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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마 9: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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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창인 목사

이 시간에 마태복음 9장 9절에서 13절 말씀을 가지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립니다.

13절을 보면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하여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라고 제목을 정했습니다. 종교 심리학에 '요나의 신드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요나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대치가 될 때 느끼는 고뇌와 갈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때에 요나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좀더 헤아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느니웨에 가서 말씀을 외치고, 증거하라"라는 것만 알았지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할 때에는 어떻게 된다는 것까지는 몰랐습니다. 즉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가르침을 따라 그 뜻을 헤아린다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제정 러시아가 망하기 전에 러시아 정교회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큰 토론이 계속 되곤 하였습니다. 성찬식을 하는데 성찬식의 포도주에 파리 한 마리가 빠져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파리가 구원을 얻었느냐? 얻지 못하였느냐? 하는 내용의 토론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제정 러시아가 망할 때까지 토론을 하였습니다. 하찮은 파리가 무슨 구원을 얻고 천국엘 갑니까? 구원을 얻지 못하였다고 해서 파리가 지옥에 갑니까? 아무 뜻이 없습니다. 우리는 뜻 없는 일에 뜻을 부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사건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러한 경우에는 크신 뜻을 부여해 주셨다.'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그 뜻이 무엇인지를 헤아려 보자는 의미에서 말씀을 전해드립니다.

