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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감사지수는? (엡 5: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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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정호 목사

사람들이 건강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종합검진을 받게 되는데 정상적인 사람은 모든 기능이 적당한 수치를 유지하고 있지만 건강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간, 혈압, 심장, 신장, 당뇨, 적혈구, 백혈구의 수치가 문제가 비 정상적이서 항상 긴장하며 약물복용이나 의사의 정기적인 체크를 받으면서 조심하고 살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이야기하면서 지능이 어느 정도이며 감성은 풍부한지를 묻기도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상태를 평가할 때는 영성을 확인하게 되는데 영성을 결정하는 요인 중에 감사지수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추수감사 주일은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감사하고 사는 사람인가를 한번 점검해 본다는 의미에서 뜻이 있는 절기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감사지수가 얼마나 높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한번 살펴보는 것입니다. 감사지수는 높을수록 좋습니다. 감사지수가 낮은 사람일수록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고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성, 감성, 영성 그리고 감사

사람의 마음속에는 세 개의 점령해야 할 성(成)이 있는데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성은 지성이고, 중간에 있는 성은 감성이고,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성은 영성입니다. 우리 사회는 지식세계이기 때문에 IQ 높고, 머리 좋은 사람이 공부도 잘하고 성공하는 것으로 믿고 그 지성을 점령하기 위해서 태어나면서부터 공부를 시작합니다. 인생의 중요한 전반기 20년을 지성을 점령하는 일에 다 씁니다. 그러나 그 안에 만족함이 없다는 것을 곧 깨닫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것을 왜 20년 이상 공부를 해보아야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뭐, 평생을 해도 아직 지성도 점령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지만..

똑똑한 사람이 환영받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따뜻한 사람 즉 EQ가 높은 사람이 환영받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감성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감성을 점령했다고 해서 그 안에 만족함이 있느냐 하면 아직도 부족한 2%의 뭔가가 있습니다. 그 부족한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영성 안에 계십니다. 지식과 생각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영성 안에 계십니다. 지성과 감성을 통과하여 비로소 영성에 도달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을 만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교제하고 영적인 풍성함을 누리려면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미국 사람들에게 필요한 생활조건은 72가지가 있었고 그 중에 절대 필요한 것이 18가지가 있었는데 오늘에 와서는 그것이 496가지로 늘었고 그 중에서 절대 필요한 것은 28가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풍부한 생활을 향락할 줄 알면서도 그 축복을 주신 하나님께는 감사할 줄 모름을 회개해야 합니다. 파아핀 이라는 사람은 세 가지만 있으면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첫째는 일용할 양식이요, 둘째는 몸의 건강, 셋째는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W. 브레이크는 말하기를 '감사할 줄 아는 자는 풍성한 수확이 뒤를 따른다'고 했습니다. 마치 기관차가 앞에 서면 객차가 뒤에 따르듯이 감사가 앞에 서면 뒤에 계속해서 풍성한 수확이 따르게 되지만 불평과 원망의 생활을 계속하면 수확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생활을 할 때 감사할 일들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소와 사자의 이야기 

소와 사자가 있었는데 둘은 서로를 죽도록 사랑하여 결혼하였습니다. 둘은 최선을 다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소는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풀을 날마다 사자에게 대접했습니다. 육식동물인 사자는 싫었지만 참았습니다. 사자도 최선을 다해서 맛있는 살코기를 날마다 소에게 대접했습니다. 초식동물인 소도 괴로웠지만 참았습니다. 하지만 참을성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소와 사자는 크게 다투고 끝내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헤어지면서 서로에게 한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난 최선을 다 했어!”

나 위주로 생각하는 최선, 상대의 상태를 헤아리지 못하는 최선, 그 최선은 최선일수록 최악을 낳고 마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지 않고 상대를 대하는 것도 문제가 되지만, 나 위주의 최선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한편 안데르센 동화집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농부가 아내에게 말합니다. “여보, 오늘 말을 가지고 나가서 좋은 것으로 바꿔 올께.” 그러자 아내가 말하기를 “잘 생각했어요. 좋은 것으로 바꿔 오세요.” 하고 농부는 말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길에서 소를 가진 사람과 만났는데, 소가 좋다는 그의 말만 듣고 말을 소와 바꿨습니다. 그리고 소를 데리고 가다가 양을 가진 사람과 만났는데, 그가 양 자랑을 하니까 다시 소를 양과 바꿨습니다. 그리고 양을 데리고 가다가 거위를 가진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거위가 좋다고 하니까 다시 양을 거위와 바꿨습니다. 계속해서 거위를 가지고 가다가 암탉을 가진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암탉이 알도 잘 낳고 수입도 좋다고 하니까 다시 거위를 암탉과 바꿨습니다. 이어 암탉을 가지고 가다가 사과 한 봉지를 가진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사과가 맛있다고 하니까 그 사과 한 봉지와 암탉을 바꿨습니다.

