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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 (눅 12:13-21, 눅 12: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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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장빈 목사

누가복음 12장 1절을 먼저 찾아 읽겠습니다. / 12:1 / (읽기) / 와~! 우리 예수님, 인기가 굉장하셨군요. 그 동안에 무리가 모였는데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지경이라 하는군요. 그런데 저리도 큰 무리가 왜 모였을까? 1절의 중간 대목, <말씀>이란 단어가 보이는군요. 그랬습니다. 저들이 모인 목적은 오직 하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무리들을 향해 주시는 예수님의 첫 말씀이 좀 심상치 않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주의하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외식을 주의하라는 말씀이신데요, 그러고 보니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군요. 여기서 바로 앞, 11장 53절과 54절을 보실까요? / 11:53-54 / (읽기) / 그랬습니다. 어인 일인지 지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길목을 지키며, 예수님께 맹렬히 달라붙어 무언가 꼬투리를 잡으려고 하는 중입니다.

저들은 예수님께 왜 그랬을까? 그것은 예수님이 저들 바리새인들의 가증스러운 외식을 질책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외식을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해서 말씀 마다 저들을 질책하시며, <화가 있을 진저!> 저주하셨던 것입니다. 11장 42절 보실까요? <화 있을 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43절에도 <화 있을 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44절에도, 46절에도, 47절에도, 52절에도, <화 있을 진저>, <화 있을 진저>, 예수님은 끝까지 저들에게 심판을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그러셨습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 무리들을 만나시면, 언제나 그렇게 역정을 내셨습니다.

그러자 참다못한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대듭니다. 11장 45절인데요, <선생님, 해도 너무 하십니다. 그래도 우리가 저들 무리를 가르치는 율법사인데요, 또한 유대인들 가운데 가장 경건하다는 바리새파 소속인데, 어찌 우리를 이렇게 공개적으로 모욕하십니까?> / 그러자 우리 예수님, 또 말씀하십니다. 11장 46절인데요, 우리 함께 읽으며 나의 신앙도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 11:46 / (읽기) / 우리 주님의 말씀이십니다. <지기도 어려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우고 정작 자기는 딴 청 부리는 것들, 손가락 하나도 꼼짝하지 않고 말로만 가르치려 드는 것들, 화 있을 진저! 몽땅 다 화 있을 진저~!> 혼 날만 합니다. 저들이 잘 한 것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저들이 회개하는 대신 예수님께 맹렬히 덤비는 중이었던 것입니다. 정말 파렴치한들입니다.

이런 공방이 계속되는 동안, 12장 1절, 예수님 주변에 수만 명의 무리가 모여들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화를 내시던 예수님, 당신에게 모여든 제자 무리를 보시더니, 전혀 다른 차원의 말씀을 주십니다. / 12:4-5 / (읽기) / 아멘! 내 몸만 죽일 수 있는 칼 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내 영혼의 죽고 사는 문제까지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건데요,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단어가 하나 있으니, 4절의 <내 친구>라는 단어입니다. 내 친구에 동그라미! 지금 예수님이 나를, 우리를 내 친구라 불러 주시는 장면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그러면서 예수님, 친구들에게 아주 소박한 부탁을 하십니다. 12장 8절과 9절인데요, 눈으로 보시며 따라오시면, 한 마디로, 사람들 앞에서, 나를, 곧 예수님을 시인하며 살아 달라는 겁니다. 내가 널 내 친구라 인정하고 시인하며 사랑하듯, 너도 날 친구라 인정하고 시인하며 사랑해 달라는 겁니다. 그런데요, 따지고 보면, 이 부탁은 친구가 친구에게 할 부탁은 아닙니다. 친구라면 굳이 이런 부탁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인정하지 않는 사이는 친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이하여 예수님은 당연한 일을 이토록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하고 부탁하시는 걸까? 답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친구라 인정해 주시는데, 나는 예수님을 친구라 시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해서 하시는 말씀, <우리 친구 하자~!>는 겁니다. 참 안타까운 현실이지요. 그런데 이런 와중에 갑자기 그 무리 속에서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달려 나옵니다.

