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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파워크리스챤으로 삽시다. (약 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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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춘수 목사

지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갈등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관계의 갈등은 싸움과 분쟁을 낳습니다. 지금 세계는 곳곳에 나라와 나라의 싸움이 있습니다. 기업들도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가정 속에서도 싸움은 예외가 아닙니다. 부부간의 싸움,고부간의 싸움,형제간의 싸움 오히려 가까울수록 싸움도 더 많습니다. 교회 속에서도 알게 모르게 싸움으로 인한 갈등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쟁과 싸움의 갈등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없습니까?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싸움을 하고 분쟁의 어려움을 겪습니다.이미 초대교회 당시에도 이런 싸움들이 있었습니다.성경속의 에베소교회 고린도교회 오늘본문에 야고보기자가 대면하는 초대교회에도 이런 싸움이 있었습니다. 이미 초대 교회에 서로 다투고 그래서 교회를 떠나는 배교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교회가 크게 위축되기도 했습니다.

분쟁과 싸움의 문제를 대면할 때 우리가 종종 오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문제는 외적인데서 풀려고 합니다. 문제를 자기에게서 풀려고 하지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단순히 사람의 문제로 풀려고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것이 단순히 사람대사람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인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영적인 문제인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양한 원인일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제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파워있는 영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겪어야 할 갈등과 싸움의 주요인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지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1. 육신과의 관계를 바로 해야 합니다.
본문4: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을 좇아 난 것이 아니냐“
여기 야고보서 기자는 교회 속에서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쫓아나느뇨 질문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대답하기를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다툼과 싸움의 문제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여기 정욕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구원받기 이전에 우리의 자연인이 갖고 있는 욕구입니다. 이 욕구는 다양합니다.
아브라함마슬로우라는 심리학자는 욕구를 5가지로 나누었습니다.우선 생리적 욕구가 있습니다. 이것은 밥을 먹고 싶은 욕구같이 가자아 기본적인 욕구입니다. 다음에 안정의 욕구가 있습니다.인간은 누구나 안전하게 살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셋째는 친화의 욕구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가까이 사귀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네 번째 존경의 욕구가 있습니다. 내가 중요한 존재로서 내 가치를 높게 평가받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싶은 욕구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입니다.
이 욕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도 이 옛성품 욕구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런 육신의 욕구들이 결국 추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 욕심입니다. 모두가 자기를 나타내고 자기만족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소위말하는 인생에서의 성공을 생각합니다.
저는 오랜기간 예수를 믿고 나서 나의 야망과 믿음에 대해서 깊은 고민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과연 그리스도인되고 목회자된 나는 나의 야망 나의 욕망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저는 그 답을 마가복음 10장 45절에서 찾았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내가 목회자가 된 것은 내가 높임받고 대접받기 위함이 아니라 남을 섬기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요 남을 높이고 주님을 높이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교회 속에서 분쟁과 싸움이 왜 일어납니까? 가정 속에서도 왜 분쟁과 싸움이 일어납니까? 우리는 생각하기에 일차적으로 상대방이 잘못했기 때문에 싸운다라고 생각합니다.그러나 싸움의 원인은 1차적으로 나에게 있습니다. 교회 속에서 서로 싸우는 이유는 이유여하를 물론하고 나의 욕구대로 채워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불만 때문입니다.
구원받았습니까?
그러나 여전히 나의 욕망대로 내가 살려고 할때가 많습니다.
나의 욕심이 나를 주장하면 결국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않습니다. 옛사람의 정욕은 철저하게 나중심입니다. 나중심의 욕심은 결국 미움과 다툼과 시기와 싸움을 하게 됩니다. 내가 강하기 때문에 양보하거나 절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고 신앙에 승리하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자아을 다스리는 사람입니다.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고 성령의 소욕으로 지배를 받는 사람입니다.내가 항복해야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 나의 자아가 살아서 나를 주장하게 됩니다.