농부는 흐뭇한 마음으로 사과 한 봉지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몸이 피곤해서 잠시 주막에 들렀습니다. 마침 주막에서 쉬던 한 귀족이 이 농부의 이야기를 다 듣고 말하기를 “아마 당신 아내는 틀림없이 화를 낼 겁니다.” 하니까 농부가 말합니다. “아닙니다. 제 아내는 틀림없이 ‘잘했어요. 훌륭해요.’ 라고 할 걸요.” 귀족이 말했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금화를 다 주겠소.” 마침내 이 어리석은 농부가 귀족과 함께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하루에 벌어졌던 일을 죽 설명했더니 아내가 그 말을 다 듣고 나서 “참 잘했어요. 훌륭해요.” 라고 맞아 주었습니다. 그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귀족이 생각했습니다. ‘이런 가정이라면 내 돈을 다 줘도 아깝지 않다.’ 그는 가지고 있던 금화를 모두 그 집에 주고는 돌아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살면서 잘잘못을 따지는 것보다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은, 따뜻하게 맞아 주는 태도입니다. 상대가 부족한 모습을 보여도, 그것이 악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연약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우선 “잘했어요. 훌륭해요.” 라고 격려와 지지를 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실상 그 일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속으로는 짜증이 나면서도, 겉으로만 그렇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상대를 격려하고 지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그럴 때는 상대방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늘을 신뢰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진심으로 상대의 부족함을 격려와 지지로 반응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을 늘 신뢰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늘 부족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에게, 도대체 어떻게 늘 신뢰를 보낼 수 있습니까? 그것이 가능한 것은, 바로 하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대한 신뢰를 뿌리로 하여, 상대방에게 신뢰를 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꾸준히 신뢰로 대할 때, 언젠가 반드시 하늘이 그 신뢰의 열매를 맺어주십니다.

앞의 소와 사자의 이야기에서, 그들은 각각 상대에 대해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리고 뒤의 이야기에서도, 부인은 부족한 남편에게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둘의 차이는 무게중심이 어디에 두어져 있는가? 입니다. 곧 소와 사자의 이야기에서는, 무게중심이 상대방이 아니라 자신에게 두어져 있고 뒤의 이야기에서는, 무게중심이 하늘에 두어져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아니라 하늘에 말입니다. 그냥 상대방에 무게중심이 두어지는 것만으로는, 늘 부족한 모습을 보이는 상대에게 지속적인 신뢰를 전하기는 어렵습니다. 상대방에 무게중심이 두어지기 위해, 우선 하늘에 무게중심이 두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최선을 다한다 하더라도, 무게중심이 자신에게 두어져 있느냐, 아니면 하늘에 두어져 있느냐에 따라, 현상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를 수 있는 것은, 하늘을 품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진정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삶의 무게 중심이 하나님께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매우 강한 어조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이 말씀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마음에 걸리는 것이 '범사에'라는 말과 '항상'이라는 말입니다. 감사하라고 하는 말에 '범사'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으면 우리는 왠지 모르게 부담을 느낍니다. 감사하라는 말 앞에 '항상'이라는 수식어가 있으면 기가 죽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범사'라는 말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어떤 일을 당하든지 무조건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항상'이라는 말은 시종일관, 어떤 상황을 만나도 변함없이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감사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또 감사도 많이 하지만 이 본문 말씀이 요구하는 선에는 아직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어 부담을 느낍니다. 젊은 나이에 암으로 죽어 가는 아내를 쳐다보는 남편이 과연 감사할 수 있을까요? 오랜 지병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아무리 기도하고 부르짖어도 고쳐주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병은 점점 더 깊어 가는 자신을 보면서 과연 그 입에서 감사가 나올까요? 평생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야 될 어린 장애아인 자녀를 갖고 씨름하는 부모가 그 입에서 정말 감사가 나올까요?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력서를 수십 통 써 가지고 다니면서 취직을 해보려고 하지만 회사에서 면접 한 번 하지 못하고 연거푸 퇴짜를 맞는 젊은이의 입에서 과연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말이 나올까요? 내가 그런 경우를 당했다면 정말 감사할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가 이런 입장에서 이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이 말씀은 현실성이 없는 비현실적인 말씀이고 이상론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은 적당히 보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태도로 이 말씀을 넘길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는데 왜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감사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지금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영감 있는 시인 송명희 씨는 뇌성마비로 한 번도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로 온 몸이 비비 꼬여서, 말 한마디를 하려고 하면 죽다 살아나는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 해야 할 정도로 일급 장애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수많은 시를 썼는데 그가 쓴 시 가운데 '나'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못하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보는 것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무엇을 감사하고 무엇 때문에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까? 뇌성마비로서 남이 가진 것의 90%를 못 가졌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예수님이 그의 마음을 가득히 채웠습니다. 그러자 남이 갖지 못한 것 내게 있고 내가 가진 것 남이 없는 것을 비교하면서 오히려 '주님, 나는 세상 사람이 가지고 즐기는 것 없어도 예수님 한 분 그분의 사랑을 받고 그분을 눈으로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항상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아름다운 예라고 생각합니다.

