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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선택의 기이함 (삼상 16: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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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황요한 목사 

사람을 선택하거나 또는 귀한 자리에 선택함을 받는다고 하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요즘 취업난에 허덕이는 대졸 졸업자들을 중심한 젊은이들을 보면 더욱 실감하게 됩니다. 자신의 비전에 맞는 회사를 찾기에 힘을 다하였고 그 회사를 다니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 보지만 현실적으로 취업의 문은 그저 높기만 하기에 어떤 이들은 수십군데 이력서를 넣어으나 불합격 당한 실패의 경험들을 가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 사무엘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선택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이를 위해 이새의 가정을 방문한 사무엘은 제사를 드린 후 예전 같으면 만찬을 온 가족들과 나누었을텐데 오늘은 식사를 제쳐놓고 이새의 아들들을 면담하는 시간을 먼저 가지게 되었습니다.

장남 엘리압이 먼저 소개 되자 사무엘 마음은 직감적으로 ‘바로 이 사람이구나.’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곧 바로 기름뿔을 가져다가 기름을 부으려고 했으나 놀란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사람을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며 사무엘의 직감을 나무라셨습니다. 결국 사무엘은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선택하려던 계획을 접고 새롭게 주신 하나님의 기준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둘째 아들 아비나답이 소개되었고 그 다음엔 셋째 아들 삼마가 소개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들 일곱이 모두 소개 되어졌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면접의 결과는 8절, 9절, 10절을 보면 똑같았습니다.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지금 사무엘이 면접을 보고 있었고 그들에게 불합격 사실을 통보하고 있었지만 성경은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으셨다"고 말입니다.

아들 일곱을 모두 불합격시킨 본문의 분위기는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할것인가? 그렇다면 1절에서 계시하신 "내가 이새의 자녀들 중에서 한 형제를 왕으로 예선하였다"고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것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분명 위기감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이새를 비롯한 모든 형제들도 침묵으로 사태를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의 종 사무엘의 리더쉽이 발휘되기 시작했습니다.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우리는 본문을 읽을 때마다 이 장면을 쉽게 넘어가기 일수였지만, 사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런 질문이 나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대답이 아버지 이새로 부터 나왔습니다. "아직 말째가 남아있는데 그는 양을 지키고 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는 빨리 그를 데려오라고 명하였습니다. 그가 오기 전에는 식사자리에 앉지도 않겠노라고 단호한 의지까지 보이고 있었습니다. 사실 아버지의 대답 속에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편견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말째인 다윗은 아직 어리기에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선지자를 만날 기회 조차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아버지의 결정에 형제 중 어느 누구도 말째도 함께 면접을 보아야 되지 않겠느냐며 거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실상 온 가족들이 합의 하에 다윗은 면접의 기회를 잃어버린 셈입니다. 형제들은 제사를 드리기 전에 온 몸을 씻고 정결한 옷을 입고 제사를 참여했을 것입니다. 면접에서 최고의 모습으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들에서 방금 불려온 다윗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라고 아주 놀라운 평가를 사무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션 바르고 향수 뿌렸던 일곱 형제들은 다 불합격 당했지만, 지금 광야에서 막 돌아온 다윗은 합격의 영광을 얻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

이스라엘을 여행해본 분들은 알겠지만, 이스라엘 땅의 대부분은흙 먼지날리는 광야가 대부분입니다. 조금만 멀리 나가면 자갈밭같은 광야지대입니다. 한 번 바람이 불면 흙먼지 모래먼지로 온 몸에 뒤집어 씌게 되는 것은 기본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나 지금의 팔레스틴 지역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다윗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얼굴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은 아름다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외모에서 오는 아름다움이나 특징은 아니였을 것입니다.

사람의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 합니다. 눈을 보면 사람들의 그 모든 상황을 알고 그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사무엘은 일터에서 막 돌아온 다윗이었지만 얼굴에서 빛이 나는 다윗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얼굴이 아름답게 느껴졌고 광채가 날 정도로 준수함을 느길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가 그니 빨리 기름을 부어라" 이 말씀은 내가 너에게 1절에서 계시했던 바로 그 형제가 바로 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기준을 포기한 사무엘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머뭇거리며 지체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즉시 기름 뿔을 취하여 기름을 부은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면 때때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상당히 다른, 어떨 때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을 행하실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은 이렇게 이렇게 해야 하는데, 하나님은 이것은 아니다. 우리가 전혀 생각하지 못 한 우리가 포기했던 그런 일들, 불가능 하다고 생각했던 일들, 하나님께서는 하시는 분입니다.

바로 부모도, 형제도 포기했던 다윗을 하나님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존귀한 자로 세워서 기름을 붓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시편 118편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면서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돌이 되게 하셨다. 베드로후서 2장 4절에 보면 사람들은 예수를 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주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이제 우리의 기준을 내려놓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주님의 일을 하시는데 인간적 기준은 버려야 할 때가 왔습니다. 계산기 놓고 두들기면서 주님의 일을 하기로 한다면, 아무 일도 주님이 오실 때까지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사람들은 안 된다고 버렸던 예수, 사람들은, 부모들은, 형제들은 대상도 되지 않는다고 포기했던 다윗, 그런데 하나님은 그 다윗을 들어서 별처럼 빛나는 당신의 일꾼으로 사용하신 줄 믿습니다.

