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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욱 큰 은혜 (약 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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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정근두 목사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이 자리를 찾으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보낸 편지 한 부분을 오늘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지난주일 제가 너무 어렵게 설교를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오늘은 노력하겠습니다만 한 마디 변명을 하고 지나가고 싶습니다. 그것은 본문에 대한 진지한 설명도 없이 행해지는 설교들 때문에 당하는 상대적인 피해도 있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 새로 시작한 중국집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 동네에 모두 영세한 중국집 밖에 없어서 그나마 그래도 사람들이 둘러앉을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몇 가지 요리를 맛보았는데 요리솜씨는 괜찮은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먹었던 짜장면이 조금 걸렸습니다. 왜냐하면 요즘 일반적으로 달라진 풍조이긴 해요. 옛날보다 음식이 많이 달아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저는 단 것을 그렇게 좋아해서는 안 됩니다. 거의 저는 설탕을 넣은 음식을 먹지 않기 때문에 딱 입에 들어가면 바로 반응이 옵니다. 본래는 설탕을 넣는 음식이 아닌데 사람들이 설탕을 넣어 가지고 입맛에 아부를 하는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ꡒ맛있다ꡓ와 ꡒ달다ꡓ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늘 84세 되신 어머니한테 가끔 이야기를 하거든요. 어머니, 어머니는 어떻게 맛있다는 것하고 달다는 것을 구별하지 않습니까? 달면 무조건 맛있다고 합니까? 연세가 들면 단것이 좋아지는 것 같아요. 뿐만 아니라 우리 젊은 10대들도 단 음식에 많이 노출되어있기 때문에 심지어는 짜장면 조차도 설탕을 넣어서 이전의 짜장면 맛이 아니었습니다.

단 것을 선호하는 입맛에 따라서 음식을 만들고 또 그 단 음식을 계속 먹다보면 입맛이 설탕에 절어서 설탕을 넣지 않으면 맛이 없다고 불평을 하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제가 남의 중국 집 이야기를 하려고 이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그게 아니고 설교도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가벼운 웃음으로 시작해서 계속해서 웃다가 끝나면 가면서 “아 오늘 설교가 참 재미있었고 은혜 있었다.” 이러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면 모든 설교가 모두 천편일률적으로 시류에 적응하고 마는 잘못을 범할 것 같아서 두렵습니다.

그런 면에서 어젯밤 여러분 9.11 울산사랑 축제에 참석해 보셨습니까? 아주 많은 분들이 오셨어요. 5000 ~ 6000여명 될 것 같아요. 무대의 뒤쪽으로 말곤 다 그래도 앉을 만큼 사람들이 많이 왔어요. 간간이 크리스챤 가수들이 신앙간증을 사이사이 넣기도 했고요. 마지막이 가까워지니까 기독교 현대음악 가스펠이 연달아 몇 곡 선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이현우씨가 등장을 하는데 분위기가 확 달라지더라고요. 저는 사실 이현우씨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몰라서는 안되겠더라고요.  아줌마들이 얼마나 열광을 하는지 이상한 부채를 들고 나와서 아예 자리에서 일어서서 환영을 하는데 대단하데요.

아주 괜찮은 시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현우씨 본인은 분위기가 놀던 물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던 모양이죠? 두 번째 노래를 하면서 ‘앞에 불렀던 노래와 비교가 안돼는 그런 시시한 인간들의 사랑노래입니다’ 하면서 노래를 부르더라고요. 나는 속으로 그래도 “아네” 하는데, 뒤에 앉았던 목사님들도“알긴 아네.” 그러시더라고요. 인간들의 시시한 사랑의 이야기를 노래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는 것하고는 급이 틀린다는 것을 그 가수는 알고 있더라고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여기 지금 교회에서 다루는 주제하고 세상 여러 곳에서  들을 수 이야기하고는 내용이 다릅니다. 내용이 다르면 어떻게 전해야 되는지 방식이 또 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집에 가서 제가 말을 듣기도 해요. 당신 오늘 표정이 너무 굳어있었다고 그래서 내가 미안하니까 변명할게 없으니까 아예 내용이 내용인데 내가 어떻게 생글거리면서 설교를 할 수 있냐고 변명을 하지만 그런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심각한 주제를 다룰 때는 사실 아무도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지는 않거든요.

