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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른 복음 (갈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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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석기현 목사

기독교인이란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단이 어떻다.’라는 말에 대해서는 이상하게도 거부반응을 나타내는 자들이 있습니다. “다 같이 하나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끼리 왜 그리 이단이니, 정통이니 하고 꼬치꼬치 따지면서 기독교를 나누어야 하느냐? 불신자들이 보는 앞에서 모든 기독교인들이 그저 서로 좀 이해하고 양보해서 어찌하든지 하나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것이 그들의 이유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천주교는 이단이다.’라는 말에 대해서는 더욱 펄쩍 뛸 것입니다. “아니, 천주교도 개신교와 꼭 같이 예수님 십자가 걸어 놓고 꼭 같이 성경책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 않느냐? 불신자들 쪽에서는 천주교나 개신교나 꼭 같이 기독교라고 부르고 편의상 구교와 신교로만 구분하고 있는데, 왜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그런 옹졸한 생각을 하느냐?”라고 항의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같은 하나님 이름만 부르고 같은 교회 간판만 걸려 있으면, 무조건 다 같은 기독교라고 인정해 주는 것이 옳다는 논리입니다. 그리고 그 논리가 옳지 않다고 말하는 기독교인들은 다 ‘속이 좁은 분리주의자’라고 비난을 퍼붓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논리에 따른다면,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사도 바울 역시 ‘속이 좁은 분리주의자’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바울도 ‘같은 하나님 이름’을 부르고 있었고 ‘같은 교회’ 안에 교적을 두고 있던 사람들 중에 일부를 두고 이 본문에서 실로 맹렬히 비판하며 추상같이 저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갈라디아서 1장 1절로 5절까지 기록된 첫 인사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본론으로, 그것도 매우 강렬한 어투로 들어갑니다.

무엇이 성령의 감동받은 사도 바울의 심령을 그토록 흥분시키고 있었습니까? 그것은 갈라디아 교회 내에 암처럼 번지고 있던 ‘다른 복음’이었습니다. ‘다른 복음’ -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조금도 느긋하게 대할 수 없는, 조금이라도 무슨 피차간의 체면이나 예의 따위를 먼저 차릴 수 없는, 극히 다급한 비상사태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왜 ‘다른 복음’이란 것이 그처럼 위험한 것이겠습니까? 왜 ‘다른 복음’이란 것은 예나 지금이나 교회와 성도가 그처럼 불에 덴 듯 놀라 펄쩍 뛰는 사람처럼 반사적으로 즉각 대응해야 할 요주의 대상이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바로 그 ‘다른 복음’을 가진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참된 기독교회가 나누어져 나왔던 종교개혁일 제487주년을 맞이하여, 왜 참된 기독신자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기독교를 두고 이단이라고 부르고 경계해야 하는지 그 이유들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은 곧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가 됩니다.

본문 갈라디아서 1장 6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고 했습니다.
참된 복음은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천명한 그대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었습니다. 도무지 은혜 입을 자격이 전무한 죄인들을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불러 구원해 주시는 그것이야말로 곧 복음의 본질이었습니다. 그 은혜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죄인 대신 죽게 하셨고, 그 은혜 안에서 죄인들에게 믿음을 주셨고, 그 은혜 안에서 죄인을 의롭다고 칭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구원에 관한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므로, 우리는 그 모든 것이 ‘오직 은혜’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는 것이며, 구원에 관한 한 사람의 그 어떤 노력이나 공로를 결코 내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은 이 같은 ‘은혜의 복음’을 떠나 ‘다른 복음’ 즉 ‘공로의 복음’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거짓 선생들’ 즉 초대교회 안에 있던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한 것인데, 그들의 소위 복음이란 것은 사도행전 15장 1절에 나타나는 대로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구원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그 믿음에다가 ‘율법 준수’라는 것을 구원을 성립시키는 조건으로 하나 더 첨가시킨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별 나쁜 말 아닌 것처럼도 보이지만, 사실에 있어서 이 주장은 지극히 심각한 오류를 내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작해 놓으신 일을 사람 편에서 율법 순종을 통해 완성해야 한다는 말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사역에 사람의 힘을 더해야 한다는 말이고 하나님께서 다 마쳐 놓지 못한 구원 사역을 사람 편에서 다 마쳐야 한다는 말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는 이 말은 ‘내가 깜짝 놀랐다.’라는 뜻입니다. “뭐라고? 그리스도의 공로에다가 사람의 공로가 더해져야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이 그런 ‘다른 복음’에 넘어가고 있다는 것은 사도 바울에게는 그야말로 정말 깜짝 놀라 자빠질 일이던 것입니다.

