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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례 요한의 죽음 (막 6: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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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박봉수 목사

오래 전에 한 노인대학에서 “행복한 노후생활”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한 일이 있습니다. 강의 도중에 잠깐 어르신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를 여쭈었습니다.

여러 가지 의견이 오고가는 중에 한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죽을 사람이 행복은 무슨 행복?” 갑자기 장내가 조용해 졌습니다. 한 할머니께서 거드셨습니다. “그럼, 모두 죽기는 죽을 텐데 어떻게 죽느냐가 문제지...” 이 말 한 마디에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숙연해졌습니다.

저는 그날 연세가 높으신 어르신들께 오늘 하루하루 행복하게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바로 죽음의 문제요, 어떻게 죽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어떤 죽음을 바랄까요?

우선 가장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편안한 죽음일 것입니다. 잠자듯 고통 없이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저녁에 자고 아침에 깨어나지 않고 바로 저 하늘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품위 있는 죽음일 것입니다. 죽는 순간까지 믿음을 지키다가 죽는 것입니다. 죽는 순간까지 한평생 지켜온 명예와 품위를 지키며 죽는 것입니다. 온 가족과 친지들이 임종하는 가운데 품위 있게 유언을 남기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이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바라는 또 다른 죽음이 있습니다. 바로 의미 있는 죽음입니다. 많은 사람들 가슴 속에 큰 의미를 남기는 죽음을 말합니다. 남은 사람들의 삶에 아름다운 영향을 미치는 죽음을 말합니다.

우리가 고통 없이 세상 떠나는 것도 복입니다. 품위를 지키며 세상을 떠나는 것은 더 큰 복입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복은 의미 있는 죽음을 맞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미 있는 죽음의 전형적인 예가 나옵니다. 바로 세례 요한의 죽음입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옥에 갇혀있었습니다. 처형을 당해서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심지어 그 목이 쟁반에 담겨지는 수치를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결코 편안한 죽음은 아니었습니다. 고통스럽고 감당하기 힘든 처참한 죽음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또한 품위 있는 죽음도 아니었습니다. 사형수로 수치를 당하며 조롱과 모욕을 당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의미 있는 죽음이었습니다. 죽음을 지켜본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은 영향을 미친 죽음이었습니다. 주를 위해 소중하게 쓰임 받은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린 죽음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죽음의 의미를 보다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을 줄 것입니다.

1. 의로운 죽음이었습니다.

본문 17-8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세례 요한이 잡히게 된 이유를 설명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처형당하게 된 이유를 설명한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헤롯은 로마의 임명을 받아 갈릴리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헤롯 안디바를 말합니다. 그의 이복동생 헤롯 빌립은 갈릴리 동쪽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헤롯 안디바가 로마로 가던 도중에 이 이복동생 헤롯 빌립의 집에 들른 적이 있었습니다. 이 때 헤롯 안디바와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가 눈이 맞았습니다. 그래서 불륜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결혼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헤롯 안디바는 아내인 아레타스 왕의 딸과 이혼했습니다. 그리고 이 헤로디아도 빌립과 이혼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이 결혼을 했습니다. 이 때 빌립과 사이에 난 딸 살로메는 엄마 헤로디아와 함께 자기의 삼촌이자 의붓아버지인 헤롯 안디바에게 왔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율법을 어긴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출 20장의 십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제 7계명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어겼습니다. 그리고 제 10계명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말씀을 어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헤롯은 지금 십계명을 두 가지나 범한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레 20:21에서 명확하게 금하고 있는 “누구든지 그 형제의 아내를 취하면 더러운 일이라”는 말씀을 어긴 것입니다. 근친상간의 죄까지 범한 것입니다.

