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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구의 편입니까? (출 32:2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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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삼우 목사

  아프리카 얼룩말에 관해 이런 전설이 있습니다.  원래 까만 말이었습니다.  어느 날, 이 말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다른 짐승들은 그렇지 않은데 자기만 새까만 것이 보기가 싫었습니다.  ‘나는 왜 까만 말로 태어났을까? 보기 싫게끔.󰡑 고민을 하는데 하루는 원숭이 한 마리가 오더니, “뒷산에 올라가면 커다란 동굴이 있는데, 그 동굴에 가서 빌면 무슨 소원이든지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해주었습니다.  단숨에 뒷산으로 올라가 동굴을 발견하고는 들어가 소원을 빌었습니다.  “나는 하얀 말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고 동굴을 나와 보니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과 꼬리까지 하얗게 되었습니다.  눈부신 백마가 되어있었습니다.  정말 좋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고민이 생겼습니다. 󰡐검정말일 때는 밤에 아무 데든지 숨기 좋았는데, 하얀 말이 되니까 밤에 맹수의 눈에 잘 띄어 맹수들에게 잡아먹힐 위험이 많겠구나.󰡑 게다가 검정말일 때에는 마음대로 굴러도 되는데, 흰말이 되니까 금세 더러워져서 목욕도 자주 해야 했습니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뒷산 동굴에 다시 들어가서 󰡒검정말로 되돌아가게 해 주십시오.󰡓빌었습니다.  밖에 나와 보니까 다시 검정말이 되었습니다.  며칠 지나니 다시 이번에는 검정색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고민을 하다가 또 뒷산 동굴에 올라갔습니다. 󰡒다시 흰말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로부터 며칠 만에 한 번씩 뒷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흰말이 되었다가 검정말이 되었다가 했습니다.  하루는 정말 끝을 내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동굴을 찾았습니다.  검정말이 되기를 원합니다.󰡓하고 나오려다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만일 나갔다가 다시 흰말이 되고 싶으면 어쩌지?  다시 오기 귀찮은데.  흰말이 낫겠다.  흰말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아닌 것 같습니다.  아니 검정말이, 아니 흰말이……󰡑 그렇게 하고 있는데, 갑자기 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대로 후다닥 밖으로 나오자, 굴은 무너져 내렸고, 자기 몸을 보니까 얼룩말이 되어 있더랍니다.

  여러분,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의 신앙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  때로는 이랬다 때로는 저랬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닙니다.  결심을 했는데 또 흔들리고 그래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생각해보면 우리 신앙생활의 고민이 여기 있습니다.  아직도 분명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이랬다저랬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힘을 낼 수 없고, 아니 그래서 나약하고 그래서 자꾸만 문제가 생겨납니다.  문제의 근본이 여기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 시내 산에 이르렀을 때 일어난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 두 돌 판을 주시기 위해 모세를 시내 산으로 불러 올리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40일간을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지내게 됩니다.  모세가 이렇게 하나님과 교제하고 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당연히 지금까지 받았던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감사하면서 앞으로 받게 될 십계명에 대해 조용히 준비하는 시간을 가졌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없는 동안 그들의 마음속에는 불신앙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이 불신앙은 모세가 산으로 올라간 지 39일째가 되는 날 공개적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백성들은 아론에게로 몰려와 외쳤습니다.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낸 모세, 이 사람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언제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것이냐.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라.”

  아론이 백성들의 위협에 압도된 것 같습니다.  백성들에게 금붙이를 모아오라고 해서는 금으로 송아지 모양의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소는 원래 애굽의 주신입니다.  그러니 금송아지를 만든 것은 430년 간 종살이 생활에 젖은 습성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금송아지를 향하여 자기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선포하고, 그 앞에서 제사를 드리고 먹고 마시고 춤을 추었습니다.  엎드리며 일어나며 뛰고 춤추며, 뒹굴고, 땅을 굴리면서 금송아지를 경배한 것입니다.  이방 우상 숭배자들이 그들의 신 앞에서 행하는 모습을 그대로 연출했습니다. 

  마침내 40일 만에 십계명 두 돌 판을 받아 양손에 들고 내려오던 모세가 이 모습을 보았습니다.  모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십계명 두 돌 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려 버렸습니다.  금송아지 우상을 가루로 만들어 물에 뿌려 백성들에게 마시게 했습니다.  그런 다음 진의 문 높은 곳에 우뚝 서서 백성들을 향하여 엄숙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외쳤습니다.  26절 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모세가 진문에 서서 가로되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하매 레위 자손이 다 모여 그에게로 오는지라”  여기 모세가 외쳤습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여러분, 하나님 이 시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아니 나는 이미 하나님 편으로 나왔는데,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대부분 이미 하나님 편으로 나온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내 삶의 모든 영역이 100% 하나님 앞으로 나왔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내 삶의 영역 중 아직 세상에서 나오지 못한 영역은 없습니까?  다 나왔는데 아직 남겨두고 있는 적은 영역은 없습니까?  바로 그 영역을 두고 하나님 명령하십니다.  삶의 모든 영역을 100% 하나님 앞에 내어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전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모세의 명령은 양자택일입니다.  여기는 두 진영, 하나님의 진영과 금송아지의 진영이 있습니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중간 위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편에 있기를 거절하면 금송아지의 편에 있게 됩니다.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양쪽에 다리를 걸치려고 합니다.  하나님 편에 나왔으면서도 세상 한 쪽 구석에 자리를 남겨두려고 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그런 중간 자리는 없습니다. 