내가 「다 이루었다」라고 십자가상에서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선언하신 그대로 그리스도의 공로는 이미 조금도 모자람 없이 100퍼센트 완성된 공로였습니다. 그 완성된 구원의 공로 때문에, 구원은 이제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가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같은 ‘은혜의 복음’을 ‘공로의 복음’으로 바꾸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구원의 주권자이시며 완성자이신 하나님 당신에 대한 크나큰 모욕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 좇는 자들을 가리켜 ‘너희를 부르신 이를 떠나는 자’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 ‘떠나다’라는 단어의 원문은 ‘충성의 관계를 바꾸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그 당시 반역을 일으키거나 탈주한 군인을 가리킬 때에 쓰였고, 혹은 자기의 신념을 바꾸거나 정치적 입장을 바꾸는 사람들을 지칭할 때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떠나다’라는 동사를 명사형으로 바꾸면 문자 그대로 ‘변절자’ 혹은 ‘배반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내에 있던 이단들을 가리켜 바로 그와 같은 신앙의 변절자이며 영적 탈주병이라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을 믿는다 해도 그래도 하나님 이름은 부르고 있으니 불신자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보면 저희들 딴에는 더 열심히 믿겠다고 하는 말들 같은데 그런 사람들을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것은 도무지 인간적으로 너무 지나친 일처럼 여겨지십니까?

결코 그렇지 아니합니다. 이들은 실제로 ‘하나님을 떠난’ 자들입니다. ‘은혜의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으로 떠나는 그 순간부터 이들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변절하고 돌아선 배교자가 된 것입니다. 은혜의 복음으로 우리를 불러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망각하고 자신의 선행과 공로를 내세우는 자, 오로지 십자가의 은혜만을 기억하며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돌리며 살아야 할 위치에서 탈주한 자, 이미 하나님과 원수가 된 자들인 것입니다.
아무리 같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그 복음이 다르면, 사람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를 선포하는 이 요긴한 복음의 교리가 다르면, 실상은 다른 신을 믿고 있는 우상 숭배자와 아무 다를 것이 없는 이단에 불과한 것을 똑바로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다른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참된 교회에 대한 최대의 위험입니다.