나의 정욕을 다스릴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성령을 받습니다.기도하면 성령이 충만하게 됩니다. 기도하면 은혜를 받습니다. 기도하면 내가 죽습니다.기도하면 주님이 통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의지로 내 힘으로 나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내 안에 주님께서 역사하시도록 그분을 신뢰하고 그분이 회복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2절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라고 합니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세상의 정욕이 나를 주장하고 내 욕망에 사로잡혀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어떤 분은 자신의 기질과 성격이 바뀌거나 고칠 수 없다고 합니다. 완전히 고쳐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변화되어질 수있습니다. 기도하면 변화됩니다.기도하는 사람은 혈기를 부리지 않습니다.기도하는 사람은 혈기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혈기가 있는데 다스림을 받은 것입니다. 내가 간곳이 업어지고 주님이 나를 다스리면서 주님이 활발히 살아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결국 하나님의 욕심을 따르고 성령의 열심을 회복합니다.
성령의 지배와 인도하심을 받도록 늘 기도하면서 육신을 제어하는 성공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2. 세상 관계를 바로 해야 합니다.
4-5절을 읽어봅시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너희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이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자기 백성들을 세상에 두셨습니다.
세상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세상이란 하나님께서 피도한 모든 자연만물도 해당이 되고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세상의 사람들도 해당이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 의해서 되어진 모든 문화적인 창조물들도 세상에 해당이 됩니다. 그런데 자연과 사람과 사람들이 만든 모든 문화들은 죄로 더럽고 어둡고 부패하여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에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지금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 가야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면 안됩니다. 세상을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에서 빛가 소금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이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상은 우리의 전도의 대상이지 우리의 사랑의 대상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지만 세상과 벗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세상을 벗으로 여긴다는 것은 세상을 가까운 친구처럼 가까이 한다는 것입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왜 세상을 벗으로 사귀는 것입니까? 세상은 달콤하고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벗으로 삼는 것을 4절에 “간음”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과 우리의 관계가 부부의 관계임을 강조합니다. 절대적인 사랑의 관계가 부부의 관계이듯이 성도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사랑으로 맺은 관계입니다. 그 사랑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이 바로 간음입니다. 남편이 아내보다 다른 여자를 더 만나고 사랑하는 열심을 낸다면 결국 그관계가 실패하고 말 것입니다. 깨지되 어떻게 깨어집니까? 원수가 되어서 깨어지게 되는 것을 봅니다. 사랑하는 만큼 배신의 아픔도 큰 것입니다.

만일 성도가 하나님보다 세상을 벗하면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열심히 없으면서 세상에서 행하는 일에 대해서 열심을 내면 결국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십니다.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자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을 동원하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게 하셨습니다. 어느날 친하고 문제없던 사람들이 나를 공격하고 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갑자기 재앙이 찾아오기 시작합니다. 세상에서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주변의 환경이 갑자기 어렵게 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성도의 삶은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는 결국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성도가 세상을 사랑하면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께서 시기하십니다.
믿는 자 속에는 성령이 계십니다. 이 성령은 우리 안에서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면 시기하는 것입니다. 이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욕심을 촞지 않으면 결구 우리 속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그래서 마음에 기쁨이 없습니다. 성도가 세상을 좇으면 결국 세상에서도 결국 버림을 받고 수치를 받을 수 밖에 업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성도는 하나님에게 운명지어진 절대적인 인생을 살아야 함으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모없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뿐이니라”고 합니다.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과 벗하여 아무리 주일날 낚시를 가고 피서를 가고 등산을 가보십시오, 오히려 그 속에 갈등과 괴로움으로 오히려 즐거움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한마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생활입니다.단지 교회당에서 와서 예배만 드리고 가는 것이 신앙 생활이 아닙니다.삶속에서 항상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 바로 신앙입니다.