큰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께 달려 나나가, 모두가 긴장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가 주께 드리는 말씀이 가관입니다. 13절인데요,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아마도 형이 자기 몫의 유산까지 독차지한 모양입니다. 해서 억울한 동생이 지금 예수님께 달려 나와 호소하는 중인데, 일견 타당하고 또 당연한 요청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우리의 예상과 완전히 빗나갑니다. 12장 14절인데요,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난 가정 법원의 판사가 아니야?> 듣고 보니, 우리 주님의 마음이 좀 언짢아 지신 듯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실컷 <너는 내 친구>라 하시며 천국 복음을 전해 주었더니, 다 듣고 나서 한다는 말이 겨우 자기 몫의 유산 좀 찾아 달라는 요청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유산을 나누는 일 정도는 주님께로 가져올 문제가 아닙니다. 유산 분배, 그건 형제자매끼리, 말씀 안에서 잘 처리하면 되는 일입니다. 세상에, 자기들이 번 돈도 아니고, 부모님이 남겨 주신 유산을 나누어 갖는 일인데요, 그 정도 일도 자기들끼리 잘 처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어디 그런 사람에게 하늘나라 대권을 물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해서 우리 주님 하시는 말씀, 다음 대목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인데요, / 12:15 / (읽기) / 지금 주께서 명령하십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그런데요, 이쯤 되면 주님께 나온 이 사람, 심기가 뒤집어질 만 합니다. 아니, 아니면 말면 되지, 유산을 빼앗긴 것만 해도 억울한데, 내가 뭘 잘못했다고 탐심을 물리치라 혼내시느냐 하는 항변입니다. 우리가 봐도 좀 너무 하신 듯 합니다. 왜 그리 하셨을까? 그것은 탐심을 물리치는 일이 그만큼 중요한 문제라는 뜻입니다. 결코 그 무엇과도 타협하거나 그 무엇 때문에 희석해서는 아니 되는 가장 본질적인 문제, 바로 탐심의 문제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유산을 놓고 형제자매끼리 싸우는 경우, 100이면 100, 모두 그 원인은 자기 탐심 때문입니다. 탐심이란 만족할 줄 모르고 끝없이 욕심내는 마음을 가리키는데요, 그러니 돈보다 소중한 형제자매는 눈에 보이질 않고, 오직 그 유산을 탐하여, 형제자매끼리 돈 때문에 끝까지 다투고 싸우는 추태를 보이는 겁니다. 해서 우리 주님 주신 말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하신 것입니다. 유산을 되찾는 일보다 탐심 버리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남습니다. 탐심에 대하여 말씀하실 거면, 동생 것을 빼앗아간 형을 불러 탐심을 버리라 말씀하실 일이지, 어찌 빼앗긴 동생에게 탐심을 버리라 하시느냐 하는 의문입니다. 당연한 질문인데요, 그러나 우리의 통념을 넘어서는 주님의 말씀이 바로 그 다음에 나옵니다. 15절 하반절 말씀인데요, 다시 읽어보실까요? / 12:15 / (읽기) /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 하니라!> 크게 외치며 마음에 새기기!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 하니라!> 무슨 뜻입니까? 소유의 문제는 생명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얼마나 소유하느냐의 문제는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유산을 나누는 문제,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닙니다. 더 많이 소유하는 문제,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 자기 탐심을 채우려는 부질없는 짓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제 <탐심>을 버리고 어서 주께 나와 <생명>을 받아 누리라는 겁니다. 형이든 동생이든, 빼앗은 자든 빼앗긴 자든, 먼저 예수님 만나 사람이 먼저 탐심을 버리고 생명의 세계로 나아오라는 겁니다. 해서 지금 빼앗긴 동생에게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요, 안타까운 일은 우리 현대인들, <소유의 넉넉함>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나보다 더 많이 소유한 사람이 나보다 더 많이 행복하다고 착각합니다. 나보다 더 많이 소유한 사람이 나보다 더 유능하다고 착각합니다. 나보다 더 많이 소유한 사람이 나보다 더 신사숙녀라고 착각합니다. 나보다 더 많이 소유한 사람이 나보다 더 신앙이 좋다고 착각합니다. 이렇게 모든 것의 판단 기준이 소유의 많고 적음이 되어 버린 세태입니다. 해서 우리는 모두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죽기를 한하고 돈을 법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대신 죽도록 돈을 법니다. 그렇게 어느 새 돈이 우리네 인생의 목적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다!> 해서 지금 유산을 다 빼앗겨 억울해 하는 동생에게 주시는 말씀, 네가 먼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는 겁니다. 일단 탐심을 물리치고 나면, 다음에 진짜 행복의 길이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탐심 가득한 눈으로 보아선 보이지 않는 길, 탐심을 몰아내야 만 보이는 길, 구원의 길, 생명의 길이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마음 속 탐욕이 문제입니다. 탐욕으로 이글거리는 내 마음이 문제입니다. 