아버지 생각, 막내는 데려오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너는 거기 남아있어.’ 그리고 형들만 데려왔을 때 막내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섭섭했을까? 그래도 주의 종이 와서, 목사님이 와서 중요한 예배를 드리고,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한다고 하는데 그 청소년 시기에 있었던 다윗, 얼마나 마음이 섭섭했을까?

이미 다윗은 바로 얼마 후에 블레셋과의 이스라엘 전쟁에서 엘라 골짜기에서 벌벌 떠는 이스라엘 정예군사와 자기의 맏형 엘리압도 장군이 되어서 갑옷을 입고, 풍채가 당당한 모습으로 있었지만, 바위 틈에 숨어서 떨고 있었고, 그 형의 모습을 얼마 후에 가서 보게 되지요.

그리고 다윗은 분개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욕하고 저주하는 저 인간을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냥 듣고만 있느냐고 분개하고, 내가 나가겠노라고 갑옷도 맞지 않고, 장수의 칼과 창도 맞지 않고, 심지어는 임금이 주는 갑옷도 맞지 않았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목동의 모습으로 나갔지만, 그에게서 나오는, 선포되는 고백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너는 칼과 창으로 나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 이름으로 나가노라. 전쟁은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이다. 칼과 창의 수요에 달려 있지 않다. 다윗이 고백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얼마 되지 않은 다윗의 고백을 들어보면, 이미 아버지와 형제들은 제외시킨 다윗이지만, 그 다윗의 중심에는 그런 엄청난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던 다윗입니다. 하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는 고백, 전쟁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고백, 그것이 이미 다윗의 신앙의 고백이었고, 그의 중심의 사상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다윗을 사무엘이 보았을 때 눈이 빛이 나고, ‘아, 이 사람이구나.’ 하나님께서도 마음에 흡족해 하셨습니다.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해서 기름을 부었습니다. 13절입니다. 기름을 붓는다고 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오직 주의 종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저는 지난 4월 우리 연회 때 우리 교회 속했던 민철영전도사님과 우리 지방에 속했던 4명의 수련목회자들에게 목사안수의 안수례를 베풀었습니다. 이제 목회 28년을 하면서 내가 목사 안수를 받을 때도 엊그제 같은데, 내가 후배 동역자에게 목사 안수를 주는 축복과 특권을 얻게 되었습니다.

목사가 아무렇게나 되는 것은 아니지요. 자기 머리에 자기가 안수하고, 스스로 목사라고 행사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외국에 가면 그냥 특별한 공인된 기관없이 스스로 몇 사람 모여서 단체를 만들고, 스스로 그렇게 하는 어처구니 없는 그런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공인된 교회, 우리가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공회를 믿사오며 할 때 공회, 공교회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신 교회, 하나님이 권위를 부여하신 공동체, 거기서 기름을 붓는 것입니다. 기름을 붓는 사람도 권위를 인정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지요.

사무엘이 기름을 부었습니다. 사무엘만이 할 수 있는 권위입니다.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많은 형제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선택되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평안의교회에 오신 것은 어떻게 오신 것입니까? 제가 여러분들을 생각하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 평안의 가족이 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들여서 수고하며 인내하며 기도하면서 여러분들이 평안의교회에 소개가 되어지고, 또 여러분들이 교회 왔다고 해도 여러분들이 성도가 되고, 일꾼이 되기 위해서 정착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눈물과 기도와 수고와 헌신이 필요한 지를 알고 계십니까?

서울의 유명한 이름만 대면 아는 목사 중에 목사, 설교 중에 설교라고 그렇게 유명한 교회의 정착율이 20%밖에 되지 않아요. 한 성도가 와서 정착해서 일꾼이 된다고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선택된 일꾼,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지명되고 선택받은 일꾼인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자부심이 없으면 그런 확신이 없으면 기분 나쁘면 딴 데 가고, 누구랑 다투면 딴 데 가고, 이렇게 저렇게 여러분의 거취가 맘 놓고, 아무렇게나 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명하시고, 하나님이 세우셨다고 하면 세상이 두 쪽 나도 부름 받은 자리를 떠날 수 없는 거잖아요. 여러분의 부름 받은 집사로, 권사로, 교사로, 성가대원으로, 속장으로, 강사로, 선교회 임원으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 만만한 일입니까? 그렇게 한 꺼번에 뒤도 안 돌아보고 던져버릴 정도로 그렇게 가벼운 것입니까?

정상적인 교인이라면 올 때보다 갈 때가 더 중요한 줄 믿습니다. 가기는 가야죠. 왜? 우리 교회도 새로 오는 성도가 있으니까 가는 성도가 있으니까 오는 성도도 있지요. 이사 때문에 가는 분도 있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제가 늘 오픈합니다. 이 황요한목사가 은혜가 되지 않으면 언제든지 교회를 떠나십시오. 우리 교회가 앞문이 크게 열려 있지만, 뒷문도 조금도 열려 있습니다.

