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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마 11: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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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덕만 목사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 추석 연휴가 되면 많은 분들이 고향을 향하여 내려갑니다. 시간이 평소 때보다 훨씬 많이 소요되는데도 사람들은 고향을 향하여 내려갑니다. 안 내려가면 왠지 섭섭합니다. 
추석이 되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고 말합니다. 요즘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고 인사했다가는 혼납니다. 왜냐하면 추석이 되면 물가는 오르고 선물해야할 곳은 많고, 주부들은 이래저래 고민이 많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주신 오곡백과들을 바라보면서 감사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하여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 세대를 3무시대(三無時代)라고 말합니다. 3무가 무엇입니까?
“무감각 무관심 무기력”입니다.
타인과 공동체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사회와 정치, 경제에 대해서 무관심합니다. 자기의 이익과 기분에 맞는 사람에게는 관심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앞집에 도적이 들어왔다 해도 나에게 피해가 없으면 무관심합니다. 
옛날에는 할머니가 무거운 짐을 지고 가시면 멀리 있다가도 달려가서 대신 짐을 옮겨 드리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할머니들이 무거운 짐을 지고 힘들게 걸어 가셔도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또 무감각합니다.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이 없습니다. 함께 사는 사회에서의 윤리적인 감각이 없습니다. 자기 혼자 즐기고, 자기 혼자 즐거우면 되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 대한 감각이 없습니다. 내가 편하면 그만이지 다른 사람이 불편한 것에 대해서 무감각합니다.
그래서 주차장에서 주차할 때 내가 조그만 신경 쓰면 한대 더 주차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이 주차하는데 편할 텐데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무감각합니다.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내가 마지막으로 휴지를 다 섰으면 다음 사람을 위해서 다른 휴지를 갔다 놓아야 하는데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나옵니다. 여러분 다음 사람이 멋모르고 들어가서 볼일을 봤는데 휴지가 다 떨어졌으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고속도로에서 내가 조금만 양보하면 다른 차들이 흐름을 따라서 달릴 수 있는데 다른 사람에 차에 대해서는 무감각합니다.

또한 이 세대의 특징은 무기력합니다. “에이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고 포기하며 무기력하게 살아갑니다. 도전하기를 싫어하고, 귀잖아 하면서 안주합니다. 모든 일에 무기력해져 버립니다.

그런데 무관심과 무감각과 무기력은 사람들에게는 무서운 병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질병이나 실패나 죽음 따위로 저주하시지 않고 성경을 읽어도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오지 않는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무감각 무관심 무기력은 저주입니다.

그래서 요즘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감동을 주는 일입니다. 모든 일이 감동을 주어야 합니다. 장사도 감동을 주어야 하고, 가르침도 감동을 주어야 하고, 심지어 예배도 감동을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감동이 없는 시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라고 말씀하시면서 시장에서 놀이하는 어린아이들의 놀이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옛날, 어렸을 때 저희들의 놀이는 딱지치기, 구슬치기, 고무줄놀이, 땅 따먹기 등 대부분이 친구들과 함께 노는 놀이들이었습니다. 특별히 어릴 때 소꿉장난 안 해 본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남자 아이는 아빠가 되고, 여자 아이는 엄마가 되고, 동생은 애기가 되고, 의사가 되고…그렇게 소꿉장난하면서 놀았습니다. 그런데 역할이 안 맞는다고 하여 놀이가 종종 깨지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의 어린이들의 부모님을 따라 시장에 가서 아이들끼리 모여 놉니다.
두 편으로 나누어서 한쪽에서 피리를 불면 다른 쪽에서는 춤을 춥니다. 또 한쪽에서 울기 시작하면 다른 쪽에서는 가슴을 치면서 노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놀이를 잘 맞추어서 하면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서 또 어른들은 돈을 던져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만일 한쪽에서 피를 불었는데 다른 쪽에서 춤을 추지 않습니다. 한쪽에서 울기를 시작하였는데 다른 쪽에서 가슴을 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놀이는 흥이 깨지고 놀이는 무산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대는 사람들은 피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울기를 시작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무관심과 무감각과 무기력에 빠져 있습니다.

놀이는 즐거운 것입니다. 친구들과 노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입니다. 그런데 무관심하고 무감각하고 무기력하다면 놀이가 재미없어 집니다. 결국 놀이는 깨지고 마는 것입니다.

찬양할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서로 손뼉을 칠 때는 손뼉을 치면서 찬양하고, 손을 들고 찬양할 때는 함께 손을 들고 찬양하면 앞에서 인도하는 찬양단은 힘이 납니다.
저는 찬양을 하면서 성도들을 보면 내가 은혜가 될 때가 많습니다. 성도들이 감격 속에서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더 감격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앞에서 찬양단이 열심히 찬양을 하는데 딴청하면서 무감각하게 있으면 찬양단은 의욕이 떨어집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하여도 아무 반응이 없으면 정말 설교가 힘듭니다.  ‘설교 어떻게 하나? 나를 한번 감동시켜보시지?’ 하고 앉아 있으면 정말 설교할 맛이 안 나고 설교가 힘들어집니다. 그런데 설교하는데 아멘, 아멘하면서 고개를 끄떡 끄덕하면 정말 생각 안 났던 것도 생각이 나고 저도 모르는 감동들이 전달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아멘을 자주해 주십시오. 아멘입니까?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여러 가지로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이것이 좋지 않겠니?’ 그런데 자녀들이 부모님의 말씀에 무관심하고 무감각한다면 그 관계가 얼마나 힘듭니까?

