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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양의 기쁨 (사 4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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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흥규 목사

"그는[메시아, 곧 그리스도 예수] 목자와 같이 그의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들을 팔로 모으시고, 품에 안으시며,
젖을 먹이는 어미 양들을 조심스럽게 이끄신다." 

어떤 목사님이 자전거를 타고 운동을 하시다가 잔디 깎는 기계를 팔려고 길가에 서 있는 소년 하나를 만났습니다. "얼마에 팔려고 하니?" 목사님의 질문에 소년은 간단히 대답했습니다. "자전거 한 대를 살 정도면 되요." 잠시 생각한 목사님은 자기가 타고 있는 자전거와 소년이 가지고 있는 기계를 서로 맞바꾸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소년도 좋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잔디 깎는 기계를 집에 가지고 와서 작동을 시켜보려고 했지만 영 말을 듣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 기계는 앞쪽에 있는 로프를 힘차게 잡아 당겨야지 만 시동이 걸리는 구식 기계였습니다. 여러 번 시도를 해봤지만 번번이 실패를 했습니다.

낙담한 목사님이 소년을 자기 집에 오라고 해서 따졌습니다. "내가 여러 번 이 기계를 작동시켜 보려고 해도 말을 듣지 않는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니? 혹시 고장난 기계를 나에게 판 것은 아니겠지?"

소년이 대답했습니다. "아, 그건 말이에요. 그 기계가 좀 별나서 시동을 걸기 전에 그 기계에다가 대고 저주와 욕설을 막 퍼부어야만 돼요." 당황한 목사님은 "애야, 너도 알다시피 내가 목사가 아니냐. 목사인 내가 아무리 기계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저주나 욕설을 퍼부을 수 있겠니. 목사가 된 다음에는 저주를 어떻게 하고 욕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조차도 다 잊어버렸단다."

목사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년은 환한 표정을 지으며 너무 쉽게 대꾸했습니다. "아, 목사님, 조금도 걱정하실 필요가 없어요. 계속해서 로프만 잡아 당겨보세요. 목사님도 모르시는 가운데 저절로 저주와 욕설이 튀어나올 겁니다."

우리에게는 잔디 깎는 기계와 같이 골치 아픈 문제가 다 있습니다. 특히 운전을 할 때 다 입이 걸어진다고 말합니다. 살다보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오고 짜증이 나는 문제점들이 하나 둘 다 있습니다. 이런 문제 속에 살다보면 우리는 기쁨을 잊기 쉽습니다.

살전 5: 16에서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했는데 항상은 커녕 종종도 기뻐하기 어려운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기뻐할 것이 별로 없는 시대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기뻐할 수 있을까요? 우리 예수 믿는 이들은 어떻게 해야지 만 매일 매일 기쁨 가운데 살 수 있을까요?

저는 이런 생각을 하다가 우리가 '양'이며 하나님은 '목자'라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성경은 무려 44 번씩이나 우리를 '양'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특히 요 10: 11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목자되신 예수님의 양이라고 한다면 양의 기쁨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양의 기쁨을 바로 깨닫기 위해서 우리는 다음의 세 가지를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목자가 아니라 양이라고 하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목자가 아니라 양이라고 하는 사실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양이라고 하는 사실은 우리가 도움을 절대로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양이라고 하는 말은 절대로 칭찬이나 미사여구(美辭麗句)가 아닙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말일뿐입니다.

양은 멀리서 바라볼 때 참 아름답고 영리한 동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연약하고 어리석은 동물입니다. 여러분, 서커스에서 재주를 부리는 짐승 중에 양이 있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무리 훌륭한 조련사라고 할지라도 양은 쉽게 훈련시키기 어려운, 아주 멍청한 짐승입니다. 양은 사나운 짐승들이 마음껏 약탈하고 공격할 수 있는 먹이감 제 일호일 뿐 결코 영리한 동물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흔히 집 대문이나 울타리 앞에 "맹견(猛犬) 조심"이라고 써놓은 경고문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사나운 양이 있음. 사나운 양 조심"이라고 하는 경고문은 거의 보신 적이 없을 것입니다. 양은 반드시 목자의 인도를 받고 보호를 받아야 할 연약한 짐승일 뿐입니다!

실제로 양은 시력이 아주 퇴화해서 불과 10 미터 앞도 내다 볼 수 없다고 합니다. 길을 잃어버릴 경우 꼼짝없이 맹수에게 물려 죽거나 아니면 절벽 밑으로 떨어져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 마디로 양은 스스로 자립해서 살 수 없는 아주 의존적인 짐승입니다. 100% 목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짐승이 양인 것이지요!

여러분, 성경은 우리가 목자가 아니라 양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 설 수 없으며 목자되신 하나님께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양은 목자의 인도와 보호를 받아야만 삽니다. 홀로 살 수 없습니다.

