 비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부류로 분류할 수 있는 것같습니다.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로 비유하면, 에서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야곱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그리고 요셉처럼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동물적 인생을 사는 사람이 에서같은 사람입니다. 목적도 소망도 없이 그냥 살아가는 사람, “저희의 신은 배요..” 하였듯이 욕망의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 대다수의 날을 게으르게 보내다가 누가 뭐라고 하면 분노를 터뜨리고 분노와 오기, 복수와 원한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에서의 인생을 평하여 망령된 자라고 하였지요? 이런 사람은 망령된 자, 인생을 망친 사람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야곱처럼 야망의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은 삶의 성공목표와 명예에 대한 집착이 있어서 게으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성공과 명예를 위하여, 별별 교활한 수단을 다 씁니다. 꿍꿍이를 만들어내고, 머리를 굴려서 어떤 때는 우아하게, 어떤 것은 비밀로 감추고... 자기가 원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성취해야 하고. 그래서 성공과 명예를 위하여 죽기 살기로 때로 하나님께 매달리기도 하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참 대단한 사람, 능력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면 외형상으로는 잘 산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그의 노년에 바로 임금 앞에 섰을 때, 자신이 살아온 인생길에 대하여 뭐라고 합니까? “내 나이 열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고백하지요? 야곱처럼 살면, 야망에 집착하여 살면, 험악한 인생을 보냅니다. 치열하게 살아가지만, 훗날의 허탈함과 무상함으로 뼈저리게 후회하게 됩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은 요셉과 같은 사람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살아간 사람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비전을 품은 사람이라고 하여, 자신이 형들보다 뛰어나고 아버지, 어머니도 자기에게 절하게 되고 어렸을 때의 꿈(dream)을 고이 간직하고 그것을 목표로 삼아서 와신상담(臥薪嘗膽)하고 그렇게 산 사람이 아닙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요셉은 꿈이 없는, 목적이 없는 인생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냥 환경에 순응하여 살아간 것처럼 보입니다. 야곱처럼 성공을 위하여 달려가고, 자신의 명예를 위하여 강한 애착을 보이고 이런 모습이 없기에 아무런 꿈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삶에서 제일 특징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그가 보디발의 종으로 있을 때에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나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 모습입니다. 에서처럼 삶의 위기의 순간에 분노와 오기로 자신을 파괴하지 않았고 야곱처럼 교활한 술수를 부리지도 않았습니다.

예컨대, 보디발의 아내가 그를 유혹할 때, 요셉이 훗날의 야망을 위하여 유혹을 거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거부한 것입니다.

정작 하나님의 비전을 안고 사는 사람은 야곱과 같은 모습이 아니라 요셉과 같은 사람입니다. 요셉을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살아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인정하여,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요셉을 어떻게 대하여 주셨습니까? 요셉의 생애에 자세히 살펴보면, 그의 삶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하나님이 동행해 주십니다.

그 때에, 므낫세와 에브라임, 잊어버렸다와 풍성하다로 기억되듯이,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과 삶을 온전케 하시고, 행복케 하시고 제일 존귀한 자로 세우시지 않았습니까?

창세기는 “이렇게 살아라”는 인생지침서입니다. 인생지침을 인물, 믿음의 사람들의 모본을 통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그 중에 완성된 믿음의 모습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요셉입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정말로 함께 하십니다.

  제 기억으로는 90년대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의 그리스도인들간에는, 비전 열풍, 비전 신드롬이라고 할 정도로 비전은 중요한 개념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답이 궁색하면 아직 뭘 모르는 초신자 취급을 받곤 합니다. 간혹 자신도 괜찮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보이기 위하여 내 비전은 이런 것이다 대답을 준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비전하면, 단골로 떠 올리는 말씀이 <잠29:18>입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묵시= 비전이라 하여 비전이 없으면 방정맞게 살아간다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비전의 중요성을 부각시킨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이렇게 오해를 합니다. “비전, 성공의 꿈이 없으면 방자히 행하거니와...”, “성취의 목표가 없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거니와...” 여러분도 이렇게 이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 이 <잠29:18>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묵시는 율법을 지키는 정신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인생의 원칙, 철학이 없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살아가지만, 율법을 지키는 것, 인생의 가치관이 분명한 사람은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품으려면, 야망과 비전은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야망을 내려놓지 못하면 하나님의 비전을 제대로 품을 수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비전은 우리 교회가 어떤 목표를 정해 놓고 달성하고, 우리들 개인이 어떤 목표를 정해놓고 그것을 성취하는 것과 별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성공철학, 성공환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성공철학, 성공환상으로 여기면 이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300명 알곡신자, 호남에서 제일가는 교회, 10만명 교인, 만명 사역자, 3만명 교인, 3천명 사역자, 300명 선교사 333비젼, 등 이것이 비전인양 착각하고 살아갑니다. 이것을 위하여 목숨바쳐 충성하리라 날마다 새벽기도 하지요.

개인의 모습을 보면 이렇습니다. 나도 뭔가 비전이 있긴 있어야 할 것은데, 내 인생에 목표가 있어야 되겠는데, 뭐가 좋을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성공철학, 성공환상으로 여기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 비전이 유행을 타는 모습입니다. 선교사되는 것, 찬양사역자되겠다, 크리스천 상담가가 되는 것 등등.