그 문제가 아니라면 목숨 걸고서 제단을 지켜야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자부심인지,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세우셨습니다. 형제 중에서 선택 받은 다윗입니다.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 하였음이니라. 리차드 포스트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재능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깊이 있는 사람을 찾으신다. 심지가 깊은 사람, ‘당신은 좀 다른 교회로 갔으면 좋겠는데...’ ‘왜 나보고 다른 교회로 가라고 그래요? 목사님....’

어느 교회는 지교회를 세워놓고, 교회 부 교역자를 담임으로 해서 땅도 사주고, 교회도 지어주고, 그 쪽 지역은 그 교회로 가십시오. 목사님 왜 가라고 그럽니까? 가라고 해도 못 가는 사람이 있어요. 얼마나 멋있어요?

잘 안 보여요. ‘그 분은 왜 안보입니까?’ ‘이사 갔어요.’ 여러분, 그런 너절한 교인은 되지 마세요. 올 때 보다 갈 때가 더 중요합니다. 갈 때 꽃다발 받으면서 올 때 꽃다발 받고 환영 받았으면 갈 때 환송 받으면서 담임목사의 축복 받으면서 가세요.

뭐 어떤 교회는 교인이 이사가면 저주한다지요? 자식이 죽을거야, 사업이 망할거야. 그래서 어떤 분들은 벌벌 떨어요. 그 전에 교인들이 전화가 옵니다. 진짜 이사가면 저주 받나요? 목사의 축복을 받으면서 여기서도 충성 했지만, 이사 가서 새롭게 섬기는 교회에서도 충성된 일꾼이 되어서 도대체 이 사람의 충성이 어디에서 배운 것이냐? 평안의교회에서 배웠다.

그렇게 영광 돌리고, 당신이 섬기던 교회도 존귀하게 되도록 열심히 하세요. 사람은 올 때보다 갈 때가 중요합니다. 환영받지 못하고, 꽃다발 받지 못하고 가는 교인들은 그건 정상이 아니잖아요. 여러분들은 시작보다 끝이 아름답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끝이 좋아야 합니다. 그래서 유종의 미라고 하는 것입니다.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멋있게 가야지요. 축복받으면서 가야지요. 아쉬워서 눈물 흘리면서 당신 같은 사람 또 만나기 어려운데, 그런 아쉬움 속에서 가야지요.

지금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선택하실 때 많은 사람 중에서 이새의 가정을 택하시고, 그 많은 자녀 중에서 다윗을 택하셨어요. 이 날 이후로 다윗은 더욱더 새로워진 줄로 믿습니다. ‘이 날 이후로’ 굉장히 중요한 표현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제사를 드리러 온 이전과 제사를 드리고 나서 다윗을 만난 이후 다윗은 인생이 너무 달라졌어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권하고 싶습니다. 작게는 오늘 예배를 드리러 올 때의 발걸음과 지금 말씀을 듣고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돌아가는 여러분의 발걸음이 달라지기를 축원합니다. 크게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기 이전에 우리와 주님을 그리스도 영접한 이후의 우리의 인생은 분명히 달라져 있어야 합니다. 이날 이후로 다윗은 달라졌습니다. 그의 인생은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 일꾼을 선택하실 때에는 선택만 해 놓고, 우리보고 알아서 하라고, 그렇게 무책임하게 방임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셨으면, 하나님께서 일꾼으로 뽑으셨으면, 일 할 수 있도록 능력 주시는 분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신, 성령의 충만함을 주신 줄 믿습니다. 주님의 일 하려면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야 합니다.

누가 무슨 일을 하려거든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주시는 힘을 받아 하는 것처럼 해라. 여러분 힘 가지고는 오래 못 갑니다. 여러분의 열정 기껏해야 1년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일 하다가 ‘저 교사 할래요.’ ‘저 성가대원 할래요.’ 들어가기는 쉽지요. 뭐, 세례만 받았으면 다 받아 들입니다. 그런데 연말이 다가오면 ‘저 좀 빼주세요.’ ‘왜요?’ ‘새로운 직장이 생겼어요.’ ‘저 좀 빼주세요.’ ‘왜요?’ ‘생각보다 힘드네요.’ 죄송한 표현이지만 웃기는 일이잖아요. 더 이상 이제는 웃기지 마세요. 하나님의 일 그렇게 간단하게 들락거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시고 일할 수 있는 능력도 겸하여 주시는 줄 믿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주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한 번 깨닫고 감사를 드립니다. 선택의 은혜, 지명하여 부르신 은혜, 이제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쓰임 받는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부어 주셔서 일할 수 있는 능력 주시고, 지혜 주심을 믿습니다. 변함없이 정말 변함없이 주님을 섬기는 충성된 일꾼들 되게 하시고, 우리를 모퉁이돌 같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귀한 능력과 선택에 늘 감사하면서, 늘 기뻐하면서 쓰임 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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