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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제자들 시리즈 설교 ④] 작은 것들의 사도 안드레 (요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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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하준 목사

가능성을 본 사람들

‘천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상대성원리를 발견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입니다. 그런데 이 아인슈타인은 놀랍게도 어려서 저능아로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4살까지 말도 제대로 못했고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성공할 가능성의 희박하다.”는 담임선생님의 평가가 적혀있을 정도여서 결국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퇴학을 당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인슈타인을 저능아로 보고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만은 달랐습니다. 아인슈타인이 공부를 못 한다고 매를 맞아 빨갛게 부어버린 손에 입을 맞추면서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아, 너에게는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한 특별한 재능이 있단다. 너는 반드시 훌륭한 일을 하게 될 거야.”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남들이 저능아라고 포기한 아들에게서 남들이 갖지 못한 특별한 재능을 발견해낸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내 삶을 바꾼 칭찬 한마디>라는 책이 나왔는데 여기 소개된 32명의 사회명사들 이야기를 보면 이런 내용이 참 많이 나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테너로 우뚝 선 임웅균교수(크리스천)는 어려서부터 목소리가 남달리 컸습니다. 그래서 남들은 그의 우렁찬 목소리를 그저 꽥꽥거리는 듣기 싫은 소리, 고성방가로만 생각했는데 음악 선생님은 그의 가능성을 인정해 세계적인 성악가로 우뚝 설 수 있는 용기를 주었습니다. 부상으로 의기소침해 탈의실에 앉아 있던 축구선수 박지성의 마음을 읽고 “정신력이 훌륭해.”하며 자극을 준 히딩크 감독의 배려도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보잘것없는 한 사람 속에서, 또 어려운 환경과 현실 속에서, 우리가 가진 작은 능력 속에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하느냐, 어떤 미래를 보느냐가 정말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오늘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안드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안드레 이야기는 성경에 그리 많이 안 나옵니다. 복음서에서 안드레의 이름이 단독으로 언급되는 경우는 겨우 아홉 번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비중을 따졌을 때 지난주까지 살펴본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 세 명의 A급제자에 비해 B급제자로 분류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B급밖에 안 되는 제자에게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1등만 인정해주고, 오직 일류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 경쟁사회 속에서 안드레 같은 B급, 2류 인생은 우리에게 고려할 가치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안드레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과정이 나와 있습니다. 안드레는 본디 세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하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안드레는 예수님의 첫 제자가 되었고 초대교회에서도 이 사실을 인정해서 안드레를 ‘첫 제자’라고 불러주었습니다. 그런데 41절에 보면 이 안드레가 예수님을 따른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자기 형제 시몬(베드로)을 만나 예수님께 데리고 온 일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안드레가 참 훌륭한 사람입니다. 안드레가 예수님을 믿게 된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바로 전도였습니다. 그것도 자기 친형제를 제일 먼저 전도했습니다. 우리도 안드레를 통해 예수님 믿은 후 제일 먼저 해야 할, 제일 중요한 일이 전도임을 깨달아야 하고, 더욱이 가족전도가 가장 시급하고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안드레는 형제 베드로를 주님께 인도함으로서 ‘첫 제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첫 전도자’가 되는 영예도 얻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생깁니다. 나중에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먼저 제자가 되고 베드로를 인도했던 안드레는 솔직히 제자 중에도 조금 별 볼일 없는 B급제자가 됩니다만 형제인 베드로는 자기보다 나중에 제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A급제자요 열두 제자를 대표하는 수제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사실 이런 일들이 세상에 많습니다. 나는 몇 년씩이나 열심히 공부해 왔는데 나보다 훨씬 늦게 공부를 시작한 친구가 나보다 더 좋은 성적을 받기도 하고, 음악이나 미술도 한참 나중에 배우기 시작한 사람이 훨씬 뛰어난 실력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 안에는 이런 일이 더 많습니다. 한참 나중에 예수 믿기 시작한 사람이 신앙생활 더 잘 하고, 봉사도 더 잘 해서 장로님, 권사님도 먼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 사람 제가 20년 전에 뺀질거리고 도망만 가던 사람 전도했더니 나보다 먼저 권사님 되고 장로님 됐습니다.” 이런 말 종종 듣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된다.”(마 19:30)고 말씀한 것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억울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또 형제가 있지요? 바로 야고보와 요한 형제입니다. 이 둘을 보면 물론 요한 쪽으로 조금 기울기는 하지만 둘 다 예수님의 A급제자요 귀한 지도자가 되지 않습니까? 이들에 비해 베드로 안드레 형제는 너무 차이가 납니다. 저 같으면 항의할 만도 할 것입니다. “아니, 주님! 저는 주님의 첫 제자 아닙니까? 제자가 됐어도 제가 먼저 됐는데 왜 나중에 온 베드로가 수제자입니까?”하고 말입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내가 이 교회 창립멤버요 첫 교인인데 왜 인정 안 해주냐?”, “내가 먼저 이 교회 나왔는데 왜 먼저 온 사람은 대접 안 해주고 나중에 온 사람만 위해 주냐?” 때로는 새신자를 우대해주면 불만 섞인 말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새신자만 신자냐? 오래 다닌 사람도 좀 위해 주라.” 심지어 조금 전에도 말씀 드렸지만 자기가 전도해서 교회 나온 사람이 자기보다 열심히 신앙생활 해서 먼저 직분도 받게 되면 불편한 마음을 갖는 분도 있습니다. “야, 내가 전도한 사람이 저렇게 열심히 예수 믿어서 직분도 받는구나.”하고 뿌듯해 하거나 “저 사람 저렇게 잘 믿는 동안 나는 뭐했나? 제자리걸음만 했구나.”하고 조금은 부끄러워해야 마땅한데 오히려 불편해 하고 불만스러워 하는 분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태도가 잘못된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나중에 온 사람이 나보다 더 열심히 신앙생활 했다면 당연히 먼저 중직을 받는 것이지요. 그에게 나보다 뛰어난 재능과 달란트가 있다면 당연히 더 귀하게 쓰임 받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안드레의 이름 앞에는 늘 ‘베드로의 형제’라는 수식어가 따라옵니다. 그야말로 안드레는 평생 형제인 베드로의 그늘 아래 가려 살았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안드레는 나중 된 자인 형제 베드로에 비해 정말 작은 사도였지만 결코 그의 가치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형제의 뛰어난 잠재력을 보고 그 안에서 놀라운 가능성을 보았기에 안드레는 질투도 하지 않고 불편한 마음도 갖지 않고 형제를 세워주고 그의 리더십을 따라주었던 것입니다. 비록 나보다 뒤에 나타난 사람이라도, 또 자기가 인도한 사람이라도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을 보면 기꺼이 그에게 주연 자리를 양보하고 뒤로 물러설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훌륭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요 작은 거인 아니겠습니까?




