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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앞에서 (출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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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창인 목사

출애굽기 18장 1절에서부터 12절까지 있는 말씀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립니다. 12절 보면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번제물과 희생을 하나님께 가져오매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와서 모세의 장인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으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라는 말씀을 깊이 생각하면 참 은혜가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에 "하나님 앞에서 드린다." "하나님이 보이는 모습으로 이곳에 계신다." 고 생각하게 되면 앉아서 예배드리는 자세가 달라질 겁니다. 하나님이 보이는 모습으로 예배를 받고 계신다면 하품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요. 옆 사람과 이야기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또 조는 사람도 없을 뿐 아니라 아주 얼마나 이 자리가 경건한 자리일까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예배라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분명히 여기 계시는데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아니하므로 예배가 엉망일 수 있습니다. 예배의 실패는 신앙의 실패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예배가 잘못되었는데 믿음이 잘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고넬뇨라고 하는 로마군 백부장은 기도를 많이 하고 구제생활을 많이 했는데 그것이 하나님 앞에 상달이 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때 "욥바에 있는 베드로를 청해와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부하를 시켜서 베드로를 초청했습니다. 그사이에 자기는 일가, 친척, 친구, 그리고 손이 닿는 사람은 다 함께 모이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오자마자 우리가 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들으려고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다는 자세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는 중에, 예배하는 중에 성령이 충만 힘을 받고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다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있는 대로 하나님 앞에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I. 가정생활(1-7)

우리가 이렇게 예배할 때만 "하나님 앞"이라 생각지 마시고 가정생활도 하나님 앞에서 해야됩니다. 내 가정에 들어가도 제일 좋은 자리, 제일 귀한 자리에 모시고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의 가정 생활을 지키고 계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생각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면 가정생활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1절에서 7절까지 보면 모세의 가정생활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는 앞에서 가정생활을 하게되면 믿음 우선의 가정이 됩니다. 하나님이 보는 앞에서 우리가 가정 생활을 한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이 우선됩니다. 말을 해도 믿음으로 하고 생각을 해도 믿음으로 하고 일을 해도 전부 믿음을 앞세우는 겁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게되면 1절과 4절 사이에 모세가 애굽에서 태어나서 바로 궁전에 들어가서 40세까지 배울 것 다 배우고 그러다가 바로 왕의 미움을 받자 미디안으로 도망을 가게됩니다. 이드로라고 하는 좋은 가정, 즉 제사장의 집안을 만나 그 집에서 사는데 그 집 맏딸과 더불어 결혼했습니다. 아들 형제를 낳았습니다. 어느덧 40년이 지나갑니다. 그때 하나님이 또 불러 애굽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애굽으로 가는데 호화로운 생활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고생하며 가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일을 위해 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하러 할 때 가족들이 모두 따라갔습니다. 그곳에 살면 편안한 생활을 하고 존경받는 생활을 하는데, 애굽에 가면 누가 존경합니까. 그렇게 고생하며 일하다 보니까 가족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워졌습니다. 그래서 아내를 자녀들과 함께 친정으로 보냈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남편 떨어져 갈 여자가 어디 있습니까? 죽으나 사나 남편 곁에 있을 겁니다. 그러나 모세의 아내는 가라는 대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데는 잠깐 떨어져 사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생각하여 친정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모세의 가정은 전부 믿음으로 말을 하고 믿음으로 생각을 하고 믿음으로 일을 처리했습니다. 이런 가정이 복된 가정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지켜보는 앞에서 밥상을 맞이하고 보는 앞에서 부부 지간에 의논하고 보는 앞에서 일을 할 때 믿음 우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가정생활을 하게되면 자연스럽게 협력위주의 가정이 됩니다.

이 말을 한마디로 설명하면 하나님의 일에는 온가족 식구가 몽땅 다 달라붙어 협력해야 하는데 원망을 할 때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목사이지 우리가 목사냐고 합니다. 목사가 좋기는 하지만 하는 말이 싫다는 겁니다. 교회에 가면 목사의 아들이 그러면 되느냐 혹은 목사의 딸이 그러면 되느냐 하는 말이 싫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아들과 딸이 목사는 아닌데 목사의 아들, 딸이라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일에 불평 없이 온 가족이 협력한다는 것이 그 만큼 귀합니다. 모든 일에 앞장서야 되고 안 서면 안 된다고 하니 이것이 속상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에 불평 없이 온 가족이 협력한다는 것이 그 만큼 귀합니다.

