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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잠에서 일어나라 (행 2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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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임경택 목사

잠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낮에는 자유롭게 깨어 활동하고 밤에는 활동을 중지하고 잠을 자라고 낮과 밤을 만드셨습니다. 인생은 1/3을 자야만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이요, 질서입니다. 이 창조질서에 충실해야 합니다. 아이들을 키워보신 어머니들이 고생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아이들이 밤낮이 바뀌었을 때 참 고생을 많이 하게 됩니다. 잠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복입니다. 시편 127:2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불면증은 60대 이상 고령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 20대 후반에서 40대 사이의 젊은 층에서도 빈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2년(2001-2003)사이 불면증 환자가 67%나 증가했다고 합니다. 그 원인은 경기불황과 함께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잠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시도 때도 없이 잠을 잔다든지,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고 졸고 앉아있다면 그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교통사고의 주된 원인은 과속운전, 과로운전, 음주운전, 졸음운전입니다. 주행 중 조는 시간은 불과 2-3초에 불과하지만 그 결과는 끔찍하고 오래갑니다. 어떤 사람은 잠시 졸았던 것 때문에 이세상의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식물인간이 되어 누워 있기도 합니다. 가끔 방송에서 국회의원들 중에 회의 도중에 꾸벅 꾸벅 졸고 있는 모습이 방영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망신스럽습니까?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광경이 생중계 된다면 . . .천국에서는 우리의 예배 실황을 생중계로 보게 될 것입니다.
찬양) 그날이 도적같이

1.그날이 도적같이 이를줄 너희는 모르느냐, 늘 깨어있으라 잠들지 말아라 주님과 동행하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예수안에서 너희에게 향하신
하나님 뜻이니라.
2.평강의 하나님이 너희를 거룩하게 하시고, 온몸과 영혼이 주오실 그날에 흠없기 원하노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예수안에서 너희에게 향하신 하나님 뜻이니라

*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던 1950년 6월 25일은 주일 새벽이였습니다.
* 그동안 일어났던 대형 사건이나 사고들은 대부분이 주일에 일어났습니다.
주일날 일어난 사건들이 영적인 잠과 관련되는 것들입니다. 영적인 잠에 빠져 있을 때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 전쟁 중에 낮잠에 빠졌던 다윗왕은 충성스런 부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는 죄를 저지르고, 그 남편을 죽이는 악행까지 저 질러습니다.
* 예수님의 비유에 보면 신랑오기를 기다리던 처녀들 가운데 다섯 처녀는 잠을 자다가 신랑을 만나지도 못하고 기회를 놓쳐 잔치에 참여하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는데 곁에서 잠에 빠져 있다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하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졸다가 3층에서 떨어져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하던 중에 드로아의 한 집에서 주일날(안식 후 첫날)설교를 하고 있었는데 설교가 길어졌습니다. 3층 다락방 창문에 걸터앉아서 설교를 듣던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밖으로 떨어져 죽는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예배 중에 이런 사건이 일어났으니 말입니다. 은혜로운 집회 중 유두고의 돌발적인 사고로 집회는 잠시 중단하게 되는 혼란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그 청년을 일으켜 보았지만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은혜롭고 경건했던 분위기는 갑자기 침묵과 함께 웅성거리면서 소란해졌습니다. 바울은 빨리 내려가 떠들석한 무리들을 헤치고 유두고를 품에 안고 “걱정하지 마시오. 이사람은 살아 있소.” 하고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기도합니다. 그 때 이 청년이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왜, 이 청년이 예배를 드리다가 떨어져 죽는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하필 예배를 드리다가 . . .요즘,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다가 이런 사고가 난다면 세계적인 토픽감일 것입니다.

1. 이 청년은 예배의 소중함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유두고의 경우는 예배를 중요시하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유두고는 안식 후 첫날, 주일날 교회에 나와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배를 참으로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유두고는 예배시간에 나와 앉아 있기는 했는데 떨어져 죽었던 것입니다.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예배를 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의 전에 나와 바른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예배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그리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 하여 겸손히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요4:23-24).
다른 사람들은 미리 미리 자리를 정하여 나아와 앉아서 은혜를 받는데, 유두고는 뭐하다가 늦게 와가지고는 자리도 못 잡고 창문에 걸터앉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본문의 예배실은 아마 다락방인것 같습니다. 좁기 때문에 늦게 들어오면 자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 청년은 늦게 왔고 창가에 앉았고 집중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떨어져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분명히 예배에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졸았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유두고가 주일날 교회에 나오기는 했지만 그는 갈망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공부를 열심히 할려는 학생들은 강의실 좋은데 맡을려고 학교정문에서부터 뜁니다. 그러나 공부할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발걸음만 봐도 압니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 같이 억지로 걸어갑니다.

