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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행 26: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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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삼우 목사

  어느 책을 보니 믿음에도 일류가 있고 이류가 있고 삼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삼류신앙은 세상에 한 발 교회에 한 발, 그렇게 양다리는 걸치는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은 교회에 다니기는 합니다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확신이나 구원의 기쁨이 없습니다.  교회에 나오지만 세상에 할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예배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는 믿습니다만 실제 생활을 들여다보면 모든 일이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신앙이 생활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세상 사람 교회에서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삼류신앙생활입니다. 

  이류신앙도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열심으로 하는 신앙생활입니다.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합니다.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고 모임에도 참석합니다.  그러나 기쁨이 없고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합니다.  말씀도 듣고 기도도 합니다만 능력이 없습니다.  환경 따라 조금만 어려워도 어찌할 줄 몰라 합니다.  열심히 하기는 하지만 기쁨과 능력이 없는 신앙, 이류 신앙입니다. 

  일류 신앙이란 한 마디로 복음의 능력, 복음의 생명을 누리는 신앙입니다.  기쁨과 감격이 있고 은혜가 충만합니다.  어떤 어려운 환경도 이기면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십시오.  나의 신앙은 일류입니까?  이류입니까?  삼류입니까? 

  중요한 것은 한 사회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다수가 삼류로 떨어질 때 그 사회에서 기독교가 생명력을 잃는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이탈리아 같은 나라는 90%이상이 천주교 신자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천주교는 성적인 문제에 보수적입니다.  아주 엄격합니다.  그런데 이탈리아는 국민의 90% 이상이 천주교 신자인데 성적으로 그렇게 문란할 수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90%가 천주고 신자라고 하지만 전부 3류 신앙인들입니다.  신앙을 그냥 이름으로만 걸치고 다닐 뿐, 그 속에 생명이 전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한국 사회에 중요한 것도 예수 믿는 사람이 몇 명이냐가 아니라 일류 신앙을 가진 사람이 몇 명이냐가 하는 것입니다.  삼류신앙은 아무리 많아도 세상 속에서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사람이 많을 때 교회는 세상의 비난거리가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본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왜 그 모양이냐는 말만 듣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사회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갈수록 삼류신앙 가진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같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나 자신입니다.  나는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왕 믿는 예수 한 번 잘 믿어볼 생각 없습니까?  일류 신앙 가지면 먼저 내가 행복합니다.  복음의 능력, 복음의 기쁨을 체험하면 살게 됩니다.  나아가 복음의 증인이 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됩니다.  이왕 믿는 예수, 제대로 믿어야 합니다.  겸손하게 나의 신앙을 점검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본문은 바울이 유대에서 재판을 받을 때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바울은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을 마친 후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갈 때 많은 사람들이 만류했습니다.  바울 자신도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핍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도여행을 마쳤을 때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만나고 싶었고 또 특별히 전도여행하면서 예루살렘의 어려운 형제들을 위해 구제헌금 모은 것을 직접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는데 성전에서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로마 군대에 체포되어 총독에게 재판을 받게 됩니다.  이 재판은 약 2년에 걸쳐 계속되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고 그래서 바울은 황제의 재판을 요청합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의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이런 배경으로 오늘 본문에 총독의 재판의 마지막 장면이 나타나게 됩니다. 

  본문 앞부분을 읽어보면 바울은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복음을 전합니다.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어떤 것인지, 자신이 왜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 간절한 마음으로 증거를 하면서 총독에게 오히려 복음을 전합니다.  바울의 말을 다 들은 베스도 총독은 본문 24절을 보면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너의 많은 지식이 너를 미치게 했구나” 비난합니다.

  환난도 당하고, 핍박도 당하고, 감옥에도 갇히고 이제는 미친 사람으로까지 취급받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바울에게 왜 이런 어려움이 있어야 하나,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고, 오직 주님만을 위해 살아왔는데, 이런 사람은 만사형통해야 할 것 같은데 왜 오히려 더 큰 고난을 받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이럴게 될 수 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그럴 수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살고, 주님을 위해 산다고 세상에서 만사형통하는 것 아닙니다.  고난당할 수 있고, 어려움 당할 수 있습니다.  이것 먼저 분명하게 명심해야 합니다.  바울은 지금 죄 없이 붙잡혀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순간에 바울의 모습입니다.  본문은 바울이 총독에게 받는 재판의 마지막 장면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본문에는 바울의 최후진술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29절 말씀입니다.  우리 2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여러분, 참으로 놀라운 고백이지 않습니까?

