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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훈훈한 자비 (눅 10:3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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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해원 목사

한동안 장안에 화제가 되었던 '연탄길'이란 책을 아실 것입니다. '가슴 찡한 우리 이웃의 이야기'라는 부제에서 보는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던 책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아름다운 이별'이란 글이 있었습니다.

"아주 추운 겨울이었다. 아빠는 온종일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날 아빠는 할머니의 담당의사로부터 할머니가 겨울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고, 아무도 말한 적이 없었지만 할머니도 당신이 떠나갈 시간을 알고 있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할머니는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런데 가끔씩 의식을 잃은 적은 있었지만 할머니는 기어코 그 해 겨울을 이겨냈다. 그리고 6월의 어느 화창한 날, 할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긴 여행을 떠났다. 할머니는 병원에서 말한 것보다 4개월이나 더 사셨다. 할머니의 장례식을 마치고 겨울옷을 장롱에 넣고 있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우리가 이런 거 할머니가 정말 몰랐을까?' '모르셨을 거야, 몇 달을 마루에도 한번 못 나오시고 누워만 계셨던 분이 뭘 아셨겠어?' '하긴 그래...' 우리 가족은 6월의 초여름에도 할머니 방에 들어갈 때면 늘 겨울옷을 입었다. 어떤 날은 장갑을 끼고 목도리까지 하고서 방에 들어간 적도 있다. 심지어 나는 할머니 손을 잡기 전에 차가운 얼음을 만져서 아직도 겨울이어서 손이 차갑다는 것을 느끼게 해드렸다. 그렇게 해서 우리 가족은 그토록 소중한 4개월을 할머니와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시간은 모든 것을 데려가 버린다. 하지만 할머니에 대한 가족들의 사랑은, 할머니가 계신 하늘나라까지 언제까지나 강물이 되어 소리 없이 흐를 것이다..."

겨울이 오는 길목에서 우리를 감동케 하는 훈훈한 소식, 따뜻한 이야기가 그리워지는 때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렵고 삭막해도 우리의 마음이 따뜻할 수만 있다면 이것보다 더 큰 힘은 없을 것입니다. 살기가 힘든 시기에 무엇보다도 따뜻함, 훈훈함이 절실히 필요한 때라고 생각됩니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 '자비'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신앙과 삶을 훈훈하게 하는 것입니다. 열매와 결실을 요구하시는 하나님께 오늘 우리는 자비의 열매로 나아가야 합니다. 자비가 무엇일까요? 자비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우리에게 권면하고 있을까요? 오늘은 이것을 본문을 통해 살펴보면서 여러분과 저에게 주시는 은혜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우선,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예수님의 비유가운데 대표적인 비유중의 하나입니다. 비유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이 비유처럼 많이 언급된 것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이 비유는 역사적으로 가장 많이 인용되고, 가장 많이 설교되고, 가장 많이 다양하게 해석되어진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내용은 한마디로 강도 만난 이웃을 향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입니다. 그가 강도를 향해 사랑을 베풀 수 있었던 원인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33절에서 찾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를 보고 불쌍히 여기...'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강도 만난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부터 사랑과 도움이 출발한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것이 바로 '자비'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보이신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고, 치료해 주고, 고쳐주고, 함께 했습니다. 주님이 이런 아름다운 사랑을 베풀 수 있었던 동기는 바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주님은 먼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을 열게 하셨고, 능력과 놀라운 역사를 만드는 통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가운데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 천명을 먹이고 남은 사건입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가능했습니까? 이 기적은 바로 주님의 자비에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주님의 자비, 무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 바로 이것이 동기였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5장 32절에서 이렇게 전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도 자비로 모아집니다. 성경은 택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가 참 크고 놀랍다고 말합니다. 무궁하고 확실하다고 선포합니다. 풍성하고 불붙는 듯한 열정이라고 강조합니다. 끊어지지 않고 늘 새롭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애가 3장 21절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자비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 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윌리엄 바클리(William Barclay)라고 하는 신학자는 'The mind of Jesus'라는 책에서 "예수님이 생각하는 죄는 오직 긍휼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인을 했느냐, 간음을 했느냐, 도적질을 했느냐를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긍휼이 있느냐 없느냐를 묻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습니까? 지적과 책망과 판단은 너무도 잘 하는데, 사람과 영혼을 향한 긍휼의 마음, 자비의 마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남편을 긍휼히 여기십시오. 아내를 불쌍히 여기십시오. 자녀를, 부모를, 친구를, 이웃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여기에서부터 사랑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자비의 열매를 맺으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친절한 행동입니다. 자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머물지 않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함께 이제는 부드럽고 친절한 행동으로 이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사마리아인이 보여주었던 모습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친절한 행동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우선 34절에 '가까이 가서'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그가 강도에게 보인 행동하는 발이 있었음을 시사해 줍니다. 그리고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그가 보인 행동하는 손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자기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고' 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것을 희생하려는 의지의 행동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기 짐승에 그를 태웠고, 주막에 가서는 두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사람이 여관에서 기거할 수 있는 두 달치에 해당되는 숙박비입니다. 결코 적지 않은 돈입니다. 게다가 모자라면 더 주겠다고 말합니다. 보통 친절한 행동이 아닙니다. 이것이 자비라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친절한 문화를 가진 민족을 사람들은 '일본'이라고 말합니다. 일본을 여행하시고, 또 거기에서 지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그들의 친절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몸둘 바를 모르게 합니다. 저도 지난 번 일본여행을 할 때 경험했습니다만 역에서 호텔을 찾아가는데 잘 몰라 길을 물어보는데 표를 사는 것부터 가는 길까지, 아주 친절하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내가 가는 곳까지 같이 갈 마음까지 먹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식당이나 상점에 들어가도 아주 친절합니다. 말도 부드럽고, 인사할 때에도 거의 30도 이상으로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손님이 멀리 살아질 때까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그들의 친절을 우리가 잘 압니다.

