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님의 제자들 시리즈 설교 ③> 열정의 사도 야고보 (행 12:1-4)

  • 잡초 잡초
  • 1555
  • 0

첨부 1


- 설교 : 이효준 목사

예수님의 열정과 고난

중고등학교 때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면서 ‘passion’(스펠링 불러줌)이라는 단어를 외운 적이 있습니다. 이 ‘passion’이라는 낱말은 우리말로 ‘열정, 정열’이라고 번역됩니다. 그런데 얼마 전 아주 화제가 된 영화가 한 편 나왔지요. 비로 예수님의 수난을 그린 ‘the Passion of the Christ’라는 영화입니다. 이미 보신 분들도 많이 있겠지만 언젠가 이 영화를 온 교우가 함께 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수난 장면이 너무도 적나라하고 잔인해서 실제로 미국에서 이 영화를 보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도 있기 때문에 심장이 약한 분들은 볼 때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 사람들이 ‘passion of the Christ’라고 하니까 ‘그리스도의 열정’이라고 번역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 ‘passion’은 ‘열정, 정열’이라는 뜻이 아니라 반드시 그 앞에 정관사 ‘the’를 쓰고 첫 글자를 대문자로 써서 ‘the Passion’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을 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 낱말이 고난과 열정이라는 두 가지 뜻을 가지게 되었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고난과 열정은 같은 뜻이구나!” 즉 열정이 없이는 고난을 당할 수도 없고 더욱이 죽음을 당할 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 예수님이야말로 가장 큰 열정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실 때, 즉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어 오실 때 그 분의 마음속에는 크나큰 열정이 들어 있었습니다. 다름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의 죄를 사하고 우리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구원의 열정이었습니다. 그분이 공생애를 사실 때 그 3년간은 그야말로 열정의 기간이었습니다. 비록 3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남들이 삼십 년, 아니 삼백 년, 삼천 년이 되어도 이룰 수 없는 엄청난 일들을 이루셨습니다. 그분은 마치 3년이라는 짧은 시간이 너무 아까운 듯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 식사도 제대로 못해가면서 공생애의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일 듯 쏟아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쫒아냈습니다. 폭풍이 몰아치듯 수많은 기적과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그리고는 십자가에 못 박혀 그 마지막 열정을 활활 태우신 후 극적으로 생애를 마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 중에서 가장 강하게 열정을 불태우신 분인 것입니다. 분명히 이 예수님의 열정이 그 분을 당시 권력자들과 충돌하게 만드셨고 고난을 당하다가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렇게 열정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반대세력과 충돌을 일으키게 마련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이 ‘passion’이라는 낱말을 열정이라고도 번역하고 고난이라고도 번역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열정의 사도 야고보

그러면 오늘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세 번째로 야고보에 대해 알아보기로 할까요? 앞서 예수님의 열정에 대해 말씀드린 이유는 바로 이 야고보 사도가 예수님의 제자 중에 가장 많은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고 예수님의 열정적인 삶을 가장 닮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제목도 ‘열정의 사도 야고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신약성경을 살펴볼 때 이 야고보 사도에 대한 이야기는 그리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물론 야고보는 동생인 요한, 그리고 수제자 베드로와 더불어 예수님의 사랑과 신뢰를 가장 많이 받은 A급제자의 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동생인 요한에 비해, 특히 수제자 베드로에 비해 이 야고보에 대한 말씀은 성경에 그리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몇 군데 나올 뿐인데 그나마 다른 제자들이나 특히 동생 요한과 관련되어 나올 뿐이지 야고보 단독으로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그래도 소위 A급제자라는 사람이 왜 성경에 그리 많이 등장하지 않는 것이냐 하는 말입니다. 그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이 야고보가 제자들 중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빨리 죽어서 그리 많은 일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물론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는 스데반 집사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7장에 스데반의 순교 이야기가 나오고 곧 이어 12장 오늘 본문에 바로 이 야고보 사도의 순교 이야기가 나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두 번째 순교자요, 소위 사도라고 부르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는 최초의 순교자인 것입니다. 제가 설교 첫머리에 말씀 드렸지요? 예수님이 뜨거운 열정의 사람이었기에 고난도 당하고 십자가 죽음도 당하신 것이라고요. 스데반도 마찬가지요 야고보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야고보는 그의 짧은 생애를 돌아볼 때 그야말로 정열이 불타오르는 열정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뜨거운 열정이 없으면 결코 예수님을 위해 고난당할 수도 없고, 순교도 당할 수 없는 법입니다. 야고보가 정말 뜨거운 사람이었기에, 그의 열정이 그로 하여금 사도 중 최초의 순교자가 되도록 만든 것입니다.




