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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이 가르치신 복 (마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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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김형준 목사

한국 기독교가 해결해야 할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샤머니즘’, 무속신앙에 관한 문제입니다. 어떤 종교든 무속신앙이 들어오면, 종교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의 장점들이 파괴됩니다. 통일신라 때 들어온 불교가 샤머니즘과 결탁되면서 불교는 불교만의 독특성을 유지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이조 500년 역사의 유교가 가지고 있던 좋은 장점들도 샤머니즘과 결탁되면서 그 빛을 잃었습니다. 기독교가 근세에 들어와 많은 이들에게 전해졌지만, 샤머니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해서 역사성과 민족성의 변화에 치명적인 영향을 받았습니다. 기독교가 역사성을 상실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샤머니즘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한국인의 정서에 뿌리깊게 박혀있는 샤머니즘을 분별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또 하나 해결해야 할 과제는 ‘이원론’에 관한 것입니다. 낮과 밤, 하늘과 땅, 죄인과 의인, 세상과 교회, 교회의 안과 밖 등과 같이 나누어 가르쳐왔습니다. 실상 이것은 헬레니즘 철학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는 생활은 거룩했지만 교회 밖에서 하는 생활, 즉 직장이나 가정에서는 본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신자가 25%가 됨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여 역사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원론적인 사고 때문에 인격적인 변화에 둔감합니다. 물론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교회에서와 같이 직장에서도 살아야겠다는 의지나 노력이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교회 문을 나가면서부터는 교인이 아닌 사회의 한 사람입니다. 한국 기독교의 이원론이 만들어낸 모습이자 기독교가 극복 해야 하는 과제입니다.

마지막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를 꼽자면 축복에 대한 개념입니다. 한국에서 ‘축복’은 기복사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독교가 기복사상을 극복하지 못하면 어쩌면 위기를 겪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성도가 복의 기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교회의 수준과 신앙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복에 대한 성경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복을 거절하게 되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또한 하나님이 복이 아니라고 하시는데도 듣지 못하고 간절히 간구하는 엉터리 같은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조차 모를 기이한 종교가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로 복의 문제를 보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요? 우리가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행복에 대한 문제를 성경으로 풀지 않으면, 잘못된 신앙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이점을 심각하게 여기며 주님께서 말씀하신 복의 개념을 생각해보길 원합니다.

산상수훈을 통해 말씀하신 팔복을 찬찬히 들여다 보면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기 원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축복의 언어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는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 주기를 원하십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됨을 알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많은 신학자들은 “올라가 앉으시니”라는 부분을 그저 다리가 피곤하여 앉은 것이라고 해석하지 않습니다. 이 첫 구절은 산상수훈에서 맨 마지막에 나오는 “그는 권세 있는 자와 같더라”라는 구절과 연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앉으실 만한 자리, 가르치실 자의 자리,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세가 있는 자리에 앉으셔서 정식으로 해야 할 말, 가르쳐야 하는 말에 대해 하셨던 것입니다.

