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님의 제자들 시리즈 설교 ⑤] 차가운 머리 빌립 (요 6:5-13)

  • 잡초 잡초
  • 1203
  • 0

첨부 1


- 설교 : 이하준 목사

가슴은 뜨겁고 머리는 차갑게

IQ 검사라는 것이 있습니다. IQ란 Intelligence Quotient의 약자로 ‘지능지수’를 뜻합니다. 한 마디로 얼마나 머리가 좋으냐? 얼마나 지능이 발달하고 이성이 발달해 있느냐를 숫자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이 IQ도 중요하지만 또 다른 지수들도 매우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즉, EQ(감성지수), MQ(도덕성지수), PQ(열정지수) 등이 그것입니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단순히 지능지수인 IQ만 높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방금 말한 EQ, MQ, PQ 등이 골고루 발달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보면 유난히 이 지능지수가 발달한 사람, 즉 머리가 좋다기보다는 머리가 발달되고 이성이 발달된 분들이 있습니다. 또 반대로 유난히 EQ(도덕성지수)나 PQ(열정지수)가 발달되어 뜨거운 열정과 감성을 지닌 분들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전자는 ‘머리가 차가운 사람’이요 후자는 ‘가슴이 뜨거운 사람’입니다. 이런 분들의 성격은 회의를 하다보면 금방 드러납니다. 가슴이 뜨거운 분들은 교회에서 무슨 일이든지 일단 하고 보자고 주장합니다. 돈도 없고 체계적인 계획도 없는데 일단 하고 보자, 믿음으로 하자고 말합니다. 가슴이 뜨거우니까 열정을 가지고 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때 머리가 차가운 분들은 반대를 합니다. “무슨 소리냐? 돈도 없는데, 계획도 잘 세워지지 않았는데 이렇게 일을 합리적으로 안 하고 일단 벌려놓고 보자고 하면 큰일 난다.” 늘 교회 안에는 이 두 가지 성격의 사람들이 공존합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전자처럼 가슴이 뜨거운 분들을 ‘믿음이 좋다’고 평하고, 후자처럼 머리가 차가운 사람을 ‘믿음이 없다, 너무 차갑다, 너무 이성적이다’라며 비난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런 이성적인 분들이 없으면 교회는 큰일 납니다. 무조건 ‘믿습니다’ 하고 밀어 붙이면 일이 다 됩답니까? 교회가 엉망이 됩니다. 큰 혼란이 옵니다. 그래서 너무 가슴만 뜨거우면 안 되고 적절히 냉철한 이성으로 속도조절 할 사람이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또 한 가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머리만 차가우면 어떻게 되는가? 신앙에는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깊이 생각하고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 판단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이성만 가지고 일을 하면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교회도 은혜와 능력이 뜨겁게 나타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머리만 차가워도 안 되고 가슴만 뜨거워도 안 됩니다. 머리만 차가우면 능력이 안 나타납니다. 너무 율법적이고 냉랭한 교회와 신앙생활이 됩니다. 가슴만 뜨거우면 규모가 없고 혼란이 옵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슴이 뜨거운 사람도 있어야 하고 머리가 차가운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을 너무도 적절하게 잘 섞어서 사용하십니다. 그러니 서로 비난하거나 함부로 판단하지 맙시다. 회의를 하다가 이성적인 사람이 있으면 “아, 저 사람은 하나님이 머리를 유난히 차갑게 만든 사람이구나.” 생각하고, 또 너무 열정적인 사람이 있으면 “아, 저 사람은 하나님이 가슴을 유난히 뜨겁게 만든 사람이구나.” 하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지고 힘을 모아 상호 보완작용을 할 때 그 교회는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입니다.

제가 모교회 대학부에 다닐 때 회가에 이런 가사가 있었습니다. “아아, 가슴은 뜨겁고 머리는 차갑게...” 맞습니다. 이게 정답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 성도들은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를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덕목만 함께 가지고 있으면 놀랍게 균형 잡힌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도 균형이 잡힙니다. 머리가 차가운 것은 좋은 장점이지만 가슴마저 차갑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어렵습니다. 가슴이 뜨거운 것도 좋은 장점이지만 머리까지 뜨거우면 광신과 맹신으로 갑니다. 우리는 진정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이 조화를 이룬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크게 들어 쓰십니다.




오병이어 사건의 세 등장인물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그 유명한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이 오병이어 사건에 대해서는 지난주에 이미 안드레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함께 살펴본 바 있습니다만 드물게도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네 개의 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사건이며 예수님이 공생애 3년 간 베푸셨던 수많은 이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만은 다른 세 복음서에 비해 독특한 내용이 많이 나온다고 했지요?