실제로 우리가 여기서 다루는 문제는 이렇게 손뼉 치고 흔들면서 좋아하는 그런 주제를 다루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 보니까 이 시간은 조금 더 우리가 진지해 져야 되는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전체 세상이 모두다 그냥 천박한 웃음으로서 다 메워 가는 세상이 되어 가지고 설교자가 실제로는 설교를 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여러분도 모르게 그 문화에 적응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 문화와 코드가 안 맞으면 듣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그냥 꺼버리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조심하지 않으면 안돼요. 저도 그런 유혹을 받아요. 그냥 쉽게 하자.

사실은 주제 설교를 하면은 제가 에너지가 30%만 들이면 되는 것 같아요. 은혜 받았다고 그러고 주간에 모일 때마다 그 설교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다 좋아하는데, 이렇게 성경을 풀어서 성경이 말하는 데로 말하려고 하면 힘이 참 많이 들어요. 실제로 80%~90% 그냥 내가 쏟아지는 에너지 전체를 쏟아야 뭐가 전달되는 것 같고 조금만 분위기를 놓치게 되면 벌써 앉아서 기도하는 분들이 생기거든요.

오늘은 지난주일 살피다가 만 5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5절을 해설하는 데는 세 가지 큰 부류가 있다고 그랬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절대사랑을 의미한다고 보는 사람들, 그 다음 우리의 절대 충성을 기대한다고  그런 식으로 해설해 놓은 구절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지난번에 다루지 않았던  세 번째 가능성을 살피려고 합니다. 현대판 영어성경이라 할 수 있는 G.N.B.를 보면. ꡒ하나님이 우리 속에 두신 영은 맹렬한 욕망으로 채워져 있다는 성경의 말씀이 뜻 없다고 생각하십니까?ꡓ

N.E.B. 역시 같은 톤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ꡒ하나님이 사람 속에 심으신 영은 질투 하리 만큼 욕망을 향해 치닫는다고 하는 성경이 무의미하다고 여기십니까?ꡓ 앞의 두 그룹에서는 그 질투하리만큼 한다는 말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두신 성령이 질투하리만큼 강렬하다는 의미로 볼 수 있었고, 반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그 헌신이 정말 그렇게 성령께서 질투하리만큼 그렇게 강한 헌신을 요구한다고도 이해할 수 있는데 여기 제 3의 번역은 전혀 다르게 그냥 이야기를 하는데 뭐냐 하면

1. 타락한 우리의 마음은 끔찍이도 세상을 사모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영이 욕망을 향해서 치닫고 있는 것을 말하는, 타락한 우리의 마음은 끔찍이도 세상을 사모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대신에 세상으로 치닫는 인간 욕망을 꾸짖는 의미로서 번역된 것이 셋째 부류의 성경들입니다. 그래서 이 관점에서 오늘은 본문을 좀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 안에 영혼을 심으신 분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안에 영혼을 두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다가 생기를 불어넣음으로서 우리가 산 존재가 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하나님은 사람에 대해서 우리의 생명의 원인이시고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그분을 향해서 헌신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는 상대방을 만들지 않았어요. 상대방 안에 생기를 불어넣은 일도 없습니다. 다만 서로 보고 눈이 맞아서 사랑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결혼을 합니다. 그러면 결혼한 남자는 아내에게 어떻게 요구하지요? 말로 하던지 말로 하지 않던지 어떤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상대방이 나한테 절대 사랑을 하기를 바라고, 아내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남편이 세상에 여자들이 많지만 나만 생각하고 살아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렇다고 남자가 자기 아내가 자기만 보고 살려고 한다고 해서 “아이 그 남자 참 답답하네 왜 그렇게 속이 좁아.” 그렇게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아내가 남편보고 자기만 바라보고 살라고 진짜 “여자는 속 좁은 것 틀림이 없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을 보고는 여러분 편협한 사랑이다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옛날부터 부부관계에서 그런 것을 요구해 왔는데 요사이에도 그런 것을 요구 한다고 해서 이런 수구골통인 남자가 있나 그렇게 말하면 말이 맞지가 않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단순히 우리와 약속을 맺은 관계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영을 불어넣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영혼의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을 당신께 드리도록 요구하는 것이 그것이 무리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당연히 사람은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살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때에 우리가 행복할 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당신의 형상을 심으셨어요.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므로 영을 가진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생령이 된 것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숨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물의 영장이 된 것도 그 형상을 우리 안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구실을 하게 된 것은 하나님이 자기 모습대로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이젠 그 고귀한 위치에서 떨어 졌습니다. 타락이라고 그러지요. 그러니까 자기를 지은 창조주를 바라보고 사는 대신에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려야할 세상을 향하게 되는 타락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칭송하는 대신에 서로 상대방을 향해서 “오 나의 태양이여.” 라고 고백하고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이런 잘못된 상태에 빠져든 것입니다.

