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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제자들 시리즈 설교 ⑨>시몬과 유다 (눅 6: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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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누구를 위한 열심인가? 시몬과 유다

- 설교 : 이하준 목사

작은 야고보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라고도 부르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목록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앞에 나오는 여덟 명(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빌립, 바돌로매=나다나엘, 마태, 도마)은 지금까지 우리가 이미 살펴 본 사람들이고 남은 네 명이 앞으로 살펴볼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남은 네 명 중 첫 번째는 누구입니까? 바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야고보는 4명이나 됩니다. 이 가운데 예수님의 제자만도 둘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세베대의 아들, 보아너게라는 별명을 들은 사람, 열정의 사도. 이 사람에 대해서는 이미 설교했지요?)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또 나중에 초대교회의 기둥과 같은 지도자가 된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도 있고 예수님의 제자인 유다의 부친 야고보도 있습니다. 이 중에 제일 유명한 야고보는 단연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 두 번째 사람, 즉 제일 유명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구분하기 위해 알패오의 아들, 혹은 ‘작은 야고보’(막 15:40)라고 부른 야고보는 비록 예수님의 제자지만 성경에 거의 언급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만 그 모친의 이름이 ‘마리아’고(막 15:40) 동생은 ‘요세’(혹은 ‘요셉’)라고만 알려져 있을 뿐입니다(마 27:56, 막 15:47). 그래서 부득이 이 작은 야고보에 대한 설교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남은 사람은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입니다. 이 중에 마지막 가룟 유다는 다음 주일 살펴볼 것이고 오늘은 시몬과 유다(야고보의 아들)에 관해 알아봅시다.

열심당원 시몬과 유다

먼저 시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둘 있습니다. 그 유명한 베드로가 바로 ‘바요나 시몬’이라는 본명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4절과 15절을 보면 두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 바요나 시몬을 ‘베드로라고도 이름 주신 시몬’이라고 설명하고 후자는 ‘셀롯이라 하는 시몬’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똑같은 사람을 ‘셀롯이라 하는 시몬’이라 부르지 않고 ‘가나안인 시몬’이라고 부릅니다(마 10:4, 막 3:18).

그런데 이 ‘가나안인 시몬’이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잘못 생각하면 ‘가나안 사람인 시몬’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이 ‘가나안’이란 지명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열심 있는’이란 뜻을 가진 히브리어 ‘카나’에서 나온 말입니다. 따라서 이 ‘가나안인’이란 누가복음에 나온 바와 같이 ‘셀롯’을 뜻하는 똑같은 말인 것입니다.

‘셀롯’이라는 이름은 당시 Zealot이라고 부르던 사람들을 뜻합니다. 성경은 이들을 ‘열심당원’이라고 부르는데 Zealot이라는 낱말이 바로 열심, 열정을 뜻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오늘날도 영어에 zeal이라는 낱말이 있는데 바로 ‘열심, 열정’을 뜻하는 말로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이 젤롯, 즉 열심당원들은 도대체 무엇에 그리 열심이었기에 ‘열심당원’이라는 이름까지 붙었을까요? 또한 시몬은 도대체 왜 ‘열심당원’이라는 단체에 속해 있었을까요? ‘셀롯’, 즉 열심당원들은 바로 율법과 유대교에 대한 열심이 불탔던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열심인지 광신도에 가까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면서 유대인들을 속박하여 식민지로 만들고 반유대 정책을 쓰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리 없었겠지요? 따라서 이 열심당원들은 반로마 운동을 펼치면서 유대의 독립을 위해 일했습니다. 문제는 유대의 독립운동을 한 것까지는 좋은데 바로 이들이 쓴 방법이 폭력적인 반정부 활동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로마의 요인들과 로마에 협조한 ‘매국노’들을 가차 없이 살해했으며, 방화와 약탈까지도 서슴지 않곤 했습니다. 누구의 이름으로?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유대교 근본주의자들

