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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사할 이유가 있습니다 (욥 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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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백장흠 목사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삶을 보면 세상을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안 되는 것은 잘되는 사람들 때문인 것처럼  피해의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도 힘들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피곤함을 줍니다.

다음부류는 낙천적으로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어도 더 좋은 날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속에서 사는 이들입니다.  이는 신앙인이건 비신앙인이건 삶의 철학에 따라 다릅니다.  세 번째는 멋지고 아름답게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는 사람입니까? 감사하면서 사는 신앙인들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만으로 예수 믿게 된 것만으로 만족하게 생각합니다.  예배가 끝나면 목사님 오늘 너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라고 고마움을 표현합니다.  이들이야말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항상 웃음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이들은 행복의 조건을 갖추었기에 행복한 게 아니라 믿음 때문에 감사하면서 살기에 행복한 것입니다.  감사하면 행복해집니다.  감사하면 다른 이들도 행복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부부가 열심히 살아갑니다.  생활은 부유하지 않아도 서로가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살아가면 그 가정은 행복합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새로 들어온 엄마 밑에서 자란 여인이 결혼하고 편지를 썼답니다.  편지를 받을 사람은 새 엄마였습니다.  19세에 우리 아빠를 만나고 나를 잘 길러준 엄마라고 해도 불과 14세 밖에 나이 차이가 나지 않지만 많은 고생하면서 나를 시집까지 보내준 엄마 감사합니다.  늘 마음에 있었지만 이제야 감사함을 표시합니다.  엄마 사랑해 이 글을 받는 새 엄마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눈물까지 났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감사는 다른 이들에게도 기쁨을 줍니다.  하나님께서도 감사하는 사람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 답니다.  그래서 성경은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 3:15)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욥의 감사를 생각하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욥의 감사는 무조건 감사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일이 있을 때 감사합니다.  누가 보아도 좋은 일 자기 자신에게 좋은 일이 생겼으면 감사 합니다.  보통 신자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좋은 일이 있어도 감사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좋은 사람 측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참 그리스도인들은  범사에 감사입니다.  모든 일에 대하여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욥은 좀 더 다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시련을 당하고 있음에도 그 자리에서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욥은 나름대로 감사한 일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련가운데서 감사하는 욥은 신앙의 영웅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의인입니다.  감사하는 그 믿음이 위대한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욥은 감사할 이유를 말합니다.

1.  하나님의 주신 은혜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과거의 은혜는 망각하고 오늘의 어려운 일 때문에 원망하며 불평을 합니다.  진정으로 감사하여야 할 내용은 지난날에 베풀어주신 은혜 때문에 감사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영어의 감사(Thank)는 생각한다(Think)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생각해보니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욥이 감사한 것은 미친 사람의 군소리가 아닙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하나님께 원망은 안할지라도 감사는 못할 것입니다.  시골 교회에 어떤 할머니가 교회에 나오시더랍니다.  어느 날인가 교회에 나오지 아니하였습니다.  목사님이 즉시 심방을 가셨습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오늘 교회에 나오시지 않아서 몸이라도 편찮은가 해서 왔습니다.  그 말을 들은 할머니 아주 심통 사나운 모습으로 하는 말이 아니 고추도 지켜주지 못하는 하나님을 내가 왜 믿어 그럽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지난 주일에 마당에 고추를 말리려고 멍석에 널어놓고 교회에 갔다 왔는데 누가 고추를 걷어 갔더랍니다.  하나님은 전능 하시다는 데 마당에 널어 놓은 고추도 지켜주지 않아요.  이제부터 교회에 나가지 않기로 했어 그러더랍니다.  일리 있습니까? 욥은 얼마나 큰 고난을 당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감사했습니다.  진정 지난날에 베풀어주신 은혜만을 생각한 것입니다.  은혜를 잊어버리는 사람은 감사할 수 없습니다.  시편 기자가 “네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라고 한 것 같이 은택을 잊지 않고 생각하는 사람이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식을 위하여 일생동안 희생하면서 낳고 기르고 가르쳐준 부모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사람은 불효자가 됩니다.  중학교를 다닐 수 없는 어느 소년을 위하여 학자금을 대준 이가 있었습니다.  그 후에 그때 그 일을 고마워 어머니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자식들은 잊어버렸는데 그는 변함 없이 끝까지 부모같이 대접하여 주었습니다.  차이는 자식과 남인데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은혜를 기억하였느냐 망각하였느냐의 차이였습니다.  적은 것 같아도 은혜로 생각하면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지난날의 주신 은혜가 컸기에 오늘의 고난을 감사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욥은 모든 것을 은혜라는 안경을 쓰고 보는 것입니다.  