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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람직한 교회 (출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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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정호 목사

3종류의 신자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인가를 말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우리 교회 교인들이 어떤 교인들인가에 대한 설명으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 안의 신자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알곡신자, 쭉정이 신자, 싸라기 신자 등 세 종류의 신자가 있다고 말합니다. 알곡신자는 겸손히 머리를 숙이고 풍성한 열매를 맺어가기 위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누가 알아주던지 알아주지 않던지 최선을 다하는 믿음의 사람을 말하고 또 하나는 쭉정이 신자인데, 쭉정이는 빈 껍질이라 열매도 없으면서 목에 힘주고 머리를 세웁니다. 논에 나가보면 뻣뻣하게 서 있는 것은 쭉정이와 피입니다. 그러나 알곡은 다 고개를 숙이고 있습니다. 쭉정이 신자는 열매 맺지 못함에 대한 안타까움도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대한 애정도 없고 바람에 따라 흔들리고 바람에 따라 날려 다니는 사람을 말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싸라기 신자입니다. 알곡신자와 쭉정이 신자는 그나마 구별이 잘 됩니다. 그러나 알곡도 아니고 쭉정이도 아닌 신자가 있는데 '싸라기 신자'라고 불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싸라기'는 '절미'라고 하는 "부스러진 쌀알"을 말합니다. 정미소에서 정미하고 알곡과 싸라기를 구분하는 작업을 하기 전에는 이 싸라기도 알곡 틈에 끼어 있습니다. 반쪽짜리 쌀이지만 알곡 틈에 끼어 있습니다. 그러나 분별해 보면 온전한 알곡이 아닙니다.

반쪽짜리 쌀알 같은 신자들은 예수를 믿어도 온전히 믿지 않고, 십자가는 지지 않으려 하고 복에만 관심이 있고 예수 이름으로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예수 이름 때문에 환난을 당하고 핍박당하는 일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온전한 알곡 같이 여겨지나 그 속에 금이 가서 반이 잘렸습니다.

마음의 반은 다른 곳에 가있거나 또는 세상에 가 있습니다. 그 금이 간 틈으로 새어 나오는 소리는 불평, 불만, 시기, 질투이고 분쟁을 일으키고 온전히 봉사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듭니다. 인간관계 때문에, 체면 때문에 혹은 얼떨결에 맡은 직분 때문에 갈라진 마음을 숨기고 교회 안에 있다 할지라도 사실 그런 신자는 싸라기 신자입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 가운데 유난히 불평이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끔은 타당한 이유로 투덜대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자기 판단이 옳다고 하면서 교만이 가득한 채로 불평하는 때가 더 많습니다. 교회 행정이나 목사의 목회 스타일이나 다른 사람이 신앙생활 하는 것에 대해서도 불평하고 비판하고 심지어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게 만드는, 낙담을 주는 사람들이 우리들 주변에 많습니다.

우리 교회의 참모습은?

어떤 사람이 산에 가서 새알을 3개 주어왔는데 때마침 제비가 처마에 집을 짓고 알을 품고 있었습니다. 제비가 자리를 비운사이 그 새알을 제비 둥지에 넣었습니다. 어느 날 보니까 새알이 먼저 부화되어 새끼 새가 나왔는데 어미 새가 품고 있던 알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날부터 제비는 알을 품지 않고 벌레를 잡아다가 새끼 새를 먹이는 것입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어느 날 제비가 알을 둥지에서 밖으로 밀어내어 떨어트렸습니다. 그리고 부지런히 먹이를 물어다가 새 새끼를 먹여줍니다. 아마 제비는 그 새 새끼가 제 새끼인줄 아는 모양입니다. 새 새끼가 점점 자라납니다.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하며 관찰하며 마냥 신나고 재미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가서 제비가 먹이를 물고 와 서로 달라고 입을 벌려 짹짹거리는 새에게 먹이를 주지 않고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하다가 먹여주고 가곤 합니다. 갈수록 그러한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새가 날갯짓을 할 무렵 어미제비는 돌아오지 아니했고 그 이듬해도 제비는 돌아오지 아니했습니다.

