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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이루라 (행 2:3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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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성철 목사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사도행전 2:38)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우리 죄의 대속을 위해 십자가에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은 스스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끝없이 주시는 그 역사는 우리들에게 은혜일 뿐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인 사도들과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 약 120명이 다락방에 모여 예수님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합심하여 기도하는 중에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심으로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았습니다.

마침 오순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천하 각국으로부터 예루살렘을 찾아온 무리들은 제자들에게 임한 성령강림의 역사를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이 무리들을 향하여 베드로는 설교했습니다.
베드로는 설교 중에 세 가지를 강조했습니다. 첫째는, 성령강림의 역사는 오래 전 예언자들의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받아 부어주신 것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무리들이 죽인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사망권세를 정복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였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제자들 자신은 그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무리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베드로의 가르침과 권하는 말씀에 따라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숫자는 약 삼 천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고 그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인 무리들에게는 은혜를 받도록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음에 찔림을 받는 것입니다.

무리들은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찔린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자기들이 죽였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와 로마병정들이 죽였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변명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너희가 죽였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그들에게 찔림을 주었습니다.

오늘의 우리도 2000년 전에 죽으신 그리스도가 그 당시 유대인들과 제사장과 로마군인이 죽인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죽인 것”이라는 성령의 깨우치는 말씀을 들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마음에 찔림을 받을 것입니다.ꡒ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으니 내가 그리스도를 죽게 한 자ꡓ라는 음성을 듣는 다면 우리의 마음은 큰 찔림을 받을 것입니다. 이 찔림을 받는 마음이 우리로 은혜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찔려’라는 동사의 원어의 의미는ꡐ날카롭게 후벼파다',ꡐ찔러 관통하다'는 뜻입니다. 감추어진 마음이 철저히 파헤쳐져 마음이 괴롭고 아픔을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곧, 양심의 찔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양심’이란 라틴어 conscientia는 ‘함께 안다’(know with)는 뜻을 가진 동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아는 것’이 양심이라는 것입니다. 나 혼자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알게 되는 것이 양심인 것입니다.
왜 마음에 찔림을 받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아는 양심이 나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알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놀드 바우브케’라는 사람은ꡒ양심은 선과 내적인 빛 그리고 하나님의 목소리이다”라고 했고, ‘느헤미야 로저스’는 “하나님은 자신의 대리인으로서 양심을 인간의 마음속에 세워 놓으셨다”고 했으며, ‘J. 루소’는 “양심은 인간의 육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법정이다”라고 하면서 “양심은 영혼의 소리이며 욕정은 육체의 소리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아는 양심의 찔림을 가지고 사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메리칸 인디안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양심을 도형으로 나타냈습니다. 그들은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양심의 모양을 삼각형으로 비유했습니다. 사람이 처음 태어나면 이처럼 삼각형 모양을 가지고 있어서 만약에 잘못을 범하면 삼각형의 양심이 움직여 뾰족한 모서리로 마음을 찌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에 찔림을 받는 양심의 가책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양심의 가책을 겪는 중에 삼각형의 양심은 마음의 벽에 닳아 무뎌지게 되고, 인생의 연륜이 쌓여감에 따라 이 양심은 둥근 원형이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양심을 인디언들은 어른의 양심이라고 부르는데 나이가 든 사람일수록 그들의 양심을 찌를 만한 본래의 양심이 무뎌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양심의 명령을 계속해서 거역하면 우리의 마음은 둔해져서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바울은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4:2)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외식하는데 전문가인 바리새인들에게 ‘화가 있을 자들'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양심의 찔림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외식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에 찔림을 받을 줄 아는 은혜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쬬’ 목사님은 “전선에 전기가 통하는지 안 통하는지 알려면 전기 소켓에 손을 넣어보면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마음의 소켓에서 하나님을 전기처럼 느낄 수 있어야 하는데, 이는 양심이다. 양심에 하나님의 능력이 짜릿하게 느껴온다. 어떤 이는 ‘나는 조금도 양심에 하나님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라고 반박할 수 있다. 그것은 퓨즈가 끊어졌기 때문이다ꡓ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양심에 증거 하는 찔림은 바로 이 퓨즈를 연결시켜 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무리들은 성령께서 역사 하심 가운데 그 말씀으로 양심의 찔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에 찔림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은혜 받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모두는 마음에 찔림을 받는 양심의 깨달음을 가지고 사시는 은혜로운 성도의 생활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리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을 뿐 아니라 사도들에게 우리가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했습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을 죽인 죄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들의 수치를 깨닫고 탄식하는 고백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어찌할꼬’가 없는데 있습니다. ‘어찌할꼬’는 더 이상 숨길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나의 정체가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것은 자신의 부끄러운 죄와 수치를 보고 안타까워하고 괴로워하는 자기 깨달음인 것입니다. 또한 자신들이 그러한 처지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마음을 졸이는 물음입니다. 이 물음은 솔직하고 필사적인 물음입니다.