어떤 안경을 썼느냐에 따라 사물이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불만의 안경을 쓰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불만으로 보입니다.  다른 이들은 좋다고 하는데 자기는 좋지 않습니다.  누가 삶을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누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되나요? 은혜의 안경을 쓰고 사물을 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왜 불평이고 힘들어합니까? 환경이 나쁜 게 아니라 안경을 바꾸지 않아서 그럽니다.  기억력을 새롭게 하는 안경을 끼어야 합니다.  사람이 성공하는 것도 기억력이 좋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잊어야 할 것은 기억하고 기억해야 할 것은 쉽게 망각합니다.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주신 은혜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았던 사랑입니다.  욥은 지금 당하는 고난이 일곱 가지라고 한다면 받은 은혜는 칠백 가지가 넘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백 가지를 잘하다가 한 가지만 잘못하면 원수시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가지 잘못한 것은 잊어버리고 잘해준 것만 생각하면 섭섭하다고 말하지 아니 합니다.  선민 이스라엘이 광야 길을 가면서 왜 원망하였습니까? 은혜는 망각하고 현재의 고통스러운 것만을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근원적인 감사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녀들이 부모가 옷을 사주었다.  새 차를 사주었다.  참으로 감사하다라고 생각합니다.  왜 다른 집 아이들은 그렇게 하는데 우리 부모는 못합니까? 라고 불평을 한다면 이 사람은 매우 모자라는 사람입니다.  나를 낳아주시고 중심으로 사랑해주신 그 은혜가 고맙다라고 생각할 수 있으면 이는 성숙한 자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려면 근원적인 것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업이 좀 잘되어 돈 좀 벌고 다른 이들보다 건강하다고 해서 감사하는 것보다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주신 은혜를 감사하여야 합니다.  순간마다 지켜주시고 보호하심에 대하여 감사하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 하였습니다.  광야 길을 걸어갔습니다.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들은 원망하였습니다.  원망하던 사람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들에게는 절기를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절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고난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베풀어주신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의 사람들이라면 은혜로운 것만을 생각하면서 감사와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자녀들이 울며 곡을 합니다.  요즈음에는 초상집에도 우는 것을 별로 본 일이 없습니다만 예전 같으면 우는 소리가 커야 했습니다.  딸이 많은 집에는 우는 소리가 큽니다.  딸이 없고 며느리만 있는 집에는 우는 소리가 적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하는 말 딸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딸들의 우는 소리를 들으면 아이고 아이고 하는데 며느리의 곡은 에이고 에이고 그럽니다.  그런데 애이고라고 하는데 눈물을 흘리며 곡하는 며느리를 봅니다.  왜 그 며느리가 눈물을 흘리는지 아세요.  자기가 잘한 것은 생각나지 않고 잘못한 것이 생각나고 시어머니가 잘못해준 것은 잊어버리고 자기에게 그래도 잘해준 것만 생각하기에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욥이 당한 고통은 사람이 살면서 평범하게 말할 수 있는 고통이 아닙니다.  생각지 않은 사건이 터지면 그 사건자체보다도 다른 각도에서 충격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사업을 잘하시는 분이 갑자기 부도가 나게 됩니다.  그때 받은 충격은 돈이 아니라 배신감 그리고 자신의 어리석음 그런 것이 함께 몰려와서 충격을 받아 신체적으로 병까지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욥은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고난을 주셨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이 고난을 당해도 한 가지씩 서서이 온다면 견디기가 조금은 나았을 것입니다.  욥에게는 갑자기 겹쳐서 시련이 몰려 왔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생각했습니까?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기면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여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 감사합니다.  미천한 저희가 어찌 높고 존귀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난날에 주셨던 하나님의 축복을 감사 드립니다.  이런 마음이 생기면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중에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찬송가 405장) 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아시는 대로 존 뉴턴이 지은 것입니다.  그는 젊었을 때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노예 무역선 선장까지 지냈습니다.  그가 예수 믿고 회개하여 변화를 받아 목사가 되어 40년간 주님을 위하여 일했습니다.  그럼에도 이따금 양심의 가책을 느껴 두려울 때가 있었답니다.  아무리 주님이 나를 용서했다고 하신다 해도 나같이 사람을 잡아다가 팔아먹은 노예 상인이었던 나를 용서하실까? 그런 생각을 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고 두려운 마음으로 떨렸습니다.  그럴 때에 벽에다가 이사야 43:4절 말씀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노라.”  그러면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라는 찬송 시를 부른 것입니다.  그가 82세를 살다가 세상을 떠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답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 나라로 간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 나라로 가면 아마 세 번 놀랄 것이다.  처음엔 하나님 나라에 오리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와있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 나라에서 반드시 만나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서 놀랄 것이고 세 번째는 노예 상인이 내가 거기와 있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다.  