첫째는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이 오병이어 사건의 재료가 된 보리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제자들이 아닌 이름도 모르는 ‘한 아이’가 내 놓은 것으로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이 아이를 주님께로 데리고 온 안드레의 역할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씩 먹이더라도 최소한 이백 데나리온이 필요합니다.”라고 대답한 빌립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간단하게 이 세 사람의 성격과 태도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아이’와 안드레의 믿음

먼저 이름도 없는 ‘한 아이’는 아주 순수하고 단순한 믿음을 가진 아이입니다. 주님께서도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한다(막 10:15).”고 하셨는데 이는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고 단순한 믿음을 가져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한 아이’의 믿음이 귀합니다. 제가 왜 이 ‘한 아이’를 순수하고 단순하다고 하겠습니까? 지난주에도 말씀드린 것같이 이 아이는 아주 검소하고 보잘 것 없는 도시락을 싸왔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먹을 것이 없이 배고플 때 이 아이는 잠시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그냥 이 도시락 남들 없는 데 가서 몰래 혼자 먹을까? 아니면 아무리 적은 음식이지만 꺼내서 주위 사람들하고 조금씩 나누어 먹을까? 아니야, 그렇게 먹어봐야 얼마나 먹겠어? 지금 제일 배고프신 분은 아마 예수님일거야.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듣기만 해도 배가 고픈데 저렇게 열심히 설교하신 예수님은 얼마나 배가 고프실까? 이 도시락을 예수님께 드려야지!” 그런데 그 순간 또 하나의 고민이 생긴 것입니다. “아니야, 귀하신 예수님께 드리기에는 이 도시락이 너무 보잘것없잖아? 괜히 드렸다가 핀잔만 받으면 어떻게 하지? 도대체 어떻게 한담? 이걸 드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래서 결국 이 아이는 예수님께 그 도시락을 직접 들고 가기보다 자기 주변에 있는 제자 안드레에게 먼저 가서 도시락을 내놓은 것입니다.

보십시오. 얼마나 순진하고 얼마나 단순합니까? 만약 이 아이가 복잡한 생각을 하고 머리를 썼다면 틀림없이 혼자 몰래 가서 도시락을 먹거나, 아니면 결국 미안한 마음과 체면 때문에 주님께 그 도시락을 가져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아마 오병이어 사건도 없었을지 모르지요. 어른들은 항상 이게 문제입니다. 늘 생각이 너무 많고 복잡해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손해를 볼지 이익을 볼지 계산하고 또 체면 차리랴 눈치 보랴 그래서 못하는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부자 청년이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고 나를 좇으라.” 하신 주님의 명령을 듣고 근심하며 간 이유가 무엇입니까?(마 19:21~22) 성경은 그에게 재물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재물이 많아서가 아니라 생각이 많아서입니다. 재물 아까운 생각, 예수님을 좇음으로서 얻을 것과 잃을 것을 복잡하게 생각하다 보니 결국 좇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달랐습니다. 이 아이가 복잡한 어른이 아닌 단순한 아이였기에, 그리고 순수하고 소박한 마음을 가진 소년이었기에 그는 결국 도시락을 안드레를 통해 주님께 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에게도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지만 결국 주님께 그 도시락을 드리고 싶은 소박한 마음과 열정 때문에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봅니다. 왜 하필 주님은 그 위대한 오병이어 사건을 바로 한 아이의 소박하고 보잘것없는 작은 도시락에서 시작하신 것일까요? 주님이라면 오병이어 없이도 얼마든지 놀라운 이적을 일으킬 수 있으셨을 텐데 말입니다. 그것은 분명 이 소년의 뜨거운 열정과 순수한 마음을 통해 이적을 일으키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이렇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많은 재산이나 좋은 환경이 아니라 바로 너의 순수하고 단순한 마음, 나에게 바치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이다.”




두 번째 등장인물이 바로 안드레였지요? 지난주에 이미 살펴본 대로 안드레는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한 아이’를 주님께 데리고 오면서 “주님, 여기 아이 하나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여기 이 아이가 가져온 도시락이 있습니다. 이 보잘것없는 도시락을 뭐에다 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 주님은 크게 쓰실 것으로 믿습니다.” 이 안드레의 작지만 큰 믿음과 자세 역시 한 아이의 오병이어 도시락과 더불어 놀라운 역사를 일으킨 원동력이 됩니다.




