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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제자들 시리즈 설교 ⑦> 새 삶을 좇아간 마태 (눅 5:2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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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하준 목사

새 삶을 좇아서

며칠 전 여름 내내 입던 양복을 세탁해서 집어넣고 장롱 깊숙이 들어있던 겨울 양복을 꺼냈습니다. 꺼내다보니 제법 큰 고민이 한 가지 생겼습니다. 꺼낸 양복 중 십여 년 전에 산 양복이 하나 눈에 띄는 것입니다. 낡기도 하고 유행도 한참 지나간 옷이라 벌써 몇 년째 입지 않는 옷입니다. 하지만 버리기는 너무 아까워 십 여 차례 이사할 때마다 고민하다 “언젠간 입겠지.” 싶어 다시 넣어두곤 하던 옷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 해보셨을 것입니다. 낡았고 유행도 지났지만 버리기 아까워 지금도 집안 깊숙이 쌓아둔 옷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번에 아주 큰 결심을 했습니다. “이거 과감하게 버리자. 낡아빠진 옷, 어차피 둬도 안 입을 옷이니 과감하게 버리고 이번 기회에 새 옷 하나 사자.” 그래서 사정없이 버렸습니다.

옷뿐만 아닙니다. 우리 집안을 구석구석 살펴보면 안 쓰는 물건, 낡았는데 버리지 못하고 바리바리 쌓아둔 물건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디 물건뿐이겠습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도 버려야 할 습관들과 자세들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나이가 들었으면, 철이 들면 버려야 할 행동인데 버리지 못한 행동들, 아주 옛날부터 가져온 습관이지만 이제는 과감하게 버려야 할 그런 습관들이 얼마나 많은가 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아주 핵심적인 진리 중 하나도 바로 옛사람과 새사람, 옛것을 좇는 삶과 새것을 좇는 삶에 관한 말씀입니다. 성경은 이 옛 것과 새 것을 아주 분명하게 대조시키면서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으면 새사람이 되고, 또한 새사람이 되면 반드시 옛 것을 버리고 새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대표적인 말씀이 바로 에베소서 4장 22~24 말씀으로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내용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구원 받은 우리는 이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옛날 죄에 눌려 살던 나는 죽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갈 2:20)처럼 죄 된 옛사람, 죄의 종노릇하던 옛사람은 이제 죽었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죄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진노의 자녀가 구원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새사람이 된 우리가 옛사람의 습관을 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만약 새사람이 되고도 옛사람의 습관을 벗어버리지 못한다면 우리를 새사람이라고 부를 수 없겠지요. 그래서 그리스도인 중에 새사람이 되어 옛사람을 벗어버린 이야기들이 참 많습니다. 얼마 전 새벽기도회 시간에 사사기를 읽으면서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지요?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나실인이 있는데 이 나실인도 두 가지 종류라고요. 사무엘처럼 어려서부터 하나님 잘 믿어 평생 다른 길로 가지 않고 평탄하게 쓰임 받은 나실인이 있는가 하면, 삼손처럼 평생 딴 짓 하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회개하고 돌아온 나실인도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위대한 신앙인들 중에는 사무엘처럼 평생 딴 길로 가지 않고 하나님 섬긴 사람보다 한참동안 딴 길로 가다가 비로소 회심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가도 너무 많이 가서 아예 가장 죄된 삶, 가장 더러운 인생을 살다가 극적인 사건을 통해 회심한 사람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짧은 편지글을 하나 읽어드리지요. “지난날 사회를 어지럽히던 살인자 김현양이 예수님의 종이 되었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이 세상 서로를 존중하며 아껴주는 마음을 가지고 사랑을 베풀면 저 같은 죄인은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잊지 말고 전해주세요. 이재명님이 나눠주신 사랑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조금 남은 생이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가야겠지요. 이재명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김현양 올림.”

