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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겠다! (몬 1: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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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장빈 목사

# 1 - intro

오늘 우리는 세 남자를 만나려고 합니다. 그 중 두 남자는 의인이요, 한 남자는 죄인입니다. 두 남자는 믿음이 좋은 아버지요, 한 남자는 배은망덕한 아들입니다. 두 남자는 오래도록 영적 교제를 나눈 사이요, 한 남자는 그런 두 남자의 관계를 오래도록 목격해 온 사람입니다. 그런데 두 남자는 서로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는 사이요, 다른 한 남자는 그 어떤 말도 믿어주기 힘든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두 남자는 모두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이었고, 한 남자는 누구에게도 무익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런 세 남자를 만나려고 합니다.

지금 두 남자 중 한 남자가, 또 다른 한 남자에게 편지를 써 보내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 편지의 내용이, 세 번째 남자에 관한 것이라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습니다. 문제는 이 세 번째 남자가 편지를 받아볼 남자에게서 도망쳐 온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오늘의 본문 15절을 보니, 그 세 번째 남자에 대하여 이렇게 쓰고 있군요.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그렇습니다. 세 번째 남자는 지금 첫 번째 남자로부터 잠시 떠나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떠나버린 그 남자를 이제로부터는 영원히 곁에 둘 자라 합니다. 15절 하반절,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그런데요, 16절 말씀을 보니,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하는군요. 그랬습니다. 이 세 번째 남자는 본래 첫 번째 남자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종이 아니라 형제로 둘 자라 합니다. 17절을 말씀을 보니, 저를 가리켜 <동무>라고도 하는군요. 종합하면 이젠 더 이상 종이 아니라 형제요 동무로서 영원히 우리 곁에 둘 자라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세 번째 남자가 수지맞은 셈이군요.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이지요.

세 번째 남자의 이름이? 바로 오네시모입니다. 오네시모에 관해 편지를 쓰고 있는 두 번째 남자는? 사도 바울이고요, 이 편지의 수신자인 첫 번째 남자는? 빌레몬입니다. 그랬습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만 자기 주인을 배신하고, 돈을 훔쳐 로마로 도망쳤던 것이지요. 그런데 거기서 죄인이 되어버린 종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나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요 문제는 사도 바울의 태도입니다. 자기 친구를 배신하고 돈을 훔쳐 도망쳐 온 그 종을, 혼을 내서 돌려보내지 않고 대신 자기 아들을 삼아버린 것입니다. 10절 말씀을 보실까요? / 1:10 / (읽기) /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간구하노라!> / 그랬습니다. 바울은 그 종을 돌려보내기 전에 먼저 자기 아들을 삼았던 것입니다.

어? 그런데요, 지금 사도 바울이 갇혀 있다고 하는군요. 그랬습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힌 상태였습니다. 9절을 보실까요? / 1:9 / (읽기) / 그런데 거기 <나이 많은 나 바울>이라 하는군요.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이 많도록 주의 복음을 전하다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나이 많은 바울이 갇힌 중에서도 믿음의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저를 보십니다. 나이도 많을 뿐만 아니라 감옥에 갇힌 몸인 바울이, 그래도 오네시모라는 아들을 하나 낳았다면, 나이도 많지 않고 감옥에 갇히지도 않은 나는 어찌 해야 하나? 기본은 몇? 셋이요! 은혜 받으면? 넷이라! 분명히 그렇습니다. 다른 여지가 없습니다. 나이 많아 갇힌 바울이 믿음의 아들을 하나를 낳았으면, 지금 우린 최소한 셋 내지 넷은 낳아야 합니다. 기본이 셋이요, 은혜 받으면 넷입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특히 지금 내 나이 많다고 느끼시는 어르신 여러분! 전도하는 일에 졸업이란 없습니다. 전도하는 일에 정년퇴임이란 없습니다. 하나님한테 전도하지 않아도 좋다고 허락받으신 분 있으면 손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오, 도를 전할 수 있는 인생, 복 받은 인생이요 자랑스러운 인생입니다. 여러분, 내 입술을 열어 말할 기력이 남아 있는 한 우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내 다리에 걸음을 옮길 만한 힘이 남아 있는 한, 우린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와야 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린 믿음의 자녀들을 계속 생산해야 합니다. 그것이 나를 감옥에 가두지 않으시고, 여기에 그냥 두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이 아직도 내가 살아야 하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여러분, 더 나이 많아지기 전에, 아니 감옥에 갇히기 전에, 어서 믿음의 자녀들을 많이 낳게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이대로 그냥 세상 떠날 순 없는 노릇 아닙니까? 이렇게 빈 손들고 주님 앞에 설 순 없잖습니까? 그럼요, 이 상태로 주님 앞으로 갈 순 없습니다. 이 상태로 그냥 세상 떠날 수 없습니다. 나도 한 사람 전도하는 가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사하며 다짐하기.

