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람의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 (롬 2:1-5)

  • 잡초 잡초
  • 537
  • 0

첨부 1


- 설교 : 유재명 목사

우리는 로마서1장에서 가져다주는 축복이 얼마나 소중한 가를 알았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1:16)” 했습니다. 로마서 1장을 통해 복음 안에서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축복을 알았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 합니다. 복음이 가져다주는 축복이 믿음으로 사는 삶의 축복이 할수 있거든 모든 사람들이 누리기를 하나님은 원하셨습니다. 그러난 살후 3:2에 있는 대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 했던가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버렸습니다. 복음이 복음 되지 못했고 믿음이 믿음 되지 못했습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셨습니다. 급기야는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내 욕심에 내 원함에 자꾸만 충돌을 일으키는 하나님을 거부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언제든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내 욕심 내 정욕에 충돌하지 않는 우상을 만들어 하나님 대신에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버려둘 수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요 포기였습니다. 이제 인간은 마음의 정욕대로 사는 자되었습니다. 이제 인간은 부끄러운 욕심에 이끌려 사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네 마음대로 살아라’ 이것이 처음에는 자유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람 안에 있는 정욕은 사람 안에 있는 욕심은 사람들을 유린하기 시작 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그냥 보면 내가 원하는 대로 사는 것 같지만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마음은 상실한 마음, 깨어진 마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술을 마시고 싶을 때 마시고 거절하고 싶을 때 거절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느덧 사람들은 술 없으면 못사는 사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담배나 놀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든지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줄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든지 죄를 적당히 짓다가 거절하고 정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죄는 사람이 자기를 조절할 수 없을 때까지 끌고 가는 기질이 있습니다.

죄의 결국은 사망입니다. 가정을 박살내 버립니다. 내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려 버립니다. 죄는 조절 할 수 있다 생각될 때 거절할 수 있다 생각될 때 거절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에는 사는 역사 그리고 생명의 역사가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계셔야 할 절대 공간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의 삶에 하나님을 외면하고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면서 마음이 썩기 시작했습니다. 상실한 마음들 속에서 나는 21가지의 죄의 냄새들이 진동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사형에 해당하는 것임을 알고도 사람들은 함께 죄에 유린당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만약 내가 앞을 보지 못한다면 만약 내가 걷지 못한다면 만약 내가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게 된다면 얼마나 비참한 모습입니까?
이것보다 훨씬 더 비참한 것은 복음 없이 믿음 없이 하나님 없이 말씀 없이 죄에 유린당하며 사는 모습입니다. 욕심에 거부하지 못한 채 끌려 사는 것입니다. 마치 자동차에 실려 도수장으로 가고 있는 돼지들의 모습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 2장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는 하지만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면서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 말입니다. 그 신앙이 무디어 질 때로 무디어진 채 의인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신앙이 가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있습니다. 생각으로는 큰 신앙인데 보이는 부분은 대단 한 것 같은데 가슴은 텅 비어 메마를 대로 메말라 버린 사람들입니다. 틀림없이 영적으로 목말라야 할 자인데 틀림없이 은혜에 목말라야 할 사람인데 예배에도 간절하지 않고 기도에도 간절하지 않고 은혜를 받기 위해 간절하지도 않습니다. 영적으로 배고파하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신앙이 언제부터인가 가슴이 아니라 머릿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의 신앙의 중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머리에 있습니까 가슴에 있습니까 진정한 영성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답게 하는 능력은 가슴에서 나옵니다. 그 신앙의 중심이 머리에 있게 되면 경건의 모양만 있지 경건의 능력은 상실한 사람들이 됩니다. 말은 맞는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은혜가 없습니다.