  미국 남북 전쟁 때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전쟁이 밀고 당기고 하면서 많은 사람이 죽는데 서로 치열하게 진투를 할 때는 북군과 남군의 군복 색깔이 달라서, 이 옷 색을 보고 서로 적군이지 아군인지를 구분했다고 합니다.  북군은 청색 군복을 입었고, 남군 회색 군복을 입었습니다.  어떤 강도떼들이 전쟁터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청색 옷을 입으면 남군이 총을 쏠 것이고, 회색 옷을 입으면 북군이 총을 쏠 것이라, 이렇게 걱정을 하다가는 얕은꾀를 썼습니다.  위에는 청색 옷을 밑에는 회색 옷을 입었습니다.  이렇게 입으면 양쪽에서 다 자기편이라 생각하고 총을 쏘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입고 나갔더니 양 쪽에서 모두 총을 쏘아 다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기회주의가 통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지요.  신앙생활에는 더더욱 기회주의가 통하지 않습니다. 

  왜 우리 신앙생활에 힘이 없고 능력이 없습니까?  힘이란 일직선상에 있습니다.  하나로 모여질 때 힘이 있습니다.  이럴까 저럴까 고민하고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힘을 낼 수가 없습니다.  결단을 내리고 마음이 하나로 모아질 때 힘이 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하나로 모을 때 거기 힘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이 그렇지가 못합니다.  세상에 남겨진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그래서 힘을 낼 수가 없습니다. 

  100%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합니다.  내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분명하게 아십시다.  중간 자리는 하나님 편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누가복음 11장에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적당하게 하나님 편으로 왔다 갔다 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래서 신앙생활이 제대로 안 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오라, 우리는 이 명령 앞에 온전한 결단을 내려야합니다.  하나님의 편으로 나아가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결단은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이 또한 중요합니다.  모세는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편으로 결심한 사람들은 지금 나가야 합니다.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 결단은 미룰 수가 없는 결단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결심을 해 놓고도 자꾸 뒤로 미룹니다.  여기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엘리야도 갈멜산에서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고 책망했습니다.  머뭇머뭇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직도 머뭇거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언제까지 그렇게 끌려가듯 살 수는 없습니다.  머뭇거리다가 세월 다 지나갑니다. 

  뿐만 아니라 내일을 누구 책임집니까?  내일로 미루는데 내일을 아무도 책임지지 않습니다.  야보고 4장에도 “너희가 내일 일을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이 들여지고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 결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심령에 들려지고 성령의 역사가 있다는 것이 지금이 기회라는 뜻입니다.  자꾸만 미루면 마음이 굳어질 수 있습니다.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명령은 ‘행동’을 요구합니다.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고 말씀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의 의미는 더욱 날카롭습니다.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가 누구냐? 내게로 오라’고 합니다.

  결단했으면 이제는 하나님의 편으로 나오는 행동으로 결단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편이 되길 위해서는 마음속으로 결단하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우상 숭배자의 무리 가운데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편으로 걸어 나와야 했습니다.  결단을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마음으로 결심합니다만 행동으로 결단하지 못합니다.  행동으로 결단하지 못하는 한 참된 결단이 아닙니다. 

  한 주일학교 선생이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얘들아, 부자는 이 세상에서 대궐 같은 집에 살면서 맛있는 음식이란 음식은 다 먹으며 살았지만, 결국 그 끔찍한 지옥에 가고 말았단다.  하지만 거지 나사로는 비록 이 세상에서는 구걸하며 살았지만 천국에 갔단다.”  이야기를 마친 후 선생은 물었습니다.  “얘들아, 너희들은 부자와 나사로 중 누가 되고 싶니?” 그러자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더니 대답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부자가 되고 싶고요, 죽고 난 다음에는 나사로가 되고 싶어요.”

  이것이 우리의 마음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 나가야 한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이미 결심했습니다.  그런데도 행동은 여전히 부자처럼 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세상 것 조금만 더 즐기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세상 것 마음껏 즐기다가 나중 죽을 때 하나님 편으로 나가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  지금 하나님 편으로 나와야 나중에도 하나님 편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 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편에 서기로 결정하면 세상에서 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할 때 아무 소용없습니다. 