‘어찌할꼬’의 사람임에도ꡐ어찌할꼬' 할 줄 모르는데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찌할꼬’ 할 수밖에 없는 자임을 깨닫고 그렇게 고백할 수 있을 때 은혜로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병들어 죽어 가는데도 ‘어찌할꼬’ 할 줄을 몰라 밤새워 술을 마십니다. 우리의 인생이 내일 끝나는데도 ‘어찌할꼬’를 몰라 인생을 낭비하며 탕진하며 사는 것을 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찌할꼬’하는 깨달음으로 우리의 인생의 삶을 하나님의 은혜의 삶으로 만들어 가는 축복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는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요”(마5:4)라고 말씀했습니다. 애통은 ‘어찌할꼬' 하고 자기 부족함과 수치를 보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위로를 받게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 극복해야 할 자기 부끄러움을 깨닫는 것은 위로부터 오는 은혜를 받는 삶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난 후 자신의 추악한 죄의 모습을 깨닫고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서 ‘어찌할꼬’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에 위대한 예언자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찌할꼬’ 할 수 있는 깨달음의 지혜로움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신앙생활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회개입니다

베드로는 마음에 찔림을 받고ꡐ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무리들에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은혜의 삶은 회개의 행동과 비례합니다. 지금 내가 은혜롭다는 것은 회개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은혜롭지 못하다는 것은 회개의 삶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가장 큰 역사는 회개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복음을 전파하실 때 먼저 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ꡓ(마4:17)였습니다. 천국의 역사는 회개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항해 중에 있는 배가 암초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을 선장이 발견했습니다. 이 위험을 어떻게 피하겠습니까? 갑판을 닦는다거나 사람들로 하여금 물을 퍼낼 준비를 시킴으로서 위험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배를 구하려면 배의 진로를 바꿀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장은 재빨리 명령을 내리고 배의 방향을 돌려 위험을 모면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외침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죄라는 위험한 바위에서 방향을 돌려 안전한 구원의 항구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키를 돌릴 때 배 전체가 방향을 바꾸듯이 회개는 반드시 우리가 가지고 살아야 할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위한 절대적 조건입니다.
한 사람의 생애에서, 하나님 앞에서 변명하고 도피하던 인생이,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라고 자신의 진실을 하나님 앞에 긍정하는 용기는 그 사람의 생애 중에 최대의 용기이고, 그를 변화시키는 최대의 사건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이것을 ‘회개’라고 부릅니다.

산양의 일종인 ‘스프링복’이라는 양들이 아프리카에 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풀을 뜯어먹으면서 평화롭게 행렬을 이루지만 앞쪽의 양들이 풀을 뜯어 먹어버리면 뒤따르는 양들이 풀을 차지하기 위해 앞다툼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 양들의 행렬은 조금씩 빨라지게 됩니다. 뒤쪽의 양들이 속력을 내어 앞으로 달려오므로 앞쪽은 선두를 지키기 위하여 더 빨리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은 모든 양떼가 전 속력으로 앞으로 달리다가 달려가는 힘에 의해 모두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버린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시대의 사람들이 이와 같습니다. 탐욕으로 좀더 차지하고 누려보겠다고 멸망의 삶을 향하여 서로 앞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회개는 이러한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서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의 삶에 바로서는 것입니다.

‘T. 맨톤’이라는 사람은 “회개를 미루는 사람은 결국 그 영혼이 사단에게 저당 잡혀있는 사람이다.”고 했습니다. 오늘 회개의 삶을 찾지 못함은 하나님께서 오늘 나에게 주시는 은혜의 삶을 잊고 살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회개의 삶을 살아가는 축복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사는 삶입니다. 매일 매일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가가 에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38절)고 했습니다. 용서와 함께 죄 사함의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세례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자녀 된 영광과 축복의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는 은혜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에 찔림과ꡐ어찌할꼬' 할 수 있는 깨달음과 회개의 행동을 가짐으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 안에서 은혜로운 신앙의 생활을 만들어 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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