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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마 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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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양인 목사

문둥병자의 비참함

이 세상에는 질병의 종류가 셀 수 없으리만치 많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질병 가운데서 가장 무서운 것을 들라면 누구나 문둥병을 들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병은 나병균에 의해서 감염되는데 그 증상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얼굴이나 손·발에 분포하는 말초신경, 피부, 눈에 침입하여 증상이 나타납니다.

피부 감각 그 중에서도 통각(痛覺)이 없어져서 뜨거운 물에 손을 넣어도 뜨거운 줄을 모르고 칼에 베여도 아픈 줄을 모릅니다. 그 결과, 지체를 함부로 사용해서 입은 상처 부위로 세균이 침투해서 몸이 망가집니다. 또 근육이 말라 힘이 없어지며, 손가락 운동이 되지 않는 증상이 나타나며, 내장신경이나 눈에도 감염이 됩니다. 나균이 눈에 침투하면 이로 인해 실명이 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나병은 그 증상만 가지고도  무서운 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다 나병은 인간관계를 단절시키는 병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누가 병에 걸렸다고 무시하거나 비인간적으로 대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건강할 때보다 더 큰 관심을 갖고 배려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둥병은 예외입니다. 문둥병에 걸리면 사회에서는 물론이고 가족에게서도 버림을 받습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자기 가족 중 누군가가 문둥병에 걸리면 그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 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실이 알려지면 남은 가족도 배척을 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둥병에 걸린 사람은 조용히 집을 떠나고, 남은 가족은 그를 죽은 것으로 여깁니다. 이로써 정상적인 인간관계가 단절되고 한없는 고독 속에 몸부림치게 됩니다. 사람들이 문둥병을 무서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문둥병자는 부정하므로 진밖에 나가 혼자 살아야 했습니다. 또 누가 보더라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문둥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고 사람을 만나면 윗입술을 가리우고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쳐야 했습니다(레 13:). 문둥병자는 예루살렘과 성벽이 있는 도시 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문둥병자가 가까이 다가오면 돌을 던져 쫓았습니다. 여기에는 평소에 자비를 가르치고 구제에 힘쓰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심한 경우에는 문둥병자가 지나간 거리에서 사온 계란조차도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문둥병자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

예수님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따랐습니다. 때에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말하기를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러자 즉시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졌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기를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랍비들 같았으면 문둥병자가 자기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면 기겁을 하고 손을 내 저으며 뒷걸음질 쳤을 것입니다. 또는 “저런 고얀 사람이 있느냐?”고 고함을 질렀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기들이 모세의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을 사람들 앞에 나타내 보인 것에 대하여 흐뭇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문둥병자가 그 앞에 나아와 절했을 때 거부의 몸짓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자리에 서서 동정어린 눈으로 그 병자를 내려다 보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을 받으라”고 하시며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예수님

저는 본문을 읽을 때마다 가슴 뭉클한 감동을 맛보곤 합니다. 이와 같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된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행복합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한량없으시므로 말씀 한 마디로 얼마든지 그 병자를 고쳐주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라” 명하시니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냄새가 나던 나사로가 살아나왔지 않습니까!

주님의 한 말씀에 죽은 자도 즉시 살아나왔다면 문둥병자를 고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소 병자의 몸에 손을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이야기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고통당하는 인간들을 향하신 예수님의 긍휼을 대합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보면서 동정심을 갖습니다 마는, 예수님의 긍휼하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에게는 터럭만한 악의도 찾아볼 수 없으며,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를 동정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안심하고 주님의 긍휼하심을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약 5:11下)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부정한 문둥병자를 용납하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나아오는 자들을 결코 거절하지 아니하십니다.

열 두 해 혈루증 앓던 한 여자가 무리를 헤치고 예수님 뒤로 다가가서 그 옷 가에 손을 대었더니 즉시로 주님에게서 능력이 나와서 그 여자의 혈루 근원이 말라 치료함을 받았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혈루증은 부정한 병으로서 이 병에 걸린 환자가 만진 물건이나 사람은 부정해 졌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의 만짐을 허용하셨으며 치료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여자가 주님의 옷에 손을 대었을 때, 주님께서는 가시던 발걸음을 멈추시고 주위를 둘러보시며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다들 “아니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말하기를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고 하셨습니다. 여자가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리어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시기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도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들을 용납하시고 치료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에는 신유가 가능했지만 현대와 같이 의술이 발달한 시대에는 신유가 끝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를 보아도 그런 말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히 13:8).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은 오늘도 주님 앞에 나아갈 때 병을 고쳐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죄에 감염된 인간들의 실상

한편, 문둥병은 죄를 상징합니다. 나병균이 사람의 몸에 침투하면 문둥병을 일으키듯이, 죄가 사람의 영혼에 침투하면 치명적인 병에 걸리게 만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누구나 죄에 감염된 죄인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이 세상에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죄인입니다. 아니 모태에서부터 죄인입니다. 이에 대하여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고 고백했습니다.