먹이를 물고 와서 반짝반짝하는 새까만 눈동자를 깜빡깜빡 휘둥글 휘둥글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갸우뚱 하는 그 제비의 모습에서 그 제비가 무엇 때문에 고개를 갸우뚱거렸나를 생각하며 그 제비의 고민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아, 이상하다 이것이 아닌데, 이건 분명 내 모습이 아니야, 무엇이 잘못 되었어. 다시 시작해야 돼. 더 늦기 전에 다시 시작해야 해. 아니야! 결단해야 해. 하며 고민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제비의 고민은 없는지요? 아무리 보아도 오늘날 교회가 원래의 교회의 모습이 아니고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모습과 너무나 다른 것이 사실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참 모습을 찾아 그 모습을 배우고 닮아 가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혁명과 개혁, 변화와 변질

오늘날 교회의 개혁을 부르짖고, 교회의 변화를 부르짖고 있지만 참된 교회개혁이 무엇이고, 올바른 교회의 변화가 무엇입니까? 교회의 개혁과 변화는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요시아의 개혁도, 루터의 개혁도,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혁명과 개혁은 다릅니다. 혁명은 다른 사람을 쳐서 고치는 것이고, 개혁은 자기를 쳐서 고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이니 교회개혁이니 하는 것은 자신을 쳐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켜 성경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변화와 변질은 다릅니다. 성경중심으로 변하는 것은 변화요 성화이지만 성경을 떠난 변화는 변질이요 타락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참된 개혁과 변화는 성령의 교회모습을 찾고 그 모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참된 모습이 무엇입니까?

출애굽교회의 모습

우리가 교회 하면 사도행전교회를 생각하게 되지만 교회의 참된 모델과 모습은 신구약성경에 광범위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출애굽교회의 참 모습을 나타내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출애굽교회는 억압에서 탈출하는 교회

애굽의 정치적 억압에서 해방되어 탈출하여 자유한 상태에서 약속의 땅으로 향하여 행진하는 것이 출애굽교회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을 너희가 알지니라(출6:7)”고 합니다. 여기서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이란 애굽의 정치적 억압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참 모습은 억압에서 해방된 모습입니다.

교회가 해방해야 함은 율법주의와 공리주의로부터의 자유인데 인간의 노력과 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나의 노력이나 율법을 지키므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외쳤습니다.

에베소서 2:8-9의 말씀과 같이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교회들이 율법으로 얽어매고 공리주의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율법과 공리주의에서 벗어나 믿음과 은혜의 진리 안에서 자유하는 것이 교회의 참 모습입니다.

이방문화에서의 탈출하는 교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을 애굽에서 탈출시킨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문화에서 탈출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애굽의 우상문화와 미신문화에서 탈출시키기 위한 것이며, 애굽의 인본주의 문화와 이방사상과 가치관에서 탈출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참된 교회의 모습은 이방문화 속에 살면서도 그 문화에 침식당하지 않고 그 문화에 물들지 않고 구별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그곳을 떠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갈대아 우르의 인본주의 이방문화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신본주의 문화를 형성하여 살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교회와 사화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행복의 가치판단이나, 성공의 기준이 교회에서 말하는 것이나 사회에서 말하는 것이 꼭 같다는 말입니다. 가치판단 삶의 질과 기준이 무엇이 다릅니까? 돈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하는 황금만능 주의적 세속적 문화가 교회에 침투하여 교회의 참 모습을 퇴색시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이들은 교회생활은 열심이면서도 자기가 교회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헌금 못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황금만능주의 사상입니다. 교회에서 헌금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면으로 봉사하는 것도 가치 있고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교회는 탈출해야 합니다. 무조건 권력을 추앙하고 추구하는 잘못된 사상이 교회의 감투싸움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경계해야 할 세 가지 중요한 것이 있는데 첫째는 성경을 지식화 하는 바리세인이 되지 말아야 하고 두 번째는 신앙이 미신화에 빠지지 아니해야 하고 셋째는 믿음이 율법주의나 공리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출애굽교회 참모습은 애굽의 이방문화를 탈출하는 탈출문화입니다. 인본주의 문화를 탈출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나 인생관, 가치관, 생활관을 초월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생각과 인생관과 가치관과 생활관을 가져야 합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잡히는 것만 기뻐하고 그것만 추구하는 세속문화에서 탈출하여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만져지지 않고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영적 세계를 추구하며 그 안에서 기쁨과 보람을 찾는 것이며 이것이 세속문화를 탈출하는 출애굽교회의 참 모습입니다.