모세의 아내는 남편이 하는 일에 어쩌면 그렇게 협력을 잘 합니까. 애굽으로 돌아가는 길에 천사가 모세의 목을 눌려 죽이려고 할 때 아내는 생각되는 바가 있었습니다. 두 아들에게 할례를 베풀지 못한 것입니다. 차돌을 깨서 할례를 베풀고 양피를 모세 앞에 던져더니 살아났습니다. 세상에 이런 아내를 어디서 찾아 볼 수 있겠습니까? 남편이라는 일에 아내가 협력 해주고, 또 남편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자녀들을 데리고 친정에 가 있으라면 또 협력을 잘해주는 십보라였습니다. 아들 형제도 어머니와 함께 잘 협력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깊이 생각할 문제입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하는 일에 자녀가 협력하고 남편이 하는 일에 아내가 협력하고 아내가 하는 일에 남편이 협력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 남자 집사님들이 열심 내거들랑 아내는 뒤에서 잘한다고 격려하며 협력하고 잔소리는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다가 남편이 주저앉고 기분 나쁘다 하여 술 먹고 교회에 나오겠다 고하면 어떻게 할 겁니까? 그 반대로 아내가 열심을 내거들랑 구역장이다 권찰이다 성경반 교사다 유년부 부장이다 열심을 내면은 더 박수치고 잘한다 해주십시오. 못하게 하다가 나중에 춤바람이 나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결국 빗나가 춤이나 실컫 추겠다면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생활을 하고 하나님의 일 하는데 열심히 도와주고 협력해 주십시오. 하나님이 지금 우리 가정에서 우리와 함께 보이는 모습으로 지켜보고 계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협력을 잘하는 가정이 될 것입니다. 복된 가정이며 아주 믿음 있는 가정입니다.

글공부는 학교에서 하지만 교양은 가정에서 시킵니다. 요즘 학교에서 공부하는가 보십시오. 글자 많이 알고 시험 점수 많이 받으면 일등이라고 합니다. 사람되는 법을 가르쳐주지 못하기 때문에 윗사람을 존경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기의 선생, 스승의 머리를 강제로 깎아버리지를 않나. 총장실에 가서 책상을 뒤엎어 버리지를 않나 이것이 무슨 교육입니다? 그것이 다 누가 가르쳤습니까? 참교육을 한다는 사람들은 그런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았습니까? 학교에서는 공부를 중점적으로 하고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 어머니에게서 사람되는 법을 배우는 겁니다. 그래서 가정 교육이 중요합니다.

가만히 본문을 살펴보면 이드로, 즉 모세의 장인이 모세의 아내와 모세의 두 아들을 데리고 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홍해를 건너와 시내산 밑에 진을 쳤습니다. 그때에 장인이 딸과 자기 외손자를 데리고 모세를 찾아왔습니다. 모세가 그 소리를 전해 듣고 달려나갔습니다. 그 다음에 큰절을 하고 입을 맞췄습니다. 이때 모세의 나이가 모세가 80입니다. 그러면 장인은 100살 이상이 되었을 겁니다. 80살난 영감과 백살 이상이 된 영감이 수염이 더부룩해 가지고 입을 맞추니 그 꼴이 얼마나 사나웠겠습니까? 징그러웠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꼴사납다 혹은 징그럽다 해도 그때 당시 그 지역의 풍속은 상당히 예의를 갖춘 인사법입니다. 장인일행을 천막으로 영접했습니다. 좋은 걸로 대접했을 뿐 아니라 밤이 깊도록 신앙간증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모세가 자기 장인에게, 즉 어른에게 이처럼 잘하더라는 겁니다. 그 아들들이 누구를 보고 배울 것입니까? 할아버지한테는 저렇게 하는구나 또는 윗사람한테는 저렇게 하는 구나, 하고 배우게 됩니다. 또 모세가 어디에서 배웠습니까? 자기 부모한테 배웠지요. 모세가 그러니 그 아들 딸들이 그대로 배워 교양 있는 가정이 됩니다. 윗사람을 잘 존경하고 친구들과는 잘 어울리고 밑에 사람들은 아끼고 사랑하는 이 모습도 역시 모세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사람구실을 하게됩니다. 참 교양 있는 가정입니다. 여러분들의 아들 딸들에게 교양만점을 가르치는 이런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 즉 우리 집안에 계신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훌륭한 가정이 될까를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의 가정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생활하는 가정으로서 행복하고 승리하는 가정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II. 갱신의 생활, (8절-11절)

