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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에 대한 명령 - 추수감사절 (골 3: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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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박봉수 목사 

언젠가 한 청년이 찾아와서 제게 따지듯이 한 가지 건의를 한 일이 있습니다. “목사님, 헌금은 자발적으로 하는 것 아닙니까. 주보에 헌금 봉투를 넣는다면 자발성이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주보에 봉투를 넣지 말아주십시오.” 일견 일리가 있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또 언젠가 한 집사님이 헌금과 관련해서 다른 건의를 한 일이 있습니다. “목사님, 헌금은 강요해서는 안되는 것 아닙니까? 헌금 위원을 세워서 헌금 주머니를 돌리면 헌금을 강제로 내는 경우도 생기지 않겠습니까? 우리교회도 교회 입구에 헌금함을 두어서 헌금하고 싶은 사람들만 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일견 일리가 있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과연 우리는 자발적으로 신앙 생활할 수 있을까요? 알아서 감사하고, 자발적으로 헌금하고, 시키지 않아도 봉사할 수 있을까요?

저는 레위기를 읽으면서 하나님께 이분들과 같은 질문을 해 본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 종류를 상세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각 제사마다 제물은 어떤 것을 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 제물들을 어떻게 손질하고, 제사 드린 후 그 제물들은 어떻게 처리하라고 아주 자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표현대로 하면 하나님께서 헌금 액수를 정해 놓으시고 헌금 방법까지 규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헌금을 강요하신 것입니다. 

제사는 우리가 감사한 마음에 감동되는 대로 드리면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 형편껏 우리가 드리고 싶은 것을 하나님께 드리면 되는 것 아닙니까? 꼭 이런 때는 이것을 이렇게 드리라고 규정해 놓으면 마치 무슨 세금 내라고 하는 것처럼 강요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제물을 더 많이 받으시려고 이렇게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힘들게 하시려고 이렇게 하셨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는 해도 아직 하나님의 백성답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이라는 강제 규정 없이는 자발적으로 신앙 생활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감사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은혜를 받았습니다. 마땅히 감사해야 합니다. 자발적으로 감사해야 하고 알아서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감사를 명령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감사에 대해서 두 가지 명령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1.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로새서는 대부분의 바울서신들처럼 바울서신 나름의 내용 구조적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전반부는 교리적인 내용이요 후반부는 실천적인 내용인 이중적 구조입니다. 그리고 이 둘을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골로새서를 보면 3장 1절에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1-2장에서는 교리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고, 이제 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 이후에 실천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1-2장의 교리 내용은 간단히 요약해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새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새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연결된 3-4장은 새사람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새사람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골 3:1-17까지는 새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반드시 지켜야 할 생활의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새사람의 생활 원리들 가운데 한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새사람인 그리스도인들은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한두 번 감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늘 감사하며 사는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감사할 조건을 찾아보고 그것들을 감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해야 할 때도 감사하고 감사할 수 없을 때도 감사하는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과연 이게 가능할까요?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명하신 것은 아닐까요?

여기서 새사람이 됐다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골 3:1에 보면 새사람이 됐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을 사람인데 살리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아 새사람이 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죽을 사람이 살게 됐으니 감사할 수밖에요. 저주 받아야 할 사람이 복을 받게 됐으니 감사할 수밖에요.

저는 요 19:28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정말 큰 은혜를 받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상에서 내가 내 죄 때문에 받을 벌을 다 받으셨다는 말씀입니다. 내 죄를 씻을 피를 남김없이 다 흘리셨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받아야 할 저주와 그 모진 고통을 남김없이 다 받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우리 죄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아야 하고 죄 값으로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옛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죄 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죄 때문에 심판을 받거나 멸망당하지 않게 됐습니다. 바로 이것이 새사람입니다.

그러니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새사람은 구원 받은 감사를 우선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우리에게 이것보다 우선되는 감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을 감사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감사하겠습니까?