출애굽교회의 참된 모습은 정치적 억압에서 탈출하고 당시 애굽의 우상과 미신문화에서 탈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도 탈출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율법과 공리주의에서 해방되어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안에 거하고 세속적인 문화 즉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잡히는 것만을 추구하는 자들의 가치관과 인생관과 생활관에서 탈출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인생관과 가치관과 생활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잘못된 의식과 제도에서 풀려나야 한다

우리는 지나친 형식과 의식과 제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만찬을 거행할 때 화체설을 주장합니다. 떡과 포도주를 놓고 기도하면 그것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찬식을 하고 남은 것을 버리지 못하고 창고에 쌓아두었습니다. 쥐가 창고에 들어가 떡을 먹었을 때 떡을 먹은 쥐가 구원 얻었느냐 못 얻었느냐 하는 논쟁을 했고, 세례 줄 물에 파리가 빠져 죽었는데 파리가 성화 되었느냐 아니냐를 놓고 장시간을 싸웠습니다. 중세기 카톨릭 교회는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제도와 의식에 꽁꽁 매여 그것에 시간을 허비하고 세월을 보내다가 교회는 부패하여 몰락하게 된 것입니다. 교회학자들에 의하면 지금 북미와 남미의 문화적 차이를 말하면서 남미는 성경을 가지고가 의식화하였고, 북미는 성경을 가지고 그 말씀으로 삶의 지표를 삼아 생활화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그 의식과 제도에 얽어매기 위한 것이 아니고 생활화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사건은 이방인들의 잘못된 의식과 제도에서 벗어나 삶의 중심으로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의식 중심의 신앙의 제도에서 벗어나 삶의 중심의 신앙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교회의 참 모습은 생활하는 믿음입니다. 거룩하고 장엄한 예배는 있는데 생활하는 신앙의 모습이 없다면 이는 교회의 참된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참 모습은 율법주의적 억압에서 벗어나 오직 믿음과 은혜 안에 살기 위하여 이방문화에서 탈출하여 진리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새로운 50년을 향해 힘찬 출발을 시작한 우리 영암교회가 이러한 출애굽 교회의 참 모습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부르심에 응답한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 영암교회는 위에 열거한 교회 형태 중 세 번째 형태를 근거로 해서 교회를 활성화해야 할 것입니다.

명상록으로 유명한 파스칼은 수학과 물리학의 천재로 일컬어지는 17세기 프랑스 사람이었는데 그는 이 세상 학문보다는 영원한 진리를 추구하는데 더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가 명상록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자연 중에서 가장 연약한 갈대인데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다.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천사의 흉내를 내려는 자가 실제로는 짐승의 흉내를 내고 있는 일이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분에게 봉사하는 사람들이고 둘째로는 하나님을 발견하려고 애쓰지만 찾아내지 못한 사람들이고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을 찾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파스칼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도 수학적인 방법을 택했는데 “하나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 에는 네 가지 명제가 추론된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안 계신데 안 계시다고 한다면 당연한 일이고 둘째로는 하나님이 안 계신데도 계시다고 믿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셋째로, 하나님이 계신데 계시다고 믿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계신데 안 계시다고 믿으면 그것은 정말 큰일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좋은 교회와 나쁜 교회를 구별하는 논리를 이끌어 낼 수 있겠기에 여기 정리해 보았습니다. "사람들에게도 나쁘고 하나님께도 나쁜 교회는 정말 나쁜 교회이다. 사람에게는 좋지만 하나님에게는 나쁜 교회라면 그것도 나쁜 교회이다.  사람에게는 나쁜 교회이지만 하나님에게 좋은 교회라면 그것은 좋은 교회이다. 하나님에게도 좋고 사람에게도 좋은 교회라면 진짜 좋은 교회이다."

