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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살아계십니까? (마 1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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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덕만 목사

지난 주 월요일 오전 11시경에 카자흐스탄에서 사역하시던 김진희 선교사님이 괴한에게 순교 당하셨습니다. 선교사님의 입과 머리가 심하게 맞아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손에는 날카로운 흉기에 찔려 심한 상처 입고 순교하셨습니다. 남편이신 한선교사님은 괴한이 뛰쳐나가는 것을 보고 괴한들과 몸싸움을 하다가 크게 다치셨다고 합니다.

김진희 선교사님은 1997년 카자흐스탄에서 태권도 사역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성실하게 사역을 하시다가 결국 먼 이국땅에서 순교하신 것입니다. 아직 젊은데… 자녀인 성경이는 9살이고 진경이는 8살이었는데…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남아 있는 한선교사님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 없지만 짐작하건데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럴 수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제가 개척한다고 밥도 사주시고 위로하며 힘주시던 집사님께서 산을 등반하시다가 떨어져 돌아가셨습니다. 저는 그 소식을 들으면서 얼마 전만 해도 함께 식사하시면서 나를 격려하셨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문상하면서 남아 있는 여집사님과 딸을 보면서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왜 이렇게 좋은 집사님이 이렇게 불러 가셨습니까?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여러분에게도 크고 작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하나님 살아계십니까?’ 라는 질문을 던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학생이 정말 코피를 흘리며 열심히 공부하였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고, 기도도 열심히 했는데 그 결과가 안 좋을 때 “하나님은 뭐하고 계십니까?”라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열심히 살아 보려고 노력하는데, 열심히 믿음으로 살아 보려고 노력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들은 꼬이기만 하고 어려움은 계속되어질 때 우리는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까?”라는 질문을 하지 않습니까?

전주에 어떤 학생이 눈물을 글썽이며 “이제는 기도하고 싶은 마음도 안 든다.”고 말하면서 “내가 열심히 기도했는데 아직도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참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세례요한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생각해 보았던 것처럼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확신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예수님을 보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로다.”라고 고백하였고, 요단강에서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면서 그는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며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 내 기뻐하는 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마 3:11)고 예언하였던 선지자였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3:2)라고 외쳤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헤롯 왕의 불의를 나무라다가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되었습니다. 조그만 감옥에서 수개월을 지냈습니다. 하루 이틀 갇혔다면 참을 수 있었을 텐데 시간이 길어지고 몸은 쇠사슬에 매여서 고통스러워졌습니다. 죽을 날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늘 말했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3:12) 세례요한은 메시아는 거룩하신 재판장으로 불의를 심판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아니하셨습니다. 자기의 감옥에 갇혀 있는 사정을 돌아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불의를 행하는 자들은 자기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분에 대해서 의구심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의혹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물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 말은 예수님 당신이 메시아 맞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 메시야입니까?라는 예수님에 대한 세례요한의 의구심입니다. 확신에 차 있었던 세례요한이 감옥 생활 속에서 의혹이 생긴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의 삶도 때로는 의심이 생기고 의혹이 생기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믿음으로 확신에 가득 찬 모습이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때로는 의심의 안개가 우리를 덮어서 주님은 간데없고 나의 문제만 보이도다가 될 때가 있습니다.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도 그랬습니다. 열왕기상 19장 4-9절을 보면 불의 사자 엘리야가 회의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갈멜산에서 850명의 우상의 대표들과 힘 겨루는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는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을 때 비가 오기를 간절히 기도했더니 그의 기도로 비가 다시 오는 역사를 이루었던 위대한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그는 악한 여왕 이세벨의 체포령에 광야로 하룻길을 도망하다가 로뎀 나무 밑에서 하나님께 “하나님이여 족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합니다.”라고 죽기를 구합니다. 얼마나 약해 졌습니까? 얼마나 초라해 졌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의 어려움을 통하여 로뎀나무 그늘에서 하나님께 하소연하며 약하여 있지 않습니까?  세례요한이 감옥 속에서 “오실이가 당신이오리이까? 내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의구심을 가지고 질문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당신은 정말 살아계십니까?”라고 질문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이 세례요한의 질문에 직접적인 답변을 회피하시고 구약성경에 인용하여 간접적으로 요한에게 대답하였습니다.
너희는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사야 42장 7절과 61장 1절의 말씀을 인용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본문 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 11:5)

예수님은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여 주었습니다. 죽음의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살아나는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셨습니다. 병든 자들의 친구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을 외면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감옥에 갇힌 세례요한의 고통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를 감옥에서 구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곳에서 믿음으로 이기기를 원하고 계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당하는 고난을 예수님이 모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십니다. 요한이 감옥에 갇힌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그를 그 어려움에서 구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곳에서 믿음을 지키고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어려움을 다 구원하여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이 우리의 모든 어려움에서 건져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은 그곳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도 하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싸워서 이기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그러므로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싸워야 합니다. 노력해야 합니다. 침노해야 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로다 하신 말씀처럼 싸워야 합니다.

여러분 한국 사람에게 좋은 점도 많지만 나쁜 점은 잘못 되면 남 탓하는 것입니다. 조상 탓합니다. 아이들이 잘못보고 돌부리에 넘어지면 “이 놈이 돌이 여기 왜 있어?” 하며 돌 탓합니다. 부모 탓, 환경 탓, 하나님 탓합니다. 그러나 탓만 하면 결단코 우리의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없습니다. 탓만 하면 앞으로 전진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침노 하는 자가 되어야 천국을 차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의심하는 세례요한을 어떻게 취급하셨습니까? 조금도 책망하거나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를 인정해 주시고 칭찬해 주시고 ‘너희가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라고 말씀하면서 역사적인 평가를 올바르게 내려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조금 흔들렸을 뿐 갈대처럼 왔다가 갔다하는 불완전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자기의 영화를 위하여 사치스럽게 살거나 쉬운 삶을 택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에 대해서 그는 선지자였고 어떤 선지자보다 더 나은 선지자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1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 11:11)

예수님은 의심하는 세례요한을 믿음이 없다고 꾸짖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회의를 가졌던 세례요한에 대해서 매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칭찬하시면 인정해 주셨습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로뎀나무 그늘에 앉아 낙심하고 좌절하고 믿음의 연약함을 가진 엘리야를 하나님은 먹어 주셨습니다. 용기를 주셨습니다. 사명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여러분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이 안 보이십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회의를 갖고 계십니까? 점점 믿음을 잃어가고 실망과 낙심이 여러분을 덮고 있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먹구름이 끼어 있어도 그 먹구름 뒤에는 태양이 내려쬐고 있습니다. 태양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태양은 있습니다.

우리가 일시적으로 예수님에 대해서 의심할 수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고 회의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갈대처럼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례요한을 칭찬하시며 인정해 주시는 것처럼 우리의 믿음을 인정해 주시며 우리의 신앙을 격려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님의 십자가를 붙들고 천국을 침노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카자흐스탄의 한선교사님과 그 유가족들도 한 순간은 원망하고 후회하고 부정하고 싶었겠지만 결국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하시라 믿습니다.

우리도 끝까지 승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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