I. 부르심의 뜻 (9-10)

한번은 예수님께 부자 청년이 나왔습니다. "주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그랬더니 "네가 계명을 알지 않느냐?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등등이 있는데"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이 부자청년의 하는 말이 "이것들은 제가 어렸을 때부터 지켰습니다" "그래? 그럼 네가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재산이 너에게는 필요이상으로 너무 많아. 이것을 모두 정리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를 하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데에서 영생의 문제는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재산이 너무 많은 까닭에 근심하며 돌아갔다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서 이 청년이 잘한 점을 몇 가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 청년이 예수님께 나왔다는 것은 아주 잘한 것입니다. 그때 당시 유대인들은 무슨 문제가 있거나 혹은 해답을 얻고 싶을 때에는 랍비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랍비를 찾지 않고 예수님을 찾아 나왔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참 잘한 일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영생문제 가지고 찾아왔다는 것이 참 잘한 일입니다. 사업을 10년 공을 들여 하다가 잘못되어 부도직전에 와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며 도와달라고 하는 부탁에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나의 가족이 몹쓸 병에 걸려서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런 문제들도 중요하지만 이 청년은 인간의 근본적인 영생문제를 가지고 온 것입니다. 셋째로 평생 살아오는 동안에 젊었을 때에는 자기 좋을 대로만 살다가 늙어서 예수님께 나왔다고 하게되면 나오지 않은 것보다는 잘한 것이지만 이 청년은 늙어서가 아닌, 젊었을 때 나왔다는 것이 얼마나 잘한 것입니까? 참 잘 하였습니다. 넷째로는 "계명을 네가 알텐데?"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을 때 "어렸을 때부터 다 지켰습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처럼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잘한 일입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고 계명을 저버리면 안됩니다. 구원을 얻었으니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지켜야 되는 것 아닙니까? 구원 얻었다고 그 계명이 상관없습니까? 구원을 얻었기 까닭에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켰기 까닭에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구원 얻은 자는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런 점은 다 좋지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너의 필요 이상의 재산을 정리하여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재산을 모두 다 팔아 나누어주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다 팔아 구제하고 난 후에 남에게 도움 받으며 살라는 말씀은 아니지 않습니까? 필요이상의 것을 다 구제하고, 정리하는 뜻입니다. 필요 이상의 것은 네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는 명령입니다. 이렇게 말씀할 때 즉 주님이 이렇게 부르실 때 '그 부자청년은 재산이 많은 고로 근심하며 돌아갔다'는 사건의 기록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우리는 너무 잘 알지 않습니까? '돈이냐? 예수냐?' 할 때 "차라리 나는 예수님도 저 버리고, 영생도 저 버리고, 돈을 따라가겠습니다"라는 자세가 청년의 자세입니다. 얼마나 미련한 사람이요, 불행한 사람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부르심의 뜻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귀하고, 얼마나 큰 축복인줄을 알았으면 그렇게 돈을 위해서 돌아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부르심의 뜻을 몰랐기 때문에 불행한 청년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부르심의 뜻을 알고, 그 부르심에 따를 때에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본문이 반의적으로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본문 9절과 10절을 보면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한번은 가버나움 동네에서 세관 앞을 지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나사렛 동네에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30살 되어 공생애 생활을 시작하심과 동시에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하시게 됩니다. 그래서 가버나움이 복음 사역의 중심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가버나움 동네에는 큰 세관이 있었습니다. 마태라는 젊은이가 세관에 앉아 돈을 모으는데 아주 열심입니다. 그전부터 예수님과 마태가 아는 사이였는지는 모르지만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습니다. "나를 좇으라"는 한 마디 뿐입니다. 마태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때에 본문을 보면 간단히 '일어나 좇으니라'고 되어있지만 누가복음 5장 28절에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고 더욱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무엇입니까? 세관에 앉아있는 이 마태라고 하는 사람은 바로 그 세관의 그 자리가 돈방석입니다. 앉아있으면 그냥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지탄과 손가락질을 받는 지 모릅니다. 그 이유는 로마가 유대를 식민지로 점령하고 있을 때 로마가 직접 세금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세리에게 청부를 줍니다. 그러면 세리는 만약 10만원의 세금을 걷는다면 4-5만원은 로마 정부에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가 갖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 눈에 비친 세리들은 로마의 앞잡이들입니다. 나라를 팔아먹는 매국노로 비춰진 것입니다. 신앙 양심도 저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세리인 들과는 상종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태는 "너희가 아무리 야단하고 나에게 손가락질을 해도 나에게는 돈이 있으면 그만이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로 세관에 앉아있는 마태입니다. 그런 마태를 예수님이 불러주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찾지 않는 마태를 예수님께서 찾아 주시고 또 불러주신 것입니다. 마태는 그 부르심의 뜻을 알았는지라 돈방석의 자리를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3년을 예수님께 배우고, 죽을 때까지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전도를 하다가 순교했습니다. 마지막에는 마태복음을 기록하여 우리들에게 남겨 주었습니다. 너무 복된 삶을 남겨 놓았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이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얼마나 영광입니까? 그러나 부자 청년은 돈이 많다는 것 때문에 주님의 부르심을 저버리고 돈을 따라 갔습니다. 그 청년과 본문의 마태를 비교하면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마태가 얼마나 잘한 것입니까? 얼마나 복되고 영광입니까? 그 이유는 부르심의 뜻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20세기의 성자'라고 하는 슈바이처는 본래 프랑스 사람입니다. 그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얼마나 두뇌가 명석하고 공부를 잘 했는지 철학박사, 신학박사, 음악박사, 의학박사까지 네 가지의 박사학위를 획득한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은 한 가지 박사학위를 얻기도 힘들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중에는 스위스 바젤 대학의 총장까지 지내게 됩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아주 편하게 살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조건을 가진 사람이 전 세계를 통틀어 몇 명이 되겠습니까? 이런 좋은 조건을 가진 그가 늘 갈등과 번민, 그리고 괴로움을 느꼈습니다. '내 인생이 이것으로 끝나도 될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여건을 허락하실 때에는 보다 더 나은 삶, 보다 더 하나님을 위한 큰 봉사를 하라고 나에게 모든 은사를 주신 것이 아닐까?'라는 갈등입니다. 이런 갈등과 고뇌 속에 있을 때 아프리카의 선교지에서 소식이 옵니다. 아프리카에 선교사들이 가서 선교를 하지만, 그들이 너무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병이 들어도 약 한첩 쓰지 못하고 죽을 뿐 아니라 학교가 없어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예수의 '예'자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슈바이처는 이 소식이 바로 자기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 좋은 자리들을 버리고, 아프라카주 '가봉'이라는 나라에 '람바네네'라고 하는 곳에 오고웨이라고 하는 강이 흐르고 있는데 그 강가에 천막을 치고 진료를 시작하였습니다. 각국의 많은 사람들에게서 후원을 받아 진료소를 늘려 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온전히 섬기는 삶으로 평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하루는 대학에서 같이 교수로 지내던 동료 한 명이 찾아왔습니다. "자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모든 생활이 보장이 되어 있는데 왜 고생을 사서하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슈바이처가 손을 내보이며 말합니다. "이것이 뭔지 아는가?" "자네 손이지" "이 손은 내 손이 아니야. 하나님의 손이야. 이 손으로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거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들어 하나님의 손 노릇을 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지금 자네 보기에는 나에게 동정이 갈는지 모르지만 절대 동정하지 말게. 나는 이 일이 가장 영광스럽고, 보람되고, 기쁜 일이네"라고 대답했습니다. 부르심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안 사람입니다. 슈바이처가 얼마나 멋지고 훌륭한 삶을 남겨놓았습니까? 하나님이 슈바이처를 부르신 뜻이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아들, 딸 삼아주시고, 천국백성 삼아주신 것이, 편안히 살라고 하신 것입니까? 예배 한시간 드리며 "하나님이여 축복해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 라고 하여 축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극상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입니까? 여러분들을 부르신 뜻은 보다 더 나은 삶, 보다 더 훌륭한 삶을 남겨놓으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인 줄로 아셔야 합니다.

