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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노의 방법 (롬 1: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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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유재명 목사

복음 안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죄 안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다 말씀을 드렸습니다. 죄를 향하여서는 계속된 죄인을 향하여서는 진노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사랑의 하나님만이 아니요 용서의 하나님만이 아닙니다. 은혜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진노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대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즉각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성경 안에서 보면 겁이 나긴 납니다. 과연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아간이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즉각적으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무너진 삼손의 초라함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보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아무 역할도 못하는 것 같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악인을 향하여서 하나님의 진노가 즉각적으로 임하여 팔다리가 부러지든지 망하든지 해야 할 것 같은데 오늘의 현실 속에서는 아닌 것 같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죽인 김일성은 천수를 누리다 갔고 적그리스도의 상징인 문선명은 오늘까지 감기 한번 안 걸리고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5.18 광주사태의 주범인 사람들도 벼락 한번 맞지 않고 잘 살고 있습니다. 온갖 쾌락을 즐기던 제 고등학교 동창도 잘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볼 때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됩니다. 오늘의 죄악들 속에서 진노하시는 하나님은 어떠한 역할을 하고 계시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먼저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즉각적 심판이 있습니다. 마음에서 시작합니다. 주일을 어기거나 죄를 지을 때 관계 안에서 누구를 힘들게 할 때 마음이 편하지 않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다음은 환경으로 옵니다. 물질적으로 건강으로 자녀의 문제로 일이 꼬이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들은 하나님의 즉각적 심판 속에 있어지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입니다. 이렇게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심판도 있지만 최고의 심판은 유기입니다. 유기라는 말은 내어버려 둔다는 것입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진노의 방법으로 버려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떠난 하나님의 포기입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계속된 죄인을 따라 가면서 징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계속 된 죄인에게 간섭을 거두시고 이제 네 마음대로 해라고 유기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부모가 유치원에 다니는 자녀에게 간섭을 거두고 방종을 허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 버려진 인간들의 방종은 곧 말살되고 죄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 마져 상실 한 채 완전히 죄의 종이 되어지고 맙니다. 사실 하나님의 간섭은 하나님의 보호입니다. 간섭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보호와 간섭을 포기한다는 것은 완전히 방치하거나 버려둔다는 의미가 있어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시골에 버려진 집이나 농사를 짓지 않는 터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또한 골목길에서 번호판이 떨어진 채 버려진 자동차를 보신적도 있으실 것입니다. 그렇게도 아담했던 집들이 생명이 넘치던 논밭들이 그리 잘 달리던 자동차가 버려지면 아주 비참한 몰골로 변해버린다는 것입니다.

파스칼의 팡세에 보면 인간의 가슴속에는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님 계셔야 할 절대 공간이 있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 안에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버렸습니다. 하나님 모시기를 거부하는 인생들을 하나님의 간섭을 피하는 인생들을 하나님이 버려두신 것입니다. 간섭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버려두니 이제 그 인생이 어떠하겠습니까? 빛이 없으니 사람 안에 빛이 없고 생수가 없으니 사람이 메말라 버렸습니다. 이러므로 인간은 부패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인간의 내면을 보면 마치 온갖 오물과 더러운 것들로 가 득 찬 옛날 시골 우물가의 구정물 통과 같습니다. 겉보기에는 한없이 잔잔하고 한 그릇 떠서 마실 수있는 것처럼 깨끗해 보이지만 한번 저어보면 흔들어 보면 온갖 더러운 음식물과 썩은 것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들은 무엇인가 배웠거나 가졌기에 겉으로는 꾸며져 좋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면에 들어가 보면 아주 더러운 속성과 사단이 뿌려놓은 온갖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단이 심어 놓은 것들이 내 영혼 깊은 곳에서 내 인격을 지배하고 성격을 지배하고 내 삶을 지배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오늘 본문에만 하나님이 버려두셨다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24절에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셨다 했고 26절에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다 했습니다. 사람들의 삶에 인격에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정욕입니다. 부끄러운 욕심입니다. 사람들은 지배하고 있는 그 정욕이 부끄러운 욕심이 가져다주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나는 종교적인 포기요 다른 하나는 도덕적 포기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영적 붕괴입니다.