  지금 거기 바울 앞에 막강한 로마의 총독이 있습니다.  화려한 분몽왕 아그립바도 있고, 세상의 권력자들이 다 모여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죄수의 몸으로 결박을 당한 채 그들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총독과 임금을 향해 이렇게 결박당한 것 외에는 당신들이 나같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는 고백입니다.  “당신들은 나의 행복을 모릅니다.  당신들이 나의 이 행복을 모르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당신들도 다 나같이 이 행복 이 기쁨 누리는 사람들 되었으면 좋겠다.”는 고백입니다.

  바울이 무엇을 가졌습니까?  세상적으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습니다.  가정이 있습니까?  재물이 있습니까?  직위가 있습니까?  명예가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초라한 한 사람의 죄수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보화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너무나 엄청난 것이요 너무도 귀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핍박도 감옥도 이 모습 이대로 행복할 뿐입니다.  총독도 왕도 이 행복 모르니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당신들도 이 행복 이 기쁨을 아는 사람 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가진 것의 가치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귀중한 것을 가져도 그 가치를 모를 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 생각해보십시다.  먼저 젊은이들은 젊음의 가치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젊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제가 부산에서 목회할 때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산동네 아주 가난한 집에 할아버지가 한 손자를 길렀습니다.  부모는 싸워서 헤어지고 할아버지가 어렵게 손자를 길렀습니다.  이 아이가 자라 서울에 대학을 갔습니다.  거기서 여자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서로 사이가 깊어져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결혼을 할 사이라면 부모에게 서로 인사를 하는 것이 좋겠다, 생각하고 서로 인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여자 부모에게 인사를 하고 그 다음 둘이서 남자 집에 할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했는데 여자가 와서 보니 부모도 없는데 집은 너무 가난합니다.  돌아가면서 마음이 바뀌어버렸습니다. 그 다음부터 남자가 만나자고하면 핑계를 대고 자꾸 회피합니다.  남자가 눈치를 챘습니다.  겨울이었는데 마지막으로 한번 만자고 해서 만났는데 여관으로 갔습니다.  남자가 문을 잠그고 석유난로를 넘어뜨리고는 말했습니다.  나와 결혼할 것 같으면 여기서 나갈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나와 함께 죽는 것이다.  여자는 설마하니 생각하고는 솔직하게 결혼하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남자가 불을 질러버렸습니다.  문을 잠근 채 석유난로를 쏟아놓고 불을 질렀으니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죽지는 않았지만 끔찍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눈 뜨고 못 볼 정도의 흉측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는 남학생이 집에 와서 누워 있는데 제가 심방을 간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제 마음이 얼마나 분노로 들끓었는지 모릅니다.  물론 애인이 배신하면 가슴이 아프지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제 이렇게 끔찍하게 화상을 입었으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갑니까?  정말 제가 가슴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 물어보십시다.  우리 20대 젊은이들, 우리나라 80된 재벌이 돈 천억 줄 테니 나이를 바꾸자고 하면 바꾸겠습니까?  천억 받고 80살 하겠습니까?  하면 무엇 합니까?  곧 죽을 텐데....  그렇다면 젊음의 가치는 천억도 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막상 젊은이들은 그 젊음의 가치를 모릅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젊음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건강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이만큼이라도 건강하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건강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바의 가치를 알아야 할 것 많습니다만 한 가지만 더 지적하고 싶습니다.  내 가족 특별히 내 아내, 내 남편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내 남편, 내 아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그 가치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의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알아야 할 것은 복음의 가치입니다.  바울이 행복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 복음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복음이 얼마나 소중하며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행복했습니다.  왕도 총독도 복음을 모르기에 불쌍했을 뿐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받은 구원이 무엇입니까?  죄로 죽었고 지옥에서 영원히 멸망당할 우리였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 세상에 오셔서 갖은 고초 다 당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나아가 우리를 위해 영원한 하늘나라까지 예비하셨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놀랍고 기이한 은혜입니다. 

  이 복음에 대한 믿음이 우리 속에서 살아 역사해야 합니다.  이것을 머리로만 믿을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뜨겁게 체험적으로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기쁘고 감격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환경을 많이 이야기 합니다.  환경 때문에 슬프고 환경 때문에 괴롭고 힘 든다고 말합니다.  깊이 생각해보면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복음이 생명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가슴이 냉랭해졌기 때문입니다.  내 심령 속에 정말 복음이 살아 있다면 우리는 이대로 죽어도 감사한 것뿐입니다. 