지금 헤롯이 율법을 어겼고 도저히 용납키 어려운 비윤리적인 행위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왕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감히 앞에서 내어 놓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본문 18절을 보면 세례 요한은 감히 왕 헤롯에게 직접 말했습니다. “그 일은 옳지 않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본문에서 ‘말하되’라는 ‘엘레겐’이란 헬라어 동사는 시제상 미완료입니다. 이것은 여러 차례 계속해서 헤롯의 잘못을 지적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공개적으로 그것도 적극적으로 불의를 지적했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문제제기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에 대해 죽기를 각오하고 책망했던 것입니다.

저는 이번 중국선교여행 중에 큰 도전과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운남성 기독교 지도자 몇 분과 식사를 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운남성 기독교 지도자들은 모두가 다 중국의 문화혁명 당시 신앙을 지키다가 큰 박해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운남신학원 원장님은 중고등학교 시절에 예수 믿는다고 학교에서 벌점 받아 고생했고, 마을에 끌려가 수 없이 매 맞고 조롱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학교나 마을 사람들 그리고 공산당에서 이 분은 지독한 기독교인이라고 낙인찍고 있었습니다. 아마 조금 문화혁명이 길어졌다면 이 분도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신학원 교무당당 목사님은 젊은 분이셨는데, 이분은 아주 어린 시절 문화혁명을 겪어서 직접 박해를 받지는 않았지만 할아버지가 목사로 순교하셨고, 아버지도 목사로 모진 박해를 받다가 오랜 세월 투옥 중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 모두가 이 분은 지독한 예수쟁이의 아들이라고 놀리고 모욕을 당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문화혁명이 끝나자 중국 정부는 자기들이 너무 심하게 박해를 했다고 기독교인들에게 일일이 찾아와 위로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순교자 가족들에게는 1000위엔, 투옥자에게는 500위엔, 그리고 매 맞고 불이익을 당했던 사람들에게는 300위엔을 지급하기로 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분들은 이 돈을 다 거절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중국교회 지도자들은 그 극심한 박해를 이긴 분들입니다. 정부가 이 사실을 알고 이분들을 기독교 지도자들로 추대해서 오늘 중국 기독교 지도자가 된 분들입니다. 예수 잘 믿다가 박해시에 변절한 사람들은 중국 정부도 인정하지 않아서 지도자로 설 수가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희생이 따르고 고난이 있다고 해도 신앙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길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눈앞의 작은 이익 때문에 신앙의 절개를 꺾어서는 안됩니다. 잠깐의 곤란함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불의와 타협해서는 안됩니다.

2. 영향을 미치는 죽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세례 요한이 죽는 과정이 정말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사건 진행과정이 이렇습니다.
헤롯이 생일을 맞아서 잔치를 벌였습니다. 고위 관료들, 군 수뇌들, 그리고 사회 저명인사들을 초청했습니다. 잔치가 한참 진행 중에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무희가 춤을 춘 것이 아니라 공주가 직접 춤을 추었습니다.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이 뜻밖의 광경에 너무 놀랐고 찬사가 대단했습니다. 헤롯도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이 때 헤롯이 기분에 들떠서 살로메에게 한 가지 청을 하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하지 않아도 될 약속을 하게 됩니다. 살로메가 엄마 헤로디아에게 의논을 합니다. 헤로디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세례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시켰습니다. 헤롯은 두려웠지만 왕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한 약속이기에 어쩔 수가 없어 허락을 하고 맙니다.

