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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 (엡 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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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오주철 목사 

영국 교회에서 사람들을 대상으로 종교 의식에 관한 설문 조사를 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설문조사 항목 가운데는 이런 질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어떤 교회를 원하십니까?" 이 질문에 적지 않은 숫자의 사람들이 전혀 기대하지 않는 대답을 해서 조사자들이 아주 당황했던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교회를 원하십니까? 당신은 어떤 교회를 원하십니까? 마음속으로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영국의 많은 사람들이 뜻밖에도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빨간 벽돌교회를 원합니다."

이것은 교인이나 비교인을 막론하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교회에 대한 이해가 성경의 이해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결코 빌딩이 아닙니다. 건물은 필요하지만, 건물이 결코 교회의 본질은 아닙니다. 가만히 보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본질적인 것은 외면하고 비본질적인 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부터인가 성경이 말하는 가장 본질적인 의미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오늘부터 몇 주간에 걸쳐서 우리가 바른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알아야 할 본질적인 것들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를 말씀을 드리고, 다음 주일에는 목사에 대한 바른 이해를, 그리고 계속해서 허락하는 한도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핵심적인 내용들을 전하려고 합니다.

먼저 오늘은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교회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교회에 다니고 있고, 또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교회에 나와야 한다고 설득을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입니까? 또 교회는 어떤 교회이어야 합니까?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에베소서라는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옥중 서신'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던 당시의 세상, 그러니까 주후 62년 전 후의 이 시기는 로마의 영광이 온 세상을 지배하고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로마의 옥중에서 죄수의 몸으로 쓰면서 로마의 영광이 아닌 교회의 영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에베소라는 도시는 소아시아의 중심적 위치를 가졌던 매우 영향력 있는 도시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바울은 한 곳에서 집중적으로 오랫동안 머물지를 않았습니다. 한 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그리고 다른 곳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신의 생애에서 한 곳에서 적어도 3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가장 집중적으로 사역을 감당했던 곳이 에베소입니다. 사도행전 20장 17절에 보면, 자신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다가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당하게 될 고난을 이야기한 후에 모두가 바울의 목을 안고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바울의 에베소 교회에 대한 관심과 기대는 남달랐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에베소 교회를 기억하며, 이 교회가 로마의 지배와 압제를 받고 있었지만, 그러나 로마의 지배 아래 무릎을 끓는 교회가 아니라 정말 복음의 영광을 드러내는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기를 원하는 기대 속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도대체 교회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오늘 함께 봉독한 에베소서 3장에 보면 교회의 본질을 드러내는 몇 가지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첫째는, '깨달았다'라는 단어입니다. 