이 글은 1994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지존파’ 중 한 사람이 사랑의 교회 이재명 집사님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이들 지존파 여섯 명은 각자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어오다가 세상에 대한 증오와 부자들에 대한 미움 때문에 합숙훈련을 하면서 부자들을 납치해 살해하고 소각로에 시체를 태우다가 검거되었습니다. 물론 이들의 엽기적인 범죄행각도 무서웠지만 처음 체포되었을 때 고개를 빳빳이 들고 “일찍 잡혀서 부자들 더 못 죽인 게 억울하다.”던 이들의 모습은 정말 온 국민을 커다란 충격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특히 일당 중 하나인 김현양이라는 사람은 죄에 대한 공포심을 없앤다며 인육까지 먹은 참으로 엽기적인 살인마였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그 악독한 살인마의 모습이 다 사라지고 이렇게 순한 양처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은 이재명집사라는 분은 사랑의 교회 전도특공대원으로 지존파 일당에에게 백 여 통의 편지를 꾸준히 보내면서 ‘복음’을 전했고 결국 그 따뜻한 사랑이 이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랑의 편지를 읽은 부두목은 자신이 비로소 엄청난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고백했고 1995년 11월 2일 이들의 사형집행에 입회한 목사님에 따르면 김현양은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 목사님이 읽어준 누가복음 23장 41~43절(골고다언덕에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회개하여 낙원을 허락받은 살인강도 이야기)을 조용히 받아들이고 난 뒤 떨리는 목소리로 이런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참회합니다. 저 같은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 신비를 온 천하에 전하고 싶습니다. 그 동안 저를 위해 수고하신 직원들과 사랑을 아끼지 않으신 자매, 목사님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늘나라 갈 것을 확신합니다. 그 곳에서 여러분을 만나고 싶습니다.” 기독신우회 회원들이 찬송가 405장(나 같은 죄인 살리신)과 545장(하늘 가는 밝은 길이)을 부르는 순간, 김현양의 육신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물론 이들은 너무도 불우한 처지에서 자라나 세상을 비관하고 잘 사는 사람에 대한 증오로 인해 그토록 극단적인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사형을 집행하기 전이라도 주님을 만나 회개한 것이 참으로 다행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들이 조금만 더 일찍 주님을 만났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김현양은 편지에서 11살 때 교회에 다니다가 중단했는데 만약 계속 신앙생활을 했더라면 자신의 삶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그가 계속해서 주님을 믿고 삶이 변했다면, 불우한 환경과 자기를 버린 세상에 대한 증오심을 주님 안에서 사랑과 용서의 마음으로 바꿀 수만 있었다면 하는 마음에 더욱 안타까운 것입니다.

옛사람 레위와 새사람 마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제자 마태 역시 대표적으로 회심하고 예수님을 좇은 사람입니다.

