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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 (사 55: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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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양인 목사

우리가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하려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이 어떠한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할 때,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을 올바로 알지 못한데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을 안다면 기꺼이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생각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말씀을 가지고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이 사람의 생각보다 높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하늘 같이 높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사람의 생각은 땅과 같이 낮습니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하늘처럼 높은 하나님의 생각을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십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과학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이 세계의 이치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세계의 우수한 과학자들이 밤낮으로 연구해서 발표하는 논문이 한 해에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물리, 화학, 생물, 지구 과학 등등 분야별로 연구 서적이 산더미처럼 많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어느 분야이든 완성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마치 매장량이 무한한 광산처럼 파도파도 끝이 없습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무한하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하나님의 생각을 유한한 사람이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유한함을 앎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훌륭한 과학자들 가운데는 겸손한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그들이 과학을 탐구하면 할수록 인간의 한계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생각이 사람의 생각보다 높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리고 겸손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항상 나의 생각보다 높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입니다.

노아를 보세요. 그는 무려 120년 동안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대홍수 이전이므로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농사짓기에 충분한 이슬이 대지를 적셨습니다. 그 때는 시베리아나 한반도에도 공룡이 살고 있었다고 보면 됩니다. 지구 전체가 따뜻한 온실과 같았습니다. 그러한 때에 대홍수를 대비해서 거대한 방주를 짓다니, 그 당시 사람들은 노아의 행동을 어리석다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사람들의 비난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노아가 붙잡은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보다 높다는 것이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을 사람의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그것은 분수에 지나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았기에, 노아는 하나님의 지시에 온전히 순종해서 1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방주를 지었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아브라함의 경우를 봅시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기를 “1)…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그의 나이는 이미 고희를 넘긴 75세였습니다. 그 나이에 새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 모든 생활 기반을 버리고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은 누가보아도 지혜롭지 못한 처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즉각 소유를 정리해서 그 아내 사라와 조카 롯을 데리고 길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보면,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은 철저한 순종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생각이 사람의 생각보다 높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우리의 머리로 그 말씀을 이해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떤 말씀은 이해할 수 있으나 어떤 말씀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해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순종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이 사람의 생각보다 높다는 진리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병원에 가서 의사가 처방을 내릴 때 그 이유를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따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의사의 수준이 나보다 높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병을 치료하는 데 있어서는 의사의 생각이 나보다 높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의 생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생각을 판단하려고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0)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11)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비와 눈에 비유하고, 우리의 마음을 토지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단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할 때 우리의 삶은 생명이 넘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제껏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망했다는 사람에 관해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아는 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복을 받아 형통하였습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한없이 높으신 하나님의 생각을 성도님들의 생각으로 받아들여 순종하심으로 복되고 형통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은 선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께서는 선하신 분이십니다. 선하신 정도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이십니다. 선하신 하나님이시므로 그 생각이 선하십니다. 왜  인간 사회가 이처럼 악한지 아십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은 사람들의 악함을 잘 보여줍니다. 혹 사람들끼리 비교해 보면 선량한 사람도 있고 사악한 사람도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 보면 사람은 다 악합니다.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온전히 선하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 역시 선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1)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12)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13)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1-13)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곤경에 빠져서 힘들어 하는 분들이 있으십니까? 성도님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성도님들의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심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레미야 당시에 남왕국 유다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멸망당했습니다. 예루살렘성은 함락되고 성전은 불탔으며 왕과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 당시의 비참함이란 이루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때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이같이 아뢰었습니다. “19)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21)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22)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애 3:)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음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는 오히려 소망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소망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이 그 근거입니다.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선지자는 선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은 선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내가 죽는 일이 생길지라도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시인하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을 가진 자라야 끝까지 신앙을 지킬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백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지체하지 아니하고 실행했습니다. 여러 아들 가운데 하나도 아니고, 첩이 낳은 이스마엘도 아니고, 백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시니,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그 이유를 묻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이튿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모든 것을 준비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처럼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11장 17절 이하에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17)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18)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19)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바벨론의 제왕, 느부갓네살이 두라 평지에 높이가 30미터나 되는 거대한 금신상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금신상의 낙성식에 만조백관을 그 앞에 소집했습니다. 반포하는 자가 크게 외쳐 이르기를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아 왕이 너희 무리에게 명하시나니 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금신상에게 절하라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고 했습니다.

드디어 나팔을 비롯해서 각종 악기 소리가 울리자, 모든 사람이 금 신상 앞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그러나 유다에서 포로로 잡혀온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서 우상에게 절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세 사람은 왕 앞에 붙잡혀 갔습니다. 왕은 노하여 얼굴빛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음성을 부드럽게 해서 말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 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상대는 대제국 바벨론의 제왕입니다. 그는 백성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습니다. 그 누구라고 그의 명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 사람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이같이 대답했습니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

그들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이같이 담대할 수 있을까요? 이는 세 사람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자기들의 생사를 다 맡겼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극렬히 타는 풀부 가운데서도 그들을 구해 내실 것을 믿었으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자기들의 믿음이 불변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진실한 믿음입니다.