세례 요한은 이렇게 해서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세례 요한은 장난거리처럼 죽임을 당했습니다. 악인들의 노리개 감으로 처형을 당한 것입니다. 정당한 재판 절차를 거치지도 않았습니다. 아무런 진술도 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죽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경우 의인은 장렬하게 죽음을 맞지 못합니다. 죽음 앞에서 인간다운 대접도 받지 못한 채 죽음의 자리로 떠밀려 갑니다. 순교를 당한 스데반이 그랬습니다. 베드로도 그랬고, 바울도 그랬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카타콤에 끌려가 노리개 감으로 사자밥이 되었습니다. 오늘도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상식 밖의 대우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옳게 산다는 이유만으로 비인격적 대우를 받고 억울하게 고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침묵했습니다. 불의의 부당한 대우에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침묵하셨습니다. 스데반도 그랬고, 사도들도 그랬고, 고난 당한 성도들이 다 그랬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왜냐하면 불의는 우리가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보라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고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심판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을 봐야 합니다. 헤롯이 세례 요한을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20절을 보면 “헤롯이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두려워하여 보호하며 또 그의 말을 들을 때에 크게 번민을 느끼면서도 달게 들음이러라.”고 했습니다. 헤롯이 세례 요한의 비판을 달게 들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자기 아내의 성화 때문에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두었던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왕이 심히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앉은 자들을 인하여 저를 거절할 수 없는지라”고 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목을 달라고 하는 요청을 들어주자니 두려웠던 것입니다. 의인을 함부로 죽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적 약속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14-16절입니다. 헤롯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는 죽은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목 베인 요한이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세례 요한을 처형했지만 헤롯의 마음속에 세례 요한은 살아있었다는 뜻입니다. 세례 요한이 선포한 말씀이 그 마음 속에 지금도 살아 역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세례 요한이 보인 그 삶의 모습이 헤롯의 마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악인들의 마음 심령 속에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그 육체는 죽일 수 있어도 결코 그 영은 죽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히려 그 영은 죽음 뒤에 더 크게 악인들의 마음속에서 크게 영향을 미칩니다.

3. 주님의 죽음을 예고하는 죽음이었습니다.

요 1:2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세례 요한이 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말입니다.

이 말 그대로 그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선 그의 탄생부터가 그랬습니다. 요 1:6을 보면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님의 탄생을 미리 알리시기 위해 세례 요한을 태어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주님의 탄생을 알리기 위해 주님보다 6개월 일찍 태어났습니다.

또한 그의 삶과 사역이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눅 1:17 말씀을 보면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 그대로 세례 요한은 메시야를 맞을 준비를 하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장차 주님께서 베푸실 성령 세례를 준비케 하기 위해 물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높일 때 그는 자기는 그분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며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고 주님을 높였습니다.

그 뿐 아니라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오실 메시야 주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오늘 본문을 보면 그는 세상 불의 앞에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의의 승리를 각인시켰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장차 예수님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시고 그 하나님의 의로 세상을 구원하실 길을 예비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의 탄생과 그의 삶, 그리고 심지어 그의 죽음까지도 오실 메시야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의 탄생을 보면 장차 오실 주님의 탄생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을 보면 장차 오실 주님의 삶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메시지를 들어보면 장차 오실 주님의 메시지를 미리 들을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그의 죽음을 보면 장차 오실 주님의 죽음을 미리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은 오실 메시야 주님의 예고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것을 준비시키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오늘의 성도들에게 증인의 사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에게 오실 메시야를 예고하도록 하셨다면, 주님의 제자들에게는 오신 메시야를 증거하도록 하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가 오신 메시야를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말을 들으면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지켜보면서 주님의 삶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와 교제하면서 주님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길거리에서 전도하던 아이언 사이드 박사에게 한 무신론자가 도전장을 냈습니다. 기독교 신앙과 무신론을 두고 공개토론을 하자는 것입니다. 자기가 청중동원과 모든 비용을 대겠다는 것입니다.

이 제안을 받고 사이드 박사는 수락하면서 한 가지 덧붙여 제안을 했답니다. 당신이 믿는 무신론을 믿고 변화된 사람 두 사람을 증인으로 데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자기는 예수 믿고 변화된 사람 100명을 증인으로 데리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 제안을 듣고 그 무신론자는 아무 소리 하지 못하고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할 때 우리가 증인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로 그리고 삶으로 예수를 증거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세례 요한의 죽음을 살폈습니다. 그의 죽음은 편안한 죽음은 아니었습니다. 품위 있는 죽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의미있는 죽음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사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잘 죽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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