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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늘의 다른 복음들 (갈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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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양인 목사

오늘 본문의  6절에서 9절까지는 매 절에 “다른 복음”이라는 말이 빠지지 않고 나옵니다.
6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이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7절에서는 다른 복음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8절과 9절에서는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내용이 매우 강력합니다.
단도직입적이고 급박한 느낌을 줍니다.

다른 복음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다른 복음은 어떤 형태로 우리에게 스며듭니까?
다른 복음을 전하거나 따르면 어떻게 됩니까?

오늘은 이 세 가지 질문의 답을 같이 찾는 가운데 은혜와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첫째, “다른 복음”은 무엇입니까?

이 질문은 원칙적으로는 성립되지 않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복음이란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은 마치 한 남편을 모시고 결혼생활을 잘 하고 있는 정숙한 아내에게 ‘당신의 다른 남편은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6절에 나오는 “다른 복음”이라는 말에서 “다른”이라는 말의 원어는 ‘헤테른’인데 ‘두 가지 다른 것 가운데 하나’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은 오직 하나이다.’라는 뜻이 여기 내포되어 있습니다.
작년 수능고사에서 정답이 둘인 문제들이 있어서 혼란이 있었는데 복음에는 복수정답이 없습니다.

“다른 복음”이란 말을 구태여 풀이하자면 ‘복음 같아 보이지만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줄여서 ‘사이비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은 정한 때가 되면 호흡을 멈추고 흙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질서 가운데 하나입니다. 
요즘 교회에 초상이 많이 생기는데 이 창조질서에 숙연하게 따르는 사람이 성숙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람에게는 육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신이 죽더라도 영혼은 죽지 않고 영원히, 좋은 곳에서 살기를 누구나 원합니다.
그런 보장이 있으면 우리가 이 땅 위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삶도 그 의미, 내용, 성격, 방향, 질이 달라집니다.
성경은 그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그 방법을 알려줍니다.
기쁜 일이지요.
그래서 이것을 우리는 기쁜 소식, 또는 복된 소리, 줄여서 복음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 16)

이것이 복음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16: 31)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 17b)

이것이 복음입니다.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롬5: 15b)

이것이 복음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
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 16)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우리는 영생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구원 받을 수 있다, 산다, 우리는 의롭다고 인정 받을 수 있다,(이것은 사형수에게 무죄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쁜 사실들을 우리에게 말하면서 그 방법과 성격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내 행위, 내 공로가 아니고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은혜이다, 이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 은혜로 구원 받는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오늘은 종교개혁 487주년 기념 주일인데 종교개혁자들은 이 원리를 아주 간단하게 표현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총으로!’ 그리고 ‘오직 말씀으로!’입니다.

구원의 진리를 에스컬레이터와 계단에 비교해 봅니다.
지하철역에 처음에는 계단만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에스컬레이터들이 설치되기 시작했습니다. 
에스컬레이터는 참 편합니다.
거기 올라서기만 하면 계단 위까지 우리를 편안하게 잘 실어다 줍니다.
우리는 지금 구원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만있으면 됩니다. 공짜입니다. 그래서 은혜라고 부릅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면 옆을 꽉 잡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것을 꽉 잡는 것이 믿음입니다.

에스컬레이터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그 괴상하게 생긴 기계가 도대체 무어야? 그것을 어떻게 믿어? 그거 타면 큰일 나! 이 계단으로 올라가야 해! 어여 빨리 이리와!’ 손짓을 합니다.
에스컬레이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데 옆에서 그러니까 거기에서 내려와서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이 그랬습니다.
바울 사도가 일차 전도 여행 때 갈라디아 지방에 와서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 힘써 전했습니다. 그 결과 교회들이 생겼습니다.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를 떠나 다른데 가서 전도하는 사이에 유대교인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유혹했습니다.
‘율법이라는 이 계단, 유대교라는 이 계단이 구원이야!‘ 했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빠져 나갔습니다.
지하철의 계단은 힘들기는 하더라도 천천히 올라가면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이라는 계단은 너무 높고 힘들어서 올라갈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 율법은 600여 조항이 넘는다고 합니다.
여러분, 600계단, 올라가라면 올라가겠어요?
바울은 그 계단을 누구보다도 힘써 올라가던 사람이었습니다.
14절을 보세요.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히 있었으나

그러다가 ‘이건 아니다!’  깨달았습니다.