영혼을 죽게 하는 죄는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서 유전되었습니다. 아담의 부패한 인간성이 그의 후손에게도 그대로 유전되어 사람은 누구에게 배우지 않더라도 스스로 죄를 짓습니다. 나병균에 감염되면 사람의 말초신경이 마비되어 통증을 느끼지 못함으로 몸을 함부로 굴려서 지체가 망가지듯이, 죄는 사람의 영혼을 마비시켜서 죄를 지으면서도 가책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이사야서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에게 이르시기를 “5)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6)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하고 사람들의 생각이 항상 악한 것은 온 머리가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머리는 생각하는 곳인데 머리가 병들었으니 바른 생각이 나올 리 만무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정상적인 생각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면 이상한 사람 취급하고, 비정상적인 생각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을 온전한 사람으로 대우합니다. 그래서 요즘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이 “엽기”라는 것입니다. 소설이나 그림, 음악, 연극, 영화 할 것 없이 엽기적인 것이라야 대접을 받지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것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부정과 부패가 넘쳐나고 감각적인 쾌락을 탐하는 문화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회 곳곳에서 썩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나병을 치료하지 않으면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되듯이, 영혼의 죄를 방치하면 영원한 죽음에 이르고 맙니다.

더구나 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죄인들이 처한 가장 비참한 운명입니다.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등지고서 어찌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병이 깊어가듯이,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들은 점점 더 타락하고 죄악에 깊이 물들어 갑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타락할수록 그들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는 더 크고 무서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모든 불행의 원인이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난 데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처한 비참한 운명을 알 때, 그 사람은 비로소 살 길을 찾게 됩니다.




영혼의 병을 고치려면

죄인이 그 영혼의 병을 고침 받고 새 생명을 얻으려면, 본문에 나오는 문둥병자처럼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야 합니다. 모든 교만과 아집을 버리고 주님께 와서 꿇어 엎드려야 합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주여 저를 죄악에서 건져 주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먼저 자신의 무능을 절감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제 힘으로 자신의 실상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전적 타락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인간은 상당히 괜찮은 존재요 희망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람의 노력으로 얼마든지 비참한 운명을 개선할 수 있으며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다가 세상 종교들이 그럴듯한 이론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현혹시킵니다. 세상 종교들은 인생의 불행 원인을 잘못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죄가 모든 불행의 원인임을 모르기 때문에 다른 데서 원인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진단이 잘못되면 처방도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인간이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은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 의심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영을 보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겼습니다.

이에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고,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셔서 그들 앞에서 잡수셨습니다. 그런 다음,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셨습니다(눅 24:).

삼년이 넘도록 예수님과 동거동낙하면서 가르침을 받고 숱한 기적을 목격했던 제자들도 주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셨을 때 비로소 성경을 깨닫게 되었다면, 일평생 죄악 가운데 살던 죄인들이 어찌 스스로 자기들의 비참함을 알고 생명의 주님을 찾아 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듣게 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의 역사는 복음을 전해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비참한 운명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구원을 받으려면 일단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들을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문둥병자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 역시 그가 평소에 예수님에 대하여 들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알지도 못하면서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로마서 10장 17절에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불신 가족과 이웃들의 구원을 바란다면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해 주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때 상대방의 반응을 유의하면서 지혜롭게 전해야 하지만, 때로는 강권할 필요가 있습니다. 에스겔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말씀하시기를 “10)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 11)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쓰기를 “1)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했습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는 상대방의 반응에 상관치 말고 전도하라는 것이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는 나의 형편에 좌우되지 말고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죄인들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복된 결과를 보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죄인을 용납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죄인들이 주님 앞에 나올 때, 주님께서는 그가 어떤 사람이든 간에 거절하지 아니하시고 용납해 주십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를 보십시오. 그는 귀신들려 정신이 파탄된 여자였습니다. 그의 가족이나 친지들이 포기한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를 용납하시고 귀신을 쫓아내사 온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후로부터 막달라 마리아는 경건하고 사랑스러운 주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그의 이름 앞에 거룩할 성(聖) 자를 붙여서 ‘성․ 막달라 마리아’ 라고 부릅니다.

