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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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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기 목사

어느 쌀쌀한 가을 날, 한 남자가 그때까지 일해오던 정부 관료직을 내놓고서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 아주 낙담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가 왜 낙담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곧 알아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어리석은 히스테리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남편을 잘라버린 정부를 탓하지 않았고, 잘려난 남편의 무능함을 들먹이지도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녀는 불을 밝게 켜놓고, 펜과 잉크와 종이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녀의 손을 남편의 어깨에 다정히 얹고, 그 남편의 얼굴을 상냥하게 바라보면서, “이제 당신은 책을 마음 놓고 쓸 수 있겠군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이 말은 마치 마술과도 같은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좌절감을 잊고 책을 쓰기 시작했고, 결국 명성과 돈을 얻었습니다.
그 사람은 1804년부터 1864년까지 살았던 미국의 소설가 나다니엘 호오돈(Nathaniel Hawthone)입니다.
사람의 말도 위로와 힘을 줍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은 더욱 여러분과 저에게 위로와 힘이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유대에서 사마리아를 지나 갈릴리에 가셨습니다. 이제 5장부터 8장까지는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유대인들과 함께 논쟁도 하시고, 고통도 당하시고, 오해도 받으시는 사건들이 기록됩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된 때를 1절은 그냥 “명절날”로 표기하기에 어느 명절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3월의 부림절이라기도 하고, 5월경의 오순절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문 가운데 양문이라고 있었습니다. 이 성문은 예루살렘 동북 편에 위치한 문으로서 그 근처에 양을 파는 시장이 있다고 해서 양문이라 이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이 양문 근처에서 양을 사가지고 끌고 들어가서 제사를 드렸는데, 지금은 스데반 문이라고 불립니다. 돈 좀 있고, 지위가 있는 사람들은 이 문으로 드나들지 않습니다.
거기에 못이 하나 있는데, 베데스다, 즉 자비의 집이라는 이름의 연못입니다. 강림의 집, 행랑의 집과 같은 별명을 가지기도 했는데, 길이가 17m가 되는 제법 큰 못입니다. 지금도 가면 연못 옆에 기념예배당을 세워 놓은 베데스다 연못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연못은 전설이 있었습니다.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못 주변에는 세상의 별별 병자들이 다 모여왔습니다. 마치 인생 비극의 전시장 같았습니다.
거기에 다섯 개의 행각이 있었는데 이 행각 안에는 눈먼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과 중풍병 환자들 등 많은 환자들이 누워 있었습니다.
거기에38년 된 병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38년이 된 병자. 무슨 병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견해는 중풍병자 일 것이라는 겁니다.
어떻든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 연못의 물이 동하면 제일 먼저 뛰어 들어가야 하는데 혼자서는 연못까지도 갈 수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가.
건강한 사람들은 잘 가지도 않는 곳. 돈 있고. 지위가 제법 되는 사람들 역시 잘 가지도 않는 곳. 병자들의 초췌한 몰골과 아픔의 신음소리가 들리는 곳. 물이 움직이면 어떻게 치유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한 가닥 희망을 안고 병자들이나 찾은 곳. 그러나 사실 그 병자들은 전혀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혈기마른 사람 곧 중풍병 환자 등 치유가 불가능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곳에 가셨습니다.
사실 예수님 역시 그 양문 말고 다른 문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에 거하실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감히 그런 곳에 가실 분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그곳에 가셨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사마리아에 가셨던 거나 갈릴리로 가셨던 거나 그 이유가 같습니다.
요한복음 4장 34절에,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고 그분의 일을 이루는 것이다.”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분의 뜻, 그분의 일이란 뭡니까?
이사야 35장 5, 6절에, “그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메시야가 오시면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이사야의 예언입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이루기 위하여 베데스다 연못가를 찾으신 것입니다.
그 연못가에서 예수님이 만나 38년 된 병자. 예수님은 그 병자를 찾아 가셨습니다.
궁금한 것은, 그 곳에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38년 된 이 병자만 예수께서 고쳐 주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냥 큰 소리로 “모두들 자리를 들고 돌아가라” 그러셨으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이 고침 받았을 텐데……. 아니면 그 물을 예수께서 움직여서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나 나중에 들어가는 사람이나 누구든지 고침 받게도 하실 수 있으실 텐데…….
분명한 것은, 예수님은 병을 고쳐 주시는 의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육신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고쳐주시려고 오신 분이십니다.
만약 예수님이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오셨다면, 마가복음 9장 47절의,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버리라. 네가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될까?
때문에 예수님은 그곳에 있는 병자들을 또 고쳐 줄 의무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많은 병자 중 예수님을 만난 38년 된 병자, 그는 복 있는 사람입니다.
보세요.
진주시민이 약 34만입니다. 그 들 중에 한 사람인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이 신비롭지 않아요? 이 사실이 기쁘지 않아요? 이 사실이 놀랍지 않아요?