II. 유익함의 뜻 (11-12)

예수님께서 한번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이 강도들이 그 사람을 때려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머니에 있는 모든 것만 털어 간 것도 모자라 입고 있는 옷까지 벗겨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사장이 지나가고, 레위인이 지나갈 때에 못 본 척 했습니다. 그 사람들도 강도 만나지 말란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도망가다시피 가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 한 명이 여행 중에 지나다가 그 사람을 보고 타고 있던 나귀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구해주고, 온갖 치료를 하고 또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줍니다. "앞으로 더 치료비가 들텐데" 하며 두 데나리온을 주고 떠납니다. "그리고 모자르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 주겠다"라고 합니다. 즉 장래 문제까지도 책임지고, 도와 준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이 비유 가운데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본래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에게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큰 유익을 준 사람입니까? 유익을 주는 사람은 꼭 있어야 할 사람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교회에 유익을 많이 주는 사람, 또 다른 사람의 믿음에 큰 도움을 주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두 번째로 제사장과 레위인들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제사장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제사를 주재하는 사람이요, 레위인들은 성전봉사를 전부 도맡아 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성전에서 봉사하는 것을 최고로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성전 밖에서는 내 이웃이 죽어가지만 "나는 모른다."고 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지를 아십니까? 교회에 나오면 정말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나가서는 이웃집에서 죽어 나가도 "나 모른다."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 안에서는 봉사한다고 해서 환영받을지는 모르지만 이 세상에서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사람입니다. 소금과 빛의 사명을 망각한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빛"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교회라고 하는 곳이 우리들끼리 모여서 눈감고 찬송 부르면서 종교적인 감정이나 만족시키는 곳입니까? 그렇다면 교회가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세상을 위해서 우리가 무언가 유익을 주고, 도움을 주고, 보탬을 줄 때 교회가 존재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것은 건물이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의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어디에도 쓸데가 없습니다.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존재들입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셋째로 강도입니다. 정말 백해무익한 사람입니다. "나를 위해서는 네가 희생해야 하고, 나를 위해서는 네가 죽어줘야 되겠다"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정말 없어야 될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과 가까이 하면 뜻 없는 손해만 봅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과 같이 하면 믿음에 큰 손해를 입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 믿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교회 비판이나 하고, 흉이나 보고 앉아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제 자신은 정의의 사도로 자칭할 것입니다. 그러나 갓 교회에 나오는 그 사람에게는 얼마나 믿음의 상처를 주는 지 아십니까? 백해무익한 존재입니다. 남의 믿음에 도움을 주고, 유익을 주어야 합니다. 넷째로 강도 만난 사람도 잘한 것은 아닙니다. '내가 도둑을 맞았다?' 할 때 도둑질한 사람만 나쁜 것입니까? 도둑맞은 나 자신도 잘한 것은 없지 않습니까? 문단속을 잘하고, 자기의 재산을 잘 관리해야할 책임이 있지 않습니까? 결국 잘한 것도 없이 이런 사람이 교회의 문제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유익한 사람도 있고 해로운 사람도 있고,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유야무야한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유익을 주는 사람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남에게 유익을 주며 살라고, 또는 유익한 존재로 살아남으라고 지으셨다고 하는 것을 명심하시고 유익함의 뜻을 꼭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11절과 12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마태라고 하는 사람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변정리를 하면서 주님께 간청을 합니다. "주님, 오늘 저녁에 저의 집에 가시지요" "왜?" "우리 집에서 주님을 위해 잔치를 하겠습니다"라고 초청을 했습니다. 스스로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 중에 예수님을 위해 잔치한 사람이 있습니까? 집을 사고 들어가 잔치하는 집들이는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아들, 딸 결혼할 때 하는 잔치는 누구를 위한 잔치입니까? 회갑이 되어 자녀들이 차려주는 잔치는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본문의 잔치는 예수님을 위한 잔치입니다. 마태가 예수님을 위한 잔치를 베풀어 놓고 자기와 똑같은 세리와 죄인들을 불렀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항상 내 이웃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보십시오. 그것이 예수님을 위한 잔치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잔치입니까? 그런데 청하지도 않은 바리새인들이 왜 옵니까? 그 자리에 왔으면 가만히 있을 일이지 왜 시비를 겁니까? "너희 선생님은 어찌하여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앉아 먹고 마시고 즐기느냐?"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책임을 지시고 대답하십니다. "이봐, 건강한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 있어? 없어?" "없지요" "너 같이 죄 없다고 하는 자칭 의인에게는 영적인 의사가 되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거야 그러나 이 마태와 같이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스스로 자복하는 사람에게는 나 같은 구주가 꼭 필요한 거야"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래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병든 자에게는 꼭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필요로 하는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의사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존재가 아니지 않습니까? 꼭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더구나 병자에게는 말입니다. 병자는 꼭 의사를 찾아 도움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의사가 꼭 필요한 존재로 삽니다. 유익한 존재로 살아남고, 살아가는 것처럼 여러분들도 꼭 유익을 주는 존재로서 유익함의 뜻을 바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지미 베이커'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가정이 참 묘합니다. 아버지는 인디언인데 아파치 인디언입니다. 미국에서 인디언들에게는 우민정책을 씁니다. 공부하지 않고, 일하지도 않게 하여 미련한 사람이 되게 합니다. 그냥 돈을 줄테니 먹고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머리가 깨면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돈만 받아먹고는 거기에 만족하고, 또 술만 먹습니다. 지미 베이커의 아버지도 인디언이기 까닭에 술만 먹다가 알콜 중독이 되어 지미 베이커가 어렸을 때 죽습니다. 어머니는 멕시코 여자입니다. 남편이 죽고 난 다음에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는 가진 것도 없는데 강도를 만나 뒤통수를 맞고 죽었습니다. 지미 베이커가 6살 때입니다. 6살에 고아가 된 것입니다. 고아원에 보내졌고, 고아원에서 학교에 보내 주는데 우리나라로 계산할 때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곱게 자랄 리가 없었습니다.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고, 나쁜 짓만 하다보니 학교에서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하여 퇴학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이 지미 베이커는 이왕 버린 몸이라 생각하여 아예 깡패, 망나니의 세계에 뛰어 들게 됩니다. 못된 짓만 하다가 경찰에게 붙들려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몇 해가 지나 27세가 되었습니다. 형무소에서 전도하는 목사님이 지극한 정성으로 끈질기게 찾아와 위로하고, 도와주며 복음을 전합니다.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하였지만 마음의 문을 열고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고 결국 예수님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가 27세에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고 하면서 철저하게 회개를 하였습니다. 대학에 가서 공부하기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석사가 되고, 박사가 됩니다. 그리고 대학에서 유명한 교수가 됩니다. 대학교에서 학문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문제 학생을 이 교수에게 붙여주기만 하면 전부 되돌려 놓는 것입니다. 얼마나 유익을 많이 주는 교수가 되었습니까? 해를 주면 해를 주었지, 유익을 전혀 주지 못하는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한 다음에는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또한 유익한 존재로 평생을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어디를 가던지 유익한 존재로 살아가라는 뜻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III. 원하심의 뜻 (13-)