삭개오는 여리고의 세리장이었습니다. 그 당시 세리는 죄인과 창기와 함께 유대 사회에서 가장 멸시 받던 자들이었습니다. 세리들은 공공연히 부정하게 재산을 축재했습니다. 성경에는 삭개오가 부자였다고 증언합니다(눅 19:2). 일개 세리도 아니고 세리들의 우두머리인 세리장이었으니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돈을 모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연히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이 좋을 리 만무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그에게도 영혼의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나사렛 예수께서 여리고 거리를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기 위해 큰길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달려가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그 뽕나무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시게 될 길 가에 서 있었습니다. 그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곳에 이르신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나무를 우러러 보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평소에 예수님은 삭개오와 일면식도 없던 사이인데도 그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얼마나 긍휼하신 주님이십니까! 삭개오가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자기 집으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수군거리기를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고 했습니다.

그 날 삭개오는 주님께 말씀드리기를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죄인들이 예수님을 만나 회개하고 새 사람 된 사례는 예수님 당시 뿐 아니라 교회사 2천년을 두고 수없이 찾아볼 수 있으며, 오늘날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프리카에 가서 흑인들을 사냥해다가 배에 싣고 신대륙에 가서 팔아 넘겼던 노예상인도 예수님을 만나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작사한 존 뉴턴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도끼로 이덕주 중령 일가족 여섯 명을 살해한 고재봉이라는 사람을 아실 것입니다. 그는 군에 입대해서 소속 부대장인 박 중령 집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중 손버릇이 나빠 헌병대에 넘겨져 7개월을 복역했습니다. 그는 출감하던 날 자기를 교도소 보낸 박 중령 일가를 몰살하고 자살하기로 하고 실행에 옮겼던 것입니다. 고재봉은 그가 복역하던 동안 박 중령이 이사가고 이덕주 중령이 새로 부임한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는 자기가 몰살시킨 가족이 박 중령 가족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둣한 절망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 무렵 안국선이라는 집사님이 신문에서 고재봉에 관한 기사를 읽고 이 사람을 전도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주님께서 안 집사님에게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그는 3개월을 기도로 준비하고 교도소로 가서 고재봉을 면회했습니다. 면회실에 나온 범인을 보는 순간 안 집사님은 왜소하고 연약해 보이는 젊은이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무조건 요한복음 3장 16절로 20절까지를 봉독하고 하나님이 누구시며 예수가 누구이신가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단 15분의 전도로 마음 문이 열린 것입니다.

안 집사님이 전해준 성경을 읽고 구원의 확신을 얻은 날, 고재봉은 교도소가 떠나가리만큼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이 놈들아! 왜 나에게 진작 예수를 알려주지 않았는가! 예수를 조금만 일찍이 알았던들, 한 발짝만 일찍 예수를 알았던들 무고한 사람이 여섯씩이나 죽지는 않았을 것을" 그는 밤새도록 통곡하며 그 말을 외쳤다고 합니다.

그 날 이후로 살인마 고재봉은 교도소의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의 전도로 구원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우리 사회는 흉악한 살인범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군사법정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새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비록 무고한 일가족 여섯 명을 살해한 죄인이지만,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아뢰었더니, 주님께서는 고재봉에게 손을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사죄의 은총을 내려주셨습니다.




마지막 권면

주님께서 용서하시지 못할 죄인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천년 전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달려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지금도 생생하게 살아 역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심령에 뿌려질 때 죽었던 영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됩니다. 주님 앞에 나아와서 깨끗함을 받은 문둥병자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혼의 질병인 죄로부터 구원 받은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사랑의 빚을 진 자들입니다. 우리는 영혼의 나병에 걸려 죽어가는 불신 이웃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함으로써 이 빚을 갚아 나가야 합니다.

그런즉 주님의 긍휼하심을 힘입어 구원 받은 사람답게 이제부터 듣든지 아니 듣든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생명의 주님을 전함으로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사명을 기쁘게 감당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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