<할렐루야, 나도 한 사람,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 2 - 두 남자의 우정과 사랑

1:4-7 / (읽기) / 여기서 우린 사도 바울과 빌레몬의 아름다운 관계를 보게 됩니다. 나이 많도록 평생을 같이 한 두 남자의 우정과 사랑인데요, 정말 한 평생 살면서 나에게 이런 친구 하나만 있어도, 내 인생 무지 행복할 것 같습니다. 보기만 해도 부럽고 듣기만 해도 가슴 뭉클해지는 장면인데요, 여기서 두 남자의 우정과 사랑을 깊이 들여다보며, 벤치마킹하고 가겠습니다.

첫째, 바울과 빌레몬, 이 두 남자는 서로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이였습니다. 4절에서 바울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한다!> 누구 때문에? 바로 너, 내 친구 빌레몬 때문에 항상 감사한다는 겁니다. 기도할 때마다 너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다는 겁니다.

여러분, 이제 질문입니다. 나와 당신의 사이는 어떻습니까? 내가 당신의 이름을 부를 때에 내 가슴엔 감사가 넘쳐납니까? 내 하나님께 내가 기도할 때마다 내 입술에 나도 모르게 당신의 이름이 터져 나오며, 절로 감사의 기도가 터져 나옵니까? 아니면, 그렇지 않다면, 당신의 이름 생각할 때마다 이가 갈리고 진저리가 쳐집니까? 여러분, 부디 서로 생각할수록 감사만이 넘쳐나는 그런 사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 바울과 빌레몬, 이 두 남자는 사랑과 믿음의 교제를 나누는 사이였습니다. 5절에 보니 바울이 빌레몬에게,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어 고맙고, 6절에 보니 너의 믿음의 교제가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여 고맙다고 합니다. 거기 단어 셋을 주목하고 싶군요. 5절의 사랑과 믿음, 그리고 6절의 교제인데요, 표시하시고요, 종합하면 저들은 사랑과 믿음의 교제를 나누는 사이였다는 겁니다.

그랬습니다. 바울과 빌레몬, 이 두 남자는 서로를 끝까지 믿어주는 사이였습니다. 중간에 어떤 누가 와서 어떤 말을 해도, 저들은 내 친구를 먼저 믿었습니다. <무슨 소리야? 내 친구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난 내 친구를 믿어!> 뿐만 아닙니다. 이 두 남자는 서로를 무지하게 사랑했습니다. 세상에 그 무엇도 아까울 것 없는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두 남자, 그렇게 저들은 평생을 두고 사랑과 믿음의 교제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나와 당신의 만남을 한번 점검해 보시겠습니까? 부부 사이, 부모 자식 사이, 형제자매 사이, 우리 동광교회의 하늘 가족 사이, 우리 사이엔 정녕 사랑과 믿음의 교제가 계속되고 있습니까? 난 당신을, 당신은 나를 끝까지 믿어줍니까? 당신을 위해서라면 내 죽을 수도 있습니까?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사랑합니까? 피를 나누지 않은 외간 두 남자가 그렇게 믿고 사랑했다면, 최소한 우리 가족들끼리는 그 보다 더 진한 사랑으로 사랑하고, 그 보다 더 굳은 믿음으로 믿어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부디 이 가을, 사랑과 믿음의 교제가 풍성한 아름다운 만남, 행복한 가정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바울과 빌레몬, 저들은 평안함과 기쁨과 위로를 나누는 사이였습니다. 7절인데요, 평안함, 기쁨, 위로, 세 단어에 표시하시지요. 그랬습니다. 바울과 빌레몬, 이 두 남자는 서로에게 평안이요 기쁨이요 위로였습니다. 시절이 좋아 평안한 것 아니었습니다. 좋은 일이 많아 기쁨이 넘쳤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들여다보면 오히려 평안할 날이 하루도 없었으며, 기쁠 일 하나도 없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고백합니다. 내 친구 빌레몬 때문에 내가 평안하다고 말입니다. 내 남자 빌레몬 때문에 내가 기쁘다고 말입니다. 해서 위로가 넘친다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당신에게 평안함입니까? 나는 당신에게 기쁨이요 위로입니까? 내가 가는 곳에, 평안함과 기쁨과 위로가 샘솟습니까? 아니면 내가 가기만 하면 오히려 평안함과 기쁨과 위로가 깨져 버립니까? 부디 주 안에서 당신에게 평안함이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과 위로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성도의 교제만이 계속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당신을 끝까지 믿겠습니다. 죽어도 사랑만 하겠습니다.>

