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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 (창 3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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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기 목사

1884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가 한국에 와서 고종황제로부터 교육과 의료 선교의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885년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가 함께 들어와서 본격적인 선교가 시작되었는데, 감리교는 주로 교육과 의료사업을 하였습니다. 감리교는 선교초기부터 교육에 많은 관심을 갖고 노력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주일학교운동입니다.

1935년에 제시되었던 진흥운동의 표어는 “주일학교는 교회의 기초이다. 교회마다 주일학교를 세우자. 교인마다 학생이 되자!”였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전에는 성경공부를 하기 위해서 사경회를 열어 일주일에서 열흘까지도 집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암송대회, 성경퀴즈대회, 성경통독대회 등 성경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교인마다 학생이 되자”는 말이 무색해졌습니다.

태어나서 얼마 안 되어 누어있는 아이의 얼굴 위에다 모빌을 걸어둡니다. 바람 따라 빙빙 도는 것을 보고 아이가 뭔가 생각하라는 겁니다. ‘엄마’라는 말을 가까스로 하기 시작하면 발 빠른 부모들은 벽에다 한글과 영어가 있는 그림이나 도표를 붙여 줍니다. 그리고 가르칩니다. 4살만 넘어가면 ‘무엇을 가르칠까?’ ‘어디로 보내야 하나?’를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심지어 대하까지 계속됩니다.
물론 그리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기회만 있으면 가르쳐야 합니다.
“나는 것만큼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르면 봐도 모르는 겁니다. ‘기상도’를 들여다보아도 모르면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기상도를 알면 비가 올 건지 바람이 불건지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기회만 있으면 가르쳐야 합니다. 아이가 건강하고 감당할 수만 있으면 몇 개씩이라도 가르쳐야 합니다.

바울보다 베드로가 진짜 사도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름을 직접 받았고, 삼년이나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직접 말씀을 듣고, 직접 예수님의 활동과 역사하심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도 보았습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였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e시 만나서 “내 양을 먹이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들었습니다. 오순절 성령임재를 체험하고, 나가서 말씀을 외칠 때 수천 명이 예수님을 믿는 사건도 있었습니다.

베드로에 비해 바울은 어떻습니까?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가고, 죽이고 하는 일에 앞장선 사람입니다.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가는 도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믿고 난 후의 행적을 보면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말하는 베드로와 버금갑니다.
왜 그랬습니까? 어떻게 그가 쓴 서신이 신약성경의 많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까?
바울이 베드로보다 나은 것은, 그가 당시 언어와 문화를 이끌어가는 헬라어를 사용할 줄 알았다는 겁니다. 그 지역 어디를 가든 말이 통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르쳐야 합니다. 학원도 몇 개든, 다닐 수만 있으면 다니게 해야 합니다.
허지만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로마서 1장 22절에,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사람p 이 되었습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거기 23절에, “그들은 썩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을 썩어질 사람이나 새나 네 발 달린 짐승이나 기어 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32절엔, “그들은, 이와 같이 일을 하는 자들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공정한 법도를 알면서도, 자기들만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닐, 이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을 두둔하기까지 합니다.”
사람의 지혜로 세상이 잘 되는 것 아닙니다. 사람의 지혜로 세상이 행복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은 처음 만들 때부터 그 속에 하나님의 숨, 하나님의 영이 들어감으로 생령 곧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은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죽은 자나 동물과 다를 바가 없는 겁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인간의 생각, 인간의 욕심을 위해 삽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없는 사람은 무엇이 옳은 건지 무엇이 선한지를 모릅니다. 그냥 자기에게 유익이 되고, 자기만 편하면 그게 곧 의요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손에 잡힌 모든 것은 자기만을 위해 사용합니다. 그러다보니 다른 사람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많이 배웠다는 것이, 많이 안다는 것이 의롭지 못하고 선하지 못하면 그것은 많은 사람들 울리거나 아프게 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기독교교육, 교회교육, 곧 하나님을 그 마음에 그 밖에 중심으로 자리 잡게 하는 일은 그 어느 일보다 우선입니다. 많이 배웠든 적게 배웠든 우선 되어져야하는 것이 신앙교육입니다.
아이에게 칼을 쥐어 주기 전에 먼저 무엇이 의로운지 무엇이 선한 것인지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 칼을 어떻게 쓰는 것이 제대로 쓰는 건지 알려 주어야 합니다. 그것 없이 그냥 손에 쥐어 주면, 그래서 자기의 유익 자기의 욕심에 따라 쓰게 되면 그 칼을 엄청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겁니다.

