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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다니에서 생긴 일 (요 11:1~2, 17~23, 4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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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곽주환 목사 

우리 교회가 2005년 1월 1일부터 베다니교회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름을 바꾸게 된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과거에는 교회의 이름을 대개 지역을 중심으로 불렀다. 당시에는 지역 중심의 교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지역을 중심으로 한 교회라기 보다는 지역을 넘어서 찾아가는 교회로 바뀌게 되었다. 선교 지역이 더욱 넓어졌기 때문이다. 요즈음에는 교통도 편리해 졌기 때문에 지역을 넘어선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시장 안에 있을 때하고 여러 가지의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교회의 이름을 바꾸는 이유 중에 하나는 구로중앙교회의 같은 이름이 많다. 혼돈이 된다. 구로동에 이도 있고, 궁동에도 있다. 중앙이라는 이름도 많다. 같은 이름도 많고, 비슷한 이름도 많기 때문에 새로운 이름을 갖을 필요가 있다.
일반 기업체에서도 새로운 이름이 가져다 주는 영향이 무척 크다고 생각한다. 브랜드네이밍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고 한다. 어떤 이름을 갖느냐에 따라서 매출이 달라진다고 한다. 교회의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지역을 초월한 이름이 되어야 다른 지역에 있는 분들도 거리낌이 교회에 접근하기가 쉬워진다.
이렇게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됨으로서 우리 모두가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이러한 공감대가 형성이 된 후에 몇 가지 행정적인 과정을 걸친 후에 지난 주일 구역회 때에 교회의 이름을 베다니교회로 정했다.
그러면, 많은 이름 중에 왜 베다니인가? 어떤 이름이든지 처음에 부를 때에는 생소하다. 그러나 반복해서 부르면 그 이름이 주는 힘이 있다. 베다니에서 생긴 일이 우리 교회에서 나타나기를 바란다. 베다니에서 생긴 일이 모든 성도들의 가정에 일어나기를 바란다.
베다니에서 생긴 일을 생각해 보자.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3킬로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이다. 그러나 작지만 큰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베다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첫째,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다. 우리 교회의 사명은 말씀으로 양육하고, 사랑으로 위로하여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생명을 살리는 교회의 사명을 지니고 있다. 죽은 나사로가 베다니에서 살아났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 곳이다. 그러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베다니에서 생긴 일이 일어나려면 우리가 모두 죽어야겠네요. 우리가 모두 불치의 병에 걸려 죽음의 위기 앞에 있어야겠네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모두가 죄로 인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난 것 처럼, 이곳에도 베다니에서 일어난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바란다.
예수님께서 베다니에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난미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예수를 믿을 때에 죽은 자가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가 나타난다. 우리 교회에서 죽은 자가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바란다.

둘째로, 베다니에서 예수님이 슬픔을 당한 자를 위로하셨다. 죽은 나사로의 가정에서 그들과 함께 주님이 눈물을 흘리시며 그들을 위로하셨다. 베다니에는 주님의 위로하심이 있던 곳이다. 우리 교회는 “네 백성을 위로하라”는 전통이 있는 교회이다. 이곳을 찾는 자들에게 주님의 위로하심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칼빈이 말하기를 어머니로서의 교회가 없이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들리려면 어머니같은 교회의 위로가 있어야 그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도 열린다.
인도의 간디가 남긴 유명한 일화 한토막. 어느날 그는 거리에서 울고 있는 한 노파를 만났다.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그만 우세요 하며 수건을 꺼내 노파의 눈물을 씻어 주었다. 간디는 한숨을 쉬며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눈물을 씻어줄 사람이 우리나라에는 너무나 많아 내 손수건 만으로는 모자랍니다. 이 단순한 말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 가난하고 영국에 압제당한 인도 국민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우리 교회는 슬픔에 잠긴자를 위로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주님께서 행하신 베다니의 위로가 이곳에 가득하게 될 줄로 믿는다.

셋째로, 베다니에서 마르다는 소망을 얻었다.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었지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위로함을 얻는다. 마르다가 고백하기를, “주님이 여기에 계셨으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텐데.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로 믿나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라고 고백한다. 마르다의 마음 속에 소망이 생겼다. 죽은 자가 살아나고, 주님께서 위로하여 주시니 우리의 마음에 소망이 생기지 않겠는가? 우리를 찾는 자들마다 주님께서 주시는 소망으로 채워지기를 바란다.
캄캄한 독 속에서 쥐들은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쥐를 캄캄한 독 속에 집어넣었더니3분을 못 견디고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독 속에 한 가닥 햇빛을 비췄더니 그 쥐들이 36시간을 살아 있다. 캄캄한 독 속에서 3분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쥐들은 체력을 다해 죽은 것이 아니라, 절망하여 죽었다는 것이 과학자들의 결론이었다고 한다. 삶을 꿋꿋하게 살게 하는 힘. 그 힘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또 어디로부터오는가? 그것은 어디로부터인가 도울 힘이 올 것임을 믿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

온 세상이 콱 막힌 것같은 절망 속에 있는 자들이 이곳 베다니에서 새로운 소망의 빛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란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사면이 꽉 막힌 것 같아 절망하지만 이곳에서 주님께서 새로운 문을 열어 놓으시는 소망을 갖기 바란다. 하나님은 한쪽 문을 닫으시면 반드시 새로운 문을 열어 놓으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이같이 베다니에서 생긴 일은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는 생명, 슬픔에 잠긴 자매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위로, 주님이 이제라도 길을 열어 주시리라는 소망이 있던 곳이다.