목자로부터 떨어져 나와 홀로 고립된 양은 위험한 양입니다. 외로운 양입니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한 양입니다. 자기 힘으로 늑대나 이리와 맞대결을 하는 양은 거의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목자와 양무리를 떠나서 들판을 홀로 어슬렁거리는 양은 또한 얼마나 위험천만한 양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인 우리는 어리석기 짝이 없으며 연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눅 10: 3에서 세상 속으로 제자들을 내보내시면서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말씀 그대로 세상은 이리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목자 없이 홀로 방황하는 양들을 습격하기 위해서 세상은 이리떼들과 마찬가지로 눈알을 휘 번득거리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양인 우리는 목자의 인도와 보호를 받아야만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제일 중요한 것이 우리가 양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목자가 아니라 양입니다. 여러분, 양은 오직 목자의 인도와 보호를 받을 때에만 안전합니다.

그러므로 양인 우리의 기쁨은 목자이신 예수님의 기쁨으로부터 옵니다. 양이 그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의 뒤를 잘 따라다닐 때 안전하고 기쁨이 있듯이 예수님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우리의 안전과 기쁨이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위험하기 짝이 없듯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없는 우리 인생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의 기쁨은 시작됩니다. 양인 우리의 기쁨은 목자장되신 예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데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둘째로, 양은 목자의 도움을 절대로 필요로 합니다.
저는 앞에서 양에게는 목자의 돌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가 양이고 예수님께서 목자라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돌봄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합니다. '자기 의'(self-righteousness)나 '자기 의존'(self-reliance)은 절대 금물입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목자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고 고집을 피운 채 살아갑니다. 양이 목자의 인도나 보호 없이 독립해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사 53: 6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가 목자의 인도와 보호를 인정하지 않고 각기 제 길로 갔다는 것입니다. 양이 목자 없이 제 길을 갔다는 것은 죽음의 길로 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늑대나 이리의 먹이감이 되거나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길로 갔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모든 죄악을 외아들 예수님의 어깨 위에 전가시켰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던 것이지요.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받는 양이 되도록 만드신 것이지요.

요 10: 11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우리가 목자 없이 멋대로 살아갈 때 예수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양된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까지 하신 선한 목자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목자 없는 양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목자의 돌봄 없이 양이 홀로 풀을 뜯거나 홀로 물을 마실 수 없습니다. 맹수는 언제나 목자의 품을 떠나 홀로 방황하는 양을 노립니다! 양은 목자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합니다! 그렇습니다. 목자장되신 그리스도 예수의 양된 우리들은 예수님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인도를 받아야만 합니다. 목자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야 합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양은 주로 양털을 얻기 위해서 길렀기 때문에 목자와 양들이 여러 해 동안 동고동락(同苦同樂)하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그래서 목자는 양 하나 하나에 이름을 붙여서 친하게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양들의 이름을 지어 부를 때에는 대개 양의 특징을 서술하는 이름이 많았는데, 예를 들면 '갈색 다리,' '까만 귀,' '홀쭉한 배,' '뚱뚱한 배' 등의 이름을 지어줬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양들은 목자의 모습을 보고 뒤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름을 부르거나 아니면 노랫소리 휘파람 소리 등의 소리를 듣고 뒤를 따라 갔습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항상 앞서 가면서 양들을 인도했습니다. 목자가 앞서 갈 때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뒤따라갑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의 목자가 밤이 되자 각기 자기 양들을 섞어서 큰 동굴 안에 몰아 넣고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자기 양들과 남의 양들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자 한 사람이 조금 멀리 떨어져서 오직 자기의 양들만이 알 수 있는 이상한 소리를 냈습니다. 그랬더니 곧바로 일부 양들이 그쪽으로 몰려갔습니다. 나중에 조사해보니 한 마리의 다른 양도 없었다고 합니다. 자기 목자의 음성을 정확하게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양인 우리도 목자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야 합니다. 참목자와 거짓 목자의 음성을 정확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는 참목자이신 예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만 청종(聽從)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목자되신 주님의 음성은 외면한 채 거짓 목자의 말을 믿고 딴 길로 가는 사람은 불안합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 목자되신 예수님의 음성을 정확히 듣고 따라가는 양에게 기쁨과 생명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자주 비유합니다. 시 23: 1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노래했습니다. 시 79: 13은 '주의 기르시는 양 된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시 80: 1은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 95: 7과 100: 3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르시는 양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봉독한 사 40: 11은 장차 메시아 그리스도 예수, 우리의 진정한 목자장이 도래하실 때 "목자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목자가 되셔서 양된 우리를 먹이시며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아주시는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좋은 지도자를 선한 목자에, 나쁜 지도자를 악한 목자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렘 23: 1은 거짓된 지도자를 "내 목장의 양무리를 멸하며 흩는 목자"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겔 34: 2은 좋은 지도자는 양무리를 먼저 배불리 먹이는 목자인 반면에 거짓 지도자들은 "자기만 먹이는 목자들"이라고 규탄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좋은 목자이십니다. 우리는 주님이 기르시는 양입니다. 양의 안전과 기쁨은 목자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목자되신 예수님의 보호 아래 있을 때 풍성한 꼴과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가 보장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기쁨을 얻기 원하십니까? 환경과 상관없이 한결같은 기쁨을 얻기 원하십니까? 양된 우리를 풍요로운 생명의 꼴로 먹이시고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되신 예수님의 뒤를 따르십시오! 