사랑하면 어떻게 합니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는 헌신과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때로 사람들은 예수를 적당히 믿으라고 합니다.너무 깊게 들어가지 말라고 합니다.그래야 상처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적당히 양다리 걸치고 믿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적당한 사랑,적당한 부부관계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그렇게 적당하게 믿음도 있고 세상도 친하고 적당하게 살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의 신앙을 “박쥐신앙”“카멜레온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힘이들고 어렵습니까? 그렇게 되면 이것도 잃고 저것도 잃고 실패자가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선대하십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


3. 마귀 와의 관계를 바로 해야 합니다.
7절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성도를 실패하도록 공격하는 3번째 적은 바로 마귀입니다. 성도는 마귀와의 관계를 대적관계를 갖아야 합니다.
이 마귀는 세상의 정사와 권세를 잡은 악한 영입니다. 이 마귀는 예수님도 시험하였고 오늘도 모든 성도들을 시험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공격할 때 광명의 천사처럼 위장하여서 우리를 공격할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위장전술에 속습니다. 때로는 부부지간에 개입하여 마귀는 싸움을 일으킵니다. 고부지간에 싸움을 불어일으키기도 합니다.
에베소서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함이라”고 합니다.
성도들중에 마귀의 공격앞에 실패의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귀를 이기는 길은 믿음으로 대적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대적하는 자에게 마귀는 역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이미 사단의 세력을 정복하시고 이겼기 때문입니다. 주님 아래 있으면 마귀는 우리에게 승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님을 믿음의 사람은 마귀가 피해갑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서있는 자는 마귀가 넘볼 수 없습니다.
반대로 성도이지만 마귀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다시말하면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입니다.그 사람은 바로 교만한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께 순복하지 못하고 마귀에게 조종당합니다. C.S 루이스라고 하는 유명한 기독교사상가는 교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교만이 무엇인가? 사랑,지혜,믿음,소망,상식 이런 모든 것들을 먹어치우는 영적인 암이다” 교만을 일컬어서 “영적인 암”이라고 하였습니다. 토마스 아쿠나스는 “교만은 모든 죄악의 어머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잠언16:18에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합니다.
여러분 교만이 어디서부터 생깁니까?
첫사람 하와가 교만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선악과 열매를 따먹었습니다. 그때 마귀가 하와를 조종하고 종으로 부려먹을 수 있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와의 자기 생각이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셨지만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했습니다. 바로 교만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교만한 사람은 사람과 다투게 됩니다.내가 교만하여 나의 생각이 중심이 되어 모든 사람이 나를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루는 개구리가 하늘을 나는 기러기들을 보았습니다. 개구리는 너무나 멋지게 하늘을 나는 기러기가 부러웠습니다.그래서 개구리는 기러기에게 물었습니다.“얘들아 내가 좀 날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어?” 그랬더니 기러기들이 빈정거리면서 이야기합니다.“너는 날개가 없어서 안돼 넌 날수 없어”
그런데 문득 개구리의 머릿속에 기발한 아이디어가 하나 생각났습니다.“막대 양쪽 끝을 기러기가 입에 물고 그 막대 가운데를 내가 물고 그렇게 기러기가 날아만 준다면 나도 날 수 있을 거야? 내 머리는 왜 이렇게 좋은 것일까? ” 개구리는 기러기들에게 자기의 아이디어를 말하면서 그렇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러기들이 그렇게 해주었습니다. 드디어 막대의 양쪽끝을 기러기들이 부리로 물고 개구리는 그 막대기를 물었습니다. 드디어 하늘을 날게된 개구리가 너무나 기분이 좋았습니다.“야 내가 하늘늘 날다니,야 내 머리는 너무 비상하단 말이야” 이렇게 신나게 하늘을 나는 개구리의 모습을 농부가 보았습니다. 농부가 개구리에게 묻습니다.“아니 개구리야 어떻게 저렇게 좋은 생각을 해서 날 수 있었니” 그때 개구리는 은근히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내가 이래도 좋은 머리를 갖고 있는데...”그런 생각으로 농부에게 “내가 생각해 낸 거다”라고 말하려고 “내”라고 입을 여는 순간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곤두박질 당하여 죽고 말았습니다.교만은 우리의 인생을 망가지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삶 속에서 종이 되고자 하면 싸우지 않습니다. 문제는 왕이 되려고 합니다. 가정에서도 왕이되려고 할때 싸웁니다. 교회에서 왕이 되려고 할때 싸웁니다. 깨끗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사용하는 그릇이 되기를 바랍니다.

