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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선택에 담긴 소망 (삼상 16: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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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황요한 목사

어제 저녁 8시 KBS 1TV에서 ‘한국사회를 말한다’ 라는 시사프로그램에서는 - 선교 120년을 맞이한 한국 기독교 위기인가 - 라는 주제로 심층 취재한 내용을 방영하였는데 이 일로 인하여 교회는 교회대로, 사회는 사회대로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프로그램을 방영한다는 소식을 사전에 알게된 일부 단체와 해당 교회에서는 KBS를 찾아가 항의하거나 심지어는 수많은 성도들이 몰려가 기독교를 탄압한다며 방송사를 규탄하는 등 시위문제가 뉴스화되었기 때문입니다.

* 이 프로그램은 방영되기 전부터 사회적으로 많은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외형상 국민의 1/4이 기독교인이며, 세계 2위의 선교대국, 세계 10대 대형 교회 중 5개가 한국교회에 있으며, 국회의원 255명 중 120명이 기독교 신자일 뿐 아니라 상장기업 임원의 43%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영상매체의 호소력이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보통 3분 정도면 왠만한 주제를 가진 소개나 홍보는 충분한데 이 날 방송은 무려 60분 분량이었으니 그들이 얼마나 큰 비중을 두고 제작한 것인지 짐작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모두가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음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고 저 역시 큰 관심을 가지고 끝까지 지켜보았습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아주 잘 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저는 이 프로그램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크게 4가지라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첫째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윤리적 문제, 예를 들면 목회자들의 무분별한 대형차 사용 추세는 성장위주의 빗나간 목표의식이 낳은 어리석은 우월주의의 한 단면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합의되지 아니한 세습 문제로 인한 교회내 갈등과 사회적 불신, 세째는 교회본질적 사명에서 벗어난 헌금 사용의 부당한 문제 - 예를 들면, 성남의 어느 교회가 8백억이나 들여 교회를 짓는 것과 같은 문제점들, 그리고 네 번째는 한국교회가 사회속에서 주도적 사명을 다하지 못하고 정체성을 잃은 부분에 대해서 신랄하게 지적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적한 것만 생각하면 마음 아픈 부분도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사회를 대표하는 어떤 공익기관에서 교회를 향해 그런 이야기를 장시간 동안 하였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이 사회가 아직도 기독교에 대하여 그만큼 기대가 크다고 하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적어도 25%가 넘는 비율의 종교가 그 사회를 향한 리더쉽을 잃어버렸다면 이는 참으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입니다. 과거 한국교회는 사회운동의 일선에서 선도적 입장에 서 있었습니다. YMCA 나 YWCA 같은 기관들을 세우고 그곳에서 민족의 지도자들을 배출해 내는데 앞장서 왔기에 교회는 곧 시대의 정신이었고 중심이었습니다. 교육의 근대화를 통하여 이룬 공로는 말로 다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최초의 중, 고등학교에서 부터 대학까지 한국 근대사를 이끈 교육기관들은 거의 대부분 교회 지도자들이 세우고 이끌었습니다.

인권신장에 있어서도 그 어느 단체나 종교보다도 앞장서 온것이 기독교였습니다. 독재정권에 앞장서 이 땅에 민주화를 정착시키는데 그들의 희생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KBS 시사프로그램은 한국교회가 끼친 공로에 대하여 모두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80년대 이전까지는 기독교는 희망이었고 민중의 등불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 싯점에서 본 기독교는 너무나도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 그들의 메세지였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에 겸허한 자세로 경청해야 할 입장인데, 그런 아픈 소리 듣지 않겠다고 방영 중단을 요구하고 또 교인들을 동원하여 방송사 앞에서 데모를 하는 모습은 일부 사이비종교에서나 하는 자학적 행동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 몸에 상처가 나면 곪게 마련이지요. 그곳은 조금만 건드려도 심한 통증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그렇다고해서 그 곪은 부위를 알콜만 살살 발라주면서 호호 불어주기만 하면 당장은 시원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회복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의사의 진단을 받고 처방을 받아야합니다. 사실 방송에서 나온 지적들은 이미 웬만한 세미나에서 귀가 닿도록 들은 이야기들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내부적 고민이 되지못하고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들로 방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회적 공공기관의 손을 빌려서 곪은 부분을 지적받는 단계에 까지 온것입니다. 방송을 듣고 있던 저도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꼭 치료해야할 것이라면 마취를 해서라도 잘라낼 부분은 잘라내고 치료할 부분은 치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역기능도 물론 있습니다. 그런 프로그램이 나가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 더구나 안티그룹에 속한 이들에게는 ‘그것 봐라.기독교도 별 수 없다’ 면서 전도나 교회 이미지에 큰 상처를 입힐 수도 있습니다. 분명 그것은 역기능입니다. 하지만 저는 역기능보다는 순기능이 더욱 크다고 생각을 합니다. 오히려 1200만 성도들이 겸허하게 들어야 할 시대적 메세지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한가지 KBS에 주문을 한다면, 이번 프로그램이 진정 특정 종교를 탄압하거나 이미지에 손상을 입히려는 것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사회적 공정성을 가지고 설득력을 가지려면 올해 안에 불교나 천주교에 대해서도 같은 의도를 가진 프로그램을 방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KBS 관계자 그들의 도덕적 소양과 양심의 몫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중요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곧 "이새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다"는 1절의 말씀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울왕의 반발을 우려한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제사를 드리러 가라며 암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가도록 하셨습니다. 베들레헴 성에 도착한 그를 본 백성들의 장로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웬일로 예고도 없이 베들레헴에 오셨느냐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관례적으로 사무엘 선지자가 각 지역을 순방할 때에는 사전에 미리 통보를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길갈로 갑니다. 이번에는 라마로 갑니다. 이번에는 베들레헴으로 갑니다..." 이렇게 미리 예고를 하고 갔다고 사무엘상 7장15절에서 17절에 소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스타일이었고 그는 가는 곳마다 먼저 제사를 드리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베들레헴 방문은 예고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기다 사무엘선지자가 평소 하지 않던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사를 주관하고 집행하는 것은 사무엘 선지자 몫이지만, 제물을 준비하는 것은 성도들의 몫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날은 사무엘선지자가 암 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온 것입니다. ‘이것은 뭐 하러 가지고 오셨습니까?’ ‘제사에 쓰려고 가지고 왔지....’