  복음을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십시다.  적어도 세 가지 은혜가 있습니다.  첫째는 죄 사함 받고 의롭다함 얻은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예수 믿기 전 바울의 관심도 이것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죄 사함 받고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 얻느냐?  바울은 율법을 지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예수 믿기 전 예수 믿는 사람 그토록 열심히 핍박한 이유도 여기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의롬다함 얻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나니 예수님 내 죄를 다 대신해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까지 이루어졌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은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알고 나서 전에 자랑하던 것 배설물처럼 버립니다.  배설물처럼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죄용서 받고 의롭다함 받은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죽도록 고행을 한다고 내 죄가 사해지겠습니까?  죽을 때까지 율법 지킨다고 의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복음 속에서 이 은혜를 거저 주셨습니다.  정말 놀라운 은혜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가하면 복음 속에는 두 번째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이 있습니다.  죄용서 받고 의롬다함 얻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까지 받았습니다.  자녀가 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한 마디로 사랑의 대상이라는 뜻입니다.  가장 큰 사랑의 대상이 되어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일들이 많다구요?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실패도 있고 어려움도 있고 괴로움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신데 하나님의 사랑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 나를 사랑하시기에,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뼈아픈 체험도 있고 고통스러운 경험들도 있습니다.  그 모든 아픔들을 통해 나를 자녀로서 더 성장시키시고 성숙시키십니다.  은혜요 사랑이지 괴로움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대로 만족하고 이대로 행복해야 합니다.  내가 제일 행복하니 나와 같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아가 복음 안에는 세 번째로 천국을 상속받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한 나라의 상속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미래요 그리스도인의 소망입니다.  바울에게는 이 소망이 분명했습니다.  그는 복음 안에서 지금 당하는 고난의 미래적 의미를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내가 매 맞는 것은 하나님의 앞에서 훈장으로 바뀔 것이고, 오늘 내가 능욕 당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영광으로 바꾸어질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날에는 이 모든 것이 자랑스럽게 될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장차 나타날 영광이 너무 크기에 오늘 내가 당하는 고난은 하나도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 고난이 오히려 영광이요 상급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미래는 어떠합니까?  세상의 인간적인 소망은 우리를 속이고 실망시킵니다.  그러나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은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죽은 소망, 불확실한 소망이 아니라 산 소망, 생명 있는 소망입니다.  그래서 이 소망 안에서 오늘의 어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이 소망이 있을 때 기쁨과 감격으로 살아갑니다.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그 소망 안에서 승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혼자 만족하고 자기 혼자 행복해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내 말을 듣는 당신들도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무슨 뜻입니까?  내가 복음으로 행복하기에 여러분도 나처럼 복음을 알고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당신들도 나와 함께 이 복음 알았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생각해보면 이 마음이 바로 전도입니다.  전도가 따로 없습니다.  내가 예수 믿고 정말 행복해서 이 행복을 당신도 누렸으면 좋겠다는 마음, 여기서 전도가 시작되고 여기서 전도가 끝납니다.

  내가 예수 믿고 죄사함 받은 기쁨에 당신도 나처럼 예수 믿고 죄사함 받았으면 좋겠다.  내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된 것이 너무 행복해 당신도 나처럼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예수 믿고 천국 백성된 것이 너무 좋아 당신도 예수 믿고 천국 백성되었으면 좋겠다.  이 마음이 바로 전도입니다.  그러나 전도도 먼저 내가 예수 믿고 행복해야 합니다.  내가 행복하지 않을 때 전도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신앙의 능력을 회복하는 길은 오직 하나 예수 믿고 그 행복 누리는 데 있습니다.  내가 예수 믿고 행복하면 모든 문제 다 해결됩니다.  대단한 다른 것을 더 얻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내가 받은 구원을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십자가의 공로로 내 죄가 사해져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된 감격 안에서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론이 아니라 가슴으로 뜨겁게 체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 행복이 있고 여기 능력이 있고 여기 전도가 있습니다.  이 신앙이 환경을 이기고 이 신앙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이 신앙, 이 능력 가져야 합니다.  이 복음의 능력으로 승리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하나님, 죄수의 몸으로 재판을 받으면서도 내가 믿는 예수가 너무 좋아 총독과 왕을 향해 당신들이 나같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바울의 간증을 통해 도전을 받습니다.  하나님 같은 예수를 믿는데 우리에게는 이런 기쁨, 이런 행복이 없습니다.  내가 믿는 복음의 가치를 가슴으로 뜨겁게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예수님 한 분으로 행복하고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하게 하시고, 이 능력으로 승리하며 이 행복이 너무 귀해 다른 사람도 이 행복을 함께 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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