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시선 (시 139:1-10)

  • 잡초 잡초
  • 2166
  • 0

첨부 1


- 설교 : 홍문수 목사

옛날 어느 수도원에 덕망이 높은 원장님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특히 한 아이를 총애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는 나이도 어리고 인물도 못 생기고 지력도 떨어지는 아이였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다른 제자들의 불만이 쌓여만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제자들이 모여 원장님에게 항의를 합니다. 그러자 원장님이 조용히 말합니다. “그래 좋다. 내가 문제를 하나 낼 테니 그것을 풀어 갖고 와 보라. 그러면 내가 왜 그 아이를 특별히 사랑하는지 알게 될 거다.” 이렇게 말한 후 원장님은 제자들에게 새 한 마리씩 나눠줍니다. 그러면서 해지기 전까지 각자 아무도 보지 않는 데서 새를 죽여 갖고 오라고 했습니다. 절대로 아무도 보지 않는데서 죽여야 된다고 신신당부를 했습니다. 해질 녘에 제자들이 하나 둘 모여듭니다. 수도원 마당에는 죽은 새들이 수북이 쌓입니다. 그런데 문제의 그 아이는 돌아오질 않았습니다. 한참 후 그 아이가 헐레벌떡 달려오는데, 그 손에 새를 산 채로 들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제자들은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쾌재를 부릅니다. 원장님은 그 아이에게 왜 새를 그냥 갖고 왔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원장님! 아무도 보지 않는데서 새를 죽여오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아무리 으슥한 곳을 찾아봐도 하나님은 보고 계셨어요. 그래서 새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때 원장님이 미소를 지으며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 아이를 총애하는 이유는 이제야 알겠느냐?”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신앙이라는 게 과연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의식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앙이 성숙해질수록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생생하게 의식하게 됩니다. 초 신앙 때에는 하나님을 잘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죠. 예배 시간 같은 때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의식하지만, 생활의 현장으로 돌아가면 전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아주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한 주간 내내 보낼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직 미성숙해서 그런 겁니다. 신앙이 성숙해질수록 하나님께서 늘 내 곁에 와 계시고, 나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의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한번 스스로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주간의 삶 가운데 얼마나 생생하게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또 체험하며 사는지 말입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살 때가 종종 있다면 우리의 신앙을 다시 한번 정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완전히 잊어버리고 사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생생하게 느끼며 살지 못한다면 역시 신앙을 체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가 바로 그겁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살펴보면서 늘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신앙으로 더욱 성숙해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더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 139편은 다윗의 시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다윗의 많은 시편들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평가합니다. 그리고 저작 시기는 그의 신앙이 원숙해진 생애 말년이 아닐까 추정합니다. 이 시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아주 생생하게 느끼는 신앙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속성 : 전지전능성과 편재성

본문을 보면 구구절절 하나님의 여러 가지 속성을 회화적으로 표현하며 찬양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속성 두 가지가 곧 전지전능성(全知全能性)과 편재성(遍在性)입니다.

① 전지전능성 :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특별히 우리 인생에 대한 것을 완전히 아십니다. 1절 이하를 쭉 보면, ‘안다’는 말이 계속 반복해서 나옵니다. 1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2절.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 ” 3절. “ ...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기서 ‘안다’는 단어는 성경 히브리어로 ‘야다’(עדי)인데, 이는 이론적인 지식이 아니라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합니다. 즉 체험적으로 속속들이 안다는 뜻입니다. 인간관계의 예를 들어보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서로 이름을 소개하고 인상착의를 익힙니다. 그것도 아는 겁니다. 그러나 속속들이 아는 건 아니죠. 두 번, 세 번, ... 오랫동안 여러 번 만나면서 그 사람을 속속들이 알게 됩니다. 그것을 가리켜 히브리어로 ‘야다’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 언행심사를 모두 알고 계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 자신보다 나에 대해 더 잘 알고 계신 겁니다. 그런 사실을 가리켜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머리털 숫자까지 세고 있다고 표현합니다.(마10:30) 6절 보면 하나님의 그 전지성이 얼마나 놀라운지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 하나이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전능자이십니다. 13절~14절을 보면 우리의 인체의 신비에 관해 노래합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 ” 하나님이 나 자신의 오장육부를 창조하셨는데, 그 신비로움이 너무 놀라워 신묘막측(神妙莫測)하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원더플’(wonderful)입니다. 정말 우리가 인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신기하지 않습니까? 피가 돌고, 쉼을 쉬고, 재치기를 하고, 머리털이 나오고, ... 그 하나 하나가 다 신기한 것뿐입니다.