저는 지금 구원의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에스컬레이터와 계단을 비교했습니다만 종교개혁자 루터도 계단의 체험을 통해 구원의 진리를 깨달은 일이 있습니다.
루터는 신부로서 독일의 비텐베르그(Wittenberg)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스물여덟 살 때 로마를 방문했습니다.
로마는 그 당시 교회의 본부라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많은 기대를 하고 찾아왔는데 실망스러운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 때 교회에서는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 받을 때 올라가셨다는 스칼라 상타(Scala Santa)계단을 로마로 옮겨다 놓고 무릎으로 그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면서 계단마다 입을 맞추는 것을 권했습니다.
스물여덟 계단인데 루터도 그렇게 하다가 중간쯤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강하게 떠올라서 일어나서 내려왔다고 전해집니다. 

‘이 계단으로 가야 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해!’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구원, 구원은 은혜, 이것이 복음입니다.

여러분,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다른 복음은 어떻게 우리에게 스며듭니까?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스며듭니다.
교회의 약한 부분을 이용해서 스며듭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사도 바울이 일차 전도여행 때 갈라디아 지방,  소아시아의 중부 고원지대에 여러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이 교회들의 성도들은 처음에는 믿음이 순조롭게 자랐습니다.
성령도 체험했습니다.(갈3: 5) 세례도 받았습니다.(갈3: 27) 
바울을 잘 섬겼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4절을 보면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  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  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불치의 질병이 있었습니다.
안질이거나, 안면경련이거나, 간질, 셋 가운데 하나이거나 둘 또는 셋이 겹친 것으로 짐작됩니다.
어느 질병이든지 그것은 성도들에게 시험이 되기 쉬운 것입니다.
바울이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한 것을 보면 그것은 간질이기 쉬웠을 것이라고 짐작하기도 합니다.
‘자기 병도 못 고치면서 뭐 전도한다고 그래?’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을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반대하는 유대교인들이  교회로 스며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전한 복음은 참된 복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전에 하던 대로 율법을 지켜야 된다고 했습니다.
많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여기에 빠져 교회를 떠났습니다.
이것을 수습하기 위해서 쓴 편지가 갈라디아서입니다.

바울은 대단히 서운한 마음으로, 격한 심정으로 갈라디아서를 썼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1절을 보면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의 편지는 많은 경우, 받아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로마서 끝 장인 16장 22절을 보면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라는 말이 살짝 들어가 있습니다.
더디오라는 사람이 바울이 불러주는 것을 받아쓰면서 슬쩍 자기 이름을 넣은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직접 썼습니다.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했는데 눈이 나빠서 그렇게 했을 것이고, 또 흥분된 마음 때문에 그랬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갈라디아는 다시 남 갈라디아, 북 갈라디아로 나누어집니다만 대개 오늘날 터키의 수도 앙카라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라고 보면 됩니다.
저는 지난달에 터키의 성지들을 순례하면서 그 부근을 지날 때 갈라디아서 3장 1절의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하는 바울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또 이런 음성도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어리석도다, 이 믿음의 후배들아!’
터키는 오랫동안 기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예루살렘, 로마와 더불어 기독교 3대 도시라고 하는 콘스탄티노플, 오늘의 이스탄불이 거기 있고, 초대교회 신학과 수도원 운동의 중심지였던 카파도기아가 거기 있고,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이 모두 거기 있고, 바울의 선교본부였던 안디옥이 거기 있었습니다.
그런데 1453년에 이슬람 국가인 오스만 터키가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터키는 지금 철저한 회교국가가 되어 있습니다.
회교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중동 지역의 나라들 보다 더 철저한 회교국가가 된 것 같습니다.
이스탄불에는 성 소피아 성당이라고 아주 아름다운 성당이 있는데 회교세력이 이곳을 점령하면서 이슬람 사원으로 바꿨습니다. 성당 벽에 가득 그려져 있던 성화는 모두 석회로 지워버린 것을 요즘 와서 복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그런 모습을 보고 믿음의 유산과 유적들을 지키지 못하는 후배들을 꾸짖는 것 같아서 송구스러웠습니다..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아주 교묘하게 갈라디아의 성도들을 유혹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오랫동안 지켜오던 관습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것을 버리고  새것을 따르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새것을 따르면 웬일인지 불안하고 서먹합니다.
제가 두 주일 전에 컴퓨터와 프로그램을 새 것으로 바꿨는데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아서 고생하고 있습니다.
자꾸 예전에 쓰던 프로그램을 다시 쓰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이 단계를 넘으면 편하다고 하기에 꾹 참고 있습니다.
신앙생활 처음 하는 분들, 초기의 서먹한 단계를 잘 이기시기 바랍니다.