이름만 들어도 괜찮은, 다른 사람도 인정해 주는 것, 그것이 내 비전이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 앞에 떳떳하고 자랑스럽고 내가 뭔가 고차원의 삶을 사는 것같구... 한 마디로 폼 나지요? 그렇게 자기 인생에 대한 소망을 잡으면, 하나님의 비전을 품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정직히 말하면 착각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인생에 대한 성공목표를 갖는 것이 하나님의 비전이 아니라면, 정작 하나님의 비전을 품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가 오늘 본문으로 삼은 말씀이 예수님의 Great Commission, 지상명령입니다. 예수님의 유언이라고 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공부하고 연구한 사람이라면, 이 지상대명령은, 예수님이 뜬금없이 던져준 명령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가르침의 집약이고 또 이렇게 사는 본을 예수님께서 보이셨음을 확인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사역과 당신의 삶을 사신 생애의 집약입니다. 더 나아가 이는 우리에게 이렇게 살아라 라고 가르쳐 주는 성경의 가르침을 집약해 준 말씀으로서 창조명령<창1:28>이 구속사적으로 해석된 명령입니다.

  어려운 용어를 써서 죄송합니다. 이런 것입니다. “생육하여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는데, 인간이 죄를 범한 후에 잘 다스립니까? 잘 못 다스리지요? 그래서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사회는 엉망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조화로운 세상을 회복하는 데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 데에는 뭐가 중요합니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사람의 변화가 핵심이고 사람이 근본적으로 변화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이제 그리스도의 구속의 기반 위에, 회복의 물결이 흘러가도록 주신 명령이 지상명령입니다.

아시는 분들도 많이 있겠지만, <마28:19,20>의 명령은 이런 뜻입니다. 한 마디로 축약하면,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입니다. 당신이 제자가 되고 또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세웁니까? “가서, 침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함으로써”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세우라는 명령입니다.

‘가라’는 것은 이웃을 향하여 마음과 삶을 열라는 말입니다. 이웃에게 관심을 갖고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마음이 열려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기의 울타리를 벗어서 나에게 낯선 사람, 나하고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사랑이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하지 말고, 전혀 상관없는 이웃을 향하여 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침례를 주라’는 것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는 초점이자, 이웃 사랑의 본질입니다. 침례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을 믿기로 결신한 사람에게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의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가 회심하여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그 신앙을 고백하게 하십시오. 전도하여 회심시키라는 명령이고 거듭나게 하라는 명령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세상은 소망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고 사람의 변화를 위하여, 사람은 한번 뒤집어져야만 참 사람이 됩니다. 

사람들이 제일 많이 오해하는 것이 사랑에 대한 이해인 듯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무조건적인 희생이었지만, 맹목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죄인된 인간은 자신에게 맹목적인 사랑을 원합니다. 무엇을 해도 다 받아주고 자기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에게 아무런 멧세지를 주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아무런 요구가 없나요? “그냥 너 살던대로 계속 살아라, 내가 죄짐만 치워줄게.” 이런 것입니까? 아니지요. 무엇을 해도 다 받아주고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고 이 맹목적인 연민의 사랑은 인생을 망치게 합니다.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가 회개하여 새사람되라는 멧세지를 선명하게 증거합니다. 그것이 참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웃에게 드릴 수 있는 최선, 최고의 사랑은 그가 거듭나서 침례를 받도록 돕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나오라고 끌어댕기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정말로 회심하여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제자가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가치있는 인생, 진정한 인생을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르쳐 지키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십시오. 그의 인생의 가치관이 바로 서도록, 생각하는 패턴이 자기 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바로 서도록, 태도와 습관이 바로 서도록 배우고 익히고 가르치고 지키게 하십시오. 예수님을 믿는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 도를 배우고 따르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은 이 지상명령이 당신의 제자들의 인생의 좌표이자 초점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가 그 해답이 이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품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고 그렇다면 당연히 예수님의 유언과 같은 지상명령에 드려진 삶, 주님의 뜻에 헌신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을 야망으로 여기는 사람은 지상명령을 수단으로 여깁니다. 빨리 빨리 제자들을 삼아서 큰 교회가 되는 것, 제자들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 제자가 또 제자를 낳고 나는 그 꼭대기에 있고...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지상명령을 교회성장을 위한 수단이거나, 자신의 영적 입신양명을 위한 수단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비전을 품은 사람에게 지상명령은 그의 삶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삶 자체가 그 인생의 목적이며 꿈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처지에서 이웃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며 가르쳐 지키게 하는 삶”을 꾸준히 살아갑니다.

마치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도, 애굽의 감옥에서도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서 충성된 삶을 살았듯이, 오늘 하나님의 비전을 품은 사람은 어느 환경, 어느 시절이더라도 “가서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 지키게 하여 제자를 삼는” 삶을 살아갑니다.