이렇게 말하고,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뭐가 신비롭고 뭐가 기쁘고 뭐가 놀라워요? 내가 예수 믿었는데”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입니다.
“이제 교회 나가야지.” “이제 예수 믿어야지.” “그 동안에 놀만큼 놀았으니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믿고 구원 받아야겠다.” 그래서 갖게 된 믿음이 아닙니다.
38년 된 병자에게, “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 왜 예수님은 당신만 고쳐주셨습니까?” 하고  물었다면 그 사람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만약 여러분이 그 38년 된 병자라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그래도 내가 똑똑하니까“
“아마도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필요하니까”
그리 대답했겠습니까? 뭐라고 대답하겠어요?
한마디로 “나도 모르겠어요.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왜 나를 고쳐 주셨는지 나도 모르겠어요.”
그래요 바로 그것이 복음입니다. 바로 그것이 은혜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나을 것 하나 없는데, 거룩하게 살아온 것도 아니고, 똑똑한 것도 아니고, 돈이 많아 주님 위해, 교회 위해 팍팍 내놓은 것도 아니고, 베드로나 바울같이 굉장한 일꾼도 못 되고…….
도무지 내 세울 것 없는, 나 같은 건 관심조차 가질 수 없는, 이웃 사람조차도 별 볼일 없이 보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바로 그분이 나를 찾아 오셨고, 내게 믿음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바로 그분이 나의 죄를 씻기 위해서 당신은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 생명까지 내어 놓으셨습니다.
이 사실이 어찌 신비롭지 않으십니까?
이 사실이 어찌 기쁘지 않으십니까?
이 사실이 어찌 놀랍지 않으십니까?

38년 된 병자를 찾아오신 예수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38년이나 된 병자. 말이 38년이지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 38세 되신 분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반신불수로 오늘까지 살아왔다는 것 아닙니까? 1, 2년만 팔 다리가 아파도 짜증나고 통증이 심하면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데 38년 동안 병을 앓아왔으니…….
그에게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이 시간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큰 소리로 대답하십시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예 제가 낫기를 원합니다.” 다시 한번. 여러분의 모든 질병과 문제가 치유된 줄 믿습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어떤 사람은 “냅 둬유 이렇게 살다 죽을래유” 그러면 예수님께서 “그러려무나.”
보세요. 하나님의 능력은 완전히 좌절한 사람에게는 별 도움이 되질 못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환경에서든지 절대로 좌절하지 마십시오.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소망을 잃지 않은 사람을 원하십니다. 주님은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실 때 “예, 제가 낫기를 원합니다.”고 대답하는 사람을 찾으시며 그들에게 은혜와 능력을 베푸십니다.
프랑스에서 미테랑이라는 분이 1981년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는 뼈 속까지 암이 퍼져있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습니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사람이 암 환자라는 소문이 나면 국가적으로도 어려움을 당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래서 주변의 입을 막았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이 상상할 수도 없는 정신력으로 병고 싸웠습니다. 그 결과 재선까지 15년 동안 대통령으로 거뜬하게 자기 일을 다 한 후 명예롭게 퇴임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지 않는 자도 이럴진대,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 세상을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쉽게 절망해서야 되겠습니까?
열두 해 혈루증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아무도 모르게 손을 대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여인의 병이 완전히 나았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실 것 없습니다. 그냥 손만 대고 지나가도 그의 병이 낫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것은 그 병자로 하여금 소망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38년 되었습니다. 이젠 포기할 만 합니다. 그동안 고침 받기 위해 별별 방법을 다 동원 했을 테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38년, 그래서 희망을 버린 지 오랩니다.
못가에 와 앉은 것도 행여나 하는 요행에서였습니다.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없으니까 그냥 포기한 상태로 못가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우연한 기회에 물에 들어가게 되어 병이 나으면 다행이고, 아니면 그냥 그리고 살다 죽는 거고…….
병든 자가 차도가 있으면 기쁘다가도 없으면 낙심합니다. 사업이 좋은 듯 하면 신나다가도 안 되면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그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는 예수님의 물으심은 소망이 사그라지는 그의 가슴에 작은 불씨를 일으켰습니다. “그래, 지금이라도 물이 움직일 때 들어 갈 수만 있다면, 물이 움직일 때 누군가가 나를 들쳐 업고 뛰어 빨리 연못에 넣어 줄 수만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나도 나을 수 있을 텐데”
“선생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내가 가는 동안 남들이 나보다 먼저 못으로 들어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놓였어도 소망을 잃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선생님, 물만 움직이면, 그 물이 움직일 때 들어가기만 하면, 제 병은 나을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게 38년 된 병자에게서 나올 대답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물으심에 그는 그런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소망. 이미 이루어 진 것은 소망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진 것을 믿을 수 있는 것이 소망입니다.
