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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제자들 시리즈 설교 ⑧>참 이스라엘 사람 나다나엘 (요 1:4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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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하준 목사

나다나엘과 바돌로매

오늘 살펴볼 예수님의 제자 나다나엘은 그 이름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나다나엘이 바돌로매라는 제자와 동일인물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요한복음에만 ‘나다나엘’이라는 이름으로 나오고 다른 복음서나 사도행전에는 ‘바돌로매’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 나다나엘(혹은 바돌로매)에 관해 알고 있는 바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안드레 베드로 형제와 한 동네인 벳세다 사람 빌립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제자가 된 직후 나다나엘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이 본문에 근거해 사람들은 보통 나다나엘을 빌립 두 사람을 절친한 친구 사이(제일 먼저 전도하고 싶은)라고 봅니다. 그래서 신약에 나오는 제자목록에도 이 두 사람은 항상 붙어 나옵니다. 우리도 이런 친구 있으면 참 좋겠지요? 술친구, 노는 친구가 아닌 영적으로 정말 잘 통하는 친구, 친형제보다 서로를 잘 알고 신뢰하는 믿음의 친구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친구가 몇 사람 있습니까? 이런 친구 있으면 행복한 신앙인입니다.

한편 요한복음 21:2에서는 나다나엘을 ‘갈릴리 가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가나’ 하면 생각나는 사건이 있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첫 번째 행하신 기적이 바로 이 가나의 혼인잔치입니다. 가나는 갈릴리 서쪽 가버나움 근처에 있는 동네로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기적뿐 아니라 요한복음 4장에 의하면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장소이기도 합니다.

회의주의자에서 뜨거운 신앙인으로

오늘 본문에 나온 나다나엘의 성격을 보면 상당히 회의적인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이 예수님을 만난 후 나다나엘에게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즉 내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야를 만났는데 바로 나사렛 사람 예수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처음 예수 믿고 기쁨에 넘쳐서 전도를 한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처음 예수 믿고 뜨거워져서 전도해 본 경험이 있지요? 그런데 이 전도를 들은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그래? 나도 네가 믿는 예수님 한번 믿어볼까?” 하고 긍정적으로 나오면 정말 신이 납니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고 내가 무슨 전도의 능력자라도 된 양 정말 기쁩니다. 하지만 내 전도를 받은 상대방이 시큰둥하거나 아주 회의적으로 나오면서 “하나님이 어디 있어? 나는 못 믿겠다.”하면 정말 얼마나 맥 빠지고 김새는지 모릅니다. 오늘도 나다나엘의 말을 들은 나다나엘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대뜸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전도할 때 이렇게 나다나엘처럼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사람을 만나면 정말 맥이 빠집니다. 그런데 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조금 있다가 살펴보겠지만 나다나엘은 구약을 열심히 묵상하고 연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약을 조금만 읽어보면 메시야는 갈릴리 나사렛이 아닌 유대 베들레헴에서 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미가서 5:2이 이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당시 갈릴리는 형편없는 촌구석이었고 항상 소요나 반란이 일어나던 소외된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갈릴리나 나사렛이라는 지명은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멸시 받던 지역인 것입니다. 따라서 나다나엘은 자신이 갈릴리 출신이면서도 “갈릴리 나사렛처럼 별 볼일 없고 천한 동네에서 어떻게 존귀하신 메시야가 날 수 있느냐?”며 빈정거리고 깔본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 어떤 지역이나 학벌이나 재산이나 외모를 보고 “저런 사람이 무슨 큰일을 하겠느냐.”는 편견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보다 오히려 이런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더 큰일을 하고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편견은 무서운 것이며 악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어떤 편견도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편견을 가지고 우리의 조건을 따지셨다면 우리 중에 구원 받을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무서운 편견을 다 몰아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빈정거리는 말을 듣고 빌립이 어떻게 말을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와 보라!”(46절) 이것은 여러 말 안 할 테니 직접 와서 네 눈으로 확인해 보라는 확신에 찬 권면입니다. 얼마나 자신이 있었으면 이렇게 짧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다른 불신자에게 이렇게 짧고 분명하게 전도할 수 있을까요? 우리 교회를 이렇게 자신 있게 소개할 수 있을까요?

세 주 전 이 빌립은 ‘차가운 머리’를 가진 이성주의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이 빌립과 거의 쌍벽을 이루는 이성주의자요 차가운 회의주의자가 바로 나다나엘인 것입니다. 보통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들은 은혜 받기가 참 어렵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잘 안 믿고 언제나 의심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나다나엘에게도 아주 특별한 면이 있었습니다. 바로 무화과나무 아래의 경험입니다.