바나바와 바울

성경에서 이런 사람이 또 있을까요? 아주 좋은 예를 바나바와 바울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한 때 기독교의 핍박자였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자 그를 만나 친분을 맺은 뒤 바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사울을 소개하고 그를 대변해 주었습니다(행 9:26~27). 또 바나바는 바울이 핍박을 피해 다소에 가 있을 때 그를 찾아가 안디옥으로 데리고 옵니다. 안디옥교회에서 바나바와 바울 두 사람은 성도들을 가르치면서 교회를 크게 부흥시킵니다(행 11:25~26). 그리고 두 사람은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아 선교사로 함께 동역하게 되고(행 13:1~3) 결국 바울은 바나바의 도움과 인도를 받아서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됩니다. 그러면 이 위대한 지도자 바울은 어떻게 발탁된 것입니까? 바로 바나바가 회심한 바울을 처음 보았을 때 그 안에 잠재된 열정과 능력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비록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사람이지만 이 정도의 열정과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분명히 나중에 예수님을 위해 큰 인물이 될 것이다.” 핍박자 바울 속에서 위대한 예수님의 사도로서 가능성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도와주고 다소까지 가서 찾아내고 함께 동역해서 결국 바울을 가장 위대한 사도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은 뒤로 물러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억울하겠지요? 하지만 신앙적인 눈으로 보면 아닙니다. 사람을 볼 줄 알았고 키워줄 줄 알았던 바나바, 그를 키워 전면에 내세우고 위대한 지도자로 만든 후 자신은 뒤로 물러날 줄 알았던 바나바는 비록 바울보다 위대한 사람으로 우리들 기억에 남지는 못했어도 분명 하나님 앞에서는 바울 못지않게 칭찬 받고 인정받았을 것입니다.