빌립의 믿음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인물은 빌립입니다. 빌립이라는 이름은 열두 제자 목록 중 늘 다섯 번째 나타나는데 서열로도 뒤쪽이지만 이 이름은 성경에 그리 자주 나오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사마리아에서 전도한 후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 전하고 세례 준 빌립은 이 빌립과 다른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빌립에 관한 이야기는 요한복음에만 네 번 나오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내용이 바로 오늘 본문인 오병이어 사건에 나타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빌립은 어떤 성격을 가진 사람입니까? 5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이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그런데 왜 하필이면 주님께서 열두 제자들 중에 빌립에게 이 질문을 하셨을까요? 그 대답은 6절에 나옵니다. 6절을 함께 읽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이 오천 명 먹이는 것이 너무나 걱정되어 우연히 옆에 있던 빌립에게 무심코 툭 던진 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의도를 가지고 빌립이라는 제자에게 물어보신 것입니다. 무슨 의도입니까? 바로 빌립을 시험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빌립이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임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 합리적인 이성주의자, 머리가 차가운 빌립이 뭐라고 대답할까 일부러 물어보신 것입니다. 아니, 이 빌립이 이미 어떻게 대답할지 알고 물어보신 것입니다. 과연 빌립은 예수님의 생각대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얼마나 기막히게 빠르고 정확한 계산입니까? 빌립은 IQ가 높은 사람이고 계산이 빠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기 무섭게 금방 그 머리 속에서 계산이 끝난 것입니다. “장정만 오천 명이니까 여자와 아이까지 치면 줄잡아 만 오천 명 이상이 될 텐데 한 사람 당 허기라도 면하게 해주려면 대충 이백 데나리온은 넘게 나오겠구나.” 이런 식으로 말입니다. 식당에 가면 꼭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 먹은 메뉴가 뭐뭐인데 이건 얼마 저건 얼마니까 도합 얼마다.” 얼마나 계산이 빠른지 모릅니다. 주인이 전자계산기 두드려보기도 전에 벌써 계산이 다 나옵니다.

그런데 이러한 빌립의 대답 속에는 이백 데나리온이 필요하다는 단순 계산을 넘어 도저히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까지 포함된 것입니다. “주님, 이백 데나리온이 넘는 돈이 필요한데 지금 우리 현실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액수 아닙니까?” 이런 뜻이 들어있는 것이지요. 이 얼마나 현실적으로 정확한 판단입니까? 정확하게 계산해봐서 안 되면 빨리 포기해야지요. 그 안 되는 것 붙들고 끙끙대봐야 시간 손해, 돈 손해, 정신적인 손해라는 치밀하고 현실적인 계산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도 가끔 안 되는 일 가지고 붙들고 앉아서 손해만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빌립처럼 현실적인 사람들이 볼 때 대단히 한심하고 무능해 보이는 일입니다. 그런데 꼭 그렇게만 볼 수 있을까요? 신앙적인 면에서는 반드시 이성만 가지고, 합리성만 가지고 설명이 안 되는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빌립은 특유의 이성적인 자세로, 지극히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생각을 가지고 지레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머리가 차가우니 주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주석가는 “빌립에게는 건전한 이해력은 있었으나 신앙은 없었다.”고 지적하고 또 어떤 분은 “빌립에게는 오천 명을 먹일 돈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오천 명을 먹일만한 믿음이 없었다.”고 말합니다만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빌립에게는 차가운 머리는 있었으니 뜨거운 가슴은 없었다. 참 아쉬운 장면입니다. 앞서 살펴본 ‘한 아이’나 안드레에게는 있었지만 빌립에게는 없었던 것, 그것이 바로 뜨거운 가슴, 할 수 있다는 믿음과 하고자 하는 열정이었습니다. 이것이 없었기에 빌립은 자신을 제한하고 주님의 능력을 제한했습니다. 오늘날에고 이런 분들이 많기에, 그래서 할 수 있는데, 분명히 믿음 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능력 안에서 해낼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레 못한다고 뒷걸음치는 이들이 많기에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빌립에게 느끼셨던 것과 똑같은 안타까움을 가지고 그들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또 다른 장면