인생을 살기 전 무엇이 의로운지 무엇이 선한 것인지 알려주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을 가르쳐야 합니다.
사실 누군가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나오고, 사회적 명성도 크게 얻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잡혀 있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어리석은 부자. 열심히 일했습니다. 많은 수확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데려가셨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일하고, 그가 거두어들인 수확은 누구의 것이 됩니까?

열심히 공부 했습니다. 그래서 좋은 위치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그 하는 일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지 않는다면 그냥 자기가 편하고, 부요하게 먹고 살기 위함이라면, 그것이 이웃에게 사회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다.
우리 그런 사람 많이 보잖아요. 정치, 경제, 사회 등등에서 그런 사람들 많이 보잖아요. 배웠다고, 권력을 가졌다고 나서서 뭐라 하긴 하는데 결국은 나라와 백성이 아니라 자기 욕심이었던 것 보잖아요.
새벽에 열왕기상하 읽습니다. 왕들입니다. 그러나 왕이 되면 뭐 합니까?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왕도 백성도 고통당하는걸요.

극단적인 예를 드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을 떠난 재벌, 박사, 정치가 그런 사람들 보다는 비록 가난하지만, 못 배웠지만, 사회적 명예도 지위도 없지만, 그래도 당신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을 더 좋아 하십니다. 말하자면 재벌이든, 박사든, 유명한 정치가든, 가난하든, 못 배웠든, 사회적 지위가 있든 없든,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사는 거고 믿지 않으면 죽는 겁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손에 잡히면 큰일을 하는 겁니다.
바로 여기에서 저는 교회교육의 목적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삶을 살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서 하나님의 자녀요, 구원 받은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도록 가르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선 함께 하시는 사람.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고, 그러한 사람으로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 교회교육입니다. 바울은 “죽어도 주를 위해 살아도 주를 위해 산다.”고 하셨습니다. 바로 우리의 자녀들이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어떠한 경우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삶을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 교회교육인 겁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요셉.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이루어지는 일도 없고, 설사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한 순간의 기쁨으로 끝나버리고 맙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요셉 그는 어떠한 사람이었는가?

1) 우선 그는 꿈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형들의 곡식 단들이 자기의 단에 둘러서서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또 한번은 해와 달에 열한별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 요셉의 꿈을 단순히 요셉의 무의식이 드러난 자연적인 꿈이라고 가볍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요셉이 장래에 대한 신념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요셉의 꿈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누구나 잠잘 때마다 꾸는 그런 자연적인 꿈도 아니고, 미래에 때한 신념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신 그의 미래에 대한 약속입니다.
자연적인 꿈, 미래에 대한 신념은 내가 스스로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수시로 변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약속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난미의 뜻이 바뀌지 않는 한 변할 수 없습니다. 그 꿈은 하나님께서 보증하십니다. 바로 요셉의 꿈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인 것입니다.
교회교육은 우선 아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간직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이일을 약속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살아가도록 하는 겁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는 의식 속에 살아가도록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도 않습니다. 그 약속을 바라며 나갑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죽을 뻔 하면서도 감옥에 억울하게 갇혔을 때도 그는 굽히지 않았던 원인은 바로 이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 이 하나님의 약속이 없습니다. 우왕좌왕 합니다. 대학입시 제도가 또 바뀐다고 합니다. 학생들이 우왕좌왕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사람은 우왕좌왕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은 입시제도 보다 훨씬 뛰어나신 보이기 때문입니다.
내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약속을 일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가장 시급한 것은 이 하나님의 약속을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다음에 난 무엇이 될 거야”가 아니라, “하나님은 내게 이일을 약속하셨다”는 꿈이 있어야 합니다.

2) 요셉은 어떤 경우에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죽이라고 한 형들, 멀리 애굽까지 팔려가는 자신의 비참함, 아버지 집에서 어느 형제보다도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일도 하지 않고 지냈는데(창 37:3 채색 옷)이제는 멀리 떨어져 종살이 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도, 형제도, 세상도, 자신의 팔자도 다 원망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원망할 수 있습니다.
팔려가서 그래도 처음에는 좀 괜찮았습니다 시위대장 보디발의 가정 총무가 되어 그 집 모든 것을 주관했으니, ‘아하 이게 하나님의 뜻이구나.’하고 마음을 놓을 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엉뚱하게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잘못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정도 되면 불평도 원망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원망도 불평도 없었습니다.