4. 하나님과 관계를 바로 맺는 사람이 승리합니다.
8절을 봅시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합니다.
성도가 언제나 항상 가까이 해야 될 대상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가까이 하여 주시기만 하면 우리의 모든 문제는 온전히 해결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하나님께 가까이합니까?
여기 보면 손을 깨끗하게 하는 사람,마음을 성결케하는 사람입니다.
특히 마음을 성결케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가까이하여주십니다.여기 성결한 마음은하나님께서 은혜로 채워주시기를 바라고 비어놓은 빈 마음 겸손하고 깨끗한 마음입니다.다음에 9절에 보면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찌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찌어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애통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십니다.자기의 죄와 허물에 대하여 눈물로써 가슴을 찢고 회개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가까이하십니다.한성서학자는 애통한다는 말을 “자신에 대해서 깨어지는 체험”이라고 했습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우리 안에 없어야 할 것이 우리 속에 가득채워져 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깨어지는 체험을 해야 우리가 살아납니다. 하나님은 깨어진 심령을 다시 손으로 빚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빚으십니다.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을 혹시 보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명품도자기는 그냥 탄생하지 않습니다. 깨어지는 아픔을 수없이 겪고 난 뒤입니다. 도예공들은 조금이라고 흠이 있고 기스가 있으면 그렇게 공을 들여서 만든 것이지만 아낌없이 깨어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빚습니다. 그래야 좋은 도자기를 빚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가까이하기 위해서는 겸손하라고 10절에 권면합니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덕목도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했습니다.겸손한 사람은 자기의는 철저하게 버리는 사람이요 하나님만늘 철저하게 높이는 자기에 대해서 죽은 사람입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타인 중심의 사람입니다.
여러분 겸손한 사람이 예배에 성공합니다.자기를 높이는 교만한 사람은 예배를 드려도 자기중심의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높으신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할 때 진정 그분을 높이고 경배합니다.
저는 단언하는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가까이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주일날 몇 번만 예배를 드리지 않아 보십시오. 벌써 하나님에게서 마음이 멀어지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내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하나님께 마음과 몸과 물질로 경배하면 하나님깨서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지만 여러분 좋은 사람을 한번 만나고 나면 얼마다 기분이 좋고 힘이 생깁니까? 목회자인 저도 평신도들 중에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만나고 나면 기분이 좋고 목회의 의욕이 생기는 것을 경험합니다.그런데 하나님을 온전히 경험하고 나면 아무리 사람이 좋고 힘을 주고 좋아도 비교할 수 없는 힘을 얻고 능력을 얻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교회를 가까이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가까이합니다. 저는 믿음생활을 할때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있는 하나의 끈 하나의 장치를 만들어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의 죄성은 자꾸 두마음을 품습니다.그래서 두마음을 품지 않고 성실하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공격적이면서도 방어적인 하나의 끈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것이 교회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에게 맞는 한가지 이상 사역을 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 사역을 경험하면서 우리자신의 죄성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의 마음이 더럽고 추하고 성격의 문제점과 내가 교만하고 모가 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가 목회자가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저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든지 말씀을 증거하기 위해서 더욱 말씀을 보고 또 내가 남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더욱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나의 마음이 세상으로 가다가도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보면 또 나의 마음이 나의 삶이 하나님에게 집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은 복잡합니다.그러나 강한 그리스도인은 모든 복잡한 삶에서 능력있는 삶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파워있는 그리스도인은 자기에 대해서 승리합니다. 파워잇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승리합니다. 마귀를 이깁니다. 그리고 이땅에서 능력있는 삶으로 영향력있게 살아갑니다.어떻게 파워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교만을 버리고 성결한 마음과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으로 날마다 영적인 능력으로 자기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우리 모두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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