열정의 제자 야고보

‘야고보’라는 이름은 헬라어 ‘이아코보스’라는 이름을 우리말로 쓴 것입니다. 이를 히브리어로 고치면 ‘야곱’이 됩니다. 구약의 ‘여호수아’와 신약의 ‘예수’는 같은 이름인데 히브리어로 ‘여호수아’가 헬라어로는 ‘예수’가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야곱과 야고보는 같은 이름인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구약에 나오는 야곱도 정말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한번 목표를 정하면 반드시 이루고야 마는 집념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장자권을 따내기 위해 그가 어떤 일들을 했는지 우리가 잘 알지 않습니까? 아마 야곱 혹은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다 열정을 대단한 사람들이었나 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 보면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몇 사람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만도 오늘 살펴보고 있는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또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두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나중에 초대교회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가 되었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였던 유다(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와는 다른)의 아버지도 야고보였습니다.

물론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야고보는 오늘 살펴보고 있는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입니다. 이 야고보 사도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신약성경에 나온 야고보 사도에 관한 내용들을 간추려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요한의 형으로서 본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일을 하는 어부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유독 어부였던 사람들이 많은데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특이하게 그냥 고기 잡는 평범한 어부가 아니라 비교적 부유한 어업가 집안의 아들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20에 예수님이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부르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때 야고보는 아버지인 세베대와 더불어 삯군들과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형제는 자기 소유의 배와 또 그 배에서 일하는 삯군을 둘 정도로 부유한 집안 출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재산이 별로 없는 사람이 포기하고 예수님 따라가기가 더 쉽겠습니까? 재산이 많은 사람이 포기하고 예수님 따라가기가 더 쉽겠습니까? 당연히 재산 없는 사람이 따라가기가 더 쉽지요. 가진 것 별로 없는 사람이야 포기할 것도 별로 없으니까 까짓것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만 부유한 사람은 그 재산에 대한 미련 때문에 그 재산 다 포기하고 예수님 따라가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9:22에 보면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그 장면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 19:22). 그렇습니다. 재물이 많으면 포기하기가 어렵습니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 이런 까닭입니다. 오늘 이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다른 제자들과 달리 아버지도 버리고 많은 재산도 포기하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분명 그 많은 아버지의 재산은 장차 자신들이 유산으로 물려받을 것인데도 말입니다. 저 같으면 예수님이 “나를 따라오너라.” 하시면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주님,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안 따라가겠다는 것이 아니고 이제 몇 년 만 지나면 제가 이 많은 재산 물려받을 텐데 그 때 따라가면 안 될까요?” 하지만 야고보와 요한은 두말 않고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그 많은 것 다 포기하고 말입니다. 이런 태도는 웬만한 열정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시작부터 이 야고보는 마음속에 뜨거운 열정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이 있어서 이것저것 따지거나 계산해 보지 않고 주님을 따른 것입니다.




불같은 열정

그런데 지난주 요한에 대해 말씀드릴 때도 나온 이야기지만 이 야고보의 성격이 얼마나 불같은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지 않습니까? 누가복음 9장에서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예수님과 일행을 영접하지 않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보고 분노하며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눅 9:54) 하고 외쳐서 덕분에 우레의 아들이라는 뜻의 ‘보아너게’라는 별명을 형제가 동시에 얻게 된 것 아닙니까?

