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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 나은 의(3) (마 5: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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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노강국 목사

예수님께서 산에서 가르치신 귀한 교훈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산상수훈의 말씀을 생각해보는 가운데 있습니다. 특히 요즘은 그 중에서도 그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잘못 적용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예수님께서 반박하는 내용의 말씀들을 생각해보는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예수님의 반박은 단순히 공격하기 위한 반박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로 하여금 그 당시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를 지니게 하기 위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 당시,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생활 속에서 철저하게 지키고자 애를 쓰며 노력했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보다 더 나은 모습과 자세를 갖게 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자세와 정신으로 율법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취지인 것입니다.

오늘은 그 중에 세 번째에 해당되는 말씀으로 “이혼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이혼”에 관한 말씀을 생각함에 있어서 한 가지 먼저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이혼에 대한 생각이나 자세가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이혼과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이혼과 다를 뿐만 아니라, 모세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율법과도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31절에 보면,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의 배경이 되는 말씀은 구약 성경 신명기 24:1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결혼 전에 생겨진 일에 대한 책임을 묻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신 24:1의 말씀을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아주 다르게 해석하여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이혼하고 싶으면 이혼증서만 써 주면 할 수 있는 것으로 잘못 적용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기서 말하는 “이혼 증서”란 여성을 보호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지, 이혼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수치 되는 일이 있을 뿐, 결백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장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이혼증서였기 때문입니다. 즉, 현대 사회에서 작성하는 이혼합의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혼 증서의 의미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예수님 시대에는 엉뚱한 모습으로 변용되어 남성들이 이혼을 정당화하는 방편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율법의 이름, 곧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어진 말씀을 자기 편의대로 해석하여 적용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심리학에서는 “고형적 사고(concrete thinking)”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어머니가 자기 자식을 나무라다가 할 수 없다 싶었는지, 그 자식 앞에서 자신의 종아리를 치며 “내가 너를 잘못 키운 탓이다”고 말했다고 칩시다. 이렇게 말하는 어머니를 향해 철부지 아들이 “엄마가 잘못했네. 잘 좀 키우지 그랬어요”라고 말하는 그러한 사고패턴이 바로 고형적 사고라는 것입니다. 이는 지극히 미성숙하거나 사고장애로 인해 추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어쩌면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들의 생각이나 사고가 경직되거나 어느 하나에 집착된 나머지 이 같은 오류를 저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이혼증서만 써주면 이혼해도 괜찮다고 여기는 오류를 율법의 이름으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점을 먼저 지적하시면서 이혼의 문제를 다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입장은 무엇보다도 그 당시, 사회적으로 약자였던 여인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서, 가정이나 부부간의 문제는 당사자만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에 대한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함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오늘 말씀을 생각해 보면서, 우리는 결혼과 가정생활을 통해 지녀야 할 “더 나은 의”로서의 삶이란 과연 어떤 삶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계속되는 32절의 말씀을 통해서 이혼에 대한 입장을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라.” 이 말씀은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 표명의 말씀입니다. 즉, 명령의 말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만일 이혼하게 된다면, 이러한 경우에 할 수 있다”는 최소한의 이유라는 것이지, 음행한 연고가 있다고 무조건 이혼하라는 명령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음행한 연고가 있더라도 할 수 있다면 이혼은 피하라는 암시가 깃들여져 있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부부 가운데 어느 한편이 간음을 한 경우라면 어떻게 할까요? 영국의 로이드 존스(Lloyd Jones) 목사는 이 본문과 관련하여 이렇게 설교를 하였답니다.