2장에서는 만나게 될 사람들은 말씀을 들을 때 믿으려고 듣는 것이 아니라 알려고 듣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의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판단만 하게 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알려고 듣는 사람들은 내가 듣고 싶은 소리를 들어야 은혜를 받았다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알려고 듣는 사람들은 말씀이 내 생각과 맞을 때에야 은혜를 받았다 합니다. 말씀을 알려고 듣는 사람들은 내 생각하고 다를 때도 거부합니다. 저 말씀은 저렇게 전하는 게 아니야 합니다. 그리고선 안 듣기 위해서 설교를 듣습니다. 말씀을 알려고 듣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소리를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목사의 소리로 듣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음으로 받는 사람들은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습니다. 말씀을 믿음으로 받는 사람들은 누가 어떻게 전해도 은혜를 받은 사람이 됩니다. 말씀을 믿음으로 받는 사람들은 그 말씀을 가슴에 담아 그 삶에 변화가 있습니다. 살전2:13절에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들을 때에게가 아니라 받을 때에입니다)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들음이니가 아니라 받음이니) 이 말씀이 (어떤 말씀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하였습니다. 지혜로운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이니가 아니라 받음이니라 했습니다. 예배 중에 목사를 감동시키는 사람은 말씀을 가슴으로 받는 사람들입니다.

3장에서는 가슴이 메마를 대로 메마른 의인 의식속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니 이들은 먼저는 의인의식인 자기가 선하다는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죄 이야기를 해도 별로 놀라지 않습니다. 목사가 로마서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에 대해 목소리를 높혀도 눈하나 깜박이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강대상에서 심판과 지옥 형벌에 대해 외쳐도 전혀 긴장함이 없습니다. 이 말씀은 죄인들을 향한 말씀이지 나를 향한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의인의식의 또 하나는 자기는 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가슴은 식어 있으면서도 늘 남 걱정만 합니다. 자기 이야기는 않고 남이야기만 합니다. 부흥회 가보면 새가족 은혜 받으라고 권사님은 밖에서 아이를 보아 줍니다. 내가 볼 때에는 권사님이 더 걱정입니다. 성도들의 아멘도 분류를 해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내 말씀으로 받고 아멘하는 경우도 있지만 옆에 있는 남편이나 데리고 온 사람 들으라고 아멘합니다. 또 말씀을 들으면서 눈을 이리저리 돌립니다. “이 말씀은 그 깡 집사가 들어야 하는데...” 하면서 말입니다. 어느날 어떤 목사님이 말씀을 준비하다 보니 자기 교회에 고약한 집사님에게 꼭 들어 맞는 말씀 본문이어서 그 집사 들으라고 열심히 말씀을 준비했다 합니다. 설교를 하기 전에 그 집사를 찾아보니 꼭 가운데 앉아 있어 옳거니 됐다 하며 강단에 올라 열심히 그 집사들으라고 설교를 했답니다. 그런데 설교를 듣는 그 집사가 은혜를 받았는지 엉엉 울면서 말씀을 받더랍니다. 너는 죽었다 하며 더욱 열심히 말씀을 전하고 드디어 예배가 마쳐졌는데도 엉엉 울고만 있더랍니다. 됐다 오늘 설교는 백점이다 생각하고 30분후 그 집사를 당회장실로 불렀답니다. 사무실에 들어온 그 집사는 얼굴은 눈물로 엉망이 되었고 눈이 부어 있었습니다. 들어오자 마자 그 집사가 말을 하기를 “목사님 오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그 동안 마음이 아파서 어떻게 사셨어요? 저는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목사님의 아픔을 보았습니다.” 이 말을 들은 목사님은 속으로 야 오늘 설교 200점이다 하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집사님이 계속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 오늘은 또 얼마나 속상하셨어요? 오늘 그 말씀은 김 집사 그 년이 들었어야 하는데...”하며 나가더랍니다.
어떤 성도들은 예배드리고 집에가서 부부싸움하는 성도도 있답니다. “ 여보 오늘 목사님 말씀 잘 들었지 당신이 문제야...무슨 소리야 그래도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하지 않더냐 하며 싸웁니다. 우리집 사정을 어떻게 알았는지 목사님한테 물어봐야지 까지 합니다.