인생의 걸음이 그 걷는 자에게 있지 않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길을 우리가 결정할 수 없습니다. 실상을 말씀드리면, 우리가 앞으로 가난하게 살 지, 부자로 살 지, 해외로 나가서 살 지, 국내에서만 살지 그것을 우리가 만들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5년 전에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셨습니까? 지금 이렇게 살아가리라고 예측하셨습니까?

물론 체념하고 무기력하게 살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정작 우리가 신경쓰고 힘을 기울여야 할 것에 우선적으로 신경쓰고 힘을 쏟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어떤 환경에 살게 하시든지, 하나님의 비전을 품은 삶, 지상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좀 상황이 나아지면, 여건이 좋아지면 그 때 예수님도 배우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서 나중에 제가 환경이 좀 나아져서 예수님 배우겠습니다 이렇게 말한 사람 저는 한번도 못만났습니다.

살아가면서 환경과 여건이 좋게 주어지는 때는 한번도 없습니다. 예) IMF 때 실업자

도리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마음을, 생각을 달리해 보십시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는 약속을 신뢰하고 어느 여건, 환경으로 인도하실지 맡기고, 기대하고.. 오늘 주어진 삶에서 가서 침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주님의 뜻에 우선적인 마음과 삶을 드리십시오.

어느 여건, 어느 환경에 이르든지,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기를 우선적으로 드려보십시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능력이 무엇인지 당신도 경험할 것입니다.

또 하나, 예) 로버트 콜만, 주님의 전도계획, “예수님에게는 국내 선교와 해외 선교의 구별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비전을 품고 살아가십니까? 혹시 아직도 아무런 열망도 없이 그냥 먹고 사는 것이 전부인 양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충동과 분노로, 두려움에 쫓기거나 오기로 그렇게 살아가지 않습니까? 게으름과 어리석음의 망령된 자리를 떨치고 일어서십시오. 인생 패가망신하는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십시오.

혹시 아직도 내 야망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험악한 세월, 인생의 비애와 허무의 자리를 떨치고 일어서십시오. 야망의 집착을 벗어 던지고 하나님의 비전을 품으십시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한번 하나님의 비전을 마음에 품고 사는 삶을 따라보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도, 정신을 배우고 익히며 또 한편으로는 가르치고 훈육하며, 그래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내가 관계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도록, 정직한 신자가 되도록 기도하고 애쓰고 그렇게 살아 보시지 않겠습니까?

내 삶에 관계된 모든 영역, 모든 사람과의 관계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며 나의 이웃들에게도 관심을 갖고 그들도 나와 함께 예수를 따르는 삶을 함께 살도록 기꺼이 수고하는 그 삶에 당신은 남은 여생을 헌신하지 않겠습니까?

  성령께서 하나님의 나라의 충만한 완성을 위하여 파트너가 될 사람을 찾으시고 역사하시는 그 성령님을 좇아,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따라 제자가 되고 제자를 삼는 그 삶을, 어느 환경, 어느 때에도 드리며 살아가는 그 삶에 헌신하시지 않겠습니까?

성령께서 당신을 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에 초청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을 품고 살아가는 자에게 어떤 약속을 주십니까?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20절>. 똑똑히 봐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내가 어떤 사람하고 함께 하는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보아라. 내가 에서처럼 욕망에 이끌려 가는 사람에게 함께 하겠느냐, 야곱처럼 야망에 목맨 사람에게 함께 하겠느냐?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전을 품은 사람, 지상명령에의 순종에 헌신된 사람에게 영원토록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스케일이 크신 분이십니다. “하나님 제가 한 달 동안 새벽기도 열심히 할 테니까, 이런 것 좀 해 주세요...” 이런 기도, 가끔은 인생이 불쌍해서 들어주시기도 하시지만, 제 추측에, 이런 사람들 하나님이 그리 썩 기뻐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도리어 “애기야, 네 인생을 All In 해보지 않을래? 내가 나의 모든 것을 가지고 영원토록 너와 함께 할테니...”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유언에 인생을 올인한 사람을 하나님은 정말로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정말로 그와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 이 예수님의 지상명령에 한번 당신의 인생을 올인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저희 교회는, 더 좁혀서 저의 소망은 저희 교회와의 만남이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비전을 품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가 지향하는 신앙생활, 교회생활의 구조는, 교회 식구를 빨리 빨리 늘려가고 그러기에는 사실 적합한 모습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희 교회와의 만남이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서 침례를 주고 가르쳐 지키게 함으로써” 제자를 삼으라는 이 말씀에 순종하고 참여하도록 맞춘 구조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저희 교회가 앞으로 5년 후에 300명, 7년 후에 500명 이런 목표를 제시해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정말로 하나님의 비전을 품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제자로 설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개인에게 또 공동체에게 분명히 함께 하십니다.

저희 교회와의 만남이 있는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지상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 “순결한 꽃들로 피어나고 푸른 의의 나무로 서 가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이 정말로 함께 하셔서... 어떤 일을 이루어 가실지 기대해 봄직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함께 하셔서 어떤 크고 놀라운 일을 보이실지 소망을 품고, 오늘 눈물로 씨를 뿌리는 것같게 느껴질지라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비전을 품은 요셉과 같은 사람이 되도록.. 오늘도 지상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우리가 함께 드려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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