이들의 모습을 보면 마치 오늘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을 보는 듯 합니다. 며칠 전 미국 대선을 치르면서 부시 대통령이 재선되는 모습을 다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 국민들이 다시금 부시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보다 그가 미국을 공격하는 테러와의 전쟁을 계속 수행해 나갈 적임자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들 테러리스트의 대표적인 집단이 바로 9.11 테러를 감행한 ‘알 카에다’라는 단체입니다. 지금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지만 ‘오사마 빈 라덴’이라는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테러리스트가 그 우두머리입니다. 바로 이 ‘오사마 빈 라덴’을 잡겠다고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또 이들에게 협조한다는 이유로 이라크를 침공해 점령했습니다. 바로 이 ‘오사마 빈 라덴’이나 ‘알 카에다’라는 조직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오직 알라신의 이름으로 성전, 즉 거룩한 전쟁을 수행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의 가장 큰 적은 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그 이스라엘을 뒤에서 조정한다고 보는 미국 역시 제1의 적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미국을 향해, 또 미국을 돕는 모든 나라들을 향해 테러를 가하는 것입니다. 테러가 정말 무서운 것은 언제 어디서 그들에 의해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전쟁은 “나 처 들어간다.”고 선전포고라도 하지만 테러는 언제 어디서 갑자기 폭탄이 터지고 불이 나고 죽게 될지 모른다는 점이지요. 더욱 무서운 것은 이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내가 알라신을 위해 죽는 것은 신을 위한 순교요 영광이라고 보기 때문에 주저 없이 비행기를 몰고 빌딩에 돌진할 수도 있고, 또 여자와 어린아이들도 몸에 폭탄을 지니고 적을 향해 돌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무서운 힘은 어디서 왔을까요? 사람들은 사상이 무섭고 주의가 무섭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믿는 사상과 주의 때문에 생명을 버립니다. 하지만 공산주의보다, 이 세상 어떤 사상과 주의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이들은 ‘신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하기 때문에 내가 테러를 하고, 살인을 하고, 불을 지르고 이 모든 일이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 될 수 있습니다. 나아가 내가 죽는 것도 신을 위해 죽는 것이기 때문에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어떤 사상과 신념이 이보다 더 무섭겠습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분석합니다. “미국은 절대 테러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테러리스트 한 사람을 잡으면 또 한 사람이 테러리스트가 되고, 한 사람을 죽이면 또 두 사람이 나온다. 그러므로 이슬람 신자 모두를 죽이기 전에는 이길 수 없다.” 여러분,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만큼 종교의 힘은 무서운 것이고 나아가 종교의 힘으로 테러고 살인이고 방화고 약탈이고 무엇이든지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알 카에다’나 ‘오사마 빈 라덴’으로 대표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처럼 예수님 당시에는 유대교 근본주의자인 열심당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열심당원들은 좀더 효과적으로 암살을 하기 위해 겉옷 자락 속에 예리한 반달 모양의 단검을 지니고 다닌 전문 암살단을 조직했습니다. 이들의 이름은 ‘비수를 꽂는 자’라는 뜻을 가진 ‘시카리’리고 불리었습니다. 이들은 로마 군병들이나 정치가들, 혹은 민족반역자들을 만나면 은밀히 다가가 등 뒤에서 갈빗대 사이로 심장을 정확하게 찔러 죽였다고 합니다. 정말 무서운 테러리스트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중에 시몬이 바로 이 열심당에 속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디 그뿐인 줄 아십니까? 학자들에 의하면 예수님의 제자 중 네 사람이나 이 열심당 출신이라고 합니다. 앞서 잠시 언급한 작은 야고보(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그리고 시몬, 유다,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 이 네 명 모두 열심당 출신이라고 봅니다. 야고보의 아들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유다는 가룟 유다와는 다른 유다인데 그의 이름은 오늘 본문에서는 ‘야고보의 아들 유다’로 나오지만 마가복음 3:18에서는 ‘다대오’로 나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유다에 대해서 아는 바는 거의 없습니다. 다만 이 사람도 시몬처럼 열심당원의 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이 정도밖에는 이 사람에 대해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들 네 사람의 열심당원 중에 유독 시몬만 ‘셀롯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을 보니 아마도 이 시몬이 네 사람 가운데 제일 극렬한 열심당원이었는가 봅니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열심인가?

이와 같이 열심당원들은 철저한 종교적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들의 열심은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열심입니까? 물론 유대교를 위한 열심이요,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었습니다. 얼마나 귀한 열심입니까? 어쩌면 오늘날 우리보다 훨씬 믿음도 좋고 훌륭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입니까? 아무리 좋은 열정과 열심을 가진다 해도 목표가 잘못 되면 문제가 됩니다. 또한 수단이 잘못 되면 역시 문제가 됩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위한답시고 폭력과 테러를 정당화 했습니다. 남을 죽이고 납치라고 그들의 재물을 훔치는 일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 한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옳은 일일까요? 세상의 원리에 의하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과정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목적만 이루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도둑질을 하던, 남을 속이던 돈만 많이 벌면 되고, 출세하고 성공하면 된다는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물론 목적도 보시고 결과도 보시지만 그 목적과 결과를 얻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 수단, 무엇보다 그 과정을 중요시 하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아무리 과정이 좋더라도 결과가 좋지 않으면 실패한 인생이라고 부릅니다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리 결과가 좋아도 잘못된 수단과 방법을 쓰면 실패한 인생이 됩니다. 차라리 결과는 좋지 못할지언정 정당한 수단과 깨끗한 방법을 사용한 사람이 더 성공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이 열심당원들은 이런 점에서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이들의 열심을 기뻐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이들의 열심을 가증스럽게 여기셨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오늘 내가 나름대로 열심을 갖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고 자부심을 갖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나아가 가증히 여김 받는 잘못된 열심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변화된 열심