교회에 은혜받기를 사모하는 사람도 일찍이 일어납니다. 목욕을 합니다. 준비를 합니다. 항상 30분 전에 와서 기도합니다. 그러나 예배에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은 예배시간 앞부분 10분 짤라먹고 나옵니다. 그리고 축도 전 10분 전에 갑니다. 태도에서 예배의 소중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가는 위험한 곳입니다. 교통사고는 사고가 많이 나는 위험한 곳에서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곳을 ‘사고 다발 지역’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죄악의 자리에 있거나 주님과 멀어질 자리에 있으면 주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유두고는 창에 걸터 앉았다가 죽게 된 것입니다. 창가는 중립지대입니다. 아인지 밖인지 구분이 가지 않습니다. 중용을 너무 좋아하면 안됩니다. 중용은 이쪽에서도 인정을 받고 저쪽에서도 인정을 받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은 중용이 아닙니다. 양자택일입니다. 신앙에는 회색지대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21세기는 종교다원주의가 팽배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습니다. 가독교에도 구원이 있고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믿는 잘못된 사상들이 흐르고 있습니다.

신6장 4-5절에 보면, “이스라엘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다하고, 다하고, 다하여... 사랑하라”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유일하신 하나님께 다 쏟아 부으란 말씀입니다. 이것이 참 믿음입니다. 그분에게만 다 쏟아 붓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반쯤만 하나님께 드리고, 나머지는 내가 움켜쥐고 있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어떤 사람이어느 쪽의 공격도 받지 않기 위해 한 가지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습니다. 윗도리는 북군 옷을 입고, 아랫도리는 남군 옷을 입는 것입니다. 자신은 살아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남군은 그가 입은 윗도리의 북군 옷을 보며 그에게 총을 쏘아대고, 북군은 아랫도리의 남군 옷을 보며 총을 쏘아대서 결국 그는 두 배의 총알을 맞고 죽었다고 합니다. 타협하는 인생의 말로를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창가에 앉은 신앙은 타협적인 신앙입니다. 타협적 신앙은 하나님께 버림 받습니다.

성도는 자리를 잘 잡아야 합니다. 하와는 사탄과 함께 있다가 유혹을 받았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 다니며 아브라함이 받는 많은 축복을 함께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요단들에서 아브라함과 땅의 경계를 정할 때 소돔 고모라의 요단 들을 택했고 그곳으로 갔습니다. 소돔성은 죄악의 도성이었습니다. 거기서 결국 아내를 잃었습니다. 두 사위를 잃었습니다. 홀로 신앙의 지조를 지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신앙의 사람곁에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은혜 받을 자리에 앉아야 하지 늦게 와서 창에 걸터앉아 있으면 졸음도 오고 떨어져 죽게 됩니다. 창가는 소극적인 자리입니다. 나태한 자리다. 방관자의 자리입니다.
예배당에는 금, 은, 동 자리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꼭 뒷자석에만 앉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사정이 생기면 예배시간에도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목숨걸고 그 날을 하나님께 다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그들은 책임감이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창가에 앉은 사람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소극적인 창가, 하나님의 일에 방관하는 창가, 사탄의 유혹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는 창가 . . .이런 곳은 위험합니다. 창가에 앉아있는 소극적인 믿음은 졸음 즉 영적인 나태를 가져옵니다.
모이기에 힘쓰지 않고 충성하지 않으며 책임감이 없으며 세속의 물결에 휩쓸립니다.
마귀는 영적으로 창가에 앉은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합니다. 이상하게 주일날 교회 가려고 하면 일이 생깁니다. 마음잡고 기도하려면 꼭 부부싸움을 하게 되거나, 방해거리가 생기게 됩니다.

2. 예배의 자세가 잘못되었습니다.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좋은 예배를 만들어 가기 위해 1주일내내 삶으로, 마음으로, 교회를 사모하며 사랑하는 마음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그렇게 준비된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최상의 삶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롬12: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했습니다.