하지만 그들의 속까지 친절하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겉만큼 속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일본어에 '혼네'와 '다테마에'라는 말이 있습니다. '혼네'는 속마음을 가리키고, '다테마에'는 겉으로 보이는 행동이나 말을 뜻합니다. 그들은 전통적으로 모나지 않게 처세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왔기 때문에, '혼네'를 감추고 '다테마에'로 사람을 대합니다.

이런 일본에 비해 우리 나라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겉은 투박해도 속은 잘 드러내는 민족입니다. 너무 속을 많이 드러내는 게 문제입니다. 우리는 서로 친하면 비밀도 없고, 무엇이든지 속에 잘 담아두질 못합니다. 말하지 않으면 근질 근실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속을 이처럼 잘 드러내는 것만큼 겉도 친절하면 좋은데 그렇지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이런 일본과 한국의 차이를 보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복합적인 모습이 요구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부름을 받고 자비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선 겉이 부드럽고 친절해야 합니다. 아울러 그것이 형식과 문화만으로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단순히 포장만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부드러움이 속에서부터 우러나와야 합니다. 자비의 행동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몸에 익숙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자비입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을 본받고 따라가는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이제 겉으로만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부드럽고 친절한 인격과 행동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옳은 것에 대한 헌신입니다. 우리가 자비를 생각할 때 단순히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나, 친절한 행동에서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고, 성경이 가르치는 진정한 자비는 우리가 옳다고 생각되는 것에 열정과 삶을 투자하고 헌신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보여주려는 의도이고, 이것이 또한 자비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 오늘 주님이 이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중요한 이유를 아셔야 합니다. 본문으로 읽지 않았지만 그 이유가 25절부터 잘 나와 있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주님께 찾아왔습니다. 그는 자기가 옳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에게 늘 보이려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29절에 보면 그가 주님을 만난 것도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나왔던 것입니다. 이런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주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주님이 지적하려는 것은, 강도 만난 사람에 대한 사마리아인에게만 초점을 두려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과 레위인에게도 초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제사장과 레위인은 가장 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성경과 율법을 처음부터 꿰뚫고 있는 박사들입니다. 이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 지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사람들이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들을 보실 때 그들의 행동은 대단히 잘못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었고, 무엇이 옳은지를 안다고 하지만 잘 몰랐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그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다면, 정말 무엇이 옳은지를 안다면 바르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36절 비유 끝에 주님은 이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것이 주님이 말씀하시는 궁극적인 자비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혹 제사장이나 레위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 종교적인 관습에서 머물러 있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몰라서라면 모르겠지만 이제 무엇이 옳은지를 알았다면 그 옳은 것에 대한 헌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가 속한 삶의 현장에서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비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갈 가장 귀한 자비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바로 오늘 독일의 신실한 신앙인 이었던 마틴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로마교황청을 향해 비텐베르그 성당의 정문에 잘못된 교리 95개항을 적은 문서를 붙이고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였습니다. 그리고 교황청에 서신을 보내 잘못된 면죄부를 즉각 철회하고 초대교회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슬로건을 외치면서 모든 개혁자들의 행동을 자극했고, 그때부터 여기저기에서 개혁의 바람이 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교황청의 권위는 하늘과 같았습니다. 교황의 말은 날아가는 새도 떨어트릴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많은 왕들이 교황 앞에서 꼼짝 못했습니다. 아무리 개혁을 하고 싶어도 죽음과 후한이 두려워 나서지 못했습니다. 이런 때 루터가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도 힘에 겨웠습니다. 많은 반대와 위협이 찾아왔습니다. 국회에서 그에게 사형언도를 내렸고, 이제 아무도 그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만 포기할 위험이 처했습니다. 그가 옳은 것을 위해 헌신했지만, 너무도 힘든 싸움에 낙심하려고 할 때, 어느 날 아내가 그의 앞에 소복을 입고 나타났습니다. 깜짝 놀라 누가 죽었느냐고 묻자, 아내는 루터에게 '하나님이 죽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루터는 '어떻게 하나님이 죽을 수 있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하나님이 죽지 않았으면 천하의 루터가 이렇게 기진 맥진하고 절망감에 빠져 있을 수 있느냐 당신 모습을 보니까 하나님이 죽은 줄 알고 이렇게 상복을 입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루터가 깊이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옳은 일은 포기할 일이 아닌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때 그가 지어 불렀던 노래가 '내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입니다. 이 찬송가가 결국 종교 개혁의 주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내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내 힘만 의지 할 때는 피할 수밖에 없도다 힘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었습니다. 이런 그의 열정이 종교 개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할 수가 있었습니다. 옳은 것에 헌신했던 루터와 그의 아내의 신실한 헌신을 통해 오늘 이 땅에 많은 교회가 세워졌고, 우리 교회도 세워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옳은 것이 무엇인지 압니다. 우리는 그 일을 행하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이 주간도 옳은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가치는 옳은 일을 행하는 현장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고, 그분을 영화롭게 합니다. 또한 이것이 진정한 자비의 열매를 맺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자비의 열매를 요구하십니다. 이제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시작하십시오. 겉과 속이 함께 부드럽고 친절한 행동으로 주님을 닮아 가십시오. 그리고 옳은 일에 대한 헌신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오늘도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의 의미를 마음에 새기면서 힘있게 출발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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