첫째, 만남으로 갱신(8절)

어린아이들을 길러 보면 그 어린 아이가 정상적으로 잘먹고 잘 자고 잘 자랄 때 굉장히 기쁘고 즐겁지 않습니까? 저는 맏딸 낳아서 기를 때에 애기를 낳은 다음날 여집사님 한 분이 와서 도와준다고 애를 씻기다가 배꼽 줄이 뚝 떨어져나갔습니다. 피가 나는데 병원에 갈 돈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머큐륨을 사다가 바르고 붕대를 감아놨는데. 그때부터 울기를 시작합니다. 3개월을 넘게 눈만 뜨면 우는데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습니다. 나중에 알아봤더니 그 아이는 기적으로 산아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 거의가 다 파상풍에 걸려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기가 울어대면 귀찮으니까 예배당으로 나가고 말곤 했습니다. 나중에는 깨끗이 낫고 지금 잘 자라서 건강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때는 속상했습니다. 제대로 먹는 것도 아니고 조금 자다가는 깨서 또 울고, 그러다 보니 정상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큰 걱정거리였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의 믿음이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하면 하나님의 걱정거리가 됩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 맏딸이 깨끗이 나아서 하루가 다르게 잘 자랐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워졌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생활도 건강하여 하루가 다르게 새로워져야됩니다. 이것을 갱신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세포가 7년 만에 완전히 새것으로 바뀐다고 합니다. 즉 1년에 7분의 1씩 노폐물이 되어 떨어져나가고 그만 새로워집니다. 이런 새로워짐이 그치는 날에 그 사람 그 사람은 죽게됩니다. 즉 자신도 모르게 변화되어집니다. 그래서 부모 앞에서 자녀들은 하루가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야 됩니다. 우리 하나님 앞에서도 우리의 삶이 또는 우리의 믿음이 혹은 영적 상태가 하루가 다르게 변화되고 갱신이 되어야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모세가 여호와께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에게 행하신 모든 일과 그들의 당한 모든 고난과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신 일을 다 그 장인에게 고하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드로의 갱신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이드로라고 하는 모세의 장인이 모세를 만났다는 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만남으로 변화가 됐고 만남으로 새로워졌습니다. 우리의 가정생활에서 이런 여자는 어디든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면 그 가정 불행합니다. 또 이 남자는 어디서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역시 부부생활은 불행합니다. 아내를 볼 때에 내 아내는 좀처럼 만나기 힘든 여자라고 생각하여 귀히 여길 때 행복한 것입니다. 역시 내 남편은 천하에 하나밖에 없는 남자라고 생각하면 행복합니다.

제가 이 말씀드리는 이유는 제사장 장인 이드로에게 두고 모세라고 하는 총각을 사위로 맞이할 때 모세의 됨됨을 보았습니다. 그 당시 모세는 전혀 볼 것이 없었습니다. 가진 것은 하나도 없었고 더욱이 쫓기는 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드로는 사람을 보는 눈을 가졌습니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모세의 처지였지만 이드로는 그에게서 보는바가 있었기에 그를 사위로 맞이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이드로는 사위하나 잘 두었습니다. 그와의 만남에서 이드로는 달라지기 시작했고 또 큰복을 받게되었습니다. 이드로가 모세를 만났는데 모세를 만나는데서 끝난게 아니라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다는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최고의 만남입니다. 믿지 않던 분이 믿는 아내를 만났고 아내를 통해서 하나님 만난 분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믿는 아내와의 만남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와 반대로 아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참 행복한 만남입니다. 바로 이드로가 모세를 만남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했다고 본문은 밝히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꼭 좋은 아내 좋은 남편과의 만남을 통해서 늘 하나님과의 만남의 생활이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둘째, 가치관의 갱신(9절)