본문 갈라디아서 1장 7절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케 하려 함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다른 복음은 없다」라고 너무나도 명백히 선언하셨습니다. ‘다른 복음이란 것은 있을 수 없다.’ - 아무리 달리 해석하려고 해야 해석할 길이 없는, 지극히 단순하고도 명백한 문장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참된 복음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은혜의 복음’ - 오로지 하나님께서 완성하셨고 오로지 기록된 성경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밝히 알게 해 주신 이 한 가지 복음,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써 구원받는다.’라는 이 은혜로운 복음 외에 다른 그 어떤 구원 얻을 복음은 존재하지 않음을 천명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사를 통하여 이 복음을 바꾸려는 시도는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그런 행위를 가리켜 본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케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변케하려 하다’라고 번역된 말은 원문의 단어에서는 훨씬 더 강한 뉘앙스를 가진 말로서, ‘뒤집어 놓다’ 혹은 ‘바꾸어 놓다’라고 번역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이 보기에는 그 이단을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의 행위는 그저 복음을 조금 수정하는 것이나 약간 첨가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그 본질을 뒤엎어 버리고 다른 것으로 대체해 버리는 행위와 꼭 같았던 것입니다. 그 지극히 순수하고도 완전한 복음에 무엇을 조금이라도 첨가한다든지 수정한다는 것은 곧바로 그 복음을 근본적으로 뿌리 뽑아 흔드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 없는 행위가 되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사단은 예나 지금이나 성도를 유혹하기 위하여 항상 양면작전을 쓰고 있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신앙생활 잘하고 있는 ‘성도의 육신’을 죄짓는 자리로 끌어 내리려고 유혹하는 동시에, ‘성도의 영혼’에 대하여서는 그저 약간만 다르게 보이는 다른 복음에 이끌려가도록 유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처럼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하는’ 행위는 곧 바로 ‘너희를 요란케 하는’ 행위 즉 신자의 영혼에 대한 직접적인 위험이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여기 ‘요란케 하다’라는 말은 원문으로는 ‘흔들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교회를 흔드는 최고의 시험은 교회 밖에서 교회를 비난하고 핍박하는 무리들이 아니라 항상 바로 교회 안에서 교회의 그 참된 복음을 변질시키려는 이단에 의하여 비롯되어져 왔던 것은 과거와 현재를 통하여 교회사에서 너무나도 뚜렷한 실상이었습니다. 복음과 지극히 비슷해 보이는 것을 가지고 진짜 복음을 전복시키려는 시도, 교회와 같은 편에 서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교회의 참된 구성원을 불러 모을 복음의 힘 그 자체를 말살시키려는 이 악한 계교야말로, 사단이 교회를 뒤흔들어 놓기 위하여 바로 교회 안에서 사용해 온 대표적인 수법이었음을 우리는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교계 안에서도 “교리는 따지지 말고 그저 모든 기독교가 하나가 되자.”라는 주장이, 보수적이라고 하는 교단 안에서 조차도 그 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정말로 기가 찰, 어처구니없는 소리입니다. 교회의 목사라는 사람들이 그런 말로 교인들을 혼란스럽게 하니, 정치가들도 “사상 따지지 말고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하나가 되자.”라는 말로 국민들을 오도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라가 국시가 바로 서 있지 않으면 결국 망할 수밖에 없듯이, 교회는 복음 진리를 명확하게 세워 놓지 않으면 결국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이 천 명 만 명 모여 보았자 그 교회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람을 천당으로 인도할 구원의 복음이 변질되어 있는 교회들과 아무리 손을 잡고 교단을 합쳐 보았자 그게 무슨 이로움이 되겠습니까? 구원 복음이 없는 교회 설립, 바른 복음이 중심이 되지 못한 교단 연합이라는 것은 실상은 사단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꼴만 연출하게 될 뿐인 것입니다.
이단을 색출하려는 교회가 교회를 분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단들이야말로 이 거룩한 ‘우주적 교회’를 그 기초부터 흔들려고 하는, 참된 교회들의 가장 위험한 적인 것을 꼭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3. ‘다른 복음’을 믿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멸망의 저주에 빠지게 합니다.

갈라디아서 1장 8절과 9절에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그와 같이 다른 복음을 전하고 또 그런 이단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임하게 될 종말에 대하여 조금도 주저함 없이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그야말로 서릿발처럼, 조금도 사정없이 무섭게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이단이라는 이 심각한 문제를 두고 경고하는 사도 바울로서는 편지 받는 사람의 입장이고 체면이고 가릴 것 없이 반드시 그들에게 해 주어야만 했던 말이었습니다. 이단이 받게 될 심판이라는 것은 참으로 두 번 생각할 필요가 없이 명백한 것이었고 또한 두렵기 짝이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두 번 사용된 ‘저주’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저주의 대상을 가리킬 때 쓴 말입니다. 완전히 진멸을 당해 그야말로 저주의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지도록 된 대상을 가리킬 때 특별하게 쓰인 단어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 죽게 되었던 아간이라든지,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의 칼날 아래 멸망당해 갔던 가나안의 여러 이방 민족들이 바로 그와 같은 ‘하나님의 저주 (divine ban)’의 대상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저주하시기로 작정하셨고 이제 남은 순서는 완전히 진멸당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대에 제물로 바쳐질 것밖에 남아 있지 않는 상태를 표현한 말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니 성령님께서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단을 가리켜 바로 그와 같이 피할 수 없는 무서운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일 따름이라고 단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저주의 대상이란 단지 갈라디아 교회들 내에 있는 거짓 교사들뿐이 아님을 명백히 했습니다.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그 누구든지 저주의 대상이라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바른 복음을 전했던 바울이 나중에라도 혹시 마음이 바뀌거나 정신이 나가서 다른 복음을 전하게 되면 그 자신조차 예외 없이 저주의 대상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니 사람이 아닌 천사 같이 신비스러운 영물이 나타나서 전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복음일 때에는 그 역시 하나님의 특별한 저주의 대상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9절에서 사도 바울이 재삼 강조한 것처럼 「만일 누구든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따름인 것입니다. 이단이 받게 될 저주는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전 역사에 걸쳐 온 우주적으로 적용될 예외 없는 원칙임을 똑똑히 밝힌 말씀입니다.