무화과나무 아래서

본문 47절에 보면 예수님이 저 멀리서 나다나엘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나다나엘을 가리켜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다나엘을 대면해보기도 전에 나다나엘의 마음속에 있는 성품과 특징을 한 눈에 다 알아보시는 주님입니다. 과연 우리 인간의 모든 것을 통찰하시고 들여다보시는 주님이십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는데 우리 주님은 저 멀리서 다가오는 나다나엘의 속사람까지 다 들여다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나다나엘을 ‘참 이스라엘 사람’이요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참’이란 헬라어로 ‘알레토스’인데 이는 ‘참된, 진정한’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고 ‘간사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돌로스’인데 이는 ‘고기를 낚기 위한 미끼,’ 혹은 ‘속임수’나 ‘계교’를 뜻합니다. 당시 자신을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정말 많았습니다. 이 참 이스라엘의 근거는 혈통입니다. 사도 바울 자신을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소개한 것처럼(빌 3:5) 나는 혈통적으로 100% 유대인이라고 자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나다나엘을 혈통으로 보시고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말로는, 혈통으로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지만 겉모습만 그렇고 속은 썩어빠진 사람들이 많았는데 바로 이런 사람을 주님은 ‘간사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부르신 것이고 나다나엘은 혈통이 아닌 신앙과 경건에 있어 참된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참되고 진실된 신앙인이라고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나다나엘은 깜짝 놀라며 예수님께 묻습니다. “아니,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48절) 놀라운 일입니다. 주님께서 나다나엘의 속사람을 아실뿐 아니라 전에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부터 보셨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인간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 들여다보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무화과나무에 대해서는 얼마 전 주일찬양예배 때 이미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 잎이 넓고 커서 종종 랍비들이 율법을 교육하거나 묵상하는 장소, 기도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좁고 답답한 집을 떠나 탁 터지고 시원한 그늘이 진 무화과나무 아래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한 것이지요. 따라서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말은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성경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그러면 어떤 내용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었을까? 아마도 이 민족을 구원하러 오실 메시야에 대해 고대하며 말씀을 묵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빌립도 잘 알았기에 예수님을 만나자 한달음에 나다나엘에게 달려가 “네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를 내가 만났다.”고 전한 것이라고 봅니다. 하지만 그냥 ‘메시야를 만났다’고 하지 않고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45절)라고 하는 것을 보면 평상시 나다나엘이 늘 율법과 선지서를 공부하고 묵상하며 메시야를 기다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늘 무화과나무 아래서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면서 구세주를 기다리던 나다나엘을 보시고 그를 만나기도 전에 이미 제자로 점찍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준비된 자가 부르심을 받습니다. 부름 받을 때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평상시에도 늘 경건생활을 통해 준비하는 자가 반드시 하나님께 부름 받아 크게 쓰임 받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다나엘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오늘 말씀 49절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다나엘이 주님 앞에 고백하게 됩니다. 함께 읽어볼까요?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냉소주의자요 회의주의자였던 나다나엘이 주님을 만난 순간에 변화되어 믿음의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메시야가 나겠나며 비웃던 사람이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이스라엘의 참 임금이시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아무리 회의주의자요 비웃고 조롱하던 자라 할지라고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면 단번에 변화됩니다. 여러분의 남편이나 부모 형제 자녀, 주변 사람들 중에 전도만 하면 비웃고 조롱하는 사람들, 맥 빠지게 하는 사람들, 두고 보십시오. 예수님만 만나면 완전히 변합니다. 회의주의자가 뜨거운 신앙인으로 변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나다나엘은 전혀 아무 바탕도 없이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 경건생활로 말씀과 기도훈련을 하던 준비된 사람이기 때문에 더 빨리, 더 정확하게 주님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초대교회의 기록에 의하면 나다나엘은 페르시아와 인도, 아르메니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주후 44년 칼에 베어져 순교당하고 시신은 자루에 넣어져 바다에 던져졌다고 합니다.

종교개혁과 성찬식의 의미

오늘은 종교개혁 487주년 기념주일입니다. 또한 성찬식을 거행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종교개혁의 참뜻은 참된 경건의 회복입니다. 487년 전 마르틴 루터가 기복신앙과 물질주의와 잘못된 신앙으로 타락한 가톨릭교회를 향해 성경에서 발견한 구원과 경건의 참뜻을 회복하자고 외친 것이 바로 종교개혁입니다. 그러므로 이 뜻 깊은 기념주일에 성찬식을 행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 찢기신 주님의 몸, 우리를 위해 흘리신 주님의 보혈의 피를 기억하며 다시 한번 우리의 마음속에 참된 경건이 회복되고 진정한 감사와 감격이 우러러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487년 전 가톨릭교회가 그랬듯이 혹시 우리 마음이 오래 믿고 오래 교회 다님으로 나태해지고 왜곡되고 변질되어 있지 않은지, 그래서 다시 한번 성찬식을 통해 참된 경건이 회복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은 오직 주님을 만남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평상시 늘 참된 경건생활을 지속해 나갈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제 잠시 후 우리는 성찬식을 통해 주님과의 참된 교제와 교통을 맛볼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항상 말씀묵상과 기도를 통해 경건훈련을 하며 메시야 만나기를 대망한 것처럼 우리도 주님 만나기를 소망하고 그 만남을 통해 참된 교제를 나누고 참된 경건이 회복되면 우리 주님으로부터 ‘너야말로 참 이스라엘 사람, 참 하나님의 사람, 참된 주님의 제자’라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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