셋째로, 양은 우리 안에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에서는 밤에 양들이 잠을 잘 때에는 반드시 양우리 안에서 자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양우리가 조금 특이했는데 사방이 벽으로 삥 둘러 쌓여서 문같이 보이는 곳이 한군데도 없었습니다. 오직 양들이 양우리 안에 들어오도록 만든 작은 입구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이곳 위에 목자가 두 다리를 쭉 뻗고 입구를 틀어막은 채 잠을 청했습니다. 따라서 일단 양우리 안에 들어간 양들은 목자가 누워있는 작은 입구 쪽이 아니면 그 어떤 곳으로도 나갈 수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목자가 유일한 '양문'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양우리를 이렇게 만든 데는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먼저 양들이 제멋대로 바깥출입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양무리를 이탈해서 딴 곳으로 갈까봐 목자가 양들의 출입을 일일이 통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늑대나 이리와 같은 맹수들, 혹은 양도둑들이 함부로 침입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 그렇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유일한 양문인 목자의 신체를 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야생 동물이나 외부인도 침입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지요!

여러분, 요 10: 7에서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양우리가 다 그랬듯이 예수님은 사방이 벽으로 둘러 쌓인 양우리의 입구 쪽을 지키시는 유일한 문이 되셔서 양된 우리를 보호해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께서 지키고 계시는 양우리 안에 들기만 하면 그 어떤 사탄 마귀도 우리를 해칠 수 없습니다. 유일한 양의 문이 되신 예수께서 다 막아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요 10: 9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양의 문이 되셔서 우리를 굳게 지켜주시는 양우리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우리는 안전합니다.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을 통하여 들어올 때마다 구원을 얻고 나갈 때마다 풍성한 꼴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 양된 우리는 반드시 양의 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과해서 양우리 안에 들어가 있어야지 만 안전합니다. 특히 어두컴컴한 밤에는 반드시 양의 문이 되신 예수께서 든든히 지켜주시는 양우리 안에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양우리 밖에서 서성거리거나 딴청을 피우는 양은 위험합니다. 불안합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오직 양의 문이 되신 예수께서 든든히 지켜주시는 양우리 안에 있을 때에만 안전과 생명과 기쁨이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기쁨을 얻기 원하십니까? 양우리 밖에서 방황하면서 기쁨을 얻기 원하는 것은 사막에서 물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힘든 일일 것입니다! 양우리 안에 거하십시오. 양의 문이 되신 예수님을 통과해서 나오고 들어올 때마다 큰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제 결론을 맺습니다.

어떤 교회의 예배 시간에 연세 많으신 목사님과 청년 한 사람이 시편 23편 말씀을 각각 암송하게 되었습니다. 젊은이는 웅변 교육을 잘 받았을 뿐만 아니라 목소리나 발성 기법 또한 천부적으로 타고난 사람이었습니다. 청년이 시편을 다 암송했을 때 청중들이 뜨거운 박수를 쳤습니다. 청년의 낭랑한 목소리와 뛰어난 언변 기술에 너나없이 압도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늙은 목사님께서 지팡이를 잡고 간신히 설교단 쪽으로 걸어 나오셨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아주 천천히 시편 23편을 암송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암송을 마쳤을 때에는 청중들로부터 아무 소리도 흘러나오지 않았습니다. 청중들은 다만 기도와 경배의 깊은 경지에 들어간 것처럼 보였습니다.

잠시 동안의 침묵을 깨고 그 젊은이가 갑자기 소리쳤습니다. "여러분, 제가 이 말을 꼭 해야 하겠습니다. 제가 시편 23편을 암송했을 때 여러분은 뜨거운 박수를 쳐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노 목사님이 암송을 마쳤을 때에는 그저 감동만 받은 채 조용히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저는 그 차이점을 지금 막 깨달았습니다! 저는 시편 23편만 알았을 뿐인데 이 목사님은 시편 23편에서 말씀하는 목자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시편 23편을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시편 23편이 말씀하고자 하는 목자를 아십시오!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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