누가 감히 이 ‘하나님의 특별한 저주’에 대하여 무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꼭 멸망시키시겠다는데 그 앞에서 사람이 무어라고 감히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저주하시겠다는데 사람이 도대체 무어라고 “그런 말은 기분 나쁘니 기독교인들이 사용을 자제하면 좋겠다.”라고, “왜 하필이면 그런 듣기 언짢은 말을 같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해야 하느냐?”라고 불평할 수 있겠습니까?

이단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는 결코 사도 바울이 다른 교사들에 대한 라이벌 의식 때문에 내뱉은 사람의 개인적 감정 표출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선포하시고 반드시 시행하실 ‘하나님의 특별 저주’입니다.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져야 할 감사와 영광을 빼앗아 가는 이단, 독생자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그 귀한 교회를 뿌리 채 흔들려고 하는 이단 - 하나님께서는 이런 ‘다른 복음’ 전하는 자들을 어떻게 그냥 보아 넘기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단에 대한 저주는 어떤 ‘옹졸한 인간’의 말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개인적 감정 표출’인 것입니다. 바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단과 그 ‘다른 복음’을 따라가는 자들이야말로 그런 무서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줄을 깨닫고, 더욱 이단에 대하여 영적 신경을 곤두세우고 조심하며 경계하며 피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단 속에 숨겨져 있는 이 치명적인 독, ‘다른 복음’을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아니 됩니다. 같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배드린다고,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신앙고백한다고, 같이 성령의 은사를 말한다고 해서, 이단을 참된 기독교와 비슷한 사촌형제 쯤으로 결코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단은 진리에 대하여 차이점만 가진 것이 아니라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이단은 진리의 친척이 아니라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복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불러도 실상 다른 신을 믿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이단의 진짜 정체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은 기독교라는 간판은 달고 있어도 실상은 우상종교와 다를 바 없는 교회임을 드러내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신자 전도보다는 오히려 이미 세워진 교회를 집중 공략하는 것이 항상 이단의 전략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복음’은 기독교인이라는 명찰은 달고 있어도 결코 구원받지 못할, 섞여있는 가라지들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만 있다면 택하신 백성까지 함께 멸망에 빠지도록 이끄는 것이 사단의 목적이며, 또한 그 사단이 조종하는 이단에 따라가는 자들의 피할 길 없는 종말이 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결코 ‘옹졸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성경 말씀의 진리에 철두철미한 신자들이었을 뿐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결코 ‘교회 분리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할 수 있는 참된 복음 위에 서 있는 교회와 사람을 미혹하여 멸망의 저주로 빠뜨리는 이단을 정확하게 구분했을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참된 복음 진리를 지키는 일이 그냥 같은 하나님 이름 부르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냥 ‘교회라는 이름만 있으면 무조건 합치자.’라는 것은 결코 고상한 신자의 자세가 아니라, 사단이 사주하고 있는 교회 파괴 운동인 것을 똑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주여 주여’하고 이름만 부른다고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 대속의 공로만을 철저히 의지하고 믿는 자만이 천당 구원 받게 되는 것을 결코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된 종교개혁자들이 그랬듯이, 오직 한 가지 참된 복음을 믿고 따르고 지킴으로써,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섬기며, 오직 하나뿐인 참된 우주적 교회를 세우고, 오직 하나밖에 없는 구원의 길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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