이웃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해야 될 능력을 가지고 자기 이익만 추구하고 섬김을 받아야할 창조주 대신에 하나님을 저버린 인생의 모습을 여기서 고발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자기 영의 주인이요, 자기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세상으로 치닫는 타락한 인간 욕망에 대한 묘사로서 5절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한번 여러분, 한 주간 동안 삶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막히는 길에도 불구하고 다 많은 분들이 참석하셨는데 말이지요. 예배의 자리에 나오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합니다만, 일주일 동안 엿새를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생각해 보려면 우리 생각이 어디로 주로 가는지를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얼마나 자주, 끈질기게 세상으로 치닫고 있는지 여러분자신을 관찰해 보셨습니까? 그 죄악 된 욕망에 사로잡혀있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괴로워 해본 사람이라고 하면 이 제3 부류의 번역에 대해서 동의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이 5절을 따라 나오는 6절의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를 주신다는 거예요. 세상을 향해서 우리가 치닫는 욕망이 강하지만 그것보다 더 큰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베푸시는 더욱 큰 은혜란 무엇입니까?

세상을 치닫는 타락한 욕망에도 불구하고 더욱 큰 은혜를 하나님은 베푸시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타락한 영의 소용돌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크신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신다는 말씀입니다. 타락한 욕망이 세상을 향해서 치닫는 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욱 큰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비 오는 날 좋지 않은 일기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게 된 것입니다.

타락한 우리의 본성과 대조할 때에 그 본성을 이기고도 남는 크신 은혜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보면 가장 적합한 해설이 5절의 해석은 제3의 번역들처럼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전적헌신을 요구하는, 전적헌신을 두 번째 번역이 그렇죠? 전적헌신을 요구하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이 가능하도록 더 큰 은혜를 주셨다. 그렇게 보아도 의미가 통하는 것입니다.

바른 해석이란 대체로 어떻게 결정을 짓느냐 하면 한 가지 문장에 대해서 서너 가지 해석을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그 다음 말하고 앞에 나오는 말 연결이 어느 것이 더 매끄러우냐에 따라서 “아 이중에서 이것이 정답이다.” 고 갈 수 있는데 이 6절은 제 2의 해석하고도 맞아떨어지고 제 3의 해석하고도 맞아떨어지니까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설교자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번역의 가능성을 그대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려지고 각기 어떻게 우리가 적용할 수 있는지를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세상을 향한 욕망보다 더 큰 은혜를 의미할까요? 아니면 우리를 향한 전적인 헌신을 요구하시는 그 하나님의 요구를 이룰 수 있는 은혜를 말하고 있을까요?

시기하고 다투는 마음의 소용돌이를 잠재우는데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욕심과 시기 나중에는 살인까지도 계획하고 행동에 옮기는 이런 악한 마음을 돌이키는데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우리 마음이 하늘에 계신 분만을 사랑하는데 필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란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것을 구하는 대신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숲 속에 있는 천 마리의 새보다 내 손안에 있는 한 마리의 새가 더 귀하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삽니다.

한번 움켜지면 한 손가락도 펴지 아니하려는데 내게 주시는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서 나누는 삶을 산다는 것은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저하고 밤에 비젼공유반을 공부하는 집사님 한 분이 남구에 있는 복지관에서 사역을 합니다. 이번에 오실 때 는 복지관에서 나오는 브로셔를 가지고 왔더라고요. 복지관에서 하는 사역이 뭔지 죽 써 있고. 그 다음에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3천원, 5천원, 만원 이렇게 써 있더라고요.