많이 가졌다고 감사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건강한 사람 중에 감사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자기 뜻대로 다 소원성취 하는 사람 입에서 감사가 나오는 것 보셨습니까? 진정한 감사는 예수님을 아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면 진정한 감사가 나옵니다. 예수님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감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명령하시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명령하실 때에는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뒤따라 보내기 때문에 우리가 변명을 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결론을 하나 얻을 수 있는데 우리가 감사하는 것만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앞길이 막막함에도 불구하고 입에서 "하나님, 제 앞길 캄캄하지만 주님이 제 앞에 있는 구름을 걷어내고 어둠을 쫓아 주실 날이 올 줄을 믿고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셔서 이런 고난을 주시는 줄로 알고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감사하는 사람의 믿음은 성숙한 믿음입니다. 감사하는 것만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하는 것만큼 행복할 수 있습니다. 100 평짜리 아파트에 살아도 감사가 없으면 절대로 행복한 사람이 아니고 스무 평짜리 집에 살아도 눈만 뜨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그 입에서 찬송이 나올 정도로 주님 앞에 감사하는 심령을 가지면 그 사람은 행복한 것입니다. 그 사람의 행복을 누가 빼앗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는 감사하는 것만큼 다릅니다. 누구하고 다릅니까? 세상 사람하고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입만 열면 불평이 심하고 불평은 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감사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입에서 계속 감사가 나옴으로써 내가 그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감사가 없습니까? 그러면 그들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감사하는 것만큼 강하다

천성적인 장애를 안고 나온 자녀를 가진 부모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우리 이 아이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복을 받고  가정이 얼마나 화목한지 모릅니다. 우리 아이 때문에 남편이 예수 믿고 돌아왔는데 아마 아이가 저러지 않았으면 그이가 예수 안 믿었을 거예요. 우리 아이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잘 살아도 교만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고 우리 아이 때문에 세상에서 천대받고 인정받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 고통당하는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주신 복이 보통 많은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도 꺾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감사지수는 높을수록 좋습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 좋아지고 더 행복해 지고 세상사람 앞에 매력적인 존재가 되고 우리는 더 강해집니다. 지금까지 불평하고 원망하던 것과 만족하지 못한 것을 거꾸로 뒤집어서 감사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어떤 형편에서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감사할 것들을 찾아 하나님 앞에 감사하도록 노력한다면 우리의 믿음이 좋아지고 우리가 행복해지고 우리가 강해지고 우리가 세상 사람에게 매력을 줄 수 있습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다음의 글을 소개합니다.

감사의 마음에도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항상 뭔가를 부족하다는 생각 대신에 먼저 그대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라. 하지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고 해서 형식적인 감사는 안 된다. 마음으로부터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여기에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무엇인가가 부족하다는 생각은 떨쳐버리고 지금 그대 손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을 바라보라.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 그대가 가진 모든 것 마실 물, 따뜻한 햇볕, 숨 쉴 공기, 그대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기 시작할 때 그대는 비로소 마음이 풍요롭고 인간다운 마음에 감싸이게 된다.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한편 감사해야 할 대상을 늘려나가도록 하라. 친구와 가족, 옷가지와 음식, 소유하고 있는 재산 그리고 인생의 길목에서 만나는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라. 연필, 포크, 의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런 물건들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에 깊이 감사하라. 그대의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사람과 물건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 나가는 것이 그대의 부족함을 없애는 지름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평범한 단어들을 모아 영감 있는 시를 만들어가는 감사의 시인이 되어야 하고, 멀리 있어서 작게 보이는 것들을 크게 볼 수 있는 감사의 망원경을 가지고, 깊은 땅속에 묻혀 있어서 우리 현상 가운데 나타나지 않는 것들을 땀과 수고로 깊이 파고 들어가 보화를 캐내는 광부처럼 감사의 채굴자가 되어서 감사의 지수를 높여 영성이 깊은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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