혹 보면, 기도 응답이 척척되면 기뻐하며 주님을 열심히 섬깁니다. 그러나 응답이 없고 설상가상으로 어려움이 중첩되면 그만 믿음이 약해져서 낙심하고 주저 않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러면 안 됩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 없이 믿어야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징계하실 때라도 그 생각이 선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징벌하시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징계하십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5)…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9)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11)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12)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 12:)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신앙에서 파선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이 그 좋은 사례입니다. 그들은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수없이 하나님을 거역했습니다. 그들은 무슨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양식이 떨어지자,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기를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 16:3)고 했습니다.

마실 물을 구할 수 없자 그들은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기를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출 17:3)고 했습니다. 모세를 향하여 원망한 것은 곧 그를 세우신 하나님께 대하여 원망한 것과 같습니다.

열 두 정탐꾼이 가나안 정탐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였습니다. 모세와 백성 앞에서 가나안에 관해서 보고하는데, 여수아와 갈렙은 그 땅을 좋게 보고했으나 나머지 열 명은 그 땅을 악평했습니다. 갈렙은 백성 앞에서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했으나 열 정탐꾼은 말하기를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고 했습니다. 또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기를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않으니 가나안 거민들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똑같은 일을 만나도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은 천양지차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사사건건 감사할 줄 모르고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고 불평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 하나, 그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지 못하니까 매사가 불안했던 것이지요. 결국,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원망하던 자들은 광야에서 다 죽었고, 출애굽 일 세대 사람 중에서는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은 신앙의 기본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이 지은 시편 23편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 시편은 매우 아름답지만, 단지 말을 아름답게 꾸민 것이 아닙니다. 구절구절이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간증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이처럼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지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마음이 합당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심으로 당신의 선하심을 극명하게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입니다(요 3:17).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희생하신 이유는 단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했습니다(요일 4:7-8). 사랑은 선의 극치입니다. 그런즉 선하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언제나 변함없는 사랑 가운데서 행복한 삶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생각을 아는데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을 베푸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의 아버지이십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먹이고 가르치고 보살피듯이,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도 성도들의 삶을 돌보아 주십니다. 아니, 육신의 부모보다 훨씬 더 자상하게 보살펴 주십니다.

이에 대하여 다윗은 말하기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시 40:5)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현재 뿐 아니라 미래에 관해서도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이 땅의 삶 뿐 아니라 영원한 천국의 삶에 관해서도 선하신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육신의 생활 뿐 아니라 영적 삶에 관해서도 유익한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많은 생각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안다 함은 곧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생각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 이같이 썼습니다. “1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19)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 하나님의 생각을 알려면 하나님께로부터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받아야 합니다. 또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눈을 밝혀주셔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내주하시며 우리 마음눈을 밝혀주신 결과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들어야 합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자라려면 설교를 자주 들어야 합니다.

또한 성령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눈을 밝혀주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로마서 8장 27절에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의지할 때,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로마서 8장 28절이 이를 말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합력성선(合力成善)!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요셉의 생애는 합력성선의 좋은 본보기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이스마엘 상인에게 은 이십에 팔렸습니다. 머나먼 애굽에 끌려가서 종으로 팔렸습니다. 성실히 일해서 주인의 인정을 받아 좀 편할까 했더니 그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설상가상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절망치 않고 성실히 일했습니다. 그랬더니 교도소장이 요셉에게 모든 사무를 맡겼습니다.

그 후 요셉은 바로의 꿈을 해석해 줌으로 일약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기근이 들었는데, 요셉의 형들이 양식을 사러 애굽에 내려온 것을 요셉이 알아보았습니다. 복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형들을 자기 집에 초대하고 자신을 알렸습니다.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찌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창 45:) 또 요셉은 말하기를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다’(창 50:20)고 말했습니다. 요셉의 생애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인간의 지혜로는 절대로 하나님에 대하여 알 수가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해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길은 오직 하나, 하나님께서 자기를 우리에게 계시해 주셔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계시의 종교라고 합니다. 신구약 성경 66권은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한 책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으십시오.

또한 교회에 나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십시오.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눈을 밝히시면 이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을 읽을 때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이유는, 성령님께서 성경의 원 저자(著者)시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을 더 깊이 알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우리는 다원화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껏 우리가  생활의 기준으로 삼아왔던 전통이나 규범의 권위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제 소견에 좋은 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 같은 세상 풍조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가치관이 혼란스러운 시대일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의 낮은 생각을 버리고 하늘 같이 높으신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의 생각으로 받아들여 행함으로써 영육간에 생명이 넘치고 형통한 삶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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