② 편재성 :

이렇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도 만일 한 공간에 묶여 있다면 별로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언제 어디서나 존재해 계십니다. 이를 가리켜 ‘무소부재성’(無所不在性) 혹은 ‘편재성’(遍在性, omnipresence)이라고 합니다.

8절 보면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라고 되어 있는데, 하늘 꼭대기로 올라가도, 땅 속 깊이 내려가도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9절~10절 보면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라고 되어 있는데, 새벽 날개는 동녘에 해가 떠오를 때 비추는 햇살을 가리킵니다. 그 빛의 속도만큼 빨리 바다 끝으로 달려가도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겁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하나님의 편재성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렘23:23~24.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데 하나님이요 먼데 하나님은 아니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2] 감찰하시는 하나님 :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시선

전지전능하시고 편재하신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1절~3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기 보면 감찰, 통촉 등의 단어가 나옵니다. 그 시선은 절대로 피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그래서 하나님의 시선은 ‘피할 수 없는 시선’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언행심사를 훤히 들여다kd보고 계십니다. 그분의 눈은 ‘불꽃 같은 눈’입니다.(계1:1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선은 흔히 우리가 경험하는 대로 부담스런 시선이 아닙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시선을 전혀 받지 못하면 소외감을 느낍니다. 반면에 너무 시선을 많이 받으면 부담스럽고 두렵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선은 우리를 향한 사랑의 시선입니다.

[3] 피할 수 없는 사랑의 시선 : 보호와 감독

하나님의 시선은 사랑의 시선으로 우리의 삶 속에 너무 귀한 것입니다. 우리를 간섭하고 귀찮게 굴고 속박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도와주는 겁니다. 본문 전체에 걸쳐 우리는 사랑이 가득한 부드러운 그분의 시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① 보호의 시선 :

하나님의 시선은 늘 주목함으로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5절.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10절.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의 시선이 우리를 주목하다가 여차 하면 우리를 둘러싸며 도와주십니다.

우리 인생은 마치 지뢰밭을 통과하는 것처럼, 험산준령을 통과하는 것처럼 수많은 위험과 고난을 겪게 됩니다. 그런 와중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안전하게 살 수 있을까요?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셔야 됩니다. 시34:7 “여호와의 사자(=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시34:15, 17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 의인은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셨도다” 우리를 주목하고 있던 하나님이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알아보시고 얼른 천사를 보내시고 도와주십니다.

야곱의 예를 봅시다. 그는 형 에서와 갈등으로 갑자기 집을 떠나게 됩니다. 난생 처음 집을 떠나는데, 한참 가다가 지쳐서 빈들에서 돌베개 베고 잠이 듭니다. 그때 꿈에 천사가 나타납니다.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로 연결되어 있는데,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합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창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야곱이 깜짝 놀라 잠에서 깹니다. 그때 그가 외친 말이 무엇입니까? 창28:16 “여호와께서 果然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탄성입니다.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그후 20년 동안 타향살이를 했지만 하나님이 그를 늘 지켜보시고 도와주셨습니다. 그 결과 거부(巨富)가 되어서 돌아옵니다.