옛사람 마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우리가 마태라는 제자에 대해 아는 바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다만 이 마태라는 제자가 본디 세리였으며 신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을 기록한 사람이라는 사실 정도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 마태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는 이름으로도 나타납니다. 이 ‘레위’라는 이름은 그가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쓰던 이름입니다. 아마 그 당시 갈릴리 사람들에게 ‘세리 레위’ 하면 다 알만큼 유명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이 옛날 이름, 더 유명한 레위라는 이름을 그대로 쓴 것이고 마태복음에서 마태는 자기 이름을 옛 이름이 아닌 새 이름 마태로 쓴 것입니다. 이 마태라는 이름은 그가 예수님을 만난 뒤 얻게 된 별명이라고 생각됩니다. 바요나 시몬이 예수님께 베드로라는 별명을 얻고, 야고보와 요한이 ‘보아너게’라는 별명을 얻었듯 말입니다. 이 ‘마태’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마태가 다른 복음서와 달리 자신이 쓴 마태복음에서 레위가 아닌 마태라는 별명을 쓴 것은 옛 사람 ‘세리 레위’는 이제 죽었고 새 사람 ‘제자 마태’로 태어났다는 그 자신의 고백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즉 하나님의 은혜로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한 집안의 아비에 불과했던 아브람이 하나님을 만난 뒤 열국의 아비인 아브라함이 된 것처럼, 또 자칭 ‘큰 자’였던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 ‘작은 자’ 바울이 된 것처럼 그는 옛사람인 세리 레위를 버리고 새사람 마태가 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돈만 알고 재산만 바라며 살던 레위는 죽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먹고 사는 마태로 거듭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 그의 본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영어로 tax-collector, 즉 세금 걷는 사람들입니다. 요즈음으로 치면 국세청 직원입니다. 당시 세리는 어부와는 달리 교육을 제법 받은 계층이었습니다. 계산능력과 경제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했으며 당시 통용되는 모든 언어인 아람어, 헬라어, 라틴어까지 알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 세리는 모든 사람에게 손가락질 받는 대표적인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 곳곳에 ‘세리와 창기와 죄인’을 같은 부류, 즉 죄인이요 인간쓰레기 같은 자들로 구분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교육 받은 계층인 세리가 왜 문제가 되었을까요? 세리는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의 앞잡이 노릇을 했습니다. 로마인들은 속국의 주민들에게 세금을 더 많이 걷기 위해 이 세리들을 이용했습니다. 즉 현지인인 세리들이 어느 집에 뭐가 있고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정도로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으니까 이들에게 세금을 걷게 한 것이지요. 그런데 로마가 이 세리들을 이용했다는 말도 맞지만 오히려 세리들이 로마를 이용했다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릅니다. 세리들은 로마의 권력을 배경으로 삼기 위해 돈을 주고 로마로부터 세금 거둘 권리를 산 후 해당되는 세금을 로마 당국에 미리 내고 나중에 직접 세금을 걷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로마에게 세금 100만원 내고 나중에 주민들에게 200만원 걷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차액인 100만원이 내 것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세리들은 더욱 악랄하게 세금을 거두어들일 수밖에 없었고 나아가 로마에게 동족을 파는 매국노로까지 손가락질을 받은 것입니다. 이들이 얼마나 철저하고 악랄하게 세금을 거두었는지 당시 유대인들 가운에 이런 속담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산에 가면 사자가 있고, 동네에 가면 세리가 있다.” 세리란 사자처럼 동족을 움켜쥐고 뜯어먹는 존재요 더러운 매국노로 몰린 것이고 따라서 법정에서도 세리는 증인이 될 수 없고 나아가 회당 출입도 금지되고 이들이 낸 헌금이나 자선금도 더럽다고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당시 최대의 욕이 ‘이 세리 같은 놈’이었다고 하니 어느 정도인지 알만 합니다.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살았겠습니까? 이들은 도둑놈에 민족 반역자라는 온갖 비난에도 불구하고 돈을 위해 모든 것을 건 사람들이었습니다. 더럽고 추잡한 욕심에 사로잡혀 오직 돈, 돈밖에 모르며 살았던 것입니다.

마태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마태는 가버나움 지역의 세리로서 아마 명성께나 날린 것 같습니다. 그의 본명인 ‘세리 레위’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틀림없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어부들을 비롯해 가버나움의 어부와 상인 등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많은 세금을 갖다 바치며 이를 갈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레위에게 어떤 일이 생겼습니까? 레위가 세관 앞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레위를 향해 “나를 좇으라.” 하시고 레위는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가 마태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이름만 바뀐 것이 아니라 세금 모으던 tax-collector가 이제 people-collector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세금을 억척스럽게 모으던 세리가 이제 모든 수단과 노력을 다 기울여, 아니 목숨까지 바쳐 사람을 모으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요한 야고보 같은 어부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부르심을 받아 물고기 낚는 어부에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된 것처럼 마태도 세금 모으는 세리에서 사람 모으는 사도가 된 것입니다. 그의 옛사람은 남의 등을 치고, 가진 것 다 빼앗고 긁어모아 내 배를 채우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새사람 되어 복음을 통해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도가 된 것입니다.