처음 입을 열어 가르치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사람들이 인생에서 가장 추구하던 행복, 복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가장 관심을 두신 이야기이기도 하고 축복하기 원하시는 내용이기도 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50절부터 51절까지 예수님께서 지상의 일을 마치시고 돌아가실 때 하셨던 마지막 말씀도 축복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예수님께서 지상을 떠나실 때 축복하며 떠나셨습니다. 원어의 문법상으로 일의 처음과 마지막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전체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복 주기를 원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생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를 볼 때,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향한 의도는 축복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가장 먼저 하신 일은 복 주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 28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여러분이 자녀를 낳고 나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오늘 네 명의 아기들이 처음으로 교회에 나왔습니다. 이 아이들의 부모들은 무엇을 소원하겠습니까? 축복기도 아니겠습니까? 자녀가 복 받길 원하고 있을 것입니다. 자녀가 태어났을 때, ‘험한 세상에 태어난 너도 참 불쌍하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참 잘 태어났다. 복 되게 살아라. 행복한 백성이 되거라.’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를 보시고 너무나 기뻐서 기꺼이 복 주길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진심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기를 원하신다는 이야기가 또 나옵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복 주고 복 받을 기회주길 원하셨으면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순간 곁에 있던 강도에게까지 복 주려 하셨겠습니까. 요한계시록 1장 3절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했습니다. 부모님들이 가난하든지, 부자든지, 존귀한 자리에 있든지, 약한 자의 자리에 있든지 자녀를 향한 공통된 마음이 있습니다. 자녀가 행복하고 존귀한 자가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복 주고자 하시는 마음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할 구원의 때에 가장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신명기 8장 16절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말씀합니다. 신명기 8장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을 광야에서 고생하면서 돌아다닌 이유를 모세가 설명하는 장면입니다. “광야에서 그저 뺑뺑이 돈 것이 아니며, 광야에서 돌아다닌 것이 우리를 힘들고 지치게도 만들었으나 현재 우리 모습을 보라. 우리 의복이 헤어졌는가? 굶은 적이 있는가? 우리를 낮추고 어렵게 만드신 이유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영원한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였다. 축복 받을 만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께서 쓰신 방법이자 축복이었던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예레미야는 전쟁으로 백성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애가를 쓰면서 다시 묵상하기를, 3장 32절에서 33절과 38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32절, 33절) 화, 복이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입으로 나오지 아니하느냐(38절)” 자기 삶을 돌이켜보면 너무나 슬프고 애달프기만 한데, 하나님 시각으로 가만히 돌이켜 보니 달리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이 진노 받고 저주 받는 존재가 되기를 원치 않으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이자 변치 않는 사실은 우리에게 복 주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고 느낄 때조차, 주님은 복 주시고자 나를 부르시는 분입니다. 지금의 상태나 어려움도 복을 주시기 위한 과정임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 받는 길을 가르쳐주시고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복 받는 길을 나름대로 찾아 갑니다.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돈을 벌어야 해.’ ‘지식과 교양이 있어야 한단다.’ 등 부모도 자녀들에게 방법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복 받는 모든 길이겠습니까? 복이라 생각했던 것이 변하여 좌절과 낙망의 길이 된 적은 없습니까? 내가 행복한 것 때문에 다른 이가 불행가운데 빠지게 된다면 복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은 영원한 것입니다. 나만이 누리는 복이 아니라 함께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이러한 복은 ‘관계’에서 나옵니다. 팔복의 복은 히브리어로 ‘마카리오스’입니다. 문학가 호머는 ‘마카리오스’라는 단어를 ‘왕 혹은 신의 존재’를 가리킬 때 썼습니다. 성경에서는 ‘복되신 하나님’을 뜻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1:11)”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6:15)” 여기서 복되신 하나님이 바로 마카리오스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있을 때와 하나님과 관계가 있을 때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누리는 복은 의미가 없습니다.

마가복음 6장에는 헤롯의 잔치가 나옵니다. 이 잔치에는 인간이 행복하기 위한 모든 수단이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술이 있었고, 음식과 아름다운 무희, 은은한 불빛 등 행복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채워주는 모든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잔치의 마지막에 세례요한의 목이 쟁반 위에 들려오면서 이 잔치는 슬픔과 두려움으로 끝이 납니다.

이어서 벌어지는 광야의 잔치는 헤롯 왕의 잔치와는 대조를 이룹니다. 기쁘고 행복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은은한 불빛이나 경쾌한 음악도 없었습니다. 두려움과 아픔, 고통 속에 있던 장정만 5천명이 광야에 있었습니다. 음식이라고는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실 때에 광야의 잔치가 되었습니다. 광야에 있던 사람들은 희망을 보고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을 때에, 주님과 관계를 가질 때에, 인생의 가치와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미국 유니온 대학의 심리학자 어니스트 리곤(Earnest Ligon) 교수는 그의 저서 중 ‘그리스도의 인격 심리학’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팔복은 예수님의 행복 이론이다. 만일, 사람들이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대로만 반응할 수 있다면 진정 그 사람은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쉽게 말씀 드리면 복은 어떤 것을 소유하거나 지위에 오르는 데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태도와 인격 속에서 주어지는 열매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가 희랍어 ‘마카리오스’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7장 12절부터 13절에서는 “너희가 이 모든 법도를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지켜 네게 인애를 베푸실 것이라 곧 너를 사랑하시고 복을 주사 너로 번성케 하시되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 소생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네 토지 소산과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풍성케 하시고 네 소와 양을 번식케 하시리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소유와 생명과 자녀 등 모든 것을 풍성하게 하기 위한 필요조건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여호수아 1장으로 연결됩니다. 여호수아가 자신의 연약함을 보고 어떻게 백성들을 인도할까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또한 이 말씀은 그대로 시편 1편에 응용됩니다.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서론이자 복에 대한 강론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복 받을 만한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시냇가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황무지를 파고 도랑을 만들어 물을 흘려 보낸 후 주변에 과실을 심은 시냇가입니다. 복 받을 팔자가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축복의 고랑을 파서 축복의 물줄기를 흘려 보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도대로 행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복 받기 원합니다. 복 받기 위해서는 복 받을 자리로 가야하고 복 받을만한 삶의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점은 복이 행위나 노력에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단지 해야 할 일은 복의 근원이신 아버지 안에 살고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 집니다. 제 딸이 가장 복된 인생이 되는 때가 언제겠습니까? 저와 함께 거할 때입니다. 딸은 먹고 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제 딸로 있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 바로 축복의 근원이자 통로입니다. 그 속에 모든 것이 공급됩니다.