또 다니엘서를 보면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갔을 때(다니엘 6장), 세 친구가 풀무 불에 들어갔을 때(다니엘 3장) 하나님은 그들을 주목하시고 보호하셔서 털끝 하나 다치지 않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어떤 아이가 친구 생일 잔치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심한 눈보라가 몰아쳐 앞이 보이지 안을 정도입니다. 너무 위험할 것 같아서 아버지가 가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울면서 졸라댑니다. 다른 아이들은 다 온다고 했는데, 다른 아버지들은 다 허락하는데 아버지는 뭐냐 이겁니다. 하도 그래서 아버지는 결국 허락합니다. 아이는 좋아라고 눈보라를 헤치며 친구 집으로 갑니다. 힘들지만 겨우 겨우 도착합니다. 그 집의 초인종을 누르면서 무심코 뒤를 돌아다봅니다. 그때 눈보라 사이로 사라지는 그림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아버지였습니다. 그 아이가 안전하게 도착할 때까지 눈보라를 헤치며 살금살금 아들의 뒤를 따라왔던 것입니다. 이게 아버지의 사랑이요, 보호하는 시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결코 낙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보시고 그 모든 어려움에서 단련하신 후에 더 좋은 인생으로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고난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심을 믿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② 감독하는 시선 :

하나님을 당신의 자녀들을 늘 살펴보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선한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간은 죄성을 갖고 있어서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의 시선을 피해 숨어있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찾아내시고 불러내셨습니다. 감히 하나님과 숨바꼭질을 하려고 하다니!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사명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시선을 피해 도망갑니다. 니느웨와 정반대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집어탄 겁니다. 배 밑창에 들어가 잠에 곯아떨어집니다. 그러나 곧이어 풍랑이 일었고 결국 그는 자신의 잘못을 실토하고 바다에 던져집니다. 다행히 하나님이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그를 삼켰다가 사흘 만에 토해냄으로 무사히 육지로 귀환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도망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서나 우리 앞에 나타나 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을 살피시고 감독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독하는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됩니다. 이를 가리켜 신전의식(神前意識)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라틴어로 코람 데오(Coram Deo), 즉 하나님 앞에서 그분을 의식하면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i) 성결한 삶 :

하나님은 이처럼 언제 어디서든지 내 앞에 계시므로 우리는 아예 죄지을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임재 사실을 알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죄를 저지를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서 아무 일 없으면 하나님이 모르시는 줄 알고 회개치도 않습니다. 그러다가 자칫 습관적인 죄악으로 고질화되기도 합니다. 이래서는 안 되죠. 우리가 죄를 지었는데도 아무 일도 없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보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스스로 회개할 때를 아직 기다려 주시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성결한 삶을 살려고 조심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시선이 무조건 우리에게 완벽을 요구하고 벗어날 경우 정죄하고 속박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사랑의 시선이므로 혹시 우리가 실수할 때 사랑어린 눈빛으로 용서해 주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을 때 그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선은 정죄나 증오가 아니라, 호소와 용서의 시선이었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회개하고 위대한 사도가 됩니다. 눅22:61~62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ii) 충성된 삶 :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은 사람이 보나 안 보나 충성합니다. 사람에게서 칭찬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바울도 그런 삶을 격려합니다. 골3:22 “ ...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요셉은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성결한 삶도 살았고 충성된 삶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는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를 했지만 워낙 착실한지라 인정받고 가정 총무가 됩니다. 그런데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추파는 던집니다. 어느 날 집안에 둘 외에는 아무도 없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 여인은 요셉을 유혹하지만 넘어가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겠습니까? 요셉이 목석이라 그랬나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는 사람이라 가능했던 겁니다. 보디발의 아내에게 그가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창39: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그의 성결한 삶과 충성된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무인도 신사가 진짜 신사라고 ... 아무도 보지 않을 때의 모습이 진짜 자기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렇다고 혼자 있을 때도 넥타이 매라는 말은 아니고, 사람이 보나 안 보나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고 충성된 삶을 살라가는 게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매일의 삶 속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삽니까?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의식하든지 의식하지 않든지 하나님의 시선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환란과 고난이 많은 세상에 살지라도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더 나아가 사람의 눈치를 보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고 충성스러운 모습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남은 생애 날이 갈수록 복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