빼앗아간 형이든, 빼앗긴 동생이든, 급선무는 탐심을 물리치는 문제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소유가 행복을 보장해 주진 않습니다. 소유가 건강을 담보하지도 않습니다. 소유가 인격을 대신할 수도 없습니다. 소유가 신앙의 대체물이 될 수도 없습니다. 소유로 구원받는 것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돈>을 더 사랑합니다. 어떤 이는 아예 <돈>을 숭배합니다. 전지전능하신 <돈>을 경배하고 찬양합니다. 이젠 돈이 하나님이 되어버린 세상을 살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다시 강조합니다. 돈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잘 써야 하는 대상입니다. 한 마디로 돈이란 잘 쓰라고 주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쓰임 받아야 하는 대상, 바로 <돈>입니다. 이 목적에서 벗어난 돈은 오직 일만 악의 뿌리가 될 뿐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경고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다시 한번 강조하십니다. 12장 16절 이하의 소위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인데요, 우리가 <탐심>을 물리쳐야만 하는 이유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신 비유이기도 합니다. 16절을 보니, 한 부자가 있었는데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여, 풍년이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부자가 심중에 생각하기를, 17절, 이 부자의 독백인데요,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 할꼬~!> 거기 <어찌 할꼬>에 표시하시고, 지금 이 부자는 넘치는 복을 주체하지 못해 고민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빠진 재물은 <어찌 할꼬>의 대상일 뿐입니다. 뭘 어쩌긴 어째, 잘 쓰면 되지요. 하지만 이 부자, 결국 부자다운 결론을 내라고 맙니다. 18절,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스스로 흐뭇해진 부자, 다음 19절에서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12:19 / (읽기) / 거기 보니 이 부자도 영혼이 있음을 알고는 있군요. 문제는 자기 영혼에게 하는 말이 틀렸다는 데 있습니다.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이제 평안히 쉬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한 마디로 하면, 우리 이제 놀고먹자는 겁니다. 그런데요, 한 가지 주목할 것, 17절부터 19절까지의 독백 속에 여섯 번에 걸쳐 1인칭 대명사 <나>가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17절부터 눈으로 따라오시며 <나>를 찾아보실까요?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내>가 어찌 할꼬,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리라, <내> 모든 곡식을 쌓아 두리라. <내>가 <내> 영혼에게 말하노라! 그랬습니다. 이 부자의 생각 속엔 <나> 밖에 없었습니다. 철저하게 나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말은 내 안에 당신은 없다는 뜻입니다. 내 안에 주님도 없다는 뜻입니다. 아니, 그 누구라서 넌 내 안에 들어올 수 없다는 뜻입니다. 왜 그리 되었나? 그 사람 안에는 오직 <탐심>으로 가득 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탐심>으로 충만한 사람, 난치성 이기주의자가 됩니다. 그러다가 이젠 자기가 자기 자신을 컨트롤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집니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 조금만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오늘 보다 내일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남 보다 내가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 달려갈 뿐입니다. 이 일에 장애가 되는 사람은 누구라도 용서가 되질 않습니다. 오직 <나>만을 위하여 뛰고 또 뜁니다. 이제 그에게는 탐심을 채우는 일이 최고의 미덕이요 생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아니오, 그건 옳지 않습니다. 당신이 있어 내가 있는 거지, 당신 없는 나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당신과 둘이 나누기에 나에게 돌아오는 몫이 좀 작아진다 해도 당신과 나누어 먹을 때 행복한 거지, 곡간에 왕창 쌓아놓고 날마다 혼자서만 먹고사는 인생, 절대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해서 우리 주님, 스스로 만족하는 이 부자를 가리켜 <어리석은 부자>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새 곡간을 더 크게 짓는 사람을 세상은 성공한 사람이라 부릅니다. 그랬습니다. 그 사람, 세상에선 틀림없이 크게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를 성공한 사람이라 하지 않으십니다. 부자라는 말도 그에게서 빼앗가 가십니다. 20절 보실까요? 그저 <어리석은 자!>라 하십니다. 거기 <어리석다>는 표현은, 분별력이 없다는 뜻의 헬라어입니다. 도무지 옥석을 분별할 줄 모르는 사람, 진주를 주어도 귀한 줄 모르는 돼지나 개 같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주께서 친구로 세워주었더니 스스로 어리석은 자가 되어버린 대표주자이지요.