그런데도 베들레헴 성읍 지도자들은 벌벌 떨었습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는듯 하였습니다. 4절을 보면 ‘평강을 위해서 오셨습니까?’라고 반문하고 있음을 보아 분위기를 잘알 수 있습니다. ‘평강을 위해서 왔지. 제사 드리려고 암 송아지까지 끌고 왔는데....’ 하지만 백성의 지도자들은 떨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들도 소문을 들었는지 모릅니다. 전에 블레셋과의 전투에 앞서 사무엘 선지자를 기다리다가 백성들이 동요하자 사울 왕이 부득불 행하였다는 제사문제로 선지자의 분노를 산 사건이 이미 소문으로 전해졌는지 모를 일입니다. 당시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 왕에게 "하나님께서는 순종을 제사보다 기뻐하신다"고 책망했었습니다. 제사라는 행위를 치룬 업적보다 제사를 드리는 동기와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도 예배자의 자세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우리는 그냥 결론을 보고, 우리 사회의 풍조를 보면 결론만 보고, 예배만 드리면 된 것 아닙니까? 어쨌든 누가 하던 예배만 드리면 된 것 아닙니까? 이렇게 결론지상주의로 말하면 될 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예배를 드리는 행위에 대해서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그 예배를 드리는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사울은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이 뭐예요? 믿음이 뭡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믿음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때때로 내게 불리한 상황이 넘어지더라도, 기다리는 것입니다. 지금 사울왕은 백성들이 동요하고, 자기한테서 떠나기 시작하니까 그러면 ‘내가 제사라도 해야 되겠다’라고 생각했어요.

제사를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고 싶은 동기에서가 아니라 백성들이 자기를 떠나면서 자기의 권위에 손상되니까 제사를 드리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동기가 다르죠?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순수한, 순결한 동기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재능, 여러분의 권위, 여러분의 어떤 이익을 위해서 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사울의 동기를 심각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 이 나라의 왕의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사무엘은 슬펐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세웠고, 그 왕은 이스라엘의 초대왕입니다. 첫 번째로 왕정이 시험해 본 단계입니다. 그런데 그 첫 번째 왕정의 시도가 실패로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그것도 사울왕의 교만과 불순종 때문에 왕정제도가 자리를 잡지 못하고 실패로 끝나고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슬퍼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사무엘은 그 말씀을 듣고서 밤새도록 기도했다고 그랬습니다. 사울을 위해서 기도한 내용은 나와 있지 않지만,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기도했겠습니까? 하나님, 이 사울의 교만을 용서하시고, 사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사울도 왕이지만, 인간의 정욕과 교만에 휩쓸리지 않겠습니까? 이 나라가 왕정이 처음 시작되고, 하나님이 이 백성들의 요구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인데, 하나님 한 번 더 기회를 주시옵소서. 눈물로 밤새도록 사울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1절 말씀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언제까지 그를 위해서 슬퍼하겠느냐? 연민의 정만 가지고 그냥 있기에는 시간이 너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가라. 이는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

월드컵 나가려면 지역예선을 거쳐야지요? 하나님께서 이미 예선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는 가서 본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지목하는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라는 것입니다. 사실 사무엘이 슬퍼하는 것은 인간 사무엘을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에서 시작되었던 왕의 직임을 사울이 저버렸기 때문에 슬퍼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알고 보면 이제 사울의 불순종으로 왕정이 깨지고, 이제는 백성들이 우왕좌왕합니다. 사사기 마지막 절에 보면 왕이 없음으로 하나님이 없음으로 백성들이 자기 소견대로 좋을대로 행동하였더라. 우왕좌왕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이제 다시 한번 그런 모습들을 볼 것을 생각하니까 사무엘은 마음이 아팠습니다.

