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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실천하는 용서 (몬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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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윤정현 목사

사람이 사십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십이 넘은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이 살아 온 인생을 대변해 준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사십 전의 인생은 자기의 얼굴을 만들고 있는 시기라고 말 할 수 있겠지만  사십 이후의 얼굴은 그 사람의 삶과 성품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얼굴은 그의 인품이 빚어내는 예술입니다.  얼굴은 개성이 창조하는 일종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즐거운 마음과 태도는 즐거운 얼굴을 만들고, 슬픈 얼굴은 비애의 얼굴을 만듭니다. 짜증스럽고 불만스러운 마음은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얼굴을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행전 6장 15절을 보면 전도하다가 잡혀 온 스데반의 얼굴에 대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우리가 스데반이 받았던 이 아름다운 별명, 천사의 얼굴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그가 살아온 삶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는 책임을 다 하는 사람이었고, 그는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으며, 그는 자기를 핍박하는 자를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순교하는 자리에서 예수님을 본받아 용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늘 사도 바울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실천되어져야 할 용서에 대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용서를 실천한 빌레몬을 실례로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용서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길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 그렇구나! 이러니까 내가 용서해야 되겠구나!"라고 용서의 길잡이인 빌레몬을 보면서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의 섭리를 알아야 용서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의 섭리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화를 복으로 바꾸십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십니다. 실을 덕으로 바꾸십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목적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의 오네시모를 쉽게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그렇습니다. 오네시모는 그 주인 빌레몬의 돈을 훔쳤습니다. 그리고 로마로 달아났습니다.

사실은 "도망을 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그런 원색적인 표현을 쓰지 않고 "떠났다"라는 부드러운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것도 "떠나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능동형으로 쓰지 않고, 수동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있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빌레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가 무엇입니까? 15절 하반 절에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잠시"가 "영원히"로 바뀌어졌습니다. "떠나게 된 것"에서 "두게 함이니"로 바뀌어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세상에서 맺은 주종의 관계는 그저 잠시잠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버립니다.

그러나 이제 오네시모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랑 받는 형제가 되었습니다. 이제 빌레몬과 오네시모는 서로 주안에서 사랑하는 형제로서 이 땅에서뿐만 아니고 하늘나라에서도 영원히 함께 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실보다 덕이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화가 바뀌어서 복이 되었습니다.

16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네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빌레몬이 잃은 것은 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돈 얼마입니다. 그것도 잠깐 잃어버린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대신 무엇을 얻었습니까? 사랑 받는 형제를 얻었습니다. 영원한 형제를 얻게 되었습니다. 손해보다는 유익이 훨씬 더 크지 않습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면서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용납하고 용서해 줄 것을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오네시모가 우리에게 물질적인 손해를 끼쳤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인본주의적인 생각만 하지말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화위복의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든지 화를 복으로 바꾸십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우리에게 선이 되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실을 우리가 깨닫게 될 때 우리도 기꺼이 우리의 오네시모를 용서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요셉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형들이 요셉을 애굽에 종으로 팔아먹었습니다. 정말 원수 같은 존재들입니다. 그것 때문에 요셉이 애굽에서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종살이했습니다. 감옥살이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요셉을 복 주셔서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형들이 요셉 앞에 섰습니다. 요셉이 자기들에게 복수하지 않을까 형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기꺼이 원수 같은 존재들인 형들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어떻게 용서해 주었습니까? 요셉에게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형들의 모든 잘못을 기꺼이 용서해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창45:5-8절의 말씀을 보면 자기를 노예로 판 것은 형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족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섭리적으로 나를 먼저 애굽으로 보낸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적인 신앙입니다. 물론 사람이 미련해서 요셉을 나쁘게 하려고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대한 신앙인입니다.(창50: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오네시모 때문에 너무 괴로워하지 마십시다.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마십시다. 거기에 분명히 하나님의 섭리적인 목적이 있음을 믿으세요! 그러므로 전화위복으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얼마든지 화를 복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으시고 믿음으로 기꺼이 선포해 버리십시오!. "내가 오네시모를 용서하리라." 아니 "내가 오네시모를 용서했노라!"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오네시모를 보다 용이하게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나도 남을 힘들게 하고 괴롭게 했던 전과자임을 알라고 교훈하십니다.

우리도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랑의 빚을 많이 지면서 살아간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사랑의 빚진 자구나!" 그것을 깨닫게 될 때 내가 사랑의 빚을 갚아나간다는 심정으로 나의 오네시모를 용서해 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 17절 말씀을 봅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찐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오네시모를 네가 볼 때에 나 바울을 생각해서라도 오네시모를 받아 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빌레몬은 바울이 자기를 동무라고 부르는 것을 들으면서 바울의 청을 거절 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을 생각하면 자기는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바울에게 너무나 큰사랑의 빛을 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자기에게 베풀어 준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면 오네시모가 자기에게 잘 못 한 일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의 빚진 자들입니다.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만 받았습니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도 하고 못 할 짓도 하며 살았지만 그것을 다 잊어버리고 사는 것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살아왔습니다.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지고 있습니다. 이 사랑을 조금이라도 갚아야 할 것입니다. 그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나의 오네시모를 사랑하고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3. 사도 바울은 빌레몬에게 용서는 실천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주십니다.

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과 진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 속에 우러나오는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그저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이론적으로 끝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만일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빚진 것이 있으면 자기가 대신해서 그것을 변상해 주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냥 "잘 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가 아닙니다. 자기의 물질을 희생하면서까지 빌레몬과 오네시모 사이를 화평케 하고자 했던 사도 바울의 사랑의 마음을 우리가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18절을 읽겠습니다.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네시모는 자기가 훔친 돈을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돈을 다 써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도 바울이 대신 갚아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바울이 무슨 돈이 있겠는가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 자기가 태어난 길리기아 다소 지방을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당대 제일 가는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부모로부터 상당한 유산을 물려받았을 것입니다. 또 바울에게는 장막을 만드는 기술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때때로 그는 자기 손으로 장막을 만들어서 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빌립보서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빌립보 성도들이 사도 바울을 위해 정성어린 헌금을 보내주었습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손에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의 은혜로 석방이 되면 빌레몬에게 가서 오네시모가 그에게 진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저 말로만 듣기 좋게 말씀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실제로 그 모든 것을 자기가 변상해 주겠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8)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으로 보면 우리 모두가 오네시모입니다. 오네시모가 그 주인 빌레몬에게 불의를 행했고 또 큰 빚을 진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불의를 행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갚지 못할 엄청난 빚을 졌습니다. 그 빚을 누가 대신 갚으셨습니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몸버려 피흘려 모든 것을 우리 대신 갚아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오네시모의 죄를 용서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자기의 물질을 희생하면서까지 화평케 했던 것처럼, 우리도 있는 처소에서 화평케 하는 자가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서 풀어야 하늘에서도 풀립니다. 이 땅에서 맺히면 하늘에서도 맺힌 채 그대로 있습니다. 다 풀어 버리십시다. 용서할 것은 용서하고 용서받을 것은 용서받을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하나님의 섭리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비록 오네시모가 나에게 손해를 끼치고 내 마음을 상하게 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합력하여 내게 선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얼마든지 화가 변해서 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용서를 선포하세요! 나도 사랑의 빛을 진 적이 있잖습니까? 나도 남의 마음을 알게 모르게 아프게 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해하고 관용하고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말과 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쪼록 오늘 이 시간에 우리 모두가 실천하는 용서를 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오는 은혜와 평강의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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