이 사건 하나만 보아도 우리는 야고보가 얼마나 급하고 불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생인 요한과는 달리 야고보는 오래 못 삽니다. 요한은 수를 다하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지만 야고보는 최초로 순교한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 큰 차이는 분명 이 두 사람의 성격이 완전히 다름을 말해 줍니다. 지난주 살펴본 것처럼 요한은 행동하는 것을 보면 우울질에 아주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대개 오래 삽니다. 그런데 야고보처럼 열정이 넘치고 불같은 사람, 다혈질의 사람은 대개 오래 못 삽니다. 남들에게 죽임을 당하든지 아니면 자신이 열통 터져서 오래 못 삽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성질 급해서 빨리 죽은 것이 아니고 전혀 타협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해서 헤롯 임금에게 본보기로, 1번 타자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성격이 참 다르지요?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인데 어쩌면 이렇게 성격이 다를 수 있을까요?

저도 아들 형제를 키우고 있습니다만 어쩌면 두 아이가 그렇게 성격이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큰아이는 소심하고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합니다. 그런데 둘째는 정말 활발합니다. 좋게 말하면 활발한 것이고 한마디로 말썽꾸러기 장난꾸러기지요. 초등부 교사들은 다 아시겠지만 천방지축 아닙니까? 그래서 저도 아이들 키우면서 어떻게 저렇게 한배에서 나온 형제가 성격이 완전히 다를까 신기합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저희 집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형제가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집도 다 그렇지요? 대개 맏이는 좀 소심하고 둘째는 좀 자유분방합니다. 성경에도 보면 야곱 에서 형제나 야고보 요한 형제처럼 정말 형제가 다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렇게 성격이 다른 형 야고보와 동생 요한을 주님은 그 성격에 맞게 적절하게 잘 사용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불같은 열정을 지닌 야고보는 제자들 중 최초의 순교자로, 감성적이고 소극적인 요한은 마지막까지 살아 성격을 기록한 사람으로 쓰신 것이지요.

왜 형제들도 보면 반드시 어떤 성격이 좋다 나쁘다 할 수 없고 다 나름대로 장점과 귀염성이 있지 않습니까? 주님이 이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지극히 사랑하여 특별대우 해주신 것은 아마 야고보는 야고보대로 그 정열이 귀해서, 요한은 요한대로 그 감성적 성품이 마음에 들어서 사랑하신 것 같습니다.




야고보다운 최후

이제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건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했다고 나옵니다. 여기 나오는 헤롯은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두 살 이하 유아들을 다 죽인 그 헤롯이 아닙니다. 그 헤롯은 ‘대(大) 헤롯’이라고 부르는 할아버지 헤롯 대왕이고 여기 나오는 헤롯은 그 손자인 헤롯 아그립바 1세(Agrippa I, A.D.37~44)로 헤롯 대왕 아들 때 여러 개로 분열된 왕국을 다시금 통일한 아주 유능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 유대교정책을 펴고 특히 당시 종교적 실세였던 바리새인들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적극적으로 핍박한 것입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이제 교회를 본격적으로 핍박하기 위해 교회 지도자들 몇을 확실하게 손봐주기고 결정하고 먼저 야고보를 잡아 죽입니다. 2절에 보면 야고보를 ‘칼로 죽였다’고 나와 있는데 이는 칼을 가지고 목을 쳐 죽이는 참수형을 뜻합니다. 야고보는 교회에 대한 박해의 와중에 참으로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해 보아야 합니다. 왜 하필이면 야고보인가? 왜 수제자 베드로도 있고 요한도 있고 다른 제자도 많은데 하필 야고보를 본보기로 삼아 제일 먼저 죽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본문에는 여기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추측해 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아마도 헤롯은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야고보가 제일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야고보도 A급제자였으니 어느 정도 사실입니다. 또 야고보 성격에 제일 열심히 전도도 하고 제일 뜨겁게 활동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눈에도 제일 많이 띄어서 교회의 몸통이라고 지목되었을 수도 있지요. 그리고 야고보가 이처럼 갑작스럽게 순교를 당한 것은 그의 불같은 성격, 타협하지 않는 신앙도 한 몫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설마 아무리 포악한 헤롯이라도 회유 한 번 안 해보고 무조건 야고보를 죽였겠습니까? 아마 야고보에게도 기회(?)를 주고 회유를 했을 것입니다. 목에다 칼을 들이대고 “살고 싶으면 예수를 부인해라”며 협박을 했을 수도 있지요. 만약 이런 일이 있었다면 우리는 야고보의 평소 성격 상 결코 타협하지 않았을 것임을 쉽게 예측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의 불같은 성격과 뜨거운 열정은 결국 그를 제자 중 최초의 순교자로 만든 것이지요.