3절에 보면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비밀을 알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여기에서 바울이 깨달았다고 고백하는 이 비밀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가리켜서 깨달음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한 마디로 깨달음의 공동체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깨달았다'는 단어를 서로 관련되어 있지만 조금 다른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에베소서를 읽다가 잘 깨달아지지 않으면 같이 읽어야 할 책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골로새서입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를 가리켜서 '쌍둥이 서신'이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서를 읽다가 이해가 안되어서 골로새서를 읽으면 "아! 이런 뜻이었구나" 하고 알게 되고, 골로새서를 읽다가 잘 깨달아지지 않으면 그때는 에베소서를 읽어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서로 보완되어서, 그 뜻이 스스로 자명하게 드러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도 비밀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골로새서에서도 비밀 이야기를 아주 많이 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6절은 만세로부터 감취었던 비밀이 드디어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골로새서 1장 27절에 보면 하나님이 성도들을 통해서 이방인들에게, 예수 안 믿는 사람들에게 이 비밀의 영광을 알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일차적으로 이 비밀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시다"
그러니까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첫 번째로 이 비밀의 의미를 강조할 때에 이 비밀은 여러분과 제 안에 살아계신 그리스도, 우리가 구주와 주님으로 우리 안에 영접하여 우리 안에 지금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비밀이라고 말합니다. 그 주님이 내 안에 살게 된 것, 그래서 내가 구원을 체험한 사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 사실이 바로 비밀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 비밀이라는 뜻의 헬라어 단어가 '무스테리온'입니다. 영어의 미스테리가 바로 무스테리온에서부터 나왔습니다. 여기에서 무스테리온이라는 단어는 그냥 숨겨진 비밀이 아닙니다. 계속 숨겨져야 할 그런 비밀이 아니라, 이것은 자랑하고 싶은 비밀입니다. 여러분, 비밀 가운데 어떤 비밀을 내가 알게 되면 말하고 싶습니다. 그 비밀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비밀이야!" 그러면서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학자는 이 무스테리온 이라는 단어를 번역할 때 나타난 비밀,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당연히 나타나야 되고 자랑하고 싶은 그런 비밀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내 구주가 되신다는 것,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이것이 놀라운 비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골로새서를 읽어보면 사도 바울은 바로 이 복음의 비밀을 듣고 골로새 교인들이 변화를 체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골로새서 1장 5절을 보면 너희에게 복음 진리의 말씀이 찾아왔고 이 진리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 골로새서 1장 6절을 보면 이 복음이 이르매, 복음이 너희에게 도달하매 너희가 이 복음을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온 천하 가운데서 너희 믿음이 자라나고 열매를 맺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복음을 들었다는 증거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복음을 듣고 복음을 깨달았다는 증거가 무엇일까요? 골로새서 1장 6절에 의하면 "너희가 복음을 듣고" 그 다음에 복음을 들었다는 증거로 강조하고 있는 말이 이 말입니다. "복음을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그러니까 복음을 들었다는 말은 그냥 한번 설교를 들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말 복음을 듣고 보니까 "아!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셨구나, 나 같은 죄인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용서하시고 용납하시고 내 인생을 변화시켜 주셨구나! 하나님의 은혜는 참 놀랍구나!"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것이 복음을 들었다는 증거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 한 사람이 예수를 안 믿고 하나님을 부정하는 무신론 친구에게 전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무신론 친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야! 너하고 나하고 다른 게 뭐가 있냐? 본질적으로 내가 믿어서 달라질 것이 도대체 뭐가 있냐? 비슷한데 도대체 왜 믿느냐? 너하고 나하고 다를 것도 없는데..." 그때 그 친구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른 게 있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있고, 너는 모른다는 거야!"

