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아름다운 성숙을 위하여② - 유혹을 물리치십시오 (약 1:13-18)

  • 잡초 잡초
  • 388
  • 0

첨부 1


- 설교 : 이덕재 목사

지난 주의 주제는 “시련(trials)”이었고 오늘의 주제는 “유혹(temptation)"입니다. 시련과 유혹, 사실 성경 원어 헬라어에는 시련이나 유혹이나 ‘페이라스모스’라는 같은 단어가 쓰였습니다. 문맥에 의하여 시련으로도 해석되고 유혹으로도 해석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이 시련이 될 수 있고 시험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시련과 유혹에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 외적인 시련은 내적인 유혹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testing)하사 어려운 상황을 통과하게 하실 때, 우리가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하고 반항하곤 합니다. 사람은 시련을 인내로 이기지 못하면, 곧잘 유혹에 빠집니다.

예컨대, <출17장>에 보면 광야를 통과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路程)대로 행하였으나” 물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대번에, “아니 하나님의 뜻대로 행했는데 물이 없다니 말이나 됩니까?”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래서 지도자 모세에게 도전하고 싸웁니다. 사실은 하나님께 대한 반항과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 있으십니까? 하나님 잘 믿겠다고 정말 정성스럽게 잘 신뢰했는데, 그래서 “이젠 하나님 잘 믿으니까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시겠지” 기대하였는데, 왠 걸 더 어려운 상황을 만나는 경험들 해 보셨습니까?

그 때가 중요한 때입니다. 그 때가 유혹에 빠지지 않고 시련을 인내하며 극복해야 하는 정말 중요한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물이 없는 광야의 시련(trials)을 거치게 하심으로 그들을 시험(testing)하시는데, 백성은 그만 시험(temptation)에 들고 말았습니다.
“시련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신 지난 주의 말씀은 시련을 거칠 때에,  유혹에 빠지지 않고 인내로 견디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함을 받은 후에” 시련을 거칠 때에 유혹에 빠지지 않고, 유혹을 물리치며 인내로 견디어 그 믿음이 인정받은 후에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시련의 상황에서, 어떻게 유혹에 속지 않고 유혹을 물리칠 것인가? 오늘 본문은 이에 대한 해답을 가르쳐 줍니다.

교회 역사에서 환난과 시련을 통과한 교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유혹을 물리친 교회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한국의 교회는 어제 가난과 고생의 시련의 시기를 거쳐 오늘은 부와 향락의 유혹의 바람 앞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과연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유혹을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오늘 우리가 직면한 과제입니다.

영화사 최고의 명작인 “벤허”의 감독이었던 오스카 와일드, 그는 “나는 유혹 말고는 어떤 것도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유혹을 이기는 천하장사는 없습니다. 인간은 유혹에 취약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유혹에 넘어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유혹은 그리스도 앞에서 무력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유혹을 물리칠 것인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야고보 사도가 깨우쳐 주는 바에 집중해 보도록 합시다.

어떻게 유혹을 물리칠 것인가? 첫째, 하나님 탓하지 마십시오<13절>.

시련의 상황이 되면, 사람은 곧잘 보이는 반응이 하나님께 대한 원망, 불평입니다. 성경 욥기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왜 하나님은 욥에게 이런 고생을 하게 하시나?” 하나님을 향한 약간의 불만스러움을 떨치지 못합니다. 욥의 고난의 이유, 하나님 탓으로 돌리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유혹하지 않으시나 사람은 다른 사람 탓하기를, 하나님 탁하기를 좋아합니다.

사실 우리는 무책임한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대한 불만은 대통령 탓, 정부 탓, 환경 탓, 부모님 탓, 배우자 탓, 마귀 탓 나아가 하나님 탓이라고 확신있게 말하곤 합니다.

윌 로저스라는 역사학자는 “역사는 책임을 지는 사람들과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들의 대행진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 혹은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입니까?

