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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 나은 의(5) (마 5:3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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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노강국 목사

예수님께서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 의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당시 유대인들이 잘못 적용하는 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기를 촉구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대표적으로 여섯 가지를 예로 드셨습니다. 그 중에 오늘은 다섯 번째 내용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 여섯 가지의 내용을 보면, 그 범위가 차츰차츰 넓은 범위로 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개인적으로 화내는 일이나 음욕을 품는 문제를 다루셨고, 그 다음에는 이혼이나, 법정이나 성전에서 맹세하는 일에 대한 문제로,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가정이나 사회문제로 좀 더 넓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과 다음 주일에 살펴볼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의 내용은 좀 더 범위가 넓어지는 차원으로 확대되는 내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보고자 하는 다섯 번째 내용은 “보복하지 말라”는 일종의 비폭력적 저항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어떤 가해자를 염두에 두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가해자가 개인적인 차원이나 이웃집 아저씨의 차원이 아니라, 강제적으로 공권력을 행할 수 있는 그러한 존재라는 점에서 좀 더 범위가 넓고 깊은 차원의 문제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네 절 밖에 안 되는 짧은 내용의 말씀이지만,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절실한 실존적인 내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 말씀을 두고 “그 당시 유대를 지배하고 있던 로마에 대하여 무장 봉기를 선동하던 열심당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이기도 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점에서 “비록 이 말씀이 일반적인 용어로 표현되어 있지만 정치적 불안을 배경에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Indeed, there is good reason to believe that the saying of this group, in their original Aramaic form, constituted comments by Jesus on the incipient Zealotism that already in his day was fomenting armed rebellion against Rome. Although the saying are expressed in general terms, they obtain a special force when seen against the background of political unrest.) 따라서 오늘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이 지녀야 할 정치가들에 대한 태도와 자세와 밀접한 관계가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보복하는 일과 관련하여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율법 용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받은 만큼 갚으라”는 의미의 “동해 복수법(同害 復讐法)”이란 율법 규정입니다. 이는 구약 출 21:23-25에 그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찌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러한 율법을 주신 이유는 보복하는 일이 더욱 커짐으로 보복이 또 다른 보복을 낳게 되는 보복의 악순환을 방지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법이 세월이 흘러가면서 원칙은 변하지 않는 범위에서 배상의 방법이 달라지긴 하였습니다. 즉, 눈을 다치게 한 상대방의 눈을 똑같이 뺄 수는 없다는 취지에서 이를 금전적인 배상으로 대치하게 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복수에 불타는 마음을 제한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보복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39절,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여기서 “대적”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안티스테미(anthistemi)”라는 말인데, 이 말의 원래 의미는 “저항하다”라는 뜻입니다. 그것도 군사적인 용어로서 “무력으로 저항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라고 하신 말씀의 기본적인 뜻은 “무력으로 보복하지 말라”는 뜻이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경우의 예를 세 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하나는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뺨을 얻어맞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른편 뺨을 맞는다는 것은 상대방이 왼손으로 때리든지, 아니면 오른쪽 손 손등으로 때릴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단순히 뺨을 때린다는 것을 넘어서서 상대방에게 모욕을 주는 행위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욕은 실제로 유대 법에 의하면 재판장 앞에서 배상을 요구할 수 있는 인격적 침해로 인정되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오른편 뺨을 얻어맞음으로 모욕을 당하더라도 이에 대해 보복하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왼쪽 뺨을 내어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욕을 당하는 일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종종 있는 일들이었습니다. 우리 한국도 예전에 일본의 점령 하에서 이러한 모욕을 많이 받아오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형편에서도 무력으로 보복하려고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둘째로는 40절의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역시 로마의 지배 하에 있던 유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아주 쉽게 볼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 표현은 누가복음에도 나오는데, 거기서는 강탈의 문제로 취급됩니다. 즉, 누군가 강제로 당신의 겉옷을 빼앗으면 그에게 속옷까지도 주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마태복음은 “너를 송사하여”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이러한 강탈의 의미보다는 법적인 수단을 동원한 “합법적 강탈”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합법적 강탈”이건 누가가 말하는 폭력적 강탈이건, 그 당시 로마 당국과 그 앞잡이들이 과중한 세금을 빌미로 유대인들을 약탈하는 그러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형편에서도 무력으로 보복하려고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셋째로는 41절의 말씀입니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 여기서 “동행”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앙가레우오(aggareuo)”라는 말인데, 이는 원래 페르시아에서 유래된 외래적 표현입니다. 원래 우편제도에서 사용하는 말로서, 누군가를 강제적으로 뽑아 우편물을 보낼 때 쓰는 말이라고 합니다. 흔히 군인들이 자기가 지고 가야 할 짐을 지역 주민들에게 강제적으로 지고 가게 할 때 쓰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다가 쓰러졌을 때, 로마 군인이 길가에 서 있던 구레뇨 시몬에게 그 십자가를 강제로 맡긴 것과 같은 일입니다. 이러한 강제 동원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많이 당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원래 예수님께서 그 당시 유대인들이 쓰던 말인 아람 말로 한 것으로 분석됩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하신 말을 마태가 헬라어로 기록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우리말로는 “5리, 10리”라고 번역한 말인데, 이 “리”라는 거리를 표현할 때 쓰는 단위입니다. 보통 헬라어에서 이렇게 거리를 표현할 때 쓰는 말은 헬라식 단위인 “스타디온(stadion)”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5리, 10리의 거리의 표현은 로마의 단위인 “밀리온”이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참고로 이 “밀리온(milion)”이라는 말에서 “마일(mile)”이란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쓴 글에도 보면 모두 다 “스타디온”을 썼지, “밀리온”이란 단위는 안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말씀하시면서 로마의 단위인 “밀리온”을 쓰셨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는 미국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mile이란 단위를 쓰지 않고 Kilometer란 단위를 사용하며 말하는 것처럼 어색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스타디온”이란 표현을 쓰지 않고 “밀리온”이란 표현을 썼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직접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과연 누구를 의식하고 이러한 말씀을 하셨는지를 잘 알 수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이러한 로마 군인들이 유대인들을 강제로 징발하여 노역을 시키는 일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커다란 울분으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한 술 더 떠서 이들에게 기꺼이 협력할 뿐만 아니라 두 배의 노역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 중에서 유대의 독립을 원하는 자유의 투사 곧 열심당원들은 이러한 예수를 반역자로 간주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이겠습니까? 신학자 더글라스 해어(Douglas R. A. Hare)는 그의 마태복음 주석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를 더 잘 이해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 아주 적절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 로마에 대한 저항은 부질없는 짓이며, 분노를 키우는 것은 자기 파괴적인 짓이다. 사람들은 5 리를 더 동행해줌으로써 자신들이 압제를 받지만 내적으로는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압제자에게 보여 줄 수 있었다.”(Those who knew him better undoubtedly recognized that his point was well taken. Resistance to Rome was futile, and the nourishing of bitter resentment was self-destructive. By going a second mile, one could demonstrate to the oppressor one's inner freedom from oppression.)