세상 사람들은 한 달에 좋은 일 하는데 만원만 내도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그럴 수 있는 것이 한 달에 하나도 남 돕는 일에 안 쓰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자기 목구멍에  넘어가는 술값은 아깝지 않지만 선한 일에 단돈 만원도 안 쓰는 세상에서 만원 씩 하는 사람 착한 사람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은 한 달에 만원씩 좋은 일에 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한 달에  십 만원도 그 이상도 드리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렇다고 교회에서 여러분들에게 좋은 일에 헌금 많이 한다고 감사장 줄 때 있습니까? 여러분 기껏해야 연말에 가서 헌금 얼마 했는지 떼어가서 세금 혜택 받도록 할지 모르지만 말이죠. 그렇게 생각하면 여러분 우리가 그런 일들에 동참하게된 것을 생각하면 우리가 뭔가 변하긴 변했어요.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온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 없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그 요구에 부응할 수 없습니다.

ꡐ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ꡑ고 하는 그 요구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할 수가 있겠습니까? 순교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교적이 삶을 살아가는 것도 누구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더욱 큰 은혜만이 우리로 하여금 일편단심 하나님께 충성하도록 합니다.

더욱 큰 은혜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하나님이 바라는 신앙 수준을 유지하기에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수준을 요구합니까? ꡐ하나님의 자비하심처럼 너희도 자비하라ꡑ ‘하나님의 온전하심처럼 너희도 온전 하라ꡑ이렇게 하나님이 요구하십니다.

착한 일을 좀 해라 일일일선(一日一善) 해라 그렇게 하면 우리가 노력하면 마음먹으면 할 수 있어요. 하루 한 가지씩 착한 일 못하겠습니까? 하다못해 세수하고 나서 세면대라도 좀 깨끗이 닦아놓으면 “일일일선(一日一善)” 들어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샤워하고 나서 목욕탕 한번 닦고 치워주면 일일일선(一日一善)이 되지 않겠습니까? 일일일선(一日一善) 하는 거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그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처럼 너희도 자비하라“하나님의 완전하심처럼 너희도 완전하라.”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를 세상종교 믿듯이 믿는 사람이 많아요. 우리가 좀 착한 일 하고 다른 사람보다 좀 많은 헌금하고 그렇게 살면 비가 오는데도 주일날 교회 나오고 굉장히 ‘아 나는 괜찮은 신자다.’ 이렇게 사람들이 생각할 때가 있어요. 그런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수준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오른뺨 때리면 왼뺨을 돌려대라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뺨을 한대 맞으면 내가 뺨맞은 일을 했건 말건 화납니다. 그렇죠? 달려들어 서너 차례 때려도 화가 덜 풀려서 시근덕거리는데 어떻게 오른뺨을 때리는데 왼뺨을 돌려 드릴 수 있습니까? 안됩니다. 겉옷을 달라고 그러면 메이커 옷을 달라고 그라는데 그래 필요하냐? 속옷까지 주는 이런 일은 본 마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맨 정신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에요. 절대 그래가지고 될 수 있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른뺨을 때리는데도 왼뺨을 돌려 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휩싸인 사람입니다.

더욱 큰 은혜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신앙수준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위한 생각을 조금도 하지 말고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서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 는 것이 인생을 행해서 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거기에 상응하는 충성, 절대헌신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더 큰 은혜가 필요합니다. 모든 상황에 부족함이 없는 더욱 큰 은혜를 하나님은 주시려 하십니다.


3. 더욱 큰 은혜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은 사실 무엇이 더욱 큰 은혜인지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없이 누가 큰 은혜를 받을 수 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ꡒ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 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ꡓ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구절을 들지 않아도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거만은 패망의 선봉” 이라고 빨리 망하고 싶거든 거드름 피워라, 이런 이야기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 나이 많이 들었을 때 이런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서로 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베푸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ꡓ 젊었을 때 베드로는 그렇지를 않았습니다. 지금 선생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십자가에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시는 길이라고 표정이 굳어져 있고 앞장서서 그 길을 걸어가시는데 제자들은 뒤에 따라오면서 신나게 서로 한바탕 했어요. 올라가서 예수님 다음자리는 누가 앉느냐는 겁니다. 이것들이 말이지 인제 3년이 다 되어가니 모두 다 기어오른다고 베드로는 생각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유월절 만찬을 하려고 만찬석상에 들어갔는데 만찬석상에 들어가려면 손을 씻고 들어가야 되거든요. 그런데 아무도 물을 떠 올 사람이 없어요. 내가 물 떠올 군번이냐? 이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는 세숫대야에 물을 담아 와서는 하나씩 불러와서 발을 씻겼습니다.