그러니까 이 무신론 친구가 이렇게 대꾸를 합니다. "야! 있지도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무슨 의미를 갖느냐? 하나님이 정말 있다면 한 번 나한테 증거를 보여라!" 그래서 믿는 사람이 "어떤 증거를 보여주기를 원하느냐?" 그러니까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한다는 소리가 "야! 너 내가 지금부터 하나님을 욕할테니까, 네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한번 내려와 보라고 그래, 나를 한번 죽이든가 어떻게 해 보라고"

그러더니 갑자기 한 5분 동안 거침없이 신성 모독적인 발언을 막 쏟아 놓더랍니다. 그러고 가만히 있는 겁니다. 그러더니 "야 봐! 아무렇지도 않잖아, 하나님이 있기는 뭐가 있어?" 이때 믿는 사람이 친구를 지긋이 바라보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야! 지금도 너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증명되었구나! 내가 하나님이라면 너를 벌써 작살을 냈을 텐데 하나님은 너를 향해 참았던 거야,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는 놀라운 거야, 그 은혜가 지금도 증명된 거야, 그런데 너는 그 은혜를 모를 뿐이고 나는 알고 있고, 그게 차이란 말이야!"

어떤 교우들이 교회에 나오고 출석을 하는데도 삶의 변화가 없습니다. 또 신앙이 자라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본질적으로 자신에게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정말 복음을 깨달았는가?" 성경이 그토록 강조하는 기쁜 소식, 이 복음의 비밀을 나는 정말 깨달아 알았을까? 깨달아 알았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는가?"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습니까? 지금도 깨닫고 있습니까? 교회에 나온다고 해서 모두가 다 교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복음의 비밀을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그가 진정한 교인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교회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복음의 비밀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이것이 불신자와 우리를 차별화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신자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그 무리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요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고, 저들은 이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교회의 중요한 본질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공동체라는 사실입니다.
계속해서 교회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기 위해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여러분, 교회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교회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중요한 단어 가운데 하나가 오늘 본문에 있습니다. 그것은 '함께 하는' 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함께 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이어야 합니다. 본문 6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여기에서는 '함께'라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 모르고 살던 사람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상속으로 주시려고 준비한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고 깨달으면 하나님의 상속한 바를 우리가 함께 누릴 수 있는 후사가 됩니다. 또 함께 하나님이 예비하신 놀라운 공동체의 지체가 됩니다. 그리고 함께 하나님의 그 놀랍고 위대한 약속들에 대해서 참여하고 누릴 수 있는 축복을 얻게 됩니다.

사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방인들이 함께 복음을 듣고 함께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잘못된 선민 의식에 세뇌를 당해 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나만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이고 너희들은 아니다" 라고 생각하면서 선을 만듭니다. 담을 쌓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거의 이방인들을 개 취급했습니다. 실제로 이방인들을 '개' 라고 불렀습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원수처럼 취급했습니다. 이것이 그릇된 선민 의식의 결과입니다. 좋은 선민 의식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릇된 선민 의식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개처럼 취급했던 그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과 이방인 사이의 견고한 벽이 무너지고 그들이 한 교회 안에서 같은 지체가 되는 놀라운 사실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은 에베소서 2장의 하반부 전체에서 바울은 그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4절을 보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라고 말씀을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평화이시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시다!"라는 선언입니다. 그 다음에 "둘로 하나를 만드사" 이 둘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말합니다.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둘이 한 새 사람이 된다"에서 이 새 사람은 어떤 인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인 교회를 말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마치 한 사람이 되듯, 한 공동체가 되어 화평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2장 16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2장 19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이 아니다, 낯선 사람이 아니다, 손님도 아니다,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 함께 천국의 시민권을 받은 동일한 시민이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권속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의 가족, 식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됨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하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한 가족이 된 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저는 여러분께 묻습니다. 여러분은 영신교회에 나와서 함께 식구가 된 것을 느끼십니까? 가족이 된 것을 느끼십니까? 왜 우리가 함께 가족이 된 것을 못 느낄까요? 우리 인간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깊은 편견이 뿌리박고 있습니다. 누구나 다 할 것 없이, 비단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뿐만 아니라 인간과 인간 사이에 우리 마음속에 있는 죄성으로 말미암아 이상한 적대감과 편견이 뿌리박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관계의 상처와 갈등을 일으키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하나되지 못하는 일이 많은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의 시카고에 있는 어떤 목사님 한 분이 백인과 흑인이 정말 하나가 되는 교회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고 그런 이상을 가진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정말 흑인과 백인들이 잘 어울릴 수 있는 문화, 그런 교회 환경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어른들은 어느 정도 되기 시작했는데, 아이들이 안 섞입니다. 주일날 교회 버스가 올 때마다 버스를 타면 백인아이들과 흑인아이들이 짝 갈라서 앉습니다. 교회학교 교사였던 존 리드라는 분이 마음이 상해서 한번은 버스에 갈라져서 앉아 있는 아이들을 보고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자, 너희들 백인 아이들 너희들 피부색깔이 뭐냐?" 그러니까 "하얀 색깔이요" 그러자 이렇게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뭐가 하예? 자세히 보라고, 너희들도 까만 것이 많아. 자세히 보라고, 더 자세히. 그러니까 너희들은 하얀 것이 아니라 회색이야 회색. 알았나? 다시 묻는다. 너희들 색깔이 뭐냐?" 그러니까 "회색이요"라고 대답을 하더랍니다.
선생님은 또 흑인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들 피부색깔이 뭐냐?" "검은색이요" "가만히 봐, 너희들 실제로 그렇게 까만 것만은 아니야, 자세히 봐. 너희들도 회색이야, 회색. 자, 너희들 색깔이 뭐냐?" "회색이요" "자, 그러면 우리들의 색깔은 이제부터 하나다, 너희들 다 무슨 색깔이야?" 그러니까 아이들이 다같이 "회색이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다음 기회에 교회 버스를 타게 되었을 때 보니까, 백인 두목쯤 되는 아이 하나가 갑자기 들어오더니 교통 정리를 하더랍니다. 뭐라고 말하는고 하니 "야! 밝은 회색 이쪽으로, 어두운 회색 저쪽으로"