셋째 우리의 진정한 축복은 예수그리스도 자신 임을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우리의 축복이 재능이나 물질, 혹은 성취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자신이 원하던 것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현철씨는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게 해달라고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길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대통령이 된 후 자신을 자해 할 만큼의 분통과 격분 속에 빠져 후회하고 있습니다. 이런 예는 많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팔복은 예수님의 의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처럼 행할 수 없고 지킬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던 우리들이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되었음을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 아래에서는 우리 힘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자녀답지 못한 모습을 비난하며 자괴감과 힐책에 빠져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과 진리 가운데 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더 이상 율법의 저주 아래 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때 우리는 아무 공로 없이 하늘나라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업과 위로와 긍휼, 배부름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주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1장 3절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신령한 복이라고 했습니다. 2장 8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의 선물이라 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기제들이 끊임없이 등장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 부끄러움을 알고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고자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짐승을 잡아 가죽옷으로 수치를 가려주셨습니다. 신음 가운데 있던 백성을 위해 모세를 보내주시고 구출해 주셨습니다. 죄인된 백성들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기 위해 성막을 만들어주셨습니다. 또한 성전 짓는 것을 허락하셔서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성전이 죄로 훼파되었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버림 받은 줄 알았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율법을 통해 저지른 우리 죄악을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시고 씻어주시고 자유 하게 해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가 축복입니다. 비유 하자면 이렇습니다. 제가 딸에게 ‘아침 6시에 일어나면, 자전거를 사주겠다.’ ‘7시에 일어나 큐티를 하면, 휴대폰을 사주겠다.’등 약속을 10가지 정도 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딸 아이가 지킬 수 있겠습니까? 좋은 줄 알지만 능력이 안됩니다. 지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도 유사합니다. 우상숭배하지 말라고 했을 때 우상숭배하지 않기를 원하지만 마음대로 안됩니다. 눈 앞에 보이는 것에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간음이나 살인 안하며 이웃의 것 탐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에서 열까지 십계명을 범하지 않고 살아갈 능력이 없습니다. 좋은 줄 알지만 지킬만한 능력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제 딸에게 가장 큰 선물은 바로 저 자신입니다. 제가 아버지로서 많은 규칙이나 율법 등을 지키지 않아도 사랑하고 딸을 축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짊어질 수 없는 짐을 대신 져주시고 말씀하시길 당신에게 속하라 하십니다. 주안에 거하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복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복보다 더 큰 축복이 있겠습니까? 바로 공주의 아들로서 세상의 축복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 백성과 더불어 고난 받는 것을 귀하게 여겼던 모세는 통찰력을 갖고 바라본 사람이었습니다. 이 땅에 잠깐 있다 사라질 것이 우리 복이 아닙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이야말로 우리 축복이며 생명이라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복 받는 인생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간절함이 있었기에 독생자를 죽이시면서 까지 복 받는 길을 주셨습니다. 그런 주님을 받아들이십시오. 믿으십시오. 주님을 여러분의 소유로 삼으십시오. 주님을 믿고 나갈 때에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 애통한 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의 관계에 모든 것을 거는 삶의 궤도로 여러분의 발걸음을 수정하시는 이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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