이렇게 보복을 금지하는 예수님의 오늘의 가르침의 말씀은 그 당시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고자 했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는, 로마의 지배 하에서 유대민족의 독립을 꿈꾸면서 무력투쟁까지도 서슴지 않았던 열혈당원에게 더 해당되는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아마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기도 했으리라고 짐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많은 도전이 되는 말씀이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42절의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 넉넉하고 그래서 가난한 자가 도움을 청할 때 들어줄 수 있는 아주 자비가 넘치는 말씀임에는 분명합니다. 하지만 내게 구하고자 하는 사람이 바로 이렇게 오른 뺨을 손등으로 내리치면서 모욕을 주는 자라면, 그리고 속옷을 빼앗고자 법적인 절차를 밟고자 하는 자라면, 그리고 강제로 노역을 시키려는 자가 바로 이러한 사람이라면 이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 말씀은 우리의 주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요, 가르침인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도전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그것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오히려 왼 뺨까지도 돌려 대고,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10리까지도 동행해주라”는 이 예수님의 말씀은 압제하는 사람들이 회개할 것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뺨을 돌려대는 것을 원수의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한 일종의 전략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It is clear that, in their present form at least, they do not contemplate the conversion of the oppressor. Turning the other cheek is not urged as a strategy for altering the enemy's behavior.) 사실,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신 것은 이러한 방법이 하나의 효과를 기대하는 전략일 수 없다는 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Jesus' passion amply illustrated the truth that this is seldom an effective strategy.) 이런 점에서 보복을 금지하는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인류 공동체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해석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These sayings purport to interpret God's will for the human community.)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대하면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속옷을 빼앗고자 하거든 겉옷까지도 주라”는 이 말씀이 비록 철저하게 문자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를 의도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들 중 어느 것도 ‘단지 비유적인 언어’로 축소됨으로써 평범한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의 의도는 우리의 일반적이고 통속적인 생각에 충격을 가하고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 더 심오한 통찰력을 심어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보복하는 것과 자기를 보호하고자 하는 옛 사람의 방식들은 오늘날 우리들이 원수라고 생각하는 자들에 대하여 더 관대하고도 도량이 큰 접근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Although not intended to be taken in their most literal sense, as is most evident in verse 40, neither are they to be domesticated by reduction to 'merely figurative language.' They are meant to shock the imagination and instill a profounder insight into God's intention. The old ways of retaliation and self-protection must give way to a gentler, more magnanimous approach to those we deem enemies.)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으로 살았던 사람이나 그룹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당대의 핍박과 냉대 속에서도 비폭력 저항으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12세기의 Peter Waldo와 이를 따르는 발도 파(The Waldensians) 사람들은 중세시대 로마 교황권의 압제에서 비폭력으로 저항함으로 신앙을 지켰습니다. 종교 개혁 후 극단적인 종교개혁자들에게 냉대를 받았던 재세례파(Anabaptists) 사람들의 비폭력 저항정신을 봅니다. 또 영국의 Cromwell의 강압 정치에서 신앙의 순수함을 지켜낸 George Fox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러시아 정교의 강압에서 신앙의 순수함을 지키고자 했던 소설가 Tolstoi를 우리는 압니다. 그리고 영국의 강압 정치에서 비폭력 저항으로 영국을 굴복시킨 인도의 간디(Ghandi)나, 미국의 백인 우월주의의 현실에서 비폭력 저항 정신으로 미국 사회를 변화시킨 마틴 루터 킹 목사(Martin Luther King, Jr.)가 있습니다. 이들 모두는 바로 예수님의 이 말씀과 가르침을 따른 사람들입니다.

특히 Tolstoi는 오늘 본문의 39절의 말씀,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의 말씀을 “기독교의 진수”(The essence of Christianity)라고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내가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는 자인가?”라는 질문을 실제적으로 던져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삶의 현실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안지를 작성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는 무거운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말씀대로 살았기에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당한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보복하지 말라”는 이 주님의 가르침은 바로 하나님의 마음을 대신한 말씀이란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우리 스스로 이 가르침에 성실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조그만 손해 보는 일에도 참지 못하고 앙갚음을 하고자 하는 저희들의 모습이 주님의 가르침에 전도되어 보복하지 않음으로 지닐 수 있는 자유와 평화를 맛볼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들의 삶이 더욱 온전해 짐으로 더 나은 의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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