신학교에서 강의 중에 서로 자기소개를 하신 시간이 있었습니다. 한 목사님께서 자기소개를 하면서 다짜고짜 “저는 죽었다 살아난 사람입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임파선 암으로 의사에게 사형선고를 받고 이제 인생을 원망하며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절망 중에 있을 때 병상에서 전도를 받았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예수를 믿고 싶더랍니다. 있는 힘을 다해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말씀을 듣는 중에 견디기 힘든 통회의 눈물이 흐르더랍니다.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고 믿음으로 기도도 하게 됐답니다.

그러던 중에 성령의 감동으로 이렇게 기도하게 됐답니다. “하나님 병을 고쳐주시면 남은 인생을 주님께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기도와 함께 치유가 시작이 되었답니다. 3달만에 완치가 되었고, 퇴원을 하게 됐고, 약속대로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사가 됐고, 오늘에 이르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분 말씀이 예수 믿고 난 뒤에 암으로 죽게 된 상황 속에서도 감사가 쏟아지더랍니다. 무엇보다 예수 믿게 된 것 감사하고, 이렇게 병상에서 라도 예수 만나보니 차라리 암에 걸린 것까지 감사한 마음이 들더랍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모든 것이 다 감사하더랍니다.

이렇게 감사하다 보니 하나님께서 병까지 고쳐주시고, 자기 기도를 들어주셔서 이제 남은 여생을 주를 위해 주의 종으로 살게 하시니 그 감사를 이루 다 표현할 길이 없더랍니다.

그렇습니다. 감사 중의 감사는 우리가 예수 때문에 새사람 된 것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주를 위해 살아갈 수 있게 된 것 그것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구원 받은 것을 감사할 수 있으면 됩니다. 죄 사함 받은 것 감사할 수 있으면 됩니다. 여기서부터 감사가 시작됩니다. 이것만 감사할 수 있으면 나머지는 저절로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감사 찬양 가운데 “주님께 감사”라는 곡이 있습니다. 그 가사를 보면 감사할 내용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날 구원하신 주 감사, 모든 것 주심 감사 지난 추억인해 감사 주내 곁에 계시네 향기론 봄철에 감사 외로운 가을날 감사 사라진 눈물도 감사 나의 영혼 평안해.../ 응답하신 기도 감사 거절하신 것 감사 해처럼 높으신 감사 모든 것 채우시네 아픔과 기쁨도 감사 절망 중 위로 감사 측량못할 은혜 감사 크신 사랑 감사해/ 길가에 장미꽃 감사 장미꽃 가시 감사 따스한따스한 가정 희망 주신 것 감사 기쁨과 슬픔도 감사 하늘 평안을 감사 내일의 희망을 감사 영원토록 감사해”

여기 감사의 도미노가 있습니다. 구원 받은 것 감사하고 나니까 감사가 도미노처럼 계속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나머지 모든 것이 저절로 감사한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구원 받은 것을 감사하지 못하면 나머지 것도 감사하기 힘이 듭니다. 형식적으로 감사하다 맙니다. 생각해 보니 감사한데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사람된 것을 감사하시고,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감사하라

오늘 본문 17절을 보면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사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니까 감사하는 사람이 된 사람에게 또 감사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감사하는 사람이 됐는데 왜 또 감사하라고 명령을 덧붙였을까요?

우선, 감사하지 않으면 감사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것들은 다 만나와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출 16:19-20을 보면 만나는 하루의 양식입니다. 그날 먹어야 합니다. 그날 먹지 않고 남겨두면 썩어서 그 다음 날 먹을 수 없습니다. 그 다음날 먹을 것은 하나님께서 그 다음날 다시 주십니다.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바 은사를 활용할 때를 놓치면 은사는 소멸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은사를 거둬 가시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 충만을 주시는 이유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주를 위해 봉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 하고서 복음 전하지 않으면, 주를 위해 봉사하지 않으면 성령 충만은 사라집니다.