이렇게 베푸신 은혜가 감사하여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옥합을 깨뜨린다. 주님을 향한 헌신이 있던 곳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장사될 날을 생각하며 마리아는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하는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 앞에 붓는다. 베다니에서 일어난 옥합을 깨뜨리는 헌신이 바로 이곳에 일어나기를 바란다. 내가 생명을 얻고, 위로함을 얻고, 소망을 얻게 되었으니 우리는 주를 위하여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흑인교회에 가보면 설교를 하면 성도들이 반응을 한다. 목사님이 한 마디 하면 성도들도 꼭 말을 받아 응답한다. 예를 들어 목사님이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맞습니다. 맞습니다. 헌신해야 합니다.’라고 응답을 한다. 그런데 어느 흑인 목사님이 이렇게 설교를 했다. “오늘날의 교회는 주저앉아 있습니다. 교회는 걷기 시작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맞습니다. 맞습니다. 걸어야합니다. Let's wolk!” “걷는 것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교회는 뛰어야 합니다. 뛰어야 합니다.” 성도들도 “뜁시다. 뜁시다. Let's run!” 목사님은 계속에서 강조하기를, “우리는 전 세계 복음 전하기 위해 교회는 날아야 합니다.” 교인들이 “맞습니다. 날아야 합니다. 날읍시다. Let's fly!” “그런데 돈이 필요합니다. 헌금을 드려야 합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조용해지더랍니다. 그런데 조용한 침묵이 있는데 저 구석에서 한 성도가 말하기를, “그냥 걸읍시다. 그냥 걸어야합니다. Just wolk!”

헌신이 사라지면 교회의 생명력도 상실한다. 헌신이 사라지면 주님을 향한 마음의 열정도 사라진다. 예수로 인하여 내가 살았으면 옥합을 깨뜨리는 헌신이 있어야 한다.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소망을 얻었으면 주님을 향한 헌신이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바로 이곳에 옥합을 깨뜨리는 마리아의 헌신이 있기를 바란다.

이렇게 마리아의 헌신은 그대로 끝나지 않았다. 마리아의 헌신은 베다니에 새로운 일이 벌어지게 하셨다. 바로 주님께서 내리신 축복이었다. 누가복음 24장의 말씀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셨다. 주님께서 베다니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하셨다. 손을 들어 축복하시는 주님의 은총이 이곳에 가득하기를 바란다. 주를 위해 헌신할 때에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축복이 이곳에 가득하기를 바란다.
영적으로 복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는 복이 있고, 기도하고 싶은 영적으로 복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복있는 가정이 되기를 바란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여 행복한 가정을 누리고, 자녀들이 말씀으로 바르게 잘 자라서 이 땅에 영향력있는 인물로 자라는 복있는 가정이 되기를 바란다. 개인의 사업장과 직장에도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복이 가득하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건강의 복도 누리게 되기를 바란다. 예수님께서 베다니를 향하여 축복하신 것처럼, 이곳에 주님의 축복된 일이 가득하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베다니 앞에서 베다니 마을을 향하여 축복하시며 승천하셨다. 마지막 순간까지 주를 위해 충성하다 주님께 가자.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의 은혜 속에 살다가 주님께 가자. 마지만 순간까지 믿음을 지키는 최후 승리의 삶을 살자. 주님이 세상의 모든 일을 마치고 승천하신 것 처럼, 우리도 믿음을 지키고 주님 앞에 서는 날 상급받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지난 주 수요일에 우리 교회 종탑을 세웠다. 그 종탑을 처음 보는 순간 주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는 느낌을 받았다. 베다니를 향하여 축복하시며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을 마음으로 그리게 되었다. 주님께서 내리시는 축복이 이곳에 가득하기를 바란다.

이같이 베다니에서 일어난 일을 요약하면, 생명, 위로, 소망, 헌신, 축복, 최후승리로 정리할 수 있다. 베다니에서 생긴 일이 우리 교회에 그대로 일어나기를 위하여 기도한다.
베다니에서 일어난 역사가 우리 교회를 통해서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이곳에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나고, 슬픈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소망을 얻고, 주신 은혜 감사하여 옥합을 깨뜨리고, 주님께서 손을 들어 축복하심을 체험하고, 우리도 주님처럼 하늘 나라갈 때까지 베다니교회에서 베다니의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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