본문 13절을 보면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감 놔라 배놔라."고 시비를 걸었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제사 드리는 일에 있어서는 열심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웃에 대한 사랑은 손톱 끝만큼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바리새인에게 "이봐,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제도, 제사 법에 따라 제사를 열심히 드리는 것도 좋지만 어쩌면 이웃에 대해서는 그렇게 냉혹한가? 그렇게 긍휼이 한 조각도 없느냐?는 책망이었습니다. 이렇게 책망하신 후에 제사만 드리면 되는 줄로 아느냐? 그런 제사라면 하나님께서 원치 아니하신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긍휼없는 제사는 원치 아니하신다는 말입니다. 제사는 오늘날의 예배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긍휼은 사랑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집안에서 시어머니가 빨리 죽기 원하는 며느리가 교회에 나와 열심히 예배만 드린다고,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며느리를 그렇게 미워하는 시어머니가 교회에서는 권사노릇하고 예배는 열심히 드립니다. 이런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지 아니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없는 제사가 아니라 긍휼을 겸하여 드리는 제사, 시어머니를 사랑하고 며느리를 사랑하면서 드리는 예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이 뜻을 분명히 아시고, 여기에서 "아멘, 아멘"하는 것을 집에 가서 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거룩, 거룩"하는 것을 집에 가서 하시기 바랍니다. 직장에 가서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뜻인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본문의 사건에 담긴 깊은 뜻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배움이란 배움 자체에서 끝나면 안 됩니다. 반드시 배운 것을 생활 속에서 적용해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부르심의 뜻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구가 되라고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다음에는 유익함의 뜻을 또 배워야 합니다. 병든 자에게는 의사가 꼭 필요합니다. 유익한 존재입니다. 우리들도 이 사회에서 유익한 존재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바가 있는데 곧 긍휼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입니다. 긍휼이 없으면 긍휼없는 심판을 받습니다. 예배만큼 중요한 것이 긍휼이요, 사랑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본문을 통해 배운 그 뜻을 살려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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