베드로의 차례가 왔어요. 와라! 못 갑니다. “제가 어떻게” 제가 어떻게 선생님한테 내 발을 갖다 맡깁니까? 그랬지만 속으로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압니까? ‘예수님보고 주라고 부르면서 거기다가 발을 갖다 내밀어 나는 너희들과는 틀려. 나는 너희들처럼 그렇게 안 해, 나는 할 수 없어’ 이러는 겁니다. 지금 겉으로는 얼마든지 겸손을 가장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어떻게 제 발을 씻기십니까? 속으로는 난 너희들과는 달라 발을 갖다 내민 너희들과는 달라, 이것이  베드로의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신앙이라는 것은 신앙이 들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노년의 베드로는ꡐ서로 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ꡑ고 마치 예수님이 수건을 두르고 나와서 자기들의 발을 씻겼다는 서로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그것이 결정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아래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높여주신다는 겁니다.

더욱 큰 은혜도 겸손한 자에게 약속되어 있습니다. 이는 성경이 말하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세상을 향한 욕망보다 더 강한 은혜의 선물이든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큰 요구보다 더 큰 은혜이든지, 겸손한 자만이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불변의 사실입니다.

시기하는 마음, 다투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을 잠재우는데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욕심, 살인, 시기로 치닫는 마음을 돌이키는데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더욱 크신 은혜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우리 마음이 하늘에 계신 분만을 사랑하는데 필요한 것이 크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움켜쥐면 손가락 하나도 펴려고 하지 않던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다른 사람과 나누는 삶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세상에 대한 탐심으로 가득해 있던 이가 자기 소유를 팔아서 구제하여 낡아지지 않는 영원한 지갑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본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더욱 큰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만이 땅 대신에 하늘에다가 보물을 쌓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온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더욱 큰 은혜입니다. 은혜로운 하나님의 도움 없이 우리를 향한 그 큰 요구에 부응할 수 없습니다.

그의 크신 은혜만이 우리로 하여금 일편단심 하나님께 충성하도록 합니다. 더욱 큰 은혜 없이는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삶을 살수 없습니다. 더욱 큰 은혜 없이는 하나님이 바라는 수준의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상황에 부족이 없는 큰 은혜를 우리에게 하나님은 주시려 하십니다. 그분의 은혜의 선물을 사모하십시오. 다만 은혜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기까지는 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정말로 나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기 전에는 그 은혜를 자기 것으로가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겸손히 하나님의 도움을 호소하면 은혜를 받습니다. 능하신 손을 바라보십시오. 어떤 역경에서도 구원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그분의 손을 앙모하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은 우리를 도우시기에 능하신 분이십니다. 그 손아래서 겸손해 지십시오.

때로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세월들이 지나가기도 합니다. 모세에게서는 40년의 세월이 지나갔다면 광야에서 양떼들을 먹이는, 여러분 한때는 자기가 스스로 임무를 자기에게 주어가지고 민족을 구원하는 일을 하겠다고 설쳤던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제 자기를 잊어버린 지 옛날이 되었고 하늘의 하나님조차 양을 먹이고 있는 자신을 잊어버린 것 같은 세월 40년이 흘러갔습니다. 그 세월은 헛된 세월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혈기로 설치던 모세가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 겸손하며 시민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래서 엄청난 하나님의 사역에 쓰임 받기 위해서 필요했던 훈련의 기간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을 향하는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데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세상에 모으고 싶고 쌓고 싶고 세상에다가 주머니를 만들고 싶은데 통장을 하나 더 두고 싶은데, 그것 대신 하늘나라를 위해 투자한다면 그런 삶에는 은혜가 필요한 일입니다.