인간의 편견을 극복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함께 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까? 정말 함께 하는 공동체, 어떻게 우리가 가족됨을 체험할 수가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우리 안에, 내 안에 우리는 하나라고 하는 공동체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공동체 의식, 가족 의식을 가지고 서로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이 시대를 뒤집을 수 있는 놀라운 역사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살아있는 생동력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46절 이하를 보게 되면 초대 예루살렘 교인들의 공동체 의식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성전에서도 모이고 집에서도 모여 순전한 마음으로 먹을 떼며 하나님을 찬양했더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성전에서만 모이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성전에서 큰 모임으로 모였다가 흩어지면 좀처럼 가족 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집에서 모였습니다. 사도행전 읽어보십시오. 얼마나 많이 집에서 모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소그룹으로, 적은 단위로 집에서 모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 모여서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면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의 고통, 아픔, 답답함, 눈물을 다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다 보면 그것이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에 모여서 모두가 찬양하고 은혜를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영신교회 성도 여러분들이 함께 하면서 공동체 의식을 더 뜨겁게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과의 모임에서 진정한 나눔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슬픔을 나누고 기쁨을 나누고, 성공을 나누고 실패를 나누고, 내 좌절을 나누고 고통을 나누고,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진정한 공동체를 함께 경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공동체로서의 진정한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교회라는 것은 함께 하는 공동체입니다.

세 번째로, 교회는 알게 하는, 혹은 전도하는 공동체입니다.
3장 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여기에 보니까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서 "모든 성도 중에서 지극히 작은 자 보다 더 작은 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작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본래 이름은 사울입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은 '크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보니까 별수 없이 작은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죽이던 이 사울이 예수를 믿고 나서 그가 얼마나 작은 자인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런 나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 이제는 이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전하게 하시려고 나를 선택하시고 교회를 설립하게 하신 것이다. 9절입니다.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전하게 하시고, 드러나게 하시고. 10절입니다.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여기에서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라는 말은 표준새번역에서는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에게"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어둠의 권세를 말합니다. 어둠의 권세들은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서 구원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교회라는 존재를 알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포해야 합니다. 복음이 얼마나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있으며, 복음을 통해서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 세워진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교회가 이 땅에서 존재하는 진정한 이유는 이웃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는데 있습니다. 사실 교회라는 것은 이상한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교회 내부를 위해서 존재하는 단체가 아니라 교회는 유일하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단체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 하나님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복음을 듣고 주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주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존재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사랑을 얼마나 이웃 사람들에게 알게 하고 전하기 위해서 헌신하고 있습니까?
미국에 존 포엘이라는 교수님이 있습니다. 이 분은 기독교 계통의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곳에서 전도와 선교에 관한 과목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한 학기가 시작되는데 자기 강의실에 이상한 학생이 하나 들어왔습니다. 이 학생이 아주 반항적인 몸짓으로 앉아 있습니다. 예측한 데로 이 학생은 괴상한 질문만 해서 교수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이 교수에게 있어서 이 학생은 큰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학기가 끝나 가는 마지막 수업 시간에 이 학생이 질문을 하는데 처음으로 진지한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전에는 반기독교적이고 반항적인 그런 질문을 계속해 오던 이 학생이 마지막에 진심이 있는 듯한 질문을 하나 던졌습니다.

