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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힘 (합 3: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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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예용범 목사

심리학자들이 쥐로 실험을 했습니다.
독안에 쥐를 집어넣고 빛을 완전 차단했을 때는 쥐가 3분 만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빛을 계속 비춰줄 때는 36시간 살았습니다.

결국 캄캄한 독안의 쥐가 죽은 것은 체력이 쇠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 절망 때문에 죽었던 것입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성도도 그렇습니다.

1) 절망

하박국 선지자는 절망 중에 낙심하며 회의에 빠졌습니다.

  합 1:2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 까지니이까?”

이러한 낙심은 큰 믿음을 가졌던 만큼 더 합니다.

왜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낙향을 해야 했습니까?
왜 세례요한은 감옥에서 제자들을 주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이니이까?」했습니까?

높이 올랐던 그네가 깊이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큰 믿음! 더 작은 파편 되어 나도 남도 절망케 되는 것입니다.

왜 절망이 옵니까?
① 환경적 요인이 있습니다.
환경은 보고 듣고 느끼는 외적 조건들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살던 시대는 「공의」가 무시되고 「악인」이 득세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박국 선지자는 이 문제를 치료하고 사회를 고칠만한 아무런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기에,
성도답고 선지자답게 기도만 했었습니다.
그러나 응답이 없고 상황은 더욱 난세가 되자 드디어 실망되었던 것입니다.

② 믿음적 요인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여러 리듬이 있습니다.
◦ 감성 리듬이 있고,
◦ 생활 리듬도 있습니다.
오늘 컨디션이 좋다, 나쁘다 하는 것은 다 여기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믿음 리듬」이 있습니다.
어제는 믿음이 불같이 일어났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믿음이 쇠잔해졌습니다.

그러므로 내게 최악의 때가 있다면 이 둘의 나쁜 조건이 합쳐질 때 일 것입니다.
즉, 환경적으로나 상황적으로 악조건이 엄습하고,
믿음적으로도 가장 부정적인 두려움이 몰려올 때 입니다.

  시 69:1-2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들어 왔나이다 내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령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특별히 이 둘은 상호 작용하는데
예수님과 함께 있던 제자들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마 8:23-26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고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는 주무시는 지라”

제자들에게 두려운 환경적 요인이 무엇입니까?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물결이 배에 덮이게 되었으되...」
믿음적 요인이 무엇입니까?
「예수는 주무시는 지라」

유감 되게
우리는 언제나 이럴 수 있습니다.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참 모습이고 실상입니다.

이럴 때 이것을 수치라고 여기면 「자만」이고,
이럴 때 이것을 정죄한다면 「교만」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는 자연인이고 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2) 현 시국

지금 우리 시국은 하박국 선지자의 시대와 비슷하기에 우리도 낙망하고 있습니다.
◦ 고유가로 인한 고물가
◦ 그러면서 실업난
◦ 들려오는 각가지의 부정적인 말
◦ 느껴오는 현실
◦ 그리고 예측 못할 미래

상황이나 조건을 보면 볼수록 국가나 개인에게 절망이기에 「오래 사십시오!」라는 인사가 욕으로 들려지는 세태가 된 것입니다.

자연 사람들의 마음도 움치려들고 마음도 움치려 들고 있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3) 희망

나치 수용소의 처참한 고통을 이겨내고 살아난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린이 있습니다.
「나치 수용소의 말할 수 없는 잔인한 고문과 무서운 형벌 그리고 비인간적 학대 속에 나를 생존하게 만든 것은 바로 희망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은 견디게 합니다.
희망은 살려냅니다.

그러나 희망이라고 해서 모든 희망이 다 유익된 것은 아닙니다.
특히 헛된 희망
    막연한 희망은 불필요한 낙심과 공포만큼이나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됩니다.

왜냐하면 희망이란 미명아래 내가 지금 할 바를 하지 않고 기다리게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희망이 좋긴 하지만,
희망을 주인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에게서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힘 있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합 3:19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문제는 이 희망을 어떻게 볼 수 있고 어떻게 얻느냐? 입니다.
여기에는 하박국다움이 있습니다.
이것을 내 것으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① 스스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 기도했습니다.

  합 2:1 “내가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

②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 받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공의와 신실하심이 여전하심을 발견했습니다.
다만 그 하나님의 공의와 신실하심이 자신의 때와 방식에 부합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왜 공의가 무시되고 악인이 득세합니까?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때문입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는데 바로 왕을 강퍅하게 하셨습니까?

  잠 11:27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하니라”

결국 하박국의 낙심은 변하여 기쁨이 되고 탄식은 노래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합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진정한 희망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 반전의 일들은 일어나고
◦ 악은 제거되고
◦ 공의는 살아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진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의 은혜로 국가나 교회나 나도 잘 되어가고 있다고...

  전 7:10 “옛날이 오늘보다 나은 것이 어찜이냐 하지 말라 이렇게 묻는 것이 지혜가 아니니라”

다윗은 가장 많은 곤란과 가장 많은 것으로부터 공격받은 성도입니다.
그의 기도는 위기와 낙심과 두려움으로부터의 부르짖음 이었습니다.
많이 울던 다윗은 가장 많이 찬양하는 성도가 되었고,
가장 많은 낙심을 겪었던 만큼 역사에 꼽히는 평강의 왕이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참 희망되기에
    그 하나님을 목자로 모셨기에...

하박국 선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합 3: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젊은 목사님께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외할머니는 이 외손자에게 아빠를 심어주고자 했습니다.
「너 아빠는 하나님의 종(servant)이란다 그리고 네 아빠는 하나님의 사자(minister)이지! 참 훌륭하고 대단하단다.

하루는 이 아이가 분홍빛 보자기를 어깨에 망토처럼 걸치고 옥상에 올라가서 동네 아이들에게 외칩니다.
야~~ 우리 아빠는 하나님의 종이(paper)이다.
우리 아빠는 하나님의 사자(Lion)이다.」

자부심이 힘으로 온 것이고,
그 힘은 담대함을 발휘한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하나님만이 나의 힘이시고
나의 구원이십니다.

지난 세월 모두를 그리고 1년 세월 속에 숱한 고비 고비와 과정을 살아왔던 비결은
내 힘 아닙니다.

현재만 보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약속과 속성을 믿고
부정적 환경 속에서도
믿음의 진수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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