예수님의 손에 들려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보는 순간 5000명의 장정이 먹고도 남은 것 열두 광주리를 모으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 소망입니다.
이미 예수께서 내 앞에 오셨다는 것만으로도 소망이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소망이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진지하게 물어 보시는 예수님을 보는 병자에게는 가냘프지만 믿음이 생겼습니다.
38년 된 병자. 누가 그렇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을 수 있을까? 그런데 한 사람이 그 앞에 서서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었다면, 뭔가 그 사람에게 기대하는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아! 이 사람은 내 병을 고칠 수 있는 뭔가가 있는가 보다.” 그리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보통 예수님의 치유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께서 나사렛 고향에 가셔서 별로 기적을 행하지 않으신 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은 병 고칠 때마다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38년 된 병자는 믿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누군지 모릅니다. 지금 자기 앞에 선 사람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바디메오처럼 외친 것도 아닙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무릎 꿇고 통사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혈루증을 12년 동안 앓던 여인처럼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댄 것도 아닙니다. 그에게는 믿음이 없습니다.
가끔 그리스도인들도 “나는 믿음이 없어서” 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구원자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할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물론 예수 믿는 믿음이 있는 자는 병 고침 받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치유의 선행 조건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이 절대 조건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실 때 사람들이 가지는 믿음이 크냐 작으냐 하는 조건에 의해 제한 받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믿음이 없다고 하나님의 일을 안 하시는 것 아닙니다.
허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이 먼저 믿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병 고치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이 곧 인간의 병과 인간의 문제를 고쳐주실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이신 것을 믿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물으셨고, 그 물으실 때 38년 된 병자는 가냘프지만 믿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다만 그 방법이 달랐습니다.
아마도 38년 된 병자의 생각은, “이 사람이 물이 움직일 때 나를 들어다 연못에 넣어 줄려나 보다.” 그리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선생님,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들어서 못에다가 넣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 말한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방법은? 말씀입니다.
8절,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 말씀이 그 38년 된 병자를 고쳐서 일으켜 세우신 주님의 능력이심을 믿습니다.
“내가 낫기를 원하느냐?” 그 말씀의 영어 번역은“ 네가 온전하고자 하느냐?” 좀 더 범위를 넓힌다면 “내가 구원 받기를 원하느냐?” 그런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스스로 온전해 질 수 있나요? 어떻게 사람이 스스로 구원할 수 있나요? 병자들이 스스로 고칠 수 있다면 왜 연못가에 몰려 왔고, 병자들이 스스로 고칠 수 있다면 왜 38년 동안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을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만이 여러분을 온전하게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여러분을 구원하실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43장 2절에,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뭐가 중요합니까? “내가 함께 할 것이라.” 바로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그런 은혜가 임하게 된다는 겁니다.
최용덕씨가 작사 작곡한 복음성가 중,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평안히 길을 갈 땐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네“
그렇습니다. 모든 일이 잘 될 때는 예수님이 함께 계셔도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아요. 그러나 38년 된 병자처럼 지치고 곤하여 일어날 힘조차 없게 되었을 때 예수님은 다가와 손을 내밀어 일으켜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고통과 절망에서 일어나게 하십니다.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세상에서는 소망이 없습니다. 정치인들은 정치 잘 한다고, 늘 국민의 뜻이라고 말하지만 국민은 그들을 통한 소망을 잃어 버렸습니다. 한국의 교육 열기가 대단하다고 하지만 웬만한 형편이 되면 교육 때문에 외국으로 이민 갑니다. 물론 그 외국도 정치나 교육이나 인간의 소망되지 못함이 이미 한참 되었습니다.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어두움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우리의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영혼의 질병까지도 치유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좌절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우리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의 병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비나 눈을 피할 수 있는 집을 지어주자.” “물이 움직일 때를 기다리는데 편하게 해주자.” “곁에서 기다렸다가 물이 움직일 때 빨리 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자.” 그리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건 교회의 사명이 아닙니다. 그런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교회의 사명은, 이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교회 빈 자리 채우려 하는 것 아닙니다. 육과 영이 병들어 있는 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치유 받도록 하는 것이 전도인 겁니다. 문제 있는 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해결 받게 해야 합니다. 절망에서 일어나게 해야 합니다.
따라서 병들어 있는 자들에게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곤 “네가 낫기를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권면해야 합니다.
그것이 전도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여 앉은 수많은 병자들, 38년이나 병들어 고통당하는 병자.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다만 다른 것은,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지만, 우리에겐 치유자가 되시고 구원자가 되시는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기다리는 것 아닙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 아직도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마귀의 전략 중 하나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찾아오신 예수님을 영접 하십시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시는 주님께 “네, 제가 낫기를 원합니다.” 대답하십시오. 그래서 “일어나 걸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여러분과 저 우리 교회가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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