우리는 고난만 기억하고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받았던 은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면 감사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과거사를 살피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과거사를 생각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지난날에 내가 잘못한 죄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지난날의 누구의 잘못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날에 주신 은혜 감사했던 일 나를 축복하셨던 일을 생각하고 감사 또 감사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의 섭리를 믿기 때문에 감사할 이유가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하시는 섭리를 모르면 어찌 불평하지 않겠습니까?  욥은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재산입니다. 돈을 잃어도 몇 백만원이라면 모릅니다.  전 재산을 자기가 써보지도 못하고 잃었습니다.  자녀들이 죽었습니다.  하나도 아닙니다.  십 남매입니다.  자신의 건강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다.  그러면 죄 값을 받는다 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내편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뜻이 있습니다.  역사가 토인비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세계역사를 연구하고 방대한 책을 쓴 사람입니다.  그는 역사를 연구하고 난 후에 이런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사람이 아무리 노력하고 수고해도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더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되면 신입니다.  내 마음대로 안 된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음은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더라 그러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원대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결과에는 의미 없는 것이 없더라.  다 뜻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들이 지금 고난을 당하십니까? 실패의 늪 속에 빠져 있습니까? 욥기를 읽으세요.  그리고 욥이 찬양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장면을 묵상 하시기 바랍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운데 감사하는 그 모습을 보세요.  오늘 당하는 어려움만 생각하고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매사를 좋게 하신 답니다.  욥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시련이 왔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사과 농사하시는 장로님을 심방 가면 저에게 농사를 통하여 얻은 교훈을 말씀하십니다.  저 사과나무를 한 번 손바 주면 반드시 대접을 해줍니다.  접과를 해주어야 합니다. (많이 달린 사과를 따내는 것) 그래야 풍성한 열매를 알찬 열매를 줍니다.  가지 치기를 합니다.  사과나무가 말을 못해서 그렇지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렇게 함으로 사과나무가 건강합니다.  이것은 농사 기술자만 아는 비밀입니다.  우리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시련이 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습니다.  결과는 나를 좋게 하신다는 것을 믿으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랍비가 나귀에 닭 한 마리와 등불과 천막을 싣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광야길입니다.  해는 저물고 해서 동네 가까운 곳에 이르러 천막을 치고 나귀와 닭을 천막에다 묶어 놓았습니다.  랍비는 등불을 켜놓고 성경을 읽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 등잔대가 엎지러졌습니다.  불을 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을 수 없어 기도하고 잠을 잤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맹수가 나귀와 닭을 잡아 죽였습니다. 랍비가 실망스러웠습니다.  이럴 수가 그런데 동네께 들어가 보니 지난밤에 동네에 강도 떼가 들어와 사람들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때 랍비는 감사의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자기 천막에 불이 켜있거나 닭이 울었다면 자기도 틀림없이 강도들에게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을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감사하였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하는 시련 때문에 슬퍼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그분의 주권을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신앙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신앙인들이 감사하면 할수록 감사할 일이 생깁니다.  고난 중에서 감사할 수 있는데 언제 불평할 수 있겠습니까? 감사하는 사람은 담대합니다.  근심 걱정 두려움이 물러갑니다.  감사하는 이는 승리합니다.  모든 것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다.

3.  미래의 축복이 있기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오늘만 생각하고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현실주의자라고 하여 자기가 상당히 현명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늘만 사는 게 아닙니다.  내일이 있습니다.  그 날이 있습니다.  우리는 내일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목표가 있습니다.  나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합니다.  저 사람들은 큰 자산이 있다.  그것이 젊음이라는 것입니다.  젊음의 자랑감이 무엇입니까? 힘입니까? 맞지요.  그러나 미래입니다.  우리는 오늘만이 있다면 비참한 사람들입니다.  미래가 있습니다.  미래는 축복입니다.  미래 축복이 있습니다.  오늘이 밤같이 어둡고 캄캄하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일에는 밝은 태양이 떠오릅니다.

미래를 생각하고 기대하면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실패하였습니까? 미래가 있습니다.  미래를 생각하면서 견디는 게 아니라 감사하는 적극적인 태도로 살아야 합니다.  감사는 생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Thank는 Think에서부터) 고난을 생각하지 않고 은혜를 생각하면 감사할 조건이 많습니다.  베풀어주신 은혜가 측량할 수 있겠습니까? 시련보다는 섭리를 믿을 때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을 보는 게 아니라 미래를 생각하고 바라보면서 감사 그것도 진정으로 뜨거운 감사를 할 수 있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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