첫째: 종교적 측면에서 하나님이 버려두신 인생의 모습

24절에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두셨다는 것입니다. ‘네 마음대로 살아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포기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이 사랑이라면 포기는 곧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말씀의 인도를 받고 살아야 할 인생들이 하나님이 아닌 정욕에 이끌려 사는 삶을 삽니다. 요일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육신이 정욕과 안목의 정욕은 하늘이 아니라 세상에서 요구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정욕에 이끌리는 삶은 철저하게 육신만을 위한 삶이요 조이는 것만 목표로 하는 삶입니다. 이들이 삶에는 하나님이 전혀 계산되지 않는 삶이요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탈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하나님이 계산되어지고 말씀의 간섭을 받고 있음의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은 무엇입니까? 육신을 위한 삶의 결국은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는 삶의 모습은 더러움이니 하나님 없이 말씀에 간섭 없이 살아가는 삶의 결국은 죄와 사망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포기한 인생들은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질 때 하나님과의 관계만 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를 섬기고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야 할 인생들이 욕심으로 인하여 서로 상하게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포기하고서는 절대로 행복 할 수가 없습니다. 25절에 보면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 할 이시로다 했습니다. 소요리 문답 제 1문에 질문합니다. 사람의 제일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는 것은 사람에게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포기한 인생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보다는 세상논리에 의해 살아갑니다. 영성보다는 이성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을 원하느냐보다 세상이 무엇을 원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생각이 나의 마음이 나의 언어가 세상으로 길들여지지 않게 하소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진짜를 주고 가짜 거짓 것을 가지고 와서 삽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교회가 가장 큰 위기입니다. 하늘이 말려나고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이 목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진리가 진리 되기보다는 적극적 사고방식 같은 것이 강단을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영적인 것을 포기한 채 병 고치는 것만이 목적인 교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교회가 가장 큰 위기입니다. 하늘이 밀려나고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이 목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가진 것으로 더 경배하고 섬기는 인생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될 인생들이 자기를 섬기는 것입니다. 자기가 주인입니다. 시1:1절에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 했습니다. 하나님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자기가 앉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인생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나를 섬겨 달라 합니다. 인간의 탐욕은 결국 하나님마저 내 마음대로 움직여 달라 합니다. 하나님을 포기한 사람들이 피조물을 섬기며 우상숭배자가 되어갑니다. 그런데 우상숭배자가 우상을 섬기게 되는 원인은 인간의 정욕에서 나온 것입니다. 인간의 탐욕이 성장하고 성장해서 우상숭배로까지 이어집니다. 우상은 언제나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상은 내가 주인입니다. 자유자재로 우상을 만들었다가 부추기기도 하고 싫으면 다시 만들고 그래서 우상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실재로는 나를 섬기는 것입니다. 우상은 실제로 신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의 욕망을 형상화 한 것이 우상입니다. 그래서 우상은 인간의 본능과 항상 맞아 떨어집니다. 그래서 우상은 인간의 욕망과 충돌이 없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우상는 인간의 죄를 정당화 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마음에 음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때에 사람들은 비너스라는 신을 만들어 그 신의 이름으로 음행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돈을 추구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풍요의 신인 바알을 만들어 바알을 섬긴다고 하면서 탐욕으로 갑니다. 사람들이 우상을 좋아하는 이유는 내 마음대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상은 나에게 절대 부담을 주지 않습니다. 나의 원함과 충동하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은 우상을 만들어 놓고 죄를 정당화 합니다. 왜 사람들이 교회를 힘들어 하는지 압니까? 그것은 바로 나의 원함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을 섬기면서 회개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우상은 죄를 책망하지도 않습니다. 우상숭배자가 회개하는 경우도 없습니다. 다른 종교와 기독교의 절대 차이는 무엇인지 압니까? 다른 종교는 우상에 아무리 색칠을 해도 결국은 나입니다. 인간의 탐욕대로 우상을 형상화하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나이자 땅입니다. 하늘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나를 넘어 또 다른 나를 추구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안에 있어야 하는 진정한 나를 말합니다. 하늘을 말합니다.