# 3 - 빌레몬네 가정

이번엔 수신자 빌레몬의 집으로 심방을 가 보겠습니다. / 1:1-3 / (읽기) / 자, 예수를 위하여 갇힌 바울이 동역자요 사랑하는 벗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는데요, 2절에 생소한 이름이 나옵니다. 자매 압비아, 군사 된 아킵보! 학자에 따라 이견이 있긴 합니다만, 대체로 이 셋의 관계를 아버지와 어머니와 아들로 보는 견해가 우세합니다. 다시 말해 빌레몬과 압비아가 부부 사이요, 아킵보는 저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2절 맨 뒤쪽에 결정적인 표현이 나옵니다. <네 집에 있는 교회> 무슨 뜻입니까? 빌레몬이 자기 집을 교회로 공개했다는 겁니다. 당시엔 예배당 건물을 별도로 가질 수 없었습니다. 아직 로마의 국교로 인정받기 전이라 걸리기만 하면 핍박과 박해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집에 교회 간판을 건다는 것, 내 집을 예배 처소로 제공한다는 것, 그것은 목숨을 건 모험이었습니다. 그런데 빌레몬과 그의 아내 압비아와 저들 부부의 아들 아킵보까지, 누구 하나 반대하지 않고, 자기네 집을 주님을 위한 교회로 내어 놓았던 것입니다. 해서 지금 온 가족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자손만대 전해지면서 영광을 누리고 있는 중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와 내 가족의 이름은 어떤 이름으로 남을 것 같습니까? 지금 내가 죽는다면, 사람들은 나의 이름을 어떻게 기억해 줄 것 같습니까?

당시엔 이렇게 자기 집을 교회로 제공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선 마가네가 다락방을 교회 처소로 내놓았었습니다.(행 12:12) 빌립보에선 자주 장사 루디아가 자기 집을 또한 교회 처소로 내놓았었습니다.(행 16:40) 에베소에선 아름다운 부부 아굴라와 브리스가가 자기 집을 예배 처소로 제공했었습니다.(고전 16:19) 여기 골로새에선 빌레몬이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해서 사도 바울이 간절한 마음으로 그 가정을 위해 복을 빌어줍니다. / 1:3 / (다시 읽기) / 아멘! 그랬습니다. 빌레몬의 가정은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이 넘치는 가정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말씀만 드리고 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부가 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가정이 복 받은 가정입니다. 부모와 자녀가 한 마음으로 한 교회를 섬기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신앙적으로 나누어진 가정이 더러 있습니다. 그런 가정을 저는 신앙적 이산가족이라 부르는데요, 그런데 아무리 기도해도 이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산의 아픔은 민족 분단으로 인한 아픔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신앙적으로 통일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올 해가 가기 전에 온 가족이 함께 나와 예배할 수 있도록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가족이 이 제단을 위해 헌신하고 봉사할 수 있을지를 찾아주시고, 또 실천해주시기 바랍니다. 해서 빌레몬의 가정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평강이 넘치는 가정, 그리고 행복한 우리 하늘 가족으로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주 안에서 자식 농사 잘 되시기 바랍니다.>

# 4 - 친필로 써 보낸 편지

1:19 / (읽기) / 아하, 지금 사도 바울이 친필로 편지를 쓰고 있군요. 그런데요, 본디 바울은 친필로 편지 쓰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대개는 바울이 불러주고 누가가 받아쓰는 식이었습니다. 누군가 대필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울이 지니고 있던 눈병 때문이었습니다. 그 눈병이 바울이 말한 몸의 가시였는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눈병을 앓았던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가 꼭 친필로 편지를 써야 할 때는 대개 큰 글자로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 11절에서 바울은 <내 손으로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런 사도 바울이, 그것도 나이 많은 몸으로 감옥에 갇힌 바울이, 친히 편지를 쓰고 있는 중입니다. 왜 그랬을까? 두 가지만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그만큼 지금 써 보내는 내용이 중요하다는 반증입니다. 그랬습니다. 오네시모를 위하여 보내는 편지를 대필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새로 낳은 믿음의 아들을 위해 자기가 친필로 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이 편지를 받을 상대가 그만큼 소중했다는 뜻입니다. 그랬습니다. 친구 빌레몬을 생각하면, 그가 다 이해해 줄 것을 믿지만, 그래도 친필로 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더욱 당혹하게 만드는 일은, 그가 친필로 쓴다고 밝히면서, 친구에게 부탁하는 내용입니다.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갚는다는 말인가? 18절에 답이 나옵니다. / 1:18 / (읽기) / 아하, 오네시모가 빚진 것을 바울이 대신 갚겠다는 거군요. 아니, 빚진 것이 아니지요. 오네시모가 도둑질했던 것을 바울이 대신 보상하고 배상하겠다는 거지요.