그런데 사람이 왜 하나님 탓합니까? 왜 욥기를 보면, 하나님이 좀 너무 하신다 라는 불만의 앙금을 떨치지 못합니까?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나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에는 이런 시련을 내리실 필요가 없는데, 하나님은 괜히 그런다고 속으로 확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단순화시키면, 자기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보다 옳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것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탓하는, 또 다른 사람 탓하는 마음은 옛 사람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거듭나지 않았거나 거듭났지만, 아직 옛 사람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 미성숙한 사람이 보이는 반응입니다.

미성숙한 사람이 책임을 회피합니다. 미성숙한 사람이 하나님 탓하고 다른 사람 탓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문제에 책임을 지십시오.

그러므로 어려운 때에, 우리 마음에 제일 먼저 방어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 탓하는, 다른 사람 탓하는 불평과 원망을 그치는 것입니다. 하나님 탓하지 마십시오. 내 문제의 대부분은 내가 초래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당신이 그릇된 선택을 하고서 그것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지 마십시오.

당신이 하나님 탓하고 있는 동안에는 마귀의 유혹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속으로 은근히 하나님 탓하고 불평하는 마음은 “마귀야 어서와라”고 유혹을 초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하나님 탓하고 다른 사람 탓하는 불평과 원망을 그치는 순간부터 당신은 마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승리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둘째, 욕심을 버리십시오<14-16절>.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야고보는 사람이 어떻게 마귀에게 속아 유혹에 넘어가서 사망을 맞이하는지 자세히 밝혀줍니다. 욕심, 미혹, 죄, 사망 이것이 유혹의 속아 넘어가는 고리들입니다.

예) 2002년에 일본 최고의 갑부는 다케이 야스오(武井保雄·74)라는 사람입니다. .세계 최대의 소비자 금융업체(대금업체)인 ‘다케후지(武富士)’의 오너로서,

미국의 경제월간지 ‘포브스’가 보도한 세계 부호 순위에서 재산 55억달러(약 5조5000억원)로 세계 59위에 기록된 사람입니다.

그가 돈을 벌게 되기까지는 거의 입지전적입니다. 젊었을 때에 맨손으로 시작하여 빌딩 유리창 청소, 심부름센타 배달, 쌀 밑거래 등 막일을 통해 창업 자금을 마련하여 드디어 36세 때인 1966년 도쿄 변두리의 4평짜리 사무실에 직원 4명을 데리고 사채업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다케이 야스오는  ‘부엌과 화장실을 청소하지 않는 여자에겐 절대 돈을 빌려줘선 안 된다’는 등의 근무수칙을 만들어 사원교육을 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1970년대 들어 사채업이 사회문제가 되면서 서민을 울리는 악덕대금업자라는 혹평을 받으면서도 성장을 거듭해 창업 37년 만에 1900여개의 점포와 사원 3300여명의 ‘다케후지 왕국’을 구축했습니다.

그가 더 벌기 위하여, 마침내 기자들을 도청하는 방법을 동원했습니다. 마침내 그에게 도청 지시를 받았던 전직 사원이 법정에서 “다케이 회장으로부터 기자 전화를 도청하라는 지시를 직접 받았고, 도청한 녹취테이프도 함께 들었다”는 진술과 녹취테이프를 물증으로 제출하는 바람에 꼼짝없이 걸려들었고  결국, 2003년 12월 4일, 다케이 야스오는 구속되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습니다.

왜 우리 사회에도 학창시절에는 장래가 총망되는 사람이었는데, 오래도록 소식이 없다가 중년이 되어서 보니, 노숙자로 전락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 종종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이 어떻게 유혹에 넘어가서 패가망신하게 됩니까? 어떻게 저럴 수가 있을까 싶게 똑똑했던 사람이 인생을 망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까?

많은 경우는 도박, 주식투자 등 일확천금을 노리는 욕심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욕심의 단계에서 많은 사람들은 그 끝이 사망임을 못봅니다. 도리어 욕심의 단계에서는 사망이 장밋빛 환상으로 보이곤 합니다.