나쁜 교회가 되면 천국 문은 닫아 놓고 지옥문만 열어 놓게 되지만 하나님도 좋아하시고 사람들도 좋아하는 교회가 되면 지옥문은 닫아 놓고 천국 문만 열어 놓는 교회가 됩니다. 정말 좋은 교회, 바람직한 교회 만들기에 피와 땀과 눈물을 아끼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찬예식에 참여하게 됩니다. 성찬예식은 예수님이 직접 세우신 대단히 중요한 예식입니다. 제정하신 날은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이고 재료는 떡과 잔입니다. 떡은  예수님의 살을 상징하고 잔은 그 속에  보통 포도즙이 있는데 그것은 주님의 피를 상징합니다. 주님의 살과 피는 참된 양식이요 영원히 살게 합니다. 하나님 계신 곳에 영생이 있음 같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속에 영생이 있음으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자도 영생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먹고 죽는 음식은 먹으려고 노력하지만 영생을 얻을 양식은 먹으러 오지 않는다고 주님은 탄식하십니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접붙임 받은 자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생명과 은혜와 사랑과 능력과 복과 성령을  충만하게 받는 길이며 계속적으로 죄를 용서받는 것도 하나님과 교제하는 방편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좋은 길입니다. 성만찬에 참여하는 자는 뜨거운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구속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게 하신 구속의 사랑을 뜨거운 감격과 감사로 받아야 할 하나님의 은사가 바로 성만찬입니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예식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6:56) 성만찬은 바로 이 희생의 주님의 몸에 내가 연합하는 신비의 체험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성만찬을 행할 때에 항상 그의 죽으심과 희생만을 강조하고 기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살았다가 죽어서 기억을 남겨준 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과거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분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장사 지낸 바 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분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즉 떡을 떼어 나누는 가운데 신자들과 함께하시는 그리스도는 갈보리의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이나 무덤에 누우신 예수님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잔치를 준비하며 당신의 식탁에 우리를 초대해 주시고 당신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을 위해 기꺼이 당신의 식탁을 열어주시는 부활하신 승리의 구세주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만찬은 주님의 죽음과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의 부활과 앞으로 있게 될 하나님나라의 메시야적 향연의 약속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즐거운 축제”인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로서의 성만찬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 지체를 이룬 무리들이 이제는 동일한 신앙 속에서 삶의 내용과 방향을 같이 하게 됩니다. 주님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의 결정체를 이룩하는 특수한 공동체가 형성되어집니다. 성만찬 때의 교제는 모든 교회가 하나가 되는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라도 거기에 참여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와 그리고 그들의 동참자들과 하나 됨을 말해주며, 그런 효험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계 어디서나 성만찬을 거행하는 무리들은 동일한 그리스도의 지체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식사로서의 성만찬

마지막으로 성만찬은 약속된 하나님의 통치를 소망하도록 해주며, 또한 그것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심을 축하하고 확신하는 축제 입니다(고전11:26,마26:29) 그러므로 성만찬은 이미 이 땅에 오신 하나님 나라와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열어주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천국의 잔치를 미리 경험케 하는 식사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만찬은 이 땅의 마지막 날에 기쁨과 영광중에 우리 주님과 함께 나눌 하나님나라의 식사의 표징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례전에서 내가 죄 사함을 받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이 놀라운 사실을 확인하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또한 이제는 주님을 위해 살기로 새롭게 다짐을 하게 되며, 감사와 감격의 삶 속에서 우리의 잠자는 신앙이 이 예식에 참여함으로써 다시 깨어나게 됩니다. 이 성례전에 믿음으로 참여함으로써 영적인 풍성한 은혜를 입게 되고 감격과 감사가 넘치는 축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식에 참여하는 여러분은 확신 있는 믿음으로 거룩하게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께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심과 같이 우리는 우리 이웃과 눈에 보이는 형제들을 사랑하며 기꺼이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의 성만찬은 새로운 의미의 성만찬이 되어야 하고, 주님이 명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성만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에 받은 말씀대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오늘 나에게 다시 살아 역사하시며 나를 변화시키는 성만찬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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