  끊을 것은 끊고, 정리할 것은 정리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기독교 초창기 역사에 이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한 장로님께서 한 번은 자기가 처음 예수를 믿을 때 겪은 우스운 이야기를 간증하셨습니다.  세례까지 받았는데 어떻게 잘못 배운 담배를 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는 중 한번은 주일날 교회에 가는데 조그만 성경을 주머니에 넣고 교회를 갔습니다.  예배 시간이 되어 주머니에서 성경을 꺼내어 앞에다 놓고 잠깐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를 하는데 옆에 앉아 있는 교인들이 킥킥거리며 웃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나 하고 눈을 떠보니 성경인줄 알고 꺼내 놓은 것이 성경이 아니라 담뱃갑이었습니다.  담뱃갑을 앞에 놓고 경건하게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얼굴이 화끈해지면서 창피하여 견딜 수가 없었답니다.  그래서 화장실에 가서 담배를 구기어 버리고 다음부터는 이를 악물고 담배를 끊고, 신앙생활을 신실히 하여 나중에는 장로가 되었다고 간증을 했습니다.  결단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행동하는 사람만이 변화하며 행동하는 사람만이 승리를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씀은 ‘헌신’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하나님 편으로 나오면 그 다음 무슨 생각을 합니까?  대부부의 경우 이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하나님 편으로 나왔으니 할 일 다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의 품에 편히 안겨  천국까지 갈 것으로 기대합니다.  예배드리고 찬송 부르고 좋은 설교를 듣고 행복하게 살겠다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본문에 모세에게로 나아온 레위인들, 나온 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27, 28절 함께 읽겠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저들은 모세의 명령에 따라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금송아지에 속한 자들을 모조리 죽여야 했습니다.  모세의 명령에 순종하여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일에 헌신해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하나님께서 부르신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하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결단은 주님의 일에 헌신할 때 비로소 온전한 결단이 됩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 헌신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의 편에 선 사람이 됩니다. 

  아셔야 할 것은 이 헌신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레위인인들이 한 일, 이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지금까지 함께 살던 이웃과 형제들을 죽이는 일입니다.  비정한 일이요 잔인할 일이요 끔찍한 일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이 어려운 일에 헌신 했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 일이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헌신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를 너무 쉽게 믿으려 합니다.  여러분 예수는 쉽게 믿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요구하십니다.  모든 것을 다 바쳐 주님의 일에 헌신하기를 요구하십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의 학정에 견디다 못한 청년들은 만주로 도망가서 독립군에 가담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때 그들이 독립군에 입대하려면 세 가지의 질문에 대답해야만 했습니다.  그 세 가지 질문이 이것입니다.  첫째, 당신은 총에 맞아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둘째, 굶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셋째, 얼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이 세 요건에 기꺼이 대답해야만 입대를 허락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어떤 각오로 따르고 있습니까?  무엇으로 헌신하며 어떻게 충성하고 있습니까?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우리의 각오를 새롭게 하십시다.  예수님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주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쫒을 것이니라.”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무서운 사형틀을 지고 나를 쫒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만한 희생, 그 만은 헌신을 각오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힘든 헌신이면 십자가라고 했겠습니까?  헌신하시는 여러분 힘들다는 말 하지 마십시오.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헌신하지 않고 있는 여러분, 여러분이 해야 할 헌신이 무엇입니까?  전적으로 헌신하고 전적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바쳐 충성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한 가지 알아야 할 것 있습니다.  레위지파가 이렇게 하나님께 헌신하였으므로 하나님은 그들에 복을 내리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29절 함께 읽겠습니다.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서 헌신하게 되었느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하나님께 헌신할 때 하나님 복을 내리십니다.  학자들은 레위인들이 이 헌신으로 인해 후손 대대로 성막과 성전을 섬기는 복을 받았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헌신한 레위지파에게 성별된 지파로 세워주시는 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을 위할 때 하나님 복을 주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높여 드릴 때 하나님도 나를 높여주시고, 내가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가질 때 하나님 내 일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 헌신할 때 하나님도 내 일을 위해 헌신하십니다.  복을 주십니다.  은혜와 영화를 아끼지 않습니다.  기어코 복을 내려주십니다.   

  이제 결단하십시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분명하게 하나님의 편에 서십시다.  결단을 했으면 행동으로 나타내십시다.  세상에서 나와서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에 봉사와 충성을 다하십시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헌신을 시작할 때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도 넘치기 시작합니다.  이 놀라운 은총을 누리시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머뭇거리던 저희들, 누구의 편이냐는 하나님의 준엄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 이 물음 앞에 분명하게 결단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결단했으면 행동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헌신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께 헌신함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는 저희들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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