새 삶을 위해 포기한 것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 구원받고 새사람 된 후 옛 습관과 행동을 포기한 것처럼 마태는 예수님 따라가서 새사람 된 후 무엇을 포기했을까요?

오늘 본문 28절에 보면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았다.”고 합니다. 같은 내용을 다룬 마태복음 9장이나 마가복음 2장에는 이 말이 안 나오고 오직 누가복음에만 강조된 내용입니다. 어부였던 제자들이 가진 모든 것은 고기 잡는 그물과 배였습니다. 특히 전에 살펴본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 세배대와 삯군까지 버리고 주님을 따릅니다. 그렇다면 이 세리 마태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은 무엇일까요? 당연히 세관 앞에서 돈을 거두던 돈상을 버렸을 것입니다. 세리라는 직업도 버리고 또 그동안 모았던 큰 재산도 버렸을 것입니다. 어떻게 모은 재산입니까? 아무리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고 비난해도 꾹 참고 오로지 이 돈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온 인생입니다. 이 돈은 그가 누리던 모든 기득권과 편안한 삶을 뜻합니다. 그런데 그 귀한 돈을, 그 피 같은 재산을 이제 다 포기하고, 모든 기득권과 편안한 삶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간 것입니다. 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것을 좇는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돈을 추구했고 재산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살아왔지만 이제는 복음을 좇는 사람이 되었으니 가치관도 달라지고 삶의 목적도 달라져야 합니다. 이렇게 새사람이 되기 위해 버릴 것이 참 많습니다. 새사람이니까 당연히 버릴 옛 것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나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무엇을 포기했습니까? 나는 주님을 따르기 위해 어떤 기득권과 어떤 편안함을 포기했습니까? 이 옛 것들을 포기하지 않고는 결코 주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가 될 수 없음을 성경은 분명히 말해 줍니다.

영원히 남은 이름

마태는 예수님을 만나 그를 따른 순간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이 되어 생명을 건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자가 됩니다. 그래서 후에 아라비아와 에티오피아까지 가서 복음 전하다가 순교를 당합니다. 마태는 이렇게 생명을 건 전도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나아가 그가 보고 겪은 예수님의 모습을 낱낱이 기록하여 위대한 마태복음의 저자가 됩니다. 그는 직접 선교지에 나가서 복음 전하는 전도도 귀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예수님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일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과연 그가 남긴 마태복음은 오늘도 이렇게 찬란하게 남아 우리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예수님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은 4개의 복음서 중에도 ‘유대인을 위한 복음서’입니다. 전에는 동족 유대인들을 팔아먹던 매국노 마태가 이제 동족인 유대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복음서를 쓴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태가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가치들을 포기하지 못했다면 그의 이름은 다만 ‘더럽고 비열한 세리 레위’라고만 남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있는 모든 기득권과 이익을 다 포기하고 새 삶을 좇아갔을 때 그의 이름은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로 영원히 남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어떻게 남겨야 할까요? 정말 우리 이름이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우리 후손과 주변 사람들에게 남기 원하신다면 당장 옛 것들을 버리십시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여 그 삶을 따라가십시오. 그리하면 우리를 통해 예수님의 이름이 영원히 남게 되고, 또한 예수님을 통해 우리 이름이 영원히 빛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2부예배 시간에 세례입교식이 있습니다. 오늘 세례와 입교 받는 분들도 이제 이 마태처럼 새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오늘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영적인 생일이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축복된 날입니다. 오늘 세례와 입교를 받는 열 분의 형제 자매님들, 그리고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진정한 새 삶을 주신 주님을 찬양하며 새사람에 합당한 새로운 삶을 살아 우리의 이름이 주님의 생명책에 영원히 기록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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