세상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하늘로 돌릴 수 있는 그 전능하신 손길을 사모하십시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부응하는 삶을 하게 하신 는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밖에 할 수 하나님께서 아버지처럼 온전 하라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처럼 자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그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말했대요. 얍복 강가에서 밤새도록 야곱이 천사와 더불어 씨름을 했습니다. 밤새워가면서 천사와 붙어 가지고 야곱이 넘어지지 아니하고 싸울 수 있다는 것은 야곱의 힘이었다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한 팔이 야곱을 넘어뜨리려고 하고 하나님의 한 팔이 야곱을 붙들어 주었기 때문에 밤새도록 싸워서 이겼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전능하심처럼 너희도 아버지의 온전하심처럼 너희도 온 전하라 자비하심처럼 너희도 자비하라. 누가 사람이 그렇게 하냐고 비웃고 앉아 있지 말고 여러분으로 하여금 그 삶을 살기에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만이 우리를 도울 수 있는 분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떤 상황 속에있더라도 문제가 없습니다. 질병입니까?  사업입니까? 그 어떤 인간관계의 문제입니까? 어떤 상황 속에 여러분이 처해있어도 그것을 새롭게 하시고 온전케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신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즐겨하십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현재형은 불변하는 진리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반면에 교만한자는 멀리 하십니다. 물리치십니다. 아니 대적하십니다. 누가 교만한자 입니까? 우리는 이런 문제가 나오면 교만한 사람이 누구더라, 구역도 들러보고 전도회도 들러보면서 누가 거기에 해당되는 얼굴이 있지? 찾는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뒤쪽에 빼놓고,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기라는 요구를  귀담아 듣지 않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이 아닙니까? 아니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어~휴 별나게도 예수를 다 믿네.” 그런 사람이 교만한 사람이라니까요.

새벽에 나와서 부르짖고 밤에 나와서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별나게도 예수를 믿네 대강 하면 안되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이 라니까요. 기도는 여러분도 드리지요 왜 안 드리겠어요. 밥 먹을 때도 하고 예배시간에도 ”아멘”도하고 혼자서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기도하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기도문을 따라서 하는 것하고 정말로 그 기도를 내 가슴에 담아서 하는 것하고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그냥 서슴없이 거침없이 외우고 있습니다. 거의 한번도 자기중심의 기도가 되지 않은 그런 사람들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오늘 제게 일용할 양식을 주셔야 만이 제가 살수 있습니다. 그런 다급한 심정을 가지고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 ‘배부르구나, 교만하구나.’ 그렇게 이야기하십니다. 교만한 사람이라고 하니까 얼굴에 특별한 글자를 써 놓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교만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에다가 자기를 두는 것입니다. 교만은 근본적으로 마음이 문제이거든요. 물론 교만한 마음을 먹고 있으면 얼굴에도 표시가 납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교만은 마음 자세의 문제이거든요. 자신이 얼마나 핍절한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안돼는 삶을 살고 있는지 자기는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교회도 나오고 기도도 하고 다 할 것 다하지만 여유를 갖고 있습니다.

한 끼 한 끼 일용할 양식이 전능하신 아버지의 손으로부터 오지 않으면 내가 살수 없습니다. 하는 자세로 기도하면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는 한 구절도 얼마나 은혜가 되는 기도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그처럼 돕지 않아도 상당한 기간 버틸 수 있다고 여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교만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움도 그렇게 절실하게 바라지 않지만 사람들이 돕겠다고 나서도 코웃음 칩니다. “야 네 앞이나 가려 나는 혼자서도 할 수 있어 사람을 어떻게 보고 이런 것을 가져오는 거야.” 그럽니다. 난 끝까지 도움을 받지 않아도 살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미안하지만 지금까지 산 것도 다 하나님의 도움이었고 사람들의 도움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여러분의 발로 걸어서 나올 수 있는 성인이 된 것은 여러분의 어머니가 가히 없는  희생적인 사랑을 베풀었기 때문에 그래요. 아이들이 왜 그렇게 엄마를 좋아하는가 하고 생각해 보면 비결은 단순하더라고요. 엄마만큼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요즘 손녀들이 우리 집에 와 있습니다만, 조그만 녀석, 둘째 녀석이 날 알겠다고 가끔 덥석 덥석 달려듭니다. 안기겠다고, 그래서 안아 주기는 하지만 그건 엄마가 없을 때 이야기입니다. 내가 안고 다니면서 방안에 있는 사진을 엄마 아빠가 자기를 안고 있는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처음에는 혼자서는 말도 안돼는,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한참 하면서 자긴 줄 알아보는가 봐요. 그러더니 갑자기 눈이 엄마 사진에 미쳤던 모양이예요. 그 다음부터는 칭얼거리면서 갑자기 슬퍼져서 엄마를 찾는데 대책이 없어요. 왜 아이들은 그렇게 엄마를 좋아하지요? 엄마가 그렇게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했기 때문에 그래서 어머니란 단어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단어 가운데 가장 소중한 단어 중에 하나입니다. 어머니의 사랑만 받았겠습니까? 아버지의 훈계도 있었고 이웃의 사랑도 다 받고 살았습니다.