그런데요, 20절에서 주목하고 싶은 또 하나의 단어가 있으니, <오늘 밤>이란 단어입니다. 오늘 밤에 동그라미, 그리고 19절의 <여러 해>라는 단어에 동그라미, 이제 둘을 연결해 두실까요? 방금 전에 어리석은 부자는 여러 해 먹을 수 있는 것을 쌓아두고 무척 즐거워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 오늘 밤에 그 부자의 영혼을 불러 가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오늘 밤>이 <여러 해>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해서 하시는 말씀,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 밤도 보장할 힘이 없는 주제에 무슨 여러 해를 말하는가? 오늘 밤에 자네 영혼을 불러 가면 그 많은 재물, 다 뉘 것이 되겠는가?> 그렇습니다. 우린 오늘 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밤, 내 영혼을 불러 가실 수도 있습니다. 실존적 인간론입니다.

그러면서 21절에서 결정적인 말씀을 주십니다. / 12:21 / (읽기) / 그렇군요. 어리석음의 극치는 자기만을 위해 재물을 쌓는 바람에 하나님께 대하여 인색해지는 거라 하시는군요. 문제는 그리하여 어리석어진 사람, 더 이상 쓸모가 없다는 데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에게 하나님 나라의 재물을 맡기지 않으신다는 데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에게 맡기면 사고만 치기 때문이지요. 해서 하는 수없이 우리 주님, 그 어리석은 자를 오늘 밤 데려 가시겠다는 겁니다. 탐심에 눈이 멀어 하나님마저 알아보지 못한 채, 오직 자기만 바라보다 그 자기와 함께 망해 가는 한심한 군상이지요.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분명합니다. 어찌해야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인가? 어찌 하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천국 보물의 청지기로 살 수 있을까? 하는 겁니다. 오늘 밤 불려가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이 땅에서 허락하신 천수를 누리며 많은 재물을 관리하는 청지기로 사는 길 말입니다. 그 답이 오늘 말씀의 제목입니다.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여기서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봅니다. / 12:33-34 / (읽기) / 아멘!

먼저 33절 첫 구절을 주목하실까요?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간단하군요. 이 땅에 내 곡간을 크게 짓고 거기 쌓아둘 일이 아니라, 오히려 내 것을 팔아 그것으로 여럿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를 만들라는 말씀입니다. 곡간 대신 주머니를 만들라! 정말 놀라운 말씀인데요, 그런데 참으로 지혜로운 말씀이기도 합니다.