유혹하는 사람들은 그런 심성을 파고 들어왔습니다.
‘모세 때부터 지켜 온 옛 것이 편하고 좋은 것이여!’
‘조상들의 믿음의 유전인 유대교를 어떻게 버릴 수 있어?’
‘옛 것이 안전한 것이여!’
‘검증된 것이여!’

여러분, 예전의 습관으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믿지 않던 때로 돌아가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이 저지른 잘못을 범하는 것이 됩니다.
성도로서 새로운 생활이 낯설고 익숙하지 않아도 그 길을 가셔야 합니다.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바울의 약점을 교묘하게 파고듭니다.
바울에게는 큰 약점이 두 가지 있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 생전에 예수님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예수님 생전에 예수님에게서 직접 가르침을 받은 사람만 사도로 인정하고 권위를 부여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심하게 박해했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전과자였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도 전과 기록이 있는 분들은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습니다.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약점을 최대한으로 이용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사도가 아니다. 따라서 사도가 아닌 바울이 전하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삼단논법식 논리를 전개했습니다.
많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여기에 넘어갔습니다.

오늘 날 교회에도 여러 가지 많은 약점들이 있습니다.
‘교파가 왜 그렇게 많으냐?’
‘교인들 가운데 실수해서 법의 제재를 받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국회의원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많다고 하는데 국회가 왜 저런 모습을 보이나?’
또 복잡한 사회 현실 속에서 교회라는 조직을 유지해 나가다보면 겪어야 되는 일들도 있습니다.
그 약점이 공격대상이 되는 일이 많습니다.
교회는 하늘에서 완성품으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많은 약점들을 가지고 그것을 극복하려고 애쓰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 교회 이천 년의 역사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기준으로 하면 사도의 조건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면서 1절을 보세요, ‘나는 예수님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사도로 임명 받았다!’ 당당하게 말합니다.
요즘 대학입시에 일반전형이 있고 특별전형이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나는 특별전형으로 직접 하나님의 임명을 받은 사람이다!’  ‘보이지는 않지만 나의 사도 임명장에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직접 찍은 도장이 찍혀 있다!’ 합니다.
2장 8절과 11절을 보세요. ‘너희들은 베드로를 사도 가운데 사도로 여기지? 그 베드로를 사도로 삼으신 하나님이 이방인 전도에 필요해서 나도 사도로 삼으셨어! 나는 그 베드로의 잘못을 지적한 사람이야!’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전과가 있다는 사실도 숨기지 않습니다.
13절 보세요.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심하게 박해했다’ 인정합니다.
그러면서 15절을 보세요.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런 나를 하나님께서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선택하셨다, 나를 부르셨다,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이와 같이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욱 은혜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약점이 있으면 그 약점은 인정하세요.
그런 약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택하시고, 구원해 주시고, 일꾼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세요.