복된 성도는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받는다 합니다. 영으로 마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가슴을 흔들어 버립니다. 여기에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복된 성도는 목사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받는 것입니다. 복된 성도는 남이 아니라 나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복된 성도는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첫째: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2장1절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하나님을 알기는 하지만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신앙의 가슴이 메말라 버렸으면서도 여전히 의인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남을 판단하는데 철저하게 길들여져 있다는 것입니다. 판단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의 죄와 실수 그리고 허물에 대하여 용서하지 않고 정죄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냥 보면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 같지만 철저하게 자기감정에 따라 주관적으로 정죄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범죄를 이방인들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사도바울은 로마서 1장의 편지를 읽는 유대인들이 다른 생각을 할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과연 그러하다 하나님의 영광을 버리고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을 섬기고 영육간에 깨어질 때도 깨어진 인간들은 죽어 마땅한 것이라 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은 하나님의 선민이기에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와 보호 밑에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자신들은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우상을 섬기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에게는 없는 거룩한 율법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세상의 만방가운데서 유일하게 택함을 받는 특별한 선민이라고 믿었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이 택한 민족이기에 절대로 지옥에는 가지 않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들이 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아브라함이 지옥의 입구에 앉아서 지옥에 들어가는 사람하나하나를 살펴 마치 병아리 암수를 고르듯 하나라도 택함 받은 육적 유대인이 혹 들어가고 있으면 지옥입구에서 아브라함이 골라내어 천국에 가도록 빼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치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 랍비들의 가르침이며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시내문서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착각속에서 이방인들을 자기들과 다른 사람을 쉽게 정죄하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판단이 무엇이라 했습니까? 판단은 다른 사람의 실수와 죄의 문제 그리고 허물에 대하여 용서하지 않고 정죄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냥보면 무엇인가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 같지만 철저하게 자기 감정에 따라 주관적으로 정죄해 버리는 것이 판단입니다.

들째: 사람들의 판단을 금하고 있는 성경

다시 말씀드리면 사람에게는 무엇에나 무엇에게나 판단의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판단은 완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절을 읽고 그러므로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합니다.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내가 내 자신을 정죄하는 것이라 합니다. 나는 언제인가 지금판단하고 있는 죄를 범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3절에도 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합니다. 놀랍게 오늘 말씀은 남의 죄와 허물에 대하여 판단하는 사람도 하나님께서는 비판 받아야 할 죄인과 똑같이 취급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람의 판단은 온전한 것이 아니기에 판단을 금하고 있습니다. 지금 누군가를 정죄하고 손가락질을 하지만 환경과 여건이 조성되면 똑 같은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 바로 나입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구요 사람을 감정에 따라 자기 공동체 유익에 따라 판단을 합니다. 이것이 국가간에 분쟁을 일으킵니다. 서로가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이것이 지역간에 분쟁을 일으킵니다.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이런식으로 판단하고 당을 가릅니다.

우리 집도 보면 그 기준이 막내아들과 큰 아들에게 다른 것 같습니다. 언젠가 제 핸드폰으로 문자가 왔습니다. 죄송해요 잘 못해서 라는 내용의 아내의 문자가 왔습니다. 그래서 집에 가서 그게 무슨 뜻이냐 했더니 아내가 자기의 핸드폰에 내 핸드폰으로부터 “여보 율비에게 좀 더 잘해주세요”라는 문자를 제가 보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보낸 적도 없는데 그런 문자가 내 핸드폰으로 왔다하여 원인을 알아보니 큰 아들이 율비가 내 핸드폰으로 아내에게 그렇게 문자를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가족이 웃은 적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비교적 착하고 선하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판단을 절대화 합니다. 내 말이 주장이 맞다는 것입니다. 이 생각으로 사니 자기는 확실한 사람인데 아내가 행복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으로 자식들과 늘 부딪힙니다. 교회 안에서까지 자기 생각은 절대적입니다. 누가 내 생각이나 주장을 반대하면 못 견딥니다.
이런 사람들은 거짓말도 잘 안합니다. 남에게 피해도 주지 않고 신세도 지지 않습니다. 대신에 자기기준에 맞지 않으면 쉽게 비판합니다. 여기 앉아서도 “아이구 교회 다니는 것들 하구는” 자기는 빠집니다. 자기는 남을 비판하면서 누가 나를 비판하면 3일 밤낮으로 잠을 못 이룹니다. 철저하게 이기적입니다. 착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길들어져 버렸습니다.