왜? 곡간에 쌓아 놓고 자기 혼자 여러 해를 두고 먹는다고 먹어 보이, 거기에 행복도 없고 생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혼자 먹어 다 먹지 못할 것, 그렇게 쌓아 두고 묵히다 썩히다 도둑맞을 일이 아니라, 지금 그것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줌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것이지요. 이 땅에 헛간 짓지 말고 저 하늘에 보물 창고 지으라는 말씀이시지요. 도적도 없고, 좀 먹는 일도 없고, 다함도 없는 보물 창고, 저 하늘에 내 마음을 두라 하시는 말씀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헌금 바치는 제도를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최소한 주일 마다 정기적으로 예물을 바치라 하신 것입니다. 십일조 헌금, 감사 헌금, 온갖 특별 헌금 등, 우리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림은, 우선은 주신 은혜에 감사함이지만, 동시에 이는 내 탐심을 물리치는 과정이요, 저 하늘에 집을 짓는 과정이요, 낡아지지 않는 복 주머니를 만드는 과정인 것입니다. 해서 잘 바치는 성도에게 더 큰 재물을 맡겨 관리하게 하시는 겁니다. 세상은 그런 성도를 가리켜 하늘이 낸 부자라 말합니다. 여러분, 어리석은 부자 말고, 하늘이 낸 부자, 사랑받고 존경 받는 부자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에겐 소유권이 없습니다. 하늘 아래 그 무엇에 대한 소유권도 나에겐 없습니다. 나에게 있는 건, 오직 관리권뿐입니다. 그렇다고 착각하지 말 것은 관리하는 그 모든 것이 내 소유는 아니라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만난 어리석은 자의 가장 큰 어리석음이 바로 모든 것이 자기 것 인줄 착각한 데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영혼마저도 자기 소유라 착각했었습니다. 하나님의 소유권과 하나님의 주권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이지요.

아니요, 나는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소유의 넉넉함> 따위는 허구적 논리라는 겁니다. <땅은 내 것이니 너희는 나그네라!> 너희는 이 땅에 잠시 들러 가는 나그네 인생일진대, 그러니 이제 성도의 사전에서 <소유>라는 단어 자체, 소유라는 개념 자체를 없애라는 겁니다. <내가 소유할 수 있는 건 하늘 아래 없다!> 이것이 가장 솔직하고 정확한 실존적 인간론입니다.

그러면 어찌 살아야 하나? 간단합니다. 소유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소유하지도 어떻게 잘 살 수 있나? 그래서 사랑이 필요합니다. 주 나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에게 맡기신 영혼들을 내 몸처럼 사랑하면 됩니다. 종합하면, <소유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랑하면 됩니다!> <소유하지 않고 사랑하기!> 그래야 구제가 가능해집니다.

여러분, 이것이 내 것이라고 착각하는 한, 내 지갑 열어 구제하기는 어려워집니다. 나에게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라 착각하는 한, 하나님을 향해 부요하기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내 영혼마저 내 것이라 착각하는 한, 낡아지지 아니하는 복 주머니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결국 그런 사람, 탐심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오늘 밤, 불려가고 마는 것입니다. 해서 탐심을 물리치라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말씀 마당을 닫으려고 합니다. 저는 우리 동광 가족들이 모두 부자 되게 해 달라고 새벽마다 기도하는 목사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 동광 가족들이 많은 재물을 맡아 관리하기에 적합한 성도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부자들 다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세속적으로 종합하면, 부자 되게 해 달라는 기도, 맞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부자는 사양합니다. 오늘 밤 불려갈 부자는 사양합니다. 하나님 인정하시는 부자, 모두에게 사랑받고 존경받는 부자, 내 곡간 크게 지어 위세 떠는 부자 말고, 열심히 구제하여 낡아지지 않는 복 주머니 많이 만든 부자, 그런 부자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교회가 감당해야 할 선교 과제가 너무나 많고, 또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정말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나가 열심히 일하셔서 돈 많이 버시되, 주 안에서 깨끗한 부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단, 어떤 경우에도 결코 돈과 사랑에 빠지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관리하라 주신 재물을 내 것이라 착각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많은 돈을 맡겨 주시면, 그만큼 더 크고 더 많은 복 주머니를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낡아지지 않는 주머니>말입니다. 하여 마지막 그 날, 주님 앞에 내가 만든 복 주머니 다 보여 드리며, 잘 했다 칭찬 듣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되기를 소망하며, 주신 말씀 마음에 새기며 잠시 명상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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