훗날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아버지나 특히 형제들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요셉에게 행한 일 때문에 요셉이 복수할까 두려워하는 형제들에게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50:19-20) 하면서 그 형제들과 형제들의 자녀들을 기르겠다고 약속합니다. 원망은커녕 오히려 그 형제들 자기에게 악을 행한 형제들을 축복합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면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지도하라”(마 5:44)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살았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게 선을 이루느니라”(로마서8:28)는 바울의 고백적인 삶이 요셉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래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그렇다면 누굴 원망하겠는가? 그저 주어진 그 순간순간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지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은 그 무엇을 그 어떤 사람을 원망할 겨를이 없다 원망할 수박에 없는 사건이지만 그 가운데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할 뿐입니다. 그래서 그 일 까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합니다.
그것이 요셉으로 하여금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힘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그로 인해 감옥에 들어갔어도 그 고통은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이 된 것입니다. 만약 원망 했더라면 그는 보디발의 아내 유혹의 넘어갔을 것이다.

3) 그는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형통이라는 단어는 “모든 일이 막힘없이 잘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셉은 하는 일마다 형통했습니다. 막힘없이 모든 일이 잘되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도 형통한자가 되었는데 그가 하는 일은 뭐든 잘되었습니다. 심지어 그 주인 보디발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을 보았고,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을 정도였습니다.
하나님께 함께 하시는 사람 그는 형통한 자가 됩니다.
종살이 했지만, 감옥에 갇혔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그 길을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형통한 사람이 될까?
여호수아 1장 7절에,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시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절, “이 율법 책을 너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다 네가 형통하리라.”
9절,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 그래서 형통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교회교육은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됩니다. 다른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교사는 물론 부모 역시 하나님의 말씀 전달자라는 사실을 잊는 때가 많은데, 내 말이나 내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내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은 이 아이들에게 전하지지 않는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형통한 자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 하나는 일하는 자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보디발이 본 요셉. 3절,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면 보디발이 이런 요셉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었을까요?
분명히 요셉은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래서 그 일할 때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형통케 하심이 나타난 것입니다.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는 사업가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입니다.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께서 함께 믿는 학생은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교회의 일꾼은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는 일꾼인 것입니다.

또 하나, 형통한자는 자기에게서 만족되지 않는다.
요셉은 비록 팔려간, 그래서 한 가정의 종이었고, 감옥에 들어간 지금 말하면 전과자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형통케 하사 그로 하여금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크게 출세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통은 요셉 개인의 출세에 그 목적 있었던 것 아닙니다. 오히려 요셉을 형통케 하사 하나님의 복이 그 이웃에게 나누어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형통케 하시는 것은 당신의 백성들이 일마다 형통케 되어 주변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변화시켜 나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보디발의 집에 있는 요셉을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심으로 보디발의 집이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보디발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까지 하나님의 복이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형통케 하사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그 자신뿐 아니라 애굽 그리고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주변의 전 지역에 임한 7년 흉년에서 그 모든 사람들을 건져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은 “끌려 다니는 자가 아니라 끌고 가는 사람입니다.” 주변의 온도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온도계 같은 사람이 아니라, 주변의 온도를 변화시키는 난방기와 냉방기 같은 사람이 곧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 교육의 목적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부모들의 사명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으로 키우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참으로 심각한 문제는 어른들은 교회교육과 상관이 없다고들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어른이기 때문에 다 안다는 뜻이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다 알고 있습니까?
“선교하는 교회” 교회는 선교의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 선교는 두 가지를 안고 있습니다.
하나는 전도입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교육입니다. 이것은 믿는 자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가르쳐서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아는 만큼 봅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그냥 “믿습니다.”로 되는 것 아닙니다. 신앙도 아는 만큼 경험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셨습니다.
복음서의 예수님 말씀 대부분은 안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제자들과 이미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무르면서 아는 척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아가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학교 공부 열심히 하도록 해야 합니다.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과 조그마한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의 차이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풍부한 물질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과 작은 물질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도 일의 나타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지식도 있어야 하고 물질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작은 지식도 크게 쓰임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작은 물질도 크게 쓰임이 됩니다.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는 지극히 작은 것이지만 예수께서 함께 하실 때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 남기는 역사가 나타냈습니다.
늘 믿음으로 사십시오.
늘 말씀대로 사십시오.
늘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형통케 하심이 여러분의 삶에 늘 경험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여러분 주위의 모든 사람에게 기쁨이요 복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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