자신이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수록 하나님을 믿는데 인색합니다. 헌신하는데도 아주 인색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의인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남의 허물과 약점에 대해 누군가의 실수에 대해 민감합니다. 필요이상으로 분노합니다. 이런 분들이 많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말세야 합니다.남의 실수나 허물을 보면서 말세여 합니다. 목사들 보면서도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저렇게 사랑이 없으니 말세야 합니다. 언제나 남입니다.
자기 자신의 죄를 보면서 자기 자신의 영적 상태를 보면서 말세야 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의인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허물이나 약점에 대해서도 상대적으로 둔감하고 관대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죄를 안 짖고 실수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노출되지 않으려고 필사의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남 얘기 너무 많이 하는 사람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남 얘기 하는 사람들의 말에 입맞춰주는 사람들은 땅을 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이야기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앞에 진솔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선한 것이 있습니까?

나는 언제나 괜찮고 남에게는 이상한 잣대를 기준으로 삼고 판단한다면 문제는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방귀를 꾸십니까? 생리현상이지요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난후 방귀가 나왔는지 제일 먼저 묻지 않습니까? 그만큼 중요합니다. 그런데 내 방귀냄새는 괜찮고 남의 방귀냄새는 어떻습니까? 참아주지를 못하잖아요. 수십 년을 살았어도 제 아내의 방귀냄새에 아직도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남을 판단 합니까? 고린도전서 4:3.4절을 보면 바울을 말을 합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합니다.


셋째: 완전하신 하나님의 판단

2절을 보면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합니다. 누군가의 죄와 허물에 대하여 판단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그냥 하나님이기에가 아니라 그 판단의 정확성인 ‘진리대로’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분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외모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인간을 다룸에 있어 편견이 없습니다.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하는 것은 하나님앞에서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목사를 더 사랑하고 성도를 덜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진리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잘못 이해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진리대로입니다. 봐 주는 것이 없습니다. 목사라구요 더 엄한 잣대가 있을 뿐입니다.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이 진리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알렉데이아]라고 하는데 이 말은 덮었던 것을 들추어낸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숨긴 것 강한 자들이 쉬쉬하고 덮어 놓은 것들을 들추어내어 발가벗듯 드러날 것입니다. 그 진리 앞에 거짓말한 사람은 그 거짓말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 진리 앞에 거짓말 한 사람은 그 거짓말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 진리 앞에서 마음속에 덮어 두었던 모든 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 진리 앞에 지금은 꾸밀 수 있지만 대강 믿었던 믿음, 외형적 믿음 등이 다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 진리앞에 앞에도 하나님 심판 앞에는 진실만 통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경고 합니다. 지금은 숨기지만 우리 입으로 우리가 저지른 죄에 대해 고백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 진실 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준비가 저와 여러분은 되어 있습니까? 아직은 여유가 있습니까? 왜 사람들은 아직 여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여전히 죄에 매여 있는데도 아직 괜찮으십니까?

4절을 읽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 하느뇨”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하나님의 기다리심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자애로우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자는 하나님이 사람을 대하시는 성품입니다.
예를 들어 간음한 여인에게 모두가 돌을 들었는데 저들을 물리치시고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 않는다 이것은 인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함께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니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같이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랍니다. 용납하심은 회개하고 돌아오면 용서하고 받아들이심입니다. 길이 참으심은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합니다. 왜 입니까? 이것을 5절에서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합니다. 고집이 사람을 망가뜨립니다. 나도 고집이 있어 나도 한다면 해 하고 사는 사람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 고집으로 남을 판단하거나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특히 영적 옷을 입은 고집은 대책이 없습니다. 누구말도 듣지 않습니다. 또 회개치 아니한 마음입니다. 믿지만 자기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은 의인의식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 용납하심 그리고 길이 참으심의 풍성이 여러분의 가슴속에도 있어지길 축원합니다. 지금 여러분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고집 아닙니까? 어떻게 해야 하는 줄 알면서 그냥 그대로 가시겠습니까? 체면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자존심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포기 할 만큼 , 영혼을 포기 할 만큼 여러분을 평생에 고집이 사로잡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이런 마음은 예수님이 없습니다. 이전 믿지 않는 습관에 따라 삽니다. 하나님이 보십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에 이끌리고 있습니까? 주님이 여러분의 손을 잡길 원하고 계십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