빌레몬의 입장에선 오네시모를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는 상황이었습니다. 여러 종들 가운데, 그래도 오네시모를 신임하여, 금고 열쇠까지 맡겼더니, 믿음을 배신하고, 그 금고를 털어 로마로 도망갔으니 말입니다. 해서 잡히기만 하면 법에 따라 혼을 내줄 판이었습니다. 당시 로마법에 따르면 주인의 것을 훔쳐 도망간 종은 최소한 사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죄인을 혼을 내서 보내기는커녕,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는 둥, 이젠 종이 아니라 형제라는 둥, 네가 나를 동무로 여긴다면 이제 저를 동무로 영접하라는 둥,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말만 늘어놓더니, 결국 하는 말,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겠다는 겁니다. 그런데요, 지금 사도 바울이 어디 있습니까? 로마 감옥에 있잖아요. 그런 주제에 갚긴 또 어떻게 갚습니까?

그런데 우리를 더욱 감동케 하며, 우리의 우정을 더욱 부끄럽게 만드는 사실은, 빌레몬이 친구 바울의 말을 그대로 믿고 따랐다는 겁니다. 자기 친구가 죄인을 동무로 받으라 하니, 그 말대로 오네시모를 영접합니다. 그리고는 바울이 부탁한 대로 그에게 자유를 줍니다. 나중에 오네시모는 에베소 교회의 감독이 되어 큰일을 감당하게 됩니다. 종에서 죄인으로 타락했던 구제불능의 한 남자를, 서로 사랑하는 두 남자가 품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받으면서, 제 마음에 별똥별이란 단어가 다시 생각났습니다. 여러분, 별똥별은 별입니까? 똥입니까? 별이지요. 중요한 것은 별 둘이 똥 하나를 같이 품어야 별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랬습니다. 먼저 바울이란 별이 오네시모란 똥을 품었습니다. 그 친구 바울의 모습을 보며, 빌레몬이란 별도 오네시모란 똥을 용서하며 가슴에 품었습니다. 그렇게 바울과 빌레몬이란 두 별이 오네시모를, 세 남자가 모두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가을, 최소한 우리 둘이 똥 하나 품어 별로 바꾸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오늘 말씀을 받으면서 제 마음에 우리 자매교회인 두평 교회가 생각났습니다. 지난 8월 31일, 우리 동광 가족들이 두평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정성으로 끓여주시던 쏘가리 매운탕의 맛을 지금도 기억하는데요, 식사 후에 교회 주변을 같이 가셨던 이대근 장로님과 산책하는 중이었습니다. 갑자기 이대근 장로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우리가 두평 교회를 책임집시다! 농촌 선교를 한다고 하면서 여기저기 찔끔찔끔 지원하는 것 보다, 이런 교회 하나를 정해서 우리가 책임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건 장로님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 감동하신 것이었지요. 그 후로 이 장로님의 기도대로 우린 많은 일을 했습니다. 제12여선교회의 김진혜 회장님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두평 교회 성도들이 농사지은 고추랑, 포도랑, 사과랑 가져다가 팔았습니다. 총액 기준 1,200만원 어치였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애쓰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오늘 두평 교회를 다시 생각나게 하신 건, 또 다른 차원입니다. 아마 요즘 농촌은 해가 갈수록 빚이 늘어가는 것이 기본인 듯 합니다. 거기에 농촌의 작은 교회가 교육관을 개축하면서 빚을 지기도 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진 빚 아닙니다. 우리 교회도 아닙니다. 나 몰라라 지나쳐도 누가 무어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울의 후예라면, 기장의 동쪽을 책임지는 동광 교회라면, 우리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친필로 쓰노니 우리가 갚겠다!> 이 고백과 꿈이 현실이 되는 그 날을 소망하며, 잠시 명상하며 주신 말씀 마음에 새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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