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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고행 (요 6: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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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장영일 목사

14)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1. 시작하면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고난 당하시고 죽으심이 우리가 아는 예수님의 고통의 중심입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님은 평소에도 많은 고통을 겪으셨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곧 고행의 바닷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중 세 가지의 고행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2. 예수님의 고행 세 가지

1) 자기를 숨길 수 없는 고통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숨길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생활에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절로 드러나신 것입니다. 출생에서부터 동정녀로 말미암아 탄생하셨고, 열 두 살 때 회당에서 율법 선생님들과의 토론에서 벌써 모든 말씀의 의미를 다 알고 계셨음이 드러나셨습니다. 요단강에서 당신의 공생애가 시작된 사건인 세례를 받으실 때도 벌써 하늘 문이 열렸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고 비둘기 같은 성령의 강림이 그 머리 위에 임하였습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기 시작하면서 이미 예수님을 본 자들은 다 같이 찬탄을 하며 말했습니다.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막 1:21-22)

이어 회당에 있던 어느 병자 속에 있던 귀신조차도 예수를 알아보고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마침 저희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질러 가로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3-24)

뿐 아니라 오병이어 같은 기적들, 병환자를 치유하시는 기적들, 그 모든 것이 곧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드러내는 표적이 되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찾아와 "당신이 오실 그 메시아입니까?"하고 물을 때에 예수님의 대답이 이랬습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눅 7:22)

예수님도 당신의 행하시는 일들이 메시아의 표적이 됨을 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는 고통이었습니다. 왜요? 그것은 자신이 노출되면 부담스럽고 힘들지 않습니까? 요한 사도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아들의 나타나심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인데, 즉 세상의 어둠과 악을 물리치시려 하시려는데, 당신의 정체가 노출되면 그만큼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이 길을 본받아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본질과 실체가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 정체가 가리워 질 수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빛 되신 분이 등경 아래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16)

여러분!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바로 이런 분입니다. 곧 투명한 사람입니다. 즉 그의 이름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 이름을 보면 분명히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보면, 사람들이 말하기를 "저 사람 교회 다니는 사람이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어야 합니다.

대신에 고통이 따릅니다. 많은 손해가 올 수 있습니다. 마음에 부담이 됩니다. 행동에 자유가 제약받을 수 있습니다. 진실해야 하고 정직해야 하고 깨끗해야 하니까 얼마나 고통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 길이 예수님의 길이었고 우리가 뒤 따라 가야할 제자의 길입니다.

2) 오해의 고통

두 번째 예수님의 고행은 표적으로 인하여 일어난 일들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이 드러나는 표적으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거센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15절)

사실 메시아에 대한 구약의 여러 예언들이 새로운 나라를 통치하실 왕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 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10)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시 2:6-9)

"보라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공평으로 정사할 것이며"(사 32:1)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와서 세울 새로운 나라는 "의로운 하나님의 나라"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의로운 나라를 위하여 그 메사아가 고난을 당해야 함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즉 인류의 죄를 씻기 위하여 대신 고난 당하실 "고난의 메시아"의 예언은 무시했던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 . .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3, 4-5)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오해이기도 합니다.

-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진리를 믿는다면 뭔가 그 증거를 나타내 보이라!"
- "예수 믿고 범사가 잘되어야 하지 않느냐?"
- "교회가 세상을 변혁하라!"

등 많은 요구를 해오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이런 도전과 요구들 앞에서 우리는 무력할 때가 많습니다.

- 죽어가던 자도 살려내고,
- 수태하지 못하던 부인이 교회 다니면서 아이도 낳고,
- 정신 병자, 불치 환자들을 치유하고,
- 세상의 경제적 부조리를 확 바꾸어 버리고,
- 정치적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고 . . .

물론 우리들도 그렇게 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확 세상을 바꾸어 버리고 세상 사람들을 모두 예수쟁이로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역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안에서 예수님의 길을 뒤따라가야 합니다. 어떤 손가락질을 받고 오해를 받아도 우리는 십자가 복음을 전하며 그 보혈의 능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전 5:17)

3) 은둔의 고통

세 번째의 고행은 은둔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신 후, 앞선 유대인들처럼 당신을 찾아와 왕으로 옹립하려는 사람들을 피하여 숨으셨습니다. 한번 더 15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15절)

이 일 외에도 여러 번 같은 행동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십니다.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끔찍이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일반적인 지도자의모습처럼 거리를 일부러 두고서 권위를 만드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와도 그들을 안으시며 "내게 어린 아이가 옴을 금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분이십니다. 베다니 나병 환자의 집에도 거침없이 들어가셨고, 당시 죄인으로 따돌림당하던 세리장 삭게오의 집에도 들어가셨고, 앞서도 보았지만 유대 남자들이 들어가지 않았던 사마리아 성으로 들어가시어 여인과 우물가에서 대화도 나누시던 분이십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사람을 무척 좋아하시며 사람과 같이 있기를 즐기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표적과 기사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으실 때는 여지없이 예수님은 그들을 떠나 아무도 없는 산으로 올라가셨던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께는 고통이셨을 것입니다.

속사도 교부 이 후부터(주후 2세기 경) 이런 예수님의 고행을 본받고자 사막이나 광야로 들어가서 고행을 일부러 자처하신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은둔 그 자체가 목적이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겐 때때로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은둔이란 반드시 광야나 산으로 들어가는 것만은 아닙니다. 침묵할 때 침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잠시 일상의 삶을 접어두고 골방에 들어가서 있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즉 내가 피해주어야 할 때를 의미합니다. 이런 은둔이 힘든 일입니다. 자기 희생이요, 자기 숨김이요, 그래서 억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야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혹은 교회를 위하여, 혹은 가정을 위하여 덕을 세울 때가 있다면 우리는 그 고통을 감당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자기를 드러내는 시대입니다. 오디오 뿐 아니라 비디오로, 인터넷 등의 여러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통하여 자기를 표현하며 알리고 있습니다. 이 때 은둔의 지혜도 필요합니다. 노출의 시대에 감춤도 필요합니다. 그것이 더욱 아름답고 돋보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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