안드레의 눈

안드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형제 베드로 안에서, 그 무식한 시골 어부 속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본 것입니다. 형제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기 때문에 그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압니다. 형제 베드로의 반석 같은 성품을 보면서 안드레는 “이만하면 훌륭한 제자가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 그를 예수님께 데려간 것입니다. 그래서 42절에 보면 주님은 안드레가 데려온 베드로를 보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베드로)라 하리라.” 주님도 베드로를 처음 본 순간 그 속에 들어있는 반석 같은 성품과 잠재된 무한한 능력을 보신 것입니다. 이것을 한자로 ‘혜안’이라고 합니다. 이 ‘혜안’이라는 말이 비록 불교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 뜻이 ‘사물을 꿰뚫어 보고 앞날을 내다볼 줄 아는 눈’을 뜻하므로 여기서 사용한 것입니다. 바로 이 혜안을 물론 우리 주님도 갖고 계셨지만 예수님의 제자 중에는 누구보다 안드레가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일궈낸 히딩크 감독은 바로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월드컵의 영웅이 된 베스트11은 당시만 해도 거의 무명에 가까운 선수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히딩크 감독은 이 무명 선수들 속에서 월드컵의 신화를 이룰 가능성을 보고 발굴해서 훈련시키고 갈고 닦아 결국 명품을 만든 것입니다.

안드레, 바나바, 히딩크 이런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지요? 바로 작은 것에서, 보잘것없는 것에서 큰 것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드레는 오늘 설교제목에도 나오듯 ‘작은 것들의 사도’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혜안과 능력을 가지게 되기 바랍니다. 사람을 알아볼 줄 알고, 그 잠재된 능력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도 ‘혜안’ 수준은 아니지만 가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아, 이 사람은 지금은 예수 안 믿고 고집 부리지만 예수 믿으면 정말 잘 믿겠다.” 또 바나바처럼, 안드레처럼 그 사람을 도와주고 밀어주고 키워줘서 능력을 발휘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는 뒤로 빠져서 그 사람을 빛나게 해주고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합니다. 여러분, 명심하십시오. 위대한 지도자감은 많지 않습니다. 누구나 다 타고난 능력과 잠재력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아주 소수입니다. 보통은 내가 그런 능력을 타고나지도 않았는데 욕심 부리고 남들 잘 하는 것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알아보고 발굴하고 키워주는 일, 마치 진흙 속에 묻힌 보석을 발견해서 갈고 닦아 빛나게 해주는 것과 같은 일도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또한 위대한 일입니다.




한 아이의 도시락에서

이외에도 안드레에 관한 이야기들이 성경에 몇 군데 나오지만 그 가운데서 가장 주목해서 봐야 할 본문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 사건입니다. 이 오병이어 사건은 드물게도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네 개의 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사건으로 가장 대표적인 예수님의 기적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마태(14장) 마가(6장) 누가복음(9장)은 그 내용이 서로 비슷한 데 비해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아주 독특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즉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 오병이어 사건의 재료가 된 오병(보리떡 다섯 개)과 이어(물고기 두 마리)를 제자들이 내놓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요한복음에서만은 이름도 모르는 한 아이가 내 놓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을 보면서 이 무명의 아이에게 주목합니다. 그저 성경에 ‘한 아이’라고만 되어 있는 이 무명의 아이가 주님을 위해 기꺼이 내놓은 도시락이 오병이어 기적의 근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 ‘한 아이’의 귀한 헌신에도 주목해야 하겠지만 오늘 우리가 주목할 인물은 바로 그 아이를 주님께 데려온 안드레입니다. 요 6:8부터 보면 오천 명의 무리가 모여 먹을 것이 없을 때 안드레가 주님께 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주님, 여기 한 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성경에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지만 우리는 이 아이가 기꺼이 자기가 가진 도시락을 내놓기로 하고 제자 안드레에게 먼저 말을 꺼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이 아이는 오천 명은 꿈에도 생각 못 하고 순진하게 자기 도시락을 주님께 드리기로 마음먹은 모양입니다. 하지만 감히 예수님께 이 거칠고 보잘것없는 음식을 드리기가 죄송스러워 제자인 안드레에게 먼저 말을 꺼낸 것 같습니다. 안드레는 이 사실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했고 그래서 주님께 와서 이 사실을 고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오병이어라는 놀라운 사건 속에서 제자 안드레가 했던 작은 역할을 발견하게 됩니다. 안드레는 아마 주특기가 누군가를 주님께 데려오는 일이었던 같습니다. 자기 형제 베드로도 주님께 데려오고, 또 도시락을 가진 한 아이도 주님께 데려옵니다. 교회에 보면 꼭 혼자 안 오는 분들, 빈손으로 안 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꼭 어떻게든지 누군가를 전도해서 함께 데리고 오려고 애쓰는 분도 있고, 무슨 모임 때마다 진수성찬은 아니라도 늘 정성스럽게 음식이나 차를 마련해 와서 다른 사람을 나누어주는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참 귀한 태도입니다. 안드레 같은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 안드레가 데려온 사람들은 누가 봐도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요 지극히 작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촌뜨기 어부 베드로가 그랬고 도시락을 가진 아이가 그랬습니다. 오병이어, 즉 보리떡과 말린 (작은) 물고기는 당시 서민들이 일상적으로 먹던 아주 소박한 음식입니다. 한마디로 별 볼일 없는 음식이지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주님은 이 안드레가 데려온 별 볼일 없는 두 사람, 그리고 그들의 성품이나 능력, 그들이 가지고 온 보잘것없는 음식을 가지고 놀라운 일들을 일으키십니다. 한 사람은 위대한 수제자로 만드시고, 또 한 사람의 도시락은 엄청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는 재료로 사용하십니다.