인간이 유혹을 받는 근원은 욕심에서부터입니다. 욕심을 품고 있는 것은 유혹을 부르는 짓입니다. 썩은 물에 파리가 몰려들 듯이, 욕심이 잉태된 마음에 유혹은 떼거지로 몰려옵니다. 유혹은 우리의 내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면 욕심이 무엇입니까?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욕심이 없다는 것이 아무런 열망도, 의욕도 없는 모습이 아닙니다. 열정 자체를 욕심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열정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것이 죄악된 욕심이냐, 거룩한 소망이냐를 구분합니다.

자아를 향한 열망, 자기 만족과 자기 연민을 향한 열망이 욕심입니다. 내가 더 많이 소유하고 내가 더 많이 누리고 내가 더 높은 지위를 받고 내가 더 좋은 인기를 누리고, 내가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싶고... 이러한 자아를 향한 열정이 욕심입니다.

욕심은 열망과 다릅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에 드는 소망이 욕심인지 열망인지 어떻게 분별합니까? <약3:17,18절>이 분별의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취 열망은 욕심입니다. 정직한 열망은 올바른 방법과 과정을 기뻐합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초청은 사랑과 행복에로의 초대이지요?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요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함이니라.”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니라”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의 행복과 영광을 위하여, 참된 사랑과 가치의 삶을 위하여 무엇을 가르쳐 주셨습니까?

자기 부인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자기 부인입니다. 그래서 역설이지요? 죽고자 하는 자가 살고 살려고 발버둥치는 자는 죽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오히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내가 사랑받고자 연연하는 마음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더 멀리하게 되고...

예수님은 우리의 행복과 영광을 위하여 자기 부인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반면, 사단은 자기 부인이 아니라 자기 만족의 길로써 우리의 마음을 유혹합니다.

자기 부인의 길의 끝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반면, 자기 만족의 길의 끝은 자기 파멸입니다. 사단은 속이는 자이고 유혹의 정체도 속이는 것입니다. 장밋빛 환상을 보이나 그러나 실체는 파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욕심을 버립니까? <14,15절>을 잘 보십시오. 무엇을 기억하고 욕심을 버리라고 합니까?  눈을 뜨십시오. 끝을 바라보십시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아까 말씀드렸던 다케이 야쓰오의 기사를 우리 나라의 모 일간 신문이 이렇게 제목을 붙였습니다. “욕망의 끝은 철창”. 여러분, “욕망의 끝은 철창” 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어리석은 사람일수록 코 앞에 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현명한 사람일수록 오늘 고생스러워도 당장 결과가 나타나지 않아도 끝을 바라봅니다. 어리석은 사람일수록 지금 이 순간만 모면하려고 허둥댑니다. 지혜로운 사람일수록 궁극적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생각합니다.

이런 대표적인 예가 우리나라의 사회문제가 된, 신용불량자, 카드 사용자들, 돌려막기 이런 것 아닙니까? (신용불량자 380만명 중 98%가 카드사용자이고 카드사용자의 90%이상이 돌려막기를 하다 빚을 더 키운 사람들입니다)

욕심을 버리십시오. 종국을 생각하고 욕심을 버리십시오. 궁극적 결과를 생각하고 유혹에 속지 마십시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속지 마십시오. 욕심이 당신에게 좋은 것을 가져다 주지 않습니다. 욕심은 사망을 낳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르쳐 주는 교훈은 아니지면, 욕심을 버리는 최선의 길, 저는 이렇게 제시하고 싶습니다. 거룩한 열망을 키우십시오. 알콜중독자가 알콜중독에서 벗어나는 최선의 길은 그가 또 다른 알콜 중독자의 치유를 돕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죽기 전에는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어린아이들에게 제일 힘든 것이 가만히 있는 것이듯이, 사람의 마음도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욕심은 “욕심을 버려~” 해도 안버려집니다. 그냥 눌러지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거룩한 열망, 자기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열망, 자기 희생의 숭고한 꿈을 꾸어 보십시오. 내 안에 욕심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잊고 살아갑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거룩한 꿈을, 세상에 정직의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거룩한 꿈을,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함께 하며 사랑하며 살고자 하는 지고한 열망을 품고 키워가 보십시오. 유혹을 잊고 살아갈 것입니다. 병든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가 춤바람에 빠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의 꿈, 거룩한 열망은 중독도 치유합니다.