감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은바 은혜를 감사하면 계속 감사할 마음이 남아 있어서 다른 것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받은바 은혜를 감사하지 않으면 감사할 마음이 사라집니다. 계속 감사할 수 없습니다. 그 마음에 원망이 틈을 타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자전거 타기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자전거는 계속 페달을 밟아서 앞으로 갈 때 바로 서서 앞으로 잘 달릴 수 있습니다. 적어도 지금의 속도로 가든지 조금 더 가속하던지 할 때 바로 서서 앞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다 속도를 줄인다든지 페달을 아예 밟지 않으면 점점 비틀거리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쓰러지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새사람이 되었어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어도 우리가 계속해서 감사하지 않으면 감사생활에 문제가 생깁니다. 조금씩 원망이 틈을 탑니다. 점점 감사보다 원망이 많아집니다. 나중에는 감사는 간데없고 원망만 가득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어제 감사했다고 그쳐서는 안 됩니다. 오늘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일 더 감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다음, 감사는 더 큰 감사를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눅 17장을 보면 주님께서 감사에 대한 교훈을 말씀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갈릴리와 사마리아 경계 지역을 지나시게 되었습니다. 여기 문둥병자 10명이 멀리서 주님께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습니다. 낳았으니까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을 받고 문둥병에서 완전히 해방되라는 말씀입니다. 저들이 이 말씀을 믿고 제사장에게 갔습니다. 가는 도중에 저들의 믿음대로 깨끗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사람만 다시 주님께 돌아와서는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

10명의 문둥병자들이 믿음으로 병을 고침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9명은 주님께 큰 은혜를 받고도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받은 복은 그것으로 끝입니다. 육체적인 질병을 고침 받은 것이 다였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 한 문둥병자는 다시 돌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축복하셨습니다. 저가 영적으로도 큰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미국 버지니아 주에 가난한 모자가 살았습니다. 목사였던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가난에 시달리는 어머니가 남의 집 세탁, 재봉, 청소 등으로 아들의 학비를 조달했습니다. 아들은 어머니의 눈물겨운 노고를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프린스톤 대학에서 수석으로 졸업하게 되어 졸업생을 대표하여 졸업연설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큰 고민이 생겼습니다. 아들 졸업식에 입고 갈 변변한 옷 한 벌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수석졸업생인 아들의 명예에 오점을 남길까 염려했습니다. 아들의 간절한 권유로 겨우 졸업식에 참석하여 뒷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아들은 연설을 마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이처럼 무사히 대학을 졸업하게 된 것은 먼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의 결과이며 또 나를 가르쳐주신 교수님들의 덕택입니다. 또한 특별히 저 때문에 고생을 거듭하시면서 학비를 조달해 주신 어머니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총장님으로부터 받은 금메달을 자신의 가슴에 달지 않고 두 손으로 정중히 받아 청중 속에 앉아 계신 어머니에게로 걸어가 어머니 가슴에 달아드렸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감사합니다. 어머니의 은혜로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받을 것이 아니고 어머니께서 받으셔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마음으로 감사를 표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동석했던 청중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젊은이는 뒤에 변호사가 되었고, 모교인 프린스톤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고, 1902년 그 대학의 총장으로 선출되었으며, 8년 후 뉴저지 주 지사가 되었으며, 다시 2년 후에는 미국의 제 28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민족자결주의를 제의한 우드로우 윌슨대통령입니다. 그 후에 그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는 더 큰 복을 불러와 더 큰 감사 제목을 만들어 냅니다. 작은 일에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더 큰 일로 감사하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작은 감사로 영광을 받으신 후 더 큰 감사로 더 크게 영광을 받으시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하십시오. 더 큰 감사 제목이 이어질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감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모두 이 말씀에 순종하며 감사하는 사람이 되시고 늘 감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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