모세가 그 날밤이 깊도록 뭐라고 말하였는가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 애굽으로 보낼 적에 가다말고 죽을 뻔했으나 바로 당신 딸이 아들들에게 할례를 베풀어 나를 살렸으리니 장가 잘 들었다는 이야기,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애굽에 가서 바로 왕과 싸웠던 이야기, 열 가지 재앙이 내리던 이야기, 홍해바다 건너오던 그 기적 같은 이야기로 간증을 하였습니다. 그 모세의 신앙간증을 들은 이드로가 기뻐하였습니다. 이드로는 지금 까지 귀신을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네가 섬기는 귀신을 이야기하면서 기뻐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와 상관없는 하나님이 무엇을 했다고 하여 기뻐하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요 하나님이 이런 일을 하셨다는 실감 있는 간증을 듣고 기뻐하였습니다. 집안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지금까지는 귀신이 제일인줄만 알았습니다.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기뻐했고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뻐하는 가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혹은 건성으로 교회만 다닐 때에는 세상의 것을 가지고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월급이 조금 올라서 조금만 월급봉투가 두꺼워지면 기뻐하고 한자리 올라가면 기뻐하고 이것으로 세상 다 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믿지 않는 사람이 더 잘하는 것이 아닙니까? 돈이야 많이 생기면 많이 쓰고 적게 생기면 적게 쓰는거 아닙니까. 돈이야 있는 데로 쓰는 것입니다. 거기에 울고 웃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보니 이제는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이 해주신 일을 기뻐하고 하나님께 대한 체험을 누구에게나 간증할 수 있는 이런 기쁨, 신령한 기쁨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즉, 세속적인 기쁨이 신령한 기쁨으로 변화가 되어야합니다.

이것은 가치관의 변화가 되기 때문에, 세상 것으로 전부를 삼고 살던 삶이 하늘의 것을 바라다보고 하늘의 것을 전부로 삼으며 살아가는 삶으로 변화됩니다. 이처럼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나지 아니하면 10년을 교회에 다녔을지라도 다 떨어져 나갑니다. 애기 못 낳아서 애기 낳기 위해 나오는 여자, 병들어 어디가도 못 고쳐서 병고치기 위해서 나오는 사람, 병 못고치고 애기 못 낳으면 다 떨어져 나갑니다. 떨어지기 전에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애기 못 낳아도 하나님의 뜻이 있고 병들어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자신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믿음으로 가치관 자체가 바꿔지지 않으면 그 사람은 믿음생활을 성공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가치관이 달라질 때 인생관이 달라지고 내 삶의 내용이 달라집니다. 이런 갱신의 삶의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셋째, 신앙생활의 갱신(10절-11절)

모세의 간증을 듣고 이드로가 기뻐하더니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라고 외치더니 너희를 애굽사람의 손에서와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백성을 애굽 사람의 손 밑에서 건지셨도다라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 세상의 신들은 아무것도 아니요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위대하시므로 승리하셨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히브리말로 알았다는 말은 만났다는 뜻이요 체험했다는 뜻입니다. 이제는 섬기던 귀신을 다 버리고 여호와 신앙을 고백한 다음 집으로 돌아가더니 다 정리해 버린 후 보따리를 지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가나안땅을 향해 떠났습니다. 즉 선민의 대열에 참여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성을 점령한 다음에 여리고성에 정착을 하였습니다. 그때 모세의 장인의 족속을 겐족속이라 부르게 된겁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모세의 장인은 여호와 신앙을 가지고 택한 백성의 대열에 참여를 하더니 하나님이 허락한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가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자손손 살게 됐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큰 변화가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서 믿음생활을 할 때 날로 날로 그 신앙이 새로워지고 변화되는 신앙이 선민의 축복에 동참케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의 갱신의 생활은, 만남으로 갱신이 되고 가치관의 갱신이 일어났고 신앙생활, 신앙생활 자체에 갱신이 일났다.

III. 조화의 생활(12절)

첫째, 하나님과 조화(12절 상)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어야 되는데 말을 바꿔하면 하나님과 버성기며 하나님과 원수 되고 잘되는 사람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절대 하나님과 원수 맺지 말라는 것이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성공합니다. 하나님이 실패하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고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과 친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질수록 나쁜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과의 조화를 이루어야 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또 제가 말씀드린 대로 이드로는 지금 하나님과 멀리할 대로 멀리하고 우상 섬기며 귀신 섬기고 좋아하던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12절에 보게되면 이제는 전혀 달라졌습니다. 그는 결심했고 결단을 내려 송아지를 끌어다가 하나님 앞에 번제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겁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울왕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초대왕이 얼마나 세상에 좋고 좋다는 거는 다 가진 부러운 왕입니까? 그런데도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고 하나님과 버성기다가 결국은 통 망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과 버성겨서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끝내는 망했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고난 속에 쫓기는 신세였습니다. 아주 가난하고 천하고 불행 속에서도 매일 하나님과 가까이 합니다. 하나님과의 조화를 이루어 나갔습니다. 나중에 하나님이 그를 들어 왕의 자리에 올려놓고 왕통을 이어주고 그 왕통에서 메시아 예수가 나오시게 하지 않습니까? 이런 축복을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과의 조화를 이루는 생활, 즉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고 생각하시면 하나님과 감히 버성기고 달려들겠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 여기 계신다 하는 것을 생각하시고 그 하나님과 친히 하시고 가까이 하시고 늘 조화를 이루는 삶으로 다윗과 같은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이웃과의 조화