어떻게 유혹을 물리칠 것인가? 셋째, 좋은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17,18절>.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사람이 유혹에 왜 넘어갑니까? 예컨대, 돈 많이 벌게 해 주겠다는 다단계, 피라밋의 유혹에 왜 넘어갑니까? 결과가 좋을 것이라고 예상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3억 벌게 해 줄테니, 지금 3백만원 내놔라 하면, 3억 벌 것만 보이는 사람은 넘어간 것이지요? 중간에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파괴되고 영혼이 어떻게 파리해져가는지 그것은 못봅니다.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사기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17,18절>에서 우리가 유혹에 속지 않도록, 야고보가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각양, 여러 가지, 온갖 좋은 은혜의 하사품과 선물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처럼 변덕부리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우리에게 선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빛들의 아버지라는 뜻은 하나님은 정의로우셔서 우리에게 선한 선물을 주시고 은혜의 선물을 주실 때에도 빛처럼 공명정대하게 내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술수와 요행으로 당신의 선물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단이 속일 때, 술수와 요행으로 현혹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온갖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빛들의 아버지께서 정직하게 내려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기치는 것, 도둑질하는 것, 들키지 않게 해서 돈을 벌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몰래 꿍꿍이를 벌려서 일을 성취시키고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빛들의 아버지이시고 우리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 여러분,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아주신 것,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18절>. 이 18절의 낳으셨느니라 가 육신의 생명인지, 거듭난 생명인지는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은 어떤 것도 가능합니다. 강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얼마나 좋으신 분이신가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선택해서 뜻을 가지시고 생명, 인생이라는 은혜를 주신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십시오. 생명뿐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온갖 좋은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롬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우리에게 온갖 좋은 것은 오직 하나님이 내려 주심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다른 것으로 좋은 것 주는 것처럼 현혹하는 유혹에 속지 마십시오.

마귀는 어떻게 유혹을 시작합니까? <창3장>에서 어떻게 배우셨습니까? 마귀는 하나님이 선하신 분, 좋으신 분이라는 사실에 의심과 회의를 들게 하는 것에서부터 유혹을 시작합니다.

온갖 좋은 것은 하나님이 주신다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키는 것은 마귀의 유혹을 초기에 진압하는, 원천봉쇄하는 지름길입니다.

우리에게 온갖 좋은 것은 오직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진리를 굳게 지키십시오. 그것으로써 다른 것으로 좋은 것 주는 것처럼 현혹하는 마귀의 유혹이 발도 못붙이게 하십시오.

욕심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않습니다. 유혹이, 술수가 좋은 것을 주지 않습니다. 거짓이 좋은 것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좋은 것을 다 내려 주시는데 뭐하러 딴 데 기웃거릴 필요가 있습니까?

어떻게 유혹에 속아 넘어가지 않고 물리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탓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책임입니다. 당신 자신에 대하여 착각하지 마십시오. 나는 의롭고 하나님이 좀 너무하다고 이런 오만한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나는 잘못 없는데, 하나님이 내게는 고약하다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유혹을 초래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욕심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욕심을 버리십시오. 집에 악취가 안나고 바퀴벌레가 들끓지 않게 하려면, 깨끗이 청소해야 하듯이, 당신의 마음의 욕심을 버리십시오.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온갖 좋은 것은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어두움의 술수와 몰래 궤계로 선물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정직한 방법으로 내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온갖 좋은 것은 하나님이 내려 주심을 믿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십시오. 선하신 하나님, 온전히 바라보고 기대하며, 인내로써 기다림이 유혹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정도입니다.

그 때에 성숙의 아름다움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누리는 행복과 기쁨을, 빛 가운데 사는 떳떳한 즐거움을 만끽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