왕의 출현이 밝은 길을 보여주는 듯 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면서 사무엘은 슬펐습니다. 사무엘의 슬픔은 개인적인 슬픔이 아니었어요. 여러분들이 슬퍼하실 때, 여러분들이 괴로워하실 때, 여러분들이 더구나 교회에 나와서 안타까운 모습을 가질 때 그 내용들이 여러분의 개인적인 것들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오시면 저는 여러분들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어떤 분들은 얼굴이 보름달처럼 밝고, 얼굴에 기쁨이 있고, 평안이 넘칩니다. 어떤 사람은 수심이 가득 차고, 어떤 사람은 화가 난 모습입니다. 아마 나오기 전에 서로 부부가 싸웠을 지도 모릅니다. 바로 전에 주택 추첨에 아파트 당첨이 되지 않고,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왔는지도 모릅니다. 15층, 20층을 바랬는데, 1층이 되어서 기분 나빠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사업이 부도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왔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교회에 기분 좋게 왔는데, 주차하다가 뒷차를 들이받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마음이 상하고, 마음에 분노가 생기고, 불편한 마음으로 예배를 참석했는지도 모릅니다.

미국 사람들은 세가지 걱정 근심이 있다고 그래요. 첫째는 점심을 어디가서 무엇을 먹을까? 맛있게 먹고도 살찌지 않았으면 좋겠는데....그것이 미국 사람의 첫 번째 근심입니다. 두 번째 근심은 어디 가서 차를 주차해 놓으면 고급승용차 누가 긁어 놓을까봐 그래서 걱정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걱정은 궁금하시지요? 천국에 가서도 골프할 수 있으려나? 그게 걱정이라는 거예요. 이 세 번째 예는 우리 한국 사람들은 아직 실감이 안 나지요. 우리는 아직 대중화 되지 않았으니까 그렇지요. 하지만 미국 사람들의 최고의 스포츠는 골프거든요. 미식축구는 그 다음입니다. 농구도 그 다음입니다. 그렇게 좋아하는 골프, 천국에 가서도 할 수 있을까? 그게 걱정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개인적인 슬픔 때문에 여러분들이 지금 슬픈 얼굴을 짓고 있고, 마음의 분노를 일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지금 시간낭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에 와서 그런 개인적인 일 때문에 분노하고, 얼굴 표정이 어둡다면 예배하는 자로써의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 우리가 하나님을 기쁨으로 찬양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화답하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개인적인 슬픔의 몇 가지와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고, 헤아릴 수 없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예배에서 인상 쓰지 마세요. 왜 예배에서 인상 쓰고 계세요?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은혜가 얼마나 많고 큰 데, 몇 가지 불편한 일 때문에 왜 인상 쓰고 있습니까?

오늘 사무엘의 슬픔은 개인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 전쟁에서 실패해서 좌절과 고통의 삶을 살게 될 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 때문에 사무엘은 슬퍼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런 문제 때문에 슬퍼한 적 있습니까? 한 사람의 죄의 문제 때문에 슬퍼한 적 있습니까? 교회 안의 불신앙 때문에 마음 아파한 적 있습니까? 기독교가 사회적 책임을 저버리는 모습 때문에 여러분 안타까워 하신 적 있습니까?

사실 어저께 그런 프로그램을 보고 나서는 그 KBS 새끼들 부수자고 데모하기 보다는, 우리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이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거기에 나가서 데모할 시간 있으면 나와서 무릎 꿇고 회개할 시간을 더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분노하는, 슬퍼하는 일이 이제는 개인적인 일을 가지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아요. 이제 120년을 맞은 한국교회는 이제 우리 이웃을 위해서, 우리 교회를 위해서, 우리 사회를 위해서 슬퍼하고,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금식하며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무엘의 슬픔은 그거였어요.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베들레헴의 이새의 집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사무엘의 슬픔이 희망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메시지를 주셨기 때문인데, 이새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를 세우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실패했다고 해도 좌절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시작을 통해서 왕의 왕 되신 하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당신의 백성들을 버려두지 않는다. 여기에 소망이 있어요. 하나님의 선택의 소망이 있습니다. 언제나 대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기대를 기억하면서 이제는 좀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우리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이루어 갈 것인가를,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진정으로 실천해 가는 평안의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대는 언제나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사울을 선택하셨습니다. 사울에 대한 기대가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체면 때문에, 자신의 교만 때문에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하나님의 그 기대하심에 이루지 못하는 연약함을 가졌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오늘 나의 교만 때문에, 나의 체면 때문에 감당해야 할 사명들이 감당되어지지 못하고, 방치되고, 오히려 그 일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 우리에게 주신 그 사명 어떤 경우에도 감당할 수 있는 책임감을 주시옵소서. 빛과 소금의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이 사회가 어둡다고 하지만, 어두울수록 더 빛을 발하기 마련입니다. 주님, 빛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함을 회개하게 하여 주시옵시고, 사회가 어둠을 발하지 아니하도록 주님 저희들을 인도해 주시옵소서. 오늘도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새로운 도전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생각 속에,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빛이, 그리고 세상이 우리를 바라보는 그 시각이 부족함이 없도록 새롭게 새롭게 거듭나는 기회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소망이 있습니다. 실패했을 지라도 새롭게 시작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소망을 가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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