여러분 옛날처럼 모시 메고 삼베 해서 길쌈하지 않고 좋은 옷 입고 산 것은 누군가 공장에서 일 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농사를 하나도 짓지 않고 손발에 흙 묻히지 않고 밥 먹고사는 것도 누군가가 농사를 짓는다고 고생했기 때문이에요. 남의 도움 없이 나는 지금까지 살았다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교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도움을 베푸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간(人間)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람인(人) 과 사이간(間) 도움을 베푸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런 인생이 나는 도움이 필요 없어 라고 말하는 것은 그야 말로 가장 교만한 교만의 극치입니다. 자신의 죄를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그런 교만한 자를 물리친다고.” 말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본문에 보니까 “교만한 자를 대적하신다.” 물리친다는 것이 아니라 교만한자는 하나님이 원수처럼 찾아가서 망하게 하겠다는 것이 대적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어떤 신앙생활을 해야 될까요?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냥 급한 것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습관적으로 주일날 오고, 비 오는 주일날까지 나와 가지고 잘못 생각하면은 ‘나야말로 괜찮은 신앙인이야’ 착각하게 된다고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돼요.

하나님 나를 보세요. 처음엔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실 때는 정말 콧물, 눈물 흘리면서 그 은혜에 감격해 놓고 요새 와서는 제가 말씀 듣는 태도가 이게 뭡니까? 한번 돌아볼 사람들이 없잖아 있지요. 우리가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깔깔거리며 웃을 만큼 여유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심각하게 부딪쳐야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어젯밤에 그 가수 에 대해서  존경을 가지고 있어요. 분위기 파악을 한다는 거여요. 여러분, 만담 하는 자리와  설교 듣는 자리는 다른 자리예요.

교만한 마음을 품으면 하나님이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우리의 대적자가 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배당이 전혀 없는 사람들은 시기와 다툼으로 주어진 삶을  살다가 장차 영원한 파멸로 들어가는 겁니다. 여기서 그냥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쉽게 쉽게 하면서 히히덕 거리 다가 한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여러분이 저보고 뭐라고 그랬겠어요. “왜 목사님 그때 심각하게 나한테 일러주지 않아서 내가 이렇게 영원한 파멸로 빠져들게 합니까?” 하고 나한테 말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심각하게 이야기하려고 하면 저도 긴장이 많이 됩니다. 다 잡을 것인지 오늘 손을 털 것인지 그런 위험요소를 저도 부담을 안고 설교를 해야 되요.

하나님의 은혜의 배당을 오늘 받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은 시기와 다툼으로 소일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 옆에 가면 평안히 사라져요. 같이 지내면 불편해져요. 그런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영원한 심판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당부하겠습니다. 겸손하십시오. 여러분이 사람인 것을 인정하십시오. 20년 30년 내어다보고 세운 계획들이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하루 한순간에 무너져 진다는 것을 아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여기 하나님의 약속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더욱 큰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의 죄악 된 욕망을 능히 제어할 수 있는 크신 은혜를 예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 불가능해 보이는 그 요구를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더욱 큰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누구에게, 겸손한 자에게 간절히 그 은혜를 부르짖으면서 사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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