오늘 시몬과 유다라는 제자들을 보면 열심당원이었던 이들의 맹목적인 열심이 예수님을 위한 열심으로 변화됩니다. 원수를 증오하고 가차 없이 찔러죽이던 열심이 이제는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변화됩니다. 폭력으로 그들만의 왕국을 세우려던 꿈이 이제 사랑의 왕국을 세우려는 꿈으로 변화됩니다. 뜨거운 열정으로 로마를 타도하려던 두 사람은 예수님을 통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뜨겁게 기도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행 1:13~14). 결국 시몬은 소아시아와 이집트, 그리고 흑해를 건너 영국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또 유다도 남부 러시아인 에데사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 곤봉에 맞아 순교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을 재건하려던 열심당원들은 열심히 로마에 대항하고 테러를 하다가 결국 주후 70년 예루살렘이 로마군에 의해 함락되자 최후의 항전을 위해 천연의 요새인 ‘마사다’라는 곳으로 옮겨 갑니다. 그리고 7개월간이나 그 요새를 지키며 로마의 10개 군단과 맞서다가 결국 주후 73년, 요새의 함락 전날 살아남은 960명 전원이 자살을 함으로 최후를 맞이합니다. 이 마사다 요새는 성지순례를 갈 때 꼭 한 번 들러보아야 할 장소라고 합니다. 오늘날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든 학생이 반드시 이 마사다 요새에 들러 정신무장을 하게 합니다. 혹시 압니까? 시몬과 유다도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들 틈에 끼어 마지막까지 항전하다가 자살했을지 말입니다. 하지만 시몬과 유다는 이런 최후가 아닌 주님을 위해 기꺼이 죽는 순교를 택했습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맹목적인 열심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게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향해 방향 지워진 열심은 영광스러운 마지막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우리는 어떤 마지막을 맞이해야 할까요?

우리는 어떤 열심당원들인가?

우리 모두는 무엇인가에 열중하며, 무엇인가에 열심을 품고 살아가는 열심당원들입니다. 물론 그 열심을 품는 대상은 저마다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열심을 품고 살아가는 물질적 열심당원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과 지위에 열심을 품은 권력지향적 열심당원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름의 사상과 신념에 목숨을 걸고 사는 사상적 열심당원들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종류의 열심당원들입니까?

우리가 앞서 나열한 세상적인 것들에 열심을 품고 거기에 목숨을 걸고 사는 그릇된 열심당원들이 되어서야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그야말로 신앙의 뜨거운 열정에 불타고 예수에 목숨 건 예수 열심당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열린우리당원도 아니고 한나라당원도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열심당원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당의 집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이 땅위에 임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온 세상을 지배하는 그날을 꿈꾸며 살아가는 하나님나라 당원들입니다.

또한 우리는 가슴 속에 어떤 칼을 품고 살아갑니까? 날카롭게 날을 세운 단도를 품고 “누가 나 건드리기만 해봐라.” 하는 사람들입니까? 나에게 상처 주는 사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에게 “두고 봐라, 내 언젠간 이 원수를 몇 배로 갚아 주리라.” 하며 복수의 칼을 가는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를 위해 살고 예수를 위해 죽는 예수 열심당원들이라면 우리는 가슴 속에 말씀의 칼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 말씀의 칼을 날카롭게 잘 갈아 만나는 사람마다 그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말씀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히 4:12).

누구를 위한 열심인가? 오늘의 설교제목입니다. 무엇을 위한 열심인가?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우리의 인생의 목적과 가치를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자기가 믿는 사상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공산주의자들, 자기가 믿는 알라신의 영광을 위해 폭탄을 지고 뛰어드는 이슬람교 신자들을 보며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껴야 합니다. 더욱이 돈을 위해, 명예를 위해. 온갖 세상적인 것들을 위해 그토록 땀을 흘리며 애를 쓰는 세상적인 열심당원들을 보며 “나는 과연 저 정도라도 믿음을 위해, 예수님을 위해 희생하고 땀 흘리고 최선을 다하는지, 내가 품은 신앙적인 열심은 정말 저 사람들 정도라도 되는 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것은 이들이 품었던 열정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는 기본적으로 뜨거운 열정과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비록 열심당원은 아니었지만 그 어느 열심당원 못지않게 유대교와 율법에 대해 열심을 품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그를 눈여겨보신 것입니다. “저만한 열심이면 참 쓸만하겠다.” 그래서 주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만나십니다. 그리고 그의 삶의 목적과 열심의 방향을 180도 틀어 놓으십니다. 바울의 열정과 열심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그 열심의 목적과 방향을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전에는 유대교화 율법을 위한 열심이었다면 이제는 예수님을 위한, 복음을 위한 열정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열정적이고 열심 있는 사람을 쓰십니다. 예수를 오래 믿었어도 늘 미적지근하고 그저 그런 사람은 쓰임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지금은 예수 믿는다고 핍박하고 기를 쓰고 반대하는 그 사람이 더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떻게 되면? 예수님을 만나 그의 삶의 목적이 바뀌고 열심의 방향이 바뀌면 말입니다. 우리 모두 차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안에 기본적인 열심과 뜨거움이 없으면 ‘결코’ 쓰임 받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열심당원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내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고 심지어 생명도 아낌없이 내놓을 수 있는 그런 열심당원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열심당원의 강령은 무엇이냐? 마가복음 12:30에 나오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입니다. 이 강령을 한 번 따라합시다. 오늘 이 강령을 함께 외치며 여러분이 주님을 위한 열심당원으로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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