374년에 시리아의 안디옥에서 태어나 정치와 법률가로서 명성을 쌓고 23세에 세례를 받고 세상의 지위를 버리고 수도생활을 통해서 당시 기독교 사회에 뛰어난 설교가로 헌신한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은 악을 보지 않으면 제사가 된다. 혀는 비루한 말을 하지 않으면 제사가 된다. 손은 죄를 짓지 않으면 번제가 된다. 그리고 그것 이상에 우리는 더욱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여야 한다. 손은 구제를 하고, 입은 우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고, 귀는 여가 있는 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그것은 산 제사가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졸음은 대부분은 습관입니다. 설교만 시작하면 조는 습관을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예배의 좋은 습관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유두고는 하나님을 만나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졸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예배에서 떠나고 예배를 중요시하지 않게 되면, 그의 심령은 별 수 없이 유두고와 같이 영혼의 졸음이 엄습해 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잠자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잠자는 신앙은 우리를 시험 들게 합니다. 시편13: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잠은 자아를 상실한 상태입니다.
잠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성경은 잠을 영적으로 죽음으로 봅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 회개케 하라고 명령하셨지만 반대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가 뱃속 지하에서 자다가 풍랑을 만나게 되고 물속에 던져지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삼손은 들릴라의 무릎에서 잠을 자다가 하나님의 능력을 다 잃고 두 눈은 뽑히고 쇠사슬에 묶이어 멧돌 돌리는 신세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24:42-43에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마24:42-43)
롬13:11에는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롬13:11) 깨시기 바랍니다. 정신을 차리고 바른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 사건은 말씀 듣는 도중에 일어났습니다. 다른 성도들은 바울의 설교를 듣는데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7절을 보며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때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라고 했습니다. 설교가 길어지고 있었는데 아무도 졸았던 사람이 없었습니다. 유독 유두고만 졸았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관심이 있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조는 법이 없습니다. 요즘 청년들은 자는 시간이 늦고 일어나는 것도 늦습니다. 밤새 인터넷으로 이메일 보내고 검색하고 채팅하느라 . . . 그런데 밤새 인터넷을 하면서 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교인들 중에 보면 꼭 말씀을 들을 시간이 되면 졸음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왜 그럴까요?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사슴이 시냇물을 갈급”해 하듯이 갈망한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결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집중을 하게 되면 옆에서 아무리 시끄럽게 해도 내가 필요한 말은 쏙쏙 들어 옵니다. 그런데 사람이 집중하지 못하면 주위의 시끄러운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입니다. 또 잡생각이 더 많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데에도 집중 훈련이 필요합니다.
다른 성도들은 말씀을 청종하고 있는데 유두고는 하나도 재미가 없었습니다. 졸리기만 합니다. ‘빨리 안 끝나나’ 하면서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배시간은 더 길게 느껴집니다. 말씀을 듣는데 집중하여야 합니다. 예배시간에 집생각, 사업생각, 엉뚱한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떤 분은 예배 끝나고 나면 예화만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씀을 통째로 먹으십시오. 부분만 받아들이면 편식하는 것입니다. 편식은 신앙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경청하는데서 새 힘이 생깁니다.
(시19:7-10) 다윗은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꿀과 송이꿀 보다 더 사모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주일 예배는 생명의 떡을 먹는 날입니다. 떡은 살리는 것입니다. 양식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떡을 먹어야 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요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고전6:14 “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고후4: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초대교회는 주일 예배로 모일 때마다 떡을 떼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생명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매 주일마다 성만찬을 할 수 없지만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의 심령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소돔 성을 멸할 때 먼저 하나님의 사자들을 보내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롯은 천사로부터 말씀을 받자마자 두 딸과 사위들에게 달려가서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위들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다고 했니다. 농담으로 여겼던 사위들은 소돔성이 불 탈 때 함께 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날 그날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지금 나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날 그날의 말씀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잠은 우리를 떨어지게 합니다. 떨어져서 좋은 일은 없습니다.
높은 데서 낮은 데로 떨어집니다. 밝은 데서 어두운 곳으로 떨어집니다.
유두고는 떨어짐으로 인하여 죽었습니다. 떨어지면 죽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이 끝입니다.
우리를 떨어지게 하는 요소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살펴보시고 거기서 탈출하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어떻습니까? 주일에 모이는 우리들의 예배가 그저 형식적인 예배, 시간만 때우는 예배, 자리만 차지하는 예배, 습관적으로 드리는 예배, 부활의 능력과 기쁨을 체험하지 못하는 예배를 드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모임입니다.
우리는 주일 예배를 사모하고 귀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주일 예배는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살리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에 모여 예배드릴 때,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는 역사가 있는 날입니다.
이 세상에 내 생명을 살리는 모임보다 더 중요한 모임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일 예배는 나의 생명의 죽고 사는 문제가 달린 아주 중대한 모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주일 예배에 빠질 수가 있겠습니까?
사업이 중요하지만 돈이 중요하지만 건강이 중요하지만 그보다 생명은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일에 모여 예배드릴 때마다. 시들어 죽어가는 나무가 살듯이 우리의 믿음이 살아나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살아나는 시간입니다. 우리의 가정, 우리의 사업 . . 소성하고 새 힘이 넘치는 시간입니다. 믿고 예배에 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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