죽어도 은혜요 살아도 은혜

그런데 야고보가 최초로 순교한 제자가 된 것에는 이보다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전혀 다른 두 사람의 운명을 보게 됩니다. 같은 예수님의 제자요 동일한 A급제자였던 야고보와 베드로 두 사람 중에 야고보는 잔인하게, 그리고 참으로 허무하게 참수형을 당해 순교합니다. 베드로도 동일한 죽음을 당할 운명에 처했다가 하나님이 기적같이 구해주심으로 생명을 건지게 됩니다. 여기서 잘못 생각하면 야고보가 죽은 것은 재앙이요, 베드로가 산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아닙니다. 야고보가 죽은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베드로가 산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비록 두 사람의 운명은 완전히 상반된 모습이지만 이 상반된 운명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상반된 방법이었습니다. 야고보는 순교 당함으로, 죽음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베드로는 살아남아서, 감옥으로부터 구원 받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아직 살아서 더 할 일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롬 14:8) 사람이요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을 찾아가 하나는 주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했는데(막 10:35) 이 때 우리 주님은 이 형제에게 이렇게 물어보십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10:38) 이 때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게 될 것이다.” 여기서 ‘나의 마시는 잔과 나의 받는 세례’란 바로 주님이 당하실 고난, 즉 ‘the Passion’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은 아마 이게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고 할 수 있다고 대답한 모양입니다. 결국 이 대답에서 우리는 야고보의 순교가 이미 예견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야고보는 자신의 대답처럼 순교의 길로 갔습니다. 하지만 이 죽음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가 죽음으로 교회는 힘을 얻고,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그의 이 불같은 열정은 바로 예수님의 열정을 닮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passion’ 즉 주님의 열정을 닮아 결국 ‘the Passion’ 즉 고난과 죽음을 따라 간 위대한 제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야고보의 이야기가 성경에 그리 많이 나오지 않을지라도, 남들보다 제일 일찍 역사에서 사라져 갔다 하더라도 굵고 짧은 인생을 산 열정의 사도, 예수님을 가장 닮은 사도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네 안에 뜨거움이 있느냐?

이제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보면서 늘 이런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오늘 사도 야고보의 생애와 죽음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또한 던져보아야 합니다. “나에게는 이런 열정이 있는가? 있다 해도 그 열정을 엉뚱한 곳에 쓰고 있지는 않은가?”

교회를 수십 년 다니고 아무리 예수님을 오래 믿어도 우리 신앙이 미지근하다면 무슨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5)

우리가 고난을 받고 순교를 당하든지, 아니면 오래오래 살면서 많은 일들을 하든지 그것은 우리의 성격과 특성 나름이기 때문에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야고보 같은 뜨거운 열정이 우리 안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열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뜨거움, 이 열정이 없으면 우리는 결코 주님의 제자로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을 향한 passion, 뜨거운 열정이 저와 여러분 마음속에 활활 불타오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