이 빌립의 성격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성격을 잘 나타내 주는 또 다른 본문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요 1:43~46에 빌립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된 후 제일 먼저 친구인 나다나엘을 찾아가 전도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언뜻 보면 ‘와 보라!’라고 단호하고 분명하게 전도하는 열정이 불타오르는 뜨거운 사람처럼 보입니다만 대화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이 빌립이 얼마나 이성적인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먼저 “우리가 그 이를 만났다.”고 증거합니다(45절). 빌립의 입장에서 보면 메시야가 자기를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자기가 메시야를 찾아 만난 것입니다. 이것은 이성주의자의 관점에서 본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이성주의자들은 “주님이 나를 찾아와 만나주셨다.”가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만났다. 내가 내 발로 교회 찾아가 예수 믿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성적이기는 하되 정확하게 틀린 말입니다. 기독교는 불교 등과 달리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종교가 아닙니다. 신이 인간을 찾아오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찾아와 만나주신 것이지 내가 찾아가 만난 것이 아닙니다.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이성이 저를 지배할 때 제 발로 교회 찾아가 믿은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에 신앙이 들어오니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찾아가 만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찾아와 주신 것이로구나.” 이게 이성과 신앙의 차이입니다.

또한 빌립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느냐?”고 물은 나다나엘(빌립보다 한 술 더 뜨는 이성주의자입니다.)에게 긴 얘기 안 합니다. 딱 한 마디 ‘와 보라!’고 말합니다. 유유상종이라고 똑같은 사람끼리 어울려 친구가 되는 모양입니다. 나다나엘도 빌립 못지않은 이성주의자요 합리주의자인데 빌립은 그에게 긴 설명 안 합니다. 확신을 가지고 ‘와 보라’고 말합니다. “내가 이리 보고 저리 보고 깊이 생각해 봤는데 저 분은 틀림없이 메시야야. 그러니까 잔말 말고 와보라는 말이야.” 이성주의자들은 자기가 이성적으로 판단해 틀림없으면 이런 분명한 확신과 자신감을 갖습니다. 그리고 긴말 안 합니다. 그랬더니 나다나엘은 이 ‘와 보라’는 말 한 마디만 듣고 군소리 없이 따라 나섭니다. 아마 “이 친구 평상시에 하는 행동 봐서 틀림없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똑같은 이 두 친구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빌립의 성격을 분명히 읽게 됩니다.

또 한 가지 결정적인 장명이 바로 요 14:8~11에서 빌립이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요구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모아 놓고 자신이 천국으로 가실 것임을 예언합니다. 이 때 도마(바로 그 의심 많은 제자입니다.)가 묻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그 성격 어디 가나요? 정말 도마다운 질문입니다. 이 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그 유명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입니다. 그런데 이성주의자 빌립이 이 때 한 술 더 떠서 이렇게 요구합니다. “주님, 그러면 그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세요. 그러면 만족하겠습니다.” 자신이 궁금한 것은 꼭 물어봐야 하는 성격이요 반드시 확인해야만 하는 성격입니다. 봐야만 믿는다는 지극히 이성적인 성격입니다. 그런데 이런 빌립이 변했습니다. 변해도 완전히 변했습니다.




빌립의 변화

교회사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빌립은 소아시아 선교를 담당하다가 순교를 당했는데 나무기둥에 거꾸로 매달려 죽음을 당했다고 합니다. 순교를 당할 때 유언으로 자기 시체를 세마포 대신 갈대로 싸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시체를 세마포로 쌌는데 나는 예수님처럼 세마포에 쌀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차갑던 빌립이 뜨거운 열정을 가진 전도자로 변했습니다. 머리만 차갑던 빌립이 가슴이 뜨거운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놀라운 변화는 어떻게 생긴 것일까? 성경에는 이 변화에 대해 직접적인 설명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먼저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대답을 했던 빌립이 예수님의 의도대로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고 목격하면서 조금씩 태도에 변화가 왔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을 통해 뜨거운 성령체험을 함으로 완전히 변화되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차갑던 머리가 뜨거워진 것은 아닙니다. 차가운 머리라는 장점은 그대로 둔 채 차가웠던 가슴이 뜨거워진 것입니다. 어떻게요? 주님의 기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결정적으로 성령충만 해졌기 때문입니다. 머리와 가슴이 다 차가운 사람이 성령 충만해지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열정이 생기고 신앙에 불이 붙습니다. 그러니 부끄러워 전도 못하고 체면 상 전도 못 하던 사람이 전도도 하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노방 전도를 하면 효과가 없다고 이성적으로 비판만 하던 사람이 전도지 들고 거리로 나가게 됩니다. 또 순교까지 할 수 있는 열정이 생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성품과 신앙을 돌아보십시오. 머리가 차갑되 가슴까지 차가워서 문제입니까? 그러면 성령충만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뜨거운 가슴을 갖게 됩니다. 열정이 생기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해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충성스러운 헌신봉사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가 ‘가슴은 뜨겁고 머리는 차가운’ 복음의 능력자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