“간음한 남편이나 아내를 버리기 보다는 용서하는 길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이 말은 피해를 입은, 그래서 이혼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간음한 일은 이혼의 사유가 될 수 있다는 것이지, 간음했다는 것은 곧 이혼하라는 명령이 아님을 상기시켜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자칫하면 악용하기 쉽습니다. 간음이란 이혼에 이를 수 있는 사유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혼하는 것만이 최선의 길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한 몸을 이룬 관계를 파괴한 것이지만 이혼하라는 명령은 아닌 것입니다. 죄의 결과를 법적으로 끝내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그러나 죄는 그런 방식으로 극복되지는 않습니다. 죄의 결과를 자신의 십자가처럼 걸머지고 아내나 남편에게 그리고 모든 가족들에게 남은 생애를 최선을 다해 봉사하는 것도 죄를 극복하는 한 방법입니다.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긴 남편이나 아내를 용서하고 어렵게 어렵게 다시 사랑하도록 몸부림침으로써 구겨진 가정을 바로 펴가는 것도 죄를 극복하는 한 방법입니다. 용서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용서해주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특히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라”는 말씀은 이러한 이혼으로 야기되는 또 다른 간음의 모습까지 예상하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이는 한 사람의 이혼으로 야기되는 간음의 연속성을 의식해 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즉, 이혼의 문제는 그 부부 당사자만의 문제를 넘어서는 사회성이 있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혼에 대해서는 극도로 신중하라는 권고의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이혼에 대한 가르침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결혼과 가정생활에 대한 크리스천의 입장과 자세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로, 결혼을 잘 해야 하겠습니다. “결혼을 잘 해야”한다는 말을 우리는 많이 하고, 또 듣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말씀을 하는 것을 오해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을 보통 자기가 결혼할 상대에 적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는 “결혼을 잘 해야”한다는 말은 자기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과연 결혼할 만큼 성숙한 사람이 되었느냐 하는 질문으로 자기 자신에게 먼저 적용해야 할 말이라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는, 결혼할 적령기가 되었기 때문에 결혼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결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안정이 되었기 때문에 결혼해야 한다든지, 아니면 배우자의 경제적인 능력에 결혼할 조건을 삼고자 한다든지 하는 것 역시 하나의 참고사항은 될지언정 결정적인 사유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결정적인 사유가 될 수 있는 것은 내가 한 남자나 한 여자를 지극히 성숙한 입장과 자세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가를 질문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이러한 성숙성의 기준이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과는 다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스스로의 객관적인 검증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실, 결혼 후에 이혼하는 경우, 대부분 그 이유나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보다는 상대방에게서 찾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러한 상대방을 감당할 만큼 내 자신이 성숙하지 못하다고 한다면 그 결혼생활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 자신이 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그러한 성숙함을 지닌 존재인가를 무엇보다도 먼저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또한 내가 아버지나 어머니가 될 수 있는 성숙함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점도 결혼과 함께 고려할 대상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성숙함의 자세를 지닐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결혼을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결혼과 가정생활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속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알 수 있는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질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구원의 질서이고, 또 하나는 창조의 질서입니다. 이를 신앙적으로 표현한다면 구원 신앙과 창조 신앙입니다. 신앙이란 모름지기 이 두 가지 모습을 함께 지녀야만 온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구원의 신앙만 있으면 선민주의에 빠진 유대인들처럼 잘못되고 편협한 신앙인이 되기 쉽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나만 돌보아주시는 것처럼 착각하며 오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창조신앙만 있으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희박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신앙인의 고유한 모습을 간직하기가 어려워짐으로 자연히 신앙생활을 추상적이고 막연하게 영위하게 되는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구원신앙과 하나님께서는 나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까지도 다 사랑하신다는 창조신앙을 함께 지닐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정은 이러한 창조질서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는 사람들의 가정도 그 나름대로 보호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가정 뿐 아니라,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가정도 이 세상의 법이나 도덕으로 보호해 주시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창조질서에 속하는 공동체로는 국가도 있습니다. 반면에 교회는 구원질서에 속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은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크리스천 가정은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크리스천의 가정은 그 자신 구원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창조의 질서 속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즉, 교회와 사회를 연결해줄 수 있는 내적인 원동력을 크리스천 가정들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는 믿지 않는 사람들의 가정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하나님의 신비가 드리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가정 특히 부부관계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 즉 예수 그리스도는 신랑으로 교회는 신부로 비유하여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의 가정을 이렇게 귀한 모습으로 간직하며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우리 가정만을 위한 삶의 자세에서 벗어나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게 하는데 일원이 되는 가정을 꾸려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를 지니게 되는 우리들의 가정생활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도 연약한 인간들입니다.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부부 관계 속에 그리스도께서 중심이 되시도록 내어드리는 자세와 모습을 지녀야 합니다. 이러한 성숙한 자세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가정의 삶에 맞이하며 살아갈 때에 우리는 우리의 가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을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이루어나갈 수 있는 하나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예수님은 원하신 것입니다. 단순히 이혼하느냐 않느냐의 범주 안에 속한 가정이 아니라, 이러한 모습을 넘어선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늘 나아갈 수 있는 영적인 풍성함을 간직한 가정이요, 부부관계가 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한 가운데 있지만 이러한 그리스도의 뜻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도록 역사하시고 도와주시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이러한 가정의 모습을 이루어나갈 수 있도록 애쓰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사랑하셔서 그 사랑의 구체적인 모습이 부부간에, 그리고 가정가운데에서 나타나게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의 가정이 이러한 사랑과 우애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과 창조의 능력을 온전케 할 수 있는 도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가운데 아직 가정을 이루지 못한 젊은이들도 있습니다. 부부의 자리로 나아가기에 합당한 성숙함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이루는 가운데 간직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혹, 가정적으로 어려움이 있는 가정이나 부부가 있습니까? 말씀을 통하여 치유 받고 치유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능력에 동참할 수 있도록 친히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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