어쩌면 안드레는 이런 능력을 가진 제자인지도 모릅니다. “주님, 여기 사람을 하나 데리고 왔습니다. 여기 한 아이가 가져온 도시락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 이런 도시락을 뭐에다 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마 주님은 크게 쓰실 것으로 믿습니다.” 과연 그 믿음과 기대대로 주님은 그 재료를 가지고, 그 사람을 가지고 위대한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무슨 능력이 있나요? 우리가 가진 적은 것으로 무슨 선한 일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본문 7절에 제자 빌립은 “이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씩 먹이더라도 최소한 이백 데나리온이 필요합니다. 돈도 없지만 설령 돈이 있다 해도 이 광야에서 어디 가서 그 많은 음식을 한꺼번에 사올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합니다. 얼마나 기막히게 빠르고 정확한 계산입니까? 얼마나 현실적으로 정확한 판단입니까? 하지만 우리도 오늘 이 빌립처럼 지극히 현실적이고 계산적이며 이성적인 기준을 가지고 주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떤 주석가는 “빌립에게는 건전한 이해력은 있었으나 신앙은 없었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안드레는 달랐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달라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적고 보잘것없지만, 어느 것도 할 수 없지만 우리는 그저 믿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그리고 재료들을, 때로는 내가 가진 시간이나 재물이나 재능을 주님께 가져옵니다. 누가 봐도 “저런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하겠나? 저렇게 보잘것없는 능력이나 물질로 뭘 하겠나?” 싶겠지만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 있었기에, 이 작은 도시락에서 큰일을 기대했기에 안드레는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보았던 사도인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유세비우스라는 분이 쓴 교회사에 의하면, 안드레는 러시아, 그리스, 소아시아 등에서 선교하다가 주후 69년 11월 30일에 그리스 아가야에서 “아멘, 주 예수여 영광을 홀로 받으시옵소서.” 하는 말을 남기고 엑스(X)자로 된 십자가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 X자 모양으로 된 십자가를 ‘성 안드레의 십자가’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 엑스 자 모양의 ‘성 안드레 십자가’는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보기 힘들지만 서양의 성당 같은 곳에 가보면 종종 종탑 위에 높이 달려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스코틀랜드에서 이 안드레를 성인으로 추대했고 그래서 스코틀랜드 국기에는 X자의 성 안드레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것입니다.

안드레는 B급제자로 형제 베드로에 비해 정말 비중이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A급제자가 필요한가 하면 반드시 B급제자도 필요합니다. 아니, 비록 우리가 말로는 안드레를 B급제자라고 부르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런 아름다운 B급이 많이 필요합니다. 개개인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 작은 것에서 큰 것을 볼 줄 알고, 다른 사람의 능력을 읽을 줄 알며, 보잘것없는 것에서 큰일을 이루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 말입니다.

여러분도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비록 내게 세상을 변화시킬만한 위대한 능력과 재능은 없다 해도 안드레처럼 한 사람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과 다른 사람들의 가능성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시고, 바나바처럼 그들을 배려하고 도와서 귀하게 세우는 일을 하게 하시고, 한 아이처럼 지금 내가 가진 작은 것으로도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이루시도록 돕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비록 나 자신도 안드레처럼 작은 사람이지만 약할 때 강함 주시고, 적은 데서도 큰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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