버섯은 보기 좋을수록 독이 강하다고 합니다.
뱀도 그렇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런 모습으로 접근해 오는 잘못된 가르침들을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자기의 약점, 교회의 약점이 있으면 그것을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부르고 일꾼으로 삼으신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다른 복음을 전하면 어떻게 됩니까?

오늘 본문에는 신구약 성경의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힘든 특징 있는 말이 나옵니다.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말인데 이 말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8절,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절,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사도에게는 축복권이 있습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교회에서 축도는 안수 받은 목사만이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사도에게는 저주권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구브로 섬에서 전도할 때 엘루마라는 마술사가 전도를 방해했습니다.
이 때 바울이 그를 저주하니까 엘루마가 시각장애인이 된 일이 사도행전 1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축복을 많이 베풀수록 좋은 것입니다.
바울은 편지를 쓸 때마다  축복의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많은 갈라디아 교회의 교인들을 훈계하기 위해서 편지를 쓰면서도 2절과 3절 보세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저주는 될 수 있는 대로 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에서 강한 저주를 퍼붓고 있습니다.

최근 우리는 ‘밤비노의 저주’라는 말을 자주 들었습니다. 보스턴 레드삭스 프로 야구 팀이 이 밤비노의 저주에 걸려 오랫동안 우승을 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어려운 일들을 많이 겪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밤비노의 저주는 86년 만에 풀려  지난 주 목요일, 2004년 메이저 리그 월드 시리즈에서 보스턴 레드삭스 야구팀이 4전 전승으로 우승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저주는 밤비노의 저주보다 더 심한 저주입니다.
영원히 풀리지 않는 저주입니다.
영적인 세계에 까지 따라가는 저주입니다.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도 그럴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 설교의 강점은 항상 자기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기는 예외로 하고 다른 사람들만 대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설교가 힘을 잃습니다.

우리는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 말을 보면서 바울이 다른 복음으로부터, 복음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복음이 아닌 것으로부터, 잘못된 가르침으로부터 교회를 방어하기 위해서 비장한 심정으로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다른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6절을 보세요.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자격 없는 우리를 은혜로 불러주신 주님을 떠나는 것은 배신 가운데 배신입니다.
여기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는 것은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어린이를 보는 심정으로 절망과 고통을 느낀다는 뜻입니다..

다른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이와 같이 가슴 아프게 합니다.

7절을 보세요.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다른 복음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으면 교회가 어지러워집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노리고 있습니다.
복음을 변질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헌법의 핵심인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공화국이다.’ 하는 것을 건드리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바울 당시에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교회를 가장 크게 위협하는 다른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으로부터 교회를 방어하기 위해 갈라디아서를 썼습니다.
루터 당시에는 ‘행동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을 가장 크게 위협하는 다른
복음이었습니다.
루터는 이것으로부터 복음을 방어하기 위해 1517년 10월 31일, 바로 오늘,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오늘날에는 다른 복음들이 훨씬 더 다양합니다.
훨씬 더 교묘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지상의 많은 단체들 가운데 하나로 여기려는 생각, 다른 복음입니다.
교회는 영적인 공동체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생명 문제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 다른 복음입니다. 
아주 위험한 다른 복음입니다.

10절을 보세요,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하나님보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한 설교, 다른 복음입니다.
하나님보다 사람들에게 좋게 여겨지기 위한 목회, 다른 복음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갈래 길에서 사람 쪽을 택하게 하는 것, 다른 복음입니다.

우리는 이 다른 복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아야합니다.
다른 복음은 없다,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말씀, 이것만이 복음이다,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해야합니다.

다른 복음으로부터 나를 지키고 교회를 지키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잘 알아야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진리의 말씀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고  오늘의 수많은 다른 복음들로부터 나를 지키고, 교회를 지키는 일에 앞장서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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