반대로 아이들이 부모에게 필요한 것들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부모님은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자녀들에게 무감각합니다. 그래서 무엇이 필요한지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자녀들은 자꾸 자꾸 부모와 세대 차이를 느낍니다. 더 무감각하면 4대 차이가 나고 더 관심이 없으면 할머니 할아버지 취급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에 있어서도 일상생활에서 있어서도 무관심과 무감각과 무기력은 우리의 무서운 적입니다.
우리는 조화를 맞추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 흥을 돋아 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 12:15)

그렇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가지고 함께 웃어주고 함께 울어주는 공동체의 모습이 있을 때 우리의 놀이는 재미있고 흥이 넘치는 놀이가 될 줄 믿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무관심하였습니다. 무감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비판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세례 요한을 비판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요한은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다하여 귀신이 들렸다."라고 하면서 요한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귀신들린 사람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사실 요한은 당시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살았습니다. 세례요한은 금욕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주님의 길을 예비한 자로서 오직 회개와 천국에 대하여 외치는 하나의 소리였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세례 요한을 귀신들렸다 비판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비판했습니다. 주님께서는 금욕주의자인 세례 요한과는 달리 일반 사람들과 똑같이 먹고, 같이 자고, 같이 동행하면서 생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세례 요한과는 전혀 다르신 예수님까지도 비판했습니다. 요한은 먹지 않으니까 귀신들렸다고 하더니, 예수님께서 잡수시는 것을 보고는 "그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마11:11) 라고 비판했습니다.

사실 우리 예수님께서 그 어떠한 경우에도 비판받을 만한 일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불쌍한 사람들과 같이 먹고, 자며, 행하는 것이 어찌 비판받을 일입니까? 그것은 오히려 한없는 존경과 축복을 받아야 할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비판했습니다.

그들은 세례요한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인 예수님에 대해서도 그들은 비판하였습니다. 이래도 저래도 다 비판하며 판단하였습니다. 여러분 모든 것을 비판하고 판단한다면 여러분 어느 장단에 춤을 출 수 있겠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설교 중에 하소연 한 내용입니다.  목사가
젊으면 - 경험이 부족하여 불안하다고 하고,
늙으면 - 시대에 맞지 않고 희망이 없다고 합니다.

잘 생기면 - 제비 같아 위험하다 하고,
못 생기면 - 품위가 없어 틀렸다고 합니다.

자식을 많이 낳으면 - 무절제 한 사람이라고 하고,
아들만 낳으면 - 욕심이 많다 하고,
딸만 낳으면 - 기도해서 그 정도도 해결 못 받았냐고 합니다.

부잣집을 심방하면 - 잘난 사람들과만 어울린다고 합니다.
좋은 집에서 잘 살면 - 사치한다고 하고,
못 살면 - 축복도 받지 못한 목사라고 천시합니다.

좋은 차를 타면 - 어려운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고 과소비 한다하고,
나쁜 차를 타면 - 장로님들과 교인들에게 사랑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하면 - 돈만 안다고 하고,
안 하면 - 가르치지 않는 무책임한 목사라고 합니다.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면 - 너무 냉정하다고 하고,
잘못을 지적치 않으면 - 정의감이 없다고 합니다.

이래도 잘못 저래도 잘못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설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건전한 비판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비판을 위한 비판은 절대 좋은 열매를 거두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형제에 대해서 비판할 권한이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6장 37절에서는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 6:37)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로마서 14장 10절에서도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롬 14:1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판단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전지(全知)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판단하는 것이 잘못될 수도 있습니다. 조금만 시각을 달리해도 전혀 다른 결과를 낳게 됩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을 위한 7가지 습관'의 저자 스티븐 코비의 이야기입니다. 스티븐 코비가 너무나 바쁜 시절에 뉴욕의 전철에서 책을 읽고 있었어요. 모든 사람들이 신문을 보거나 음악을 듣거나 조용히 묵상을 하거나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한 정거장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탔어요. 마침 스티븐 코비의 옆자리가 비어서 그들이 앉게 되었어요. 그런데 이 아이가 들어올 때부터 징징거리더니 막 울기 시작하는 겁니다. 아버지의 옷을 잡아당기며 웁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아버지가 아이를 전혀 달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방해가 됨에도 불구하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스티븐 코비가 너무나 화가 났어요. 그래서 조금 더 기다리다가 스티븐 코비가 꾸짖듯이 얘기합니다. "여보시오, 선생님! 당신 아이가 이렇게 징징대는 것을 당신은 모릅니까? 전철 안에서 다들 조용히 있는데, 이게 무슨 짓입니까?" 하고 그를 심하게 꾸짖었어요. 그러자 이 아버지가 눈을 번쩍 뜨더니, 마치 이 아이가 보채는 것을 이제 막 발견했다는 듯이 "아! 미안합니다." 양식이 없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우리가 방금 병원에서 나오는 길인데, 이 아이의 엄마가 1시간 전에 죽었습니다. 제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정신이 나갔습니다. 미안합니다." 이 얘길 들은 스티븐 코비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훗날 그의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2,30분을 더 가며 아이가 우는 그 소리가 자기를 전혀 방해하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미워지면 잘해도 밉고 못해도 밉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습니다. 사랑을 하면 다 좋게 해석되고 다 좋게 받아들여집니다.

“주님의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하며 긍정적이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안경을 가진 사람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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