하나님과는 잘 어울려 잘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십일조 생활을 꼭꼭 합니다. 주일날 예배 반드시 나옵니다. 기도생활 많이 합니다. 집에 가면 혼자서라도 찬송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부 하나님께 하는 겁니다. 찬송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도 사람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예배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사람에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는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잘하는 광성교회 집사가 앞집여자, 뒷집여자, 옆집여자 싸움은 청부를 맡은양 싸움질을 합니다. 동네에서 손가락질 받고, 욕은 혼자 먹고 다닙니다. 그리고 철야기도나 새벽기도는 혼자서 다하듯이 열심입니다. 예배시간 마다 나와서 안내도 잘 합니다. 이것이 잘 믿는 것입니까? 물론 하나님께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하는 모든 것을 다 해야합니다. 즉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어야합니다.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는 사람은 이웃과의 조화도 이루게 되어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부모에게 잘하는 사람은 형제에게도 잘해야지 부모에게는 기가 막히게 잘하면서 형제사이에는 원수처럼 살아가고 있다면 뭔가 한참 잘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부모에게 잘하는 사람 형제에게도 잘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잘하는 사람은 이웃에게도 잘해야 됩니다.

본문에 12절 중반절을 보면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와서 모세의 장인과 함께"라고 하였습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아론과 모든 장로들과 친교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친교를 착각하면 안됩니다. 교인들이 냉면이나 먹으며 또는 다방에 가서 커피를 시킨 다음에 목사를 욕하고 장로를 욕하고 교회를 비방이나 하는 것이 친교는 아닙니다. 매주일 교회에 열심히 안나온다고 타이르는 구역장을 꼴보기 싫어 죽겠다하고 권찰은 능글맞아 보기 싫어 죽겠다 하고 이사람 저사람 마주앉아 욕만하고 있습니다.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헤어지면서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오늘 은혜 참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라고 합니다. 이것이 친교입니까? 이런 것은 성경이 말하는 친교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친교는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성경공부 하고 함께 전도하러 나가고 함께 서로서로 봉사하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아론과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이드로는 함께 하나님 앞에 어울려 친교 하였습니다. 즉 제사를 함께 드리고 하나님 앞에서 떡을 떼었습니다. 이런 삶에 성공이 있고 이런 인생에게 승리가 있는 겁니다. 이런 경우 이웃과의 조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자신과의 조화

본문 12절 하반절의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으니"라는 말씀에서 믿음의 생활이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목적입니까? 떡 먹는게 목적입니까?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 목적이요 떡 먹는 것은 하나의 살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뒤집어 놓으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그렇게되면 떡만 찾습니다. 돈만 찾습니다. 하나님 앞에 사는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성가대원이 오늘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찬양을 해야 하는데 한자리가 비었습니다. 알고 봤더니 설악산에 갔다는 겁니다. 자신을 잃어버렸거나 자신을 속이고 있습니다. 자신과의 조화를 이루려면 목적과 수단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것을 바꾸어 놓으면 나 자신과의 생활에 리듬이 깨져버립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 목적이 되고 이 세상에서 돈버는 것과, 먹는 것과 입는 것은 전부 삶의 수단일 뿐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믿는 것입니다. 인생을 바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과의 조화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과의 조화를 이루는 삶에 하늘의 즐거움이었습니다. 이 즐거움이 이드로의 즐거움이었습니다. 이 즐거움이 이드로의 즐거움이었습니다. 자신과의 조화에서 얻은 즐거움입니다. 자신과의 조화를 잘 이루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으로 말씀드리면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어떤 의식을 가지느냐가 중요합니다. 항상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다는 의식을 가질 때 생활이 전혀 달라집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가정생활을 하게 되면 그 가정은 낙원이 될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날로 새로워지는 갱신과 변하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조회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놓은 이드로의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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