두 번째: 도덕적 측면에서 하나님이 버려두신 인생의 모습

26절에 보면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라고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을 포기한 인생들이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순리대로 써야 하는 성적욕구를 과다하게 순리를 넘어 사용되어지는 성적욕구는 타락을 부릅니다. 이를 ‘색욕’이라합니다. 어디까지 가는지 볼까요? ‘여인들이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입니다. 여기서 ‘순리’라는 말은 하나님이 정하신 이치대로입니다. 성적욕구는 절대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기본적 욕구이자 축복입니다. 이러한 성적욕구는 하나님이 정하신 이치와 순리 안에서 즉 결혼이라는 제도적 원리 안에서 쓰여 질 때는 하나님의 선물이자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이 축복은 바로 연합과 또 가정을 구성하게 하는 생명을 출생하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세우고 이 가정 공동체를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동참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포기한 인생들은 성을 순리가 아니라 ‘역리’로 쓰는 것입니다. 이는 곧 현재에 나타나는 성을 상품화 하는 것 등이 대표적 예입니다. 성을 이용해서 여자고 남자고 먹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성을 상품화하는 것은 인간 최고의 불행입니다. 중고등학생들이 원조교제 안에서 무너지고 가정주부들이 아이들 학비를 그리고 학원비 보충을 한다고 해서 아르바이트로 성을 팔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지금의 현실입니다. 전국에 모텔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이 모텔의 손님들 90%가 다 불륜 안에 있는 아줌마들이 주 고객이라 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성적타락과 성을 순리가 아닌 역리로 쓴다는 것 자체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오히려 유행이 되어 버렸습니다. 기준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는 주 소재가 순전히 불륜입니다. 원조교제나 가정의 붕괴를 비참하게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미화하여 아름답게 또한 로맨스로 그려내니 가정주부들이 이에 현혹되고 기준을 망각해버리는 것입니다. 연예오락 프로그램에는 오로지 여자들은 상품화하여 ‘섹시하다’라는 말에 젊은 여자들은 정신을 못 차리고 노출의 한계를 제한 없이 하여 자신을 치장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붓듯 하매’라고 성경은 정확히 표현합니다. 오죽하면 공공연히 대한민국을 불륜공화국이라고 하겠습니까! 결국 이제는 남자가 여자에게 여자가 남자에게 만족을 하지 못하고 같은 동성끼리 행위를 하는 동성연애인 세임 섹스가 우리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음을 우리는 인식해야 합니다. 쾌락은 결국 더욱 자극적인 쾌락을 추구하게 하고 결국 짐승과도 교합하는 더러운 짖을 서슴치 않고 행하고 있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절대 강자였던 로마가 무너진 원인도 바로 성적타락입니다. 목욕문화가 최고로 발달했고 유명한 철인이요 웅변가인 세네카의 말을 빌리면 ‘로마 그 당시에는 이혼하기 위해 결혼하고 결혼하기 위해 이혼한다 했습니다. 또한 황실에는 대다수의 황제들은 동성연애에 빠져 있었다’ 했습니다. 노아시대 때나 소돔과 고모라성이 유황불에 무너진 것도 그리고 거대한 요새이자 난공불락이었던 폼페이가 물에 순식간에 잠겨버린 것도 또한 여리고부터 시작하여 가나안의 전 사람들을 죽임을 당했던 것도 바로 이런 성적타락이 원인이 되었습니다.
동성이 아닌 이성끼리 정상적인 부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이어야 순리로 사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포기하고 정욕에 이끌려 사는 삶의 결국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축복의 장소인 가정이 붕괴되는 것입니다. 사단이 가정을 깨트리고 있습니다. 사단은 교회를 깨트리기 원하는 만큼 가정을 깨트리려 합니다. 하나님은 제일 먼저 사람에게 가정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가정은 인간 행복의 기본입니다. 사회적으로 아무리 성공해도 가정이 무너지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시회 적으로 성공이나 출세를 못해도 가정이 든든하면 행복한 것입니다.

가슴이 아픈 것은 우리나라가 이제는 이혼공화국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웃으면서 헤어지는 이혼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울타리 안이 소중합니다. 내 아내 내 남편이 소중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성에 대한 기준이 무너지자 가정공동체가 무너져버리고 있습니다. 성경의 소리보다 세상의 소리에 더욱 더 민감해 있습니다. 청소년들이 서로 몸을 섞는 것을 아주 가볍게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학생들은 동거하고 살다가 괜찮으면 결혼한다나요 세상이 다 그러니 별 문제 없다는 듯이 이야기 합니다. 아닙니다. 성경이 아니라면 아닌 것입니다. 세상이 무어라 해도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소리를 우리는 원칙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요즘에는 바람을 못 피우는 사람을 샌님이나 못난 사람이라 합니다. 세상은 마치 성적인 데에서만 행복이 있는 것처럼 몰고 갑니다. 여자고 남자고 다 애인이 있다 합니다. 이것이 자랑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느 날 비행기가 추락했는데 사람들은 거의 다 죽고 한 가족만 어떻게 살아났다 합니다. 왜냐 하니깐 아빠는 제비였고 엄마는 날라니였고 자식들은 비행청소년이었기 때문이랍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가정은 소중한 것입니다. 가정을 깨트리는 그 어떤 유혹과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가족들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청년들이여! 서로 사귀더라도 서로를 아껴주어야 합니다. 함부로 꽃을 꺽거나 미리 꺽는 사람은 아주 나쁜 사람입니다. 우리가 신랑 되신 예수를 만나기 위해 신앙을 지키는 것 만큼 서로에 대해 아껴주는 것은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이 버려둔 인생들 말고 성도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의해 영향을 받고 삶을 엮어가고 있으십니까 지금 여러분의 삶 그리고 인격이나 영혼을 이끌어 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여러분의 삶은 어디에 영향을 받고 길들여져 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지배를 받고 하나님의 의해 통제를 받는 다는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아십니까? 조금 기도 안하면 조금 예배 빠지면 성경을 읽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를 그냥 두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 큰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간섭하심이기 때문입니다. 유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의 가슴속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과연 은혜 받지 않고 그것들을 이길 힘이 있다 생각하십니까?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으로 내 마음을 채우지 않고는 세상을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상태입니까? 계속 죄 가운데 있는데 지금까지 아무 일이 없었고 마음을 빼앗겨 있지 않습니까? 계속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는데도 아무 일이 없습니까? 하나님의 기다리심을 만홀히 여겨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의 울타리 안으로 가까이 오십시오. 지금 여러분을 이끄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감동이기를 소원합니다. 세상의 논리나 세상 기준이 내 삶을 지재하지 않고 저와 여러분의 모든 삶은 하나님이 기준이기를 축복합니다. 여기에 사는 길이 있습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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