"교수님, 마지막 질문입니다.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까요?"
교수님은 좀 생각을 하는 듯 하다가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학생, 잘 들어. 자네는 절대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어." 강의실이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자네는 절대로 하나님을 찾지 못해. 그러나 기억하게. 하나님은 반드시 자네를 찾아올 거야. 그리고 하나님이 찾아오거든 기억하게나. 하나님은 사랑이셨다는 것을 말이야"
그리고 강의는 끝났고 한 학기가 끝났습니다. 그렇게 4년이 지난 어느 날 캠퍼스에 이 학생이 찾아왔습니다. 이 학생의 이름이 타미인데, 이 학생을 보니까 얼굴이 노랗고, 머리는 지저분한데 눈빛만은 초롱하게 빛이 나고 있었습니다. "타미, 왠일인가? 얼굴이 안됐네" "교수님, 제가 학교를 떠날 때 들었던 이야기처럼 하나님이 저에게 찾아왔다는 것을 알려드리려고 왔어요. 하나님이 저에게 찾아왔다는 사실을" "그런데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

"저요. 작년부터 암을 앓았습니다. 그런데 암 선고가 딱 내리는 그날 저는 알았지요. 아, 교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구나. 그러나 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속으로 싸웠습니다. 나는 절대로 하나님 안 믿어. 나는 절대로 교회에 안 나갈거야. 나는 절대로 포엘 교수의 말을 수긍할 수 없어. 그리고 계속 싸웠습니다. 그런데 제가 죽기 전에 마지막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아버지를 만나는 것입니다. 아버지하고도 나쁜 관계였고, 아버지도 저를 쫓아내다시피 했고, 아버지는 저를 저주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렇지만 죽어 가는 마당에 한번 아버지를 보고 싶었어요. 아버지 집에 찾아갔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저를 맞아주지도 않을 것이라고 예상을 했어요. 그런데 예상 외로 아버지는 저를 안아 주시고요, 아버지는 저를 안고 펑펑 우시더라구요. 이 덩치 큰 제가 처음으로 아버지 품에 안겨져 있었던 그 순간 제가 무엇을 생각한 줄 아세요? 아,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그러면서 교수님, 저는 그때 한 가지 생각을 깨달았어요. 우리 아버지가, 이런 아버지가 사랑이라면 하나님은 물론 사랑일거야. 하나님은 사랑일거야. 저는 그 하나님을 향해서 가슴을 열었어요. 그리고 교회에 나가서 복음을 들었구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저의 구주와 주님으로 마음속으로 초청했지요. 그리고 저는 변했구요."

이야기를 들은 포엘 교수님이 "타미, 방금 자네가 나한테 한 이 이야기를 내 강의실에 와서 학생들에게 간증해 줄 수 있겠나?" "아 그러죠" 약속을 했습니다. 약속이 실현되기 이틀 전에 타미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교수님, 제가 앰블런스에 실려서 병원에 가고 있어요. 학교에 못 갈 것 같아요. 그런데 교수님, 교수님이 내 대신 말해 주세요. 하나님이 타미를 찾아오셨다고. 아니, 교수님. 그 강의실의 학생들 뿐만 아니라 교수님의 일생이 끝날 때까지 제 이야기를 전해 주세요. 하나님이 이 타미를 어떻게 찾았는지 그것을 이야기해 주세요. 그리고 이렇게 말해 주세요. 교수님 말씀처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구 말예요."

포엘 교수는 타미의 말을 듣는 그 순간 자신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알았다고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당신들을 찾고 있고, 아직도 찾고 있다고, 당신에게 아직도 기회를 주고 있다고, 그리고 그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이것이 우리가 전해야 할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존재해야 할 이유인 것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런 영광스러운 일을 선포하는 교회의 공동체 일원이 된 것을 하나님 앞에 찬양하십시오. 그리고 더 이상 교회의 구경꾼이 되지 마십시오. 구경꾼